소설리스트

혼수는 검 한 자루-37화 (37/164)

00037 6. 폐허에 틔운 싹 =========================

(연참 1/2)

말비다는 라제카가 사라졌던 날 뒤로, 이에샤를 비난하지 않았다. 이쪽이 본모습이겠으나 이에샤로서는 색달랐다. 싫어하는 사람에게 예를 차릴 수 있다니. 황후의 시녀로부터 공주의 시녀장까지 이어지는 관록이 두드러졌다.

말비다가 바구니 손잡이를 고쳐 쥐었다. 안쪽에는 티세트와 과자, 샌드위치가 들었다.

“가던 길을 마저 가셔야지요. 공주님.”

“부인, 우리 앨저 경도 초대하면 안 될까요? 오랜만에 만났는데 금방 헤어지려니 아쉬워요.”

라제카는 사흘 전에도 석곡궁으로 놀러 왔었다.

이에샤는 입술을 터뜨리며 웃었다. 라제카 공주는 똑똑했지만, 바람을 참는 데에 서툴렀다. 이렇게 떼를 부리기도 했다. 어리기는 어렸다. 라제카의 칭얼거림에 익숙한 말비다는 잘라 말했다.

“앨저 경은 근무 중입니다. 피크닉에 부르는 건 휴일에 하세요.”

“앨저 경한테 휴일이 어딨어요.”

웃지 못할 이야기가 지나갔다. 홀로 백화 기사단 일을 떠안은 이에샤에게는 쉬는 날이 없었다. 일요일 하루만 입궁하지 않았다. 라제카가 에브라힐 밖으로 나올 수도 없으니, 시간을 맞추기 어려웠다. 슬슬 부하 몇 생길 때도 됐잖아? 이에샤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토라진 소리를 내고도 라제카는 조르지 않았다. 이에샤를 올려다보았다. 가볍게 무릎을 구부리며 인사했다.

“경, 시간 날 때 라제카와 티타임을 가져요. 라제카 바르벨로샤가 청합니다.”

“명심하겠습니다. 공주님을 전송합니다.”

델피르의 일원은 두 가지 이름을 지녔다. 국민으로서의 이름과 황족의 이름. 라제카의 말은 명령이나 다름없었다. 그 점잖은 생떼에 이에샤는 실소했다. 다가오는 일요일에는 방문객으로 입궁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성싶었다.

라제카와 말비다가 떠나갔다. 이에샤는 뺨을 긁적였다. 할일이 없어도 지나치게 없었다. 한가한 주제에 쉬는 날은 못 받는다니, 우스웠다. 한숨을 폭 쉬었다. 다른 곳을 둘러보고자 걸음을 뗀 참이었다.

“앨저 경.”

누군가가 이에샤를 불렀다. 이에샤는 익숙한 목소리에 반갑게 뛰는 가슴을 애써 모른 체했다.

“멘델린 경. 동쪽 별궁에 볼일이라도 있나요?”

“경을 찾아갔는데 사무실에 없더군요. 남는 시간을 다른 일에 쓰는 것도 좋지만 아직은 기사단이 자리잡지 못했습니다. 가급적 일과표를 지켜 주십시오.”

“으음, 미안합니다.”

엘테르트의 꾸중은 사무적이었다. 화내거나 신경질을 부리는 기색이 없었다. 이에샤도 곧장 사과했다. 2월 중하순에는 엘테르트를 자주 만났다. 실수했다가 지적당하는 데에도 익숙해졌다. 엘테르트가 상대방이 잘못을 인정하면 물고 늘어지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도 알았다.

“무슨 일로 찾으셨죠? 사무실로 가서 얘기할까요.”

“그럽시다. 곧 봄이라 그런지 바깥에 있으면 자꾸 놀고 싶어지는군요.”

“멘델린 경도 그런 생각을 합니까?”

“저도 사람입니다.”

둘은 잡담을 나누며 걸었다. 석곡궁에서 멀리 떨어지지는 않았으므로, 금세 사무실에 다다랐다. 이에샤가 자리에 앉았다. 엘테르트는 기다렸다가 응접 소파에 몸을 내렸다.

시더가 “차를 내올게요!” 하며 나갔다. 신바람이 다 났다. 시더는 엘테르트가 올 때마다 석곡궁에 빛이 들이치는 듯하다고 조잘거리고는 했다.

엘테르트는 깍짓손을 한쪽 허벅다리에 올렸다. 버릇된 자세인 모양이었다. 흠잡을 곳 없이 우아한 그림이 되었다. 이에샤는 짜증스러워졌다. 아직도 “마구간지기라도 되는 줄 알았소.” 하던 비아냥이 기억났다. 되갚아 주고 싶었으나, 엘테르트가 싸구려 술집 종놈처럼 생겼다고는 입이 찢어져도 말할 수 없었다.

“……앨저 경에게는 반길 만한 소식입니다.”

“예? 아, 뭐라고요?”

“또 딴생각을 했습니까.”

엘테르트가 고개를 절레절레했다. 대꾸할 말이 궁색했다. 셈브리온이 땅바닥에 나뭇가지로 검로를 그리면 몰두하면서, 일에 관한 소리는 한 귀로 흘러나가는 까닭을 알 수 없었다.

“새로운 백화 기사 두 명이 뽑혔습니다.”

“예?!”

“뭘 그렇게 놀랍니까. 슬슬 기사단의 구색을 갖춰야지요.”

“그, 그건 그렇지만! 갑작스럽지 않습니까. 단장인 저한테 언질도 없이.”

백화 기사단의 책임자는 이에샤였다. 사무에 젬병이더라도 일이 돌아가는 모양새를 알 권리가 있었다. 노여움, 답답함, 서운함이 뒤섞인 감정이 솟았다. 엘테르트는 곤란한 낯으로 답했다.

“상의하지 못한 건 미안합니다. 저랑 이벨리오노 전하도 지난주에 통보받은 일이다 보니.”

이에샤는 입을 다물었다. 누가 황태자에게 ‘통보’씩이나 할 수 있을까? 우울한 분위기의 황제는 보기보다 독단적인 모양이었다. 이오르가 그리했다면 이에샤도 화낼 수 없었다. 엘테르트의 말마따나 백화 기사가 늘어나는 건 달가운 소식이기도 했다.

엘테르트가 손깍지를 풀었다. 왼손을 펼쳐, 오른손으로 엄지를 접었다. 설명을 늘어놓았다.

“한 명은 앨저 경의 모자란 사무 능력을 보좌하기 위해 뽑았습니다. 공주님이 지금보다 어릴 때 놀이 시중을 맡았던 하녀인데, 공주님의 선생이 하는 말을 주워들은 것만으로 제법 뛰어난 성취를 보였습니다. 검술은 전혀 모릅니다. 공주님이 폐하께 천거한 사람이니 홀대하지 마십시오.”

“안 그래요! 어휴, 공주님은 또 왜 저한테 말을 안 해 주신 건지.”

“라제카 공주님이 원래 깜짝 선물을 좋아합니다.”

이에샤는 납득했다. 라제카는 사람을 놀랜 뒤, 앙증맞은 손으로 입가를 감싸고 쿡쿡대기를 즐겼다. 위험한 장난질은 하지 않으니 다행이었다.

이어 엘테르트가 집게손가락을 접었다.

“다른 한 명은 앨저 경도 본 적 있는 사람입니다.”

이에샤는 힘들이지 않고 눈치챘다. 황제가 추천한데다 무위를 갖추었고, 이에샤가 아는 여자는 한 사람뿐이었다. “스란?” 하고 묻자 엘테르트는 놀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여간 눈치 하나는 기가 막혔다.

“스란은 황제 폐하께서 은밀하게 거느리신 조직 ‘암무’의 일원입니다. 이번에 백화 기사단으로 소속을 옮기게 되었습니다. 본인이 강력하게 청했다더군요.”

“자원했다고요?”

“예.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에샤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알 만했다. 그 여자 검사는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사람 같았다. “앨저 경한테 못 미친다.” 하는 소리에 이에샤를 째렸으니. 황제의 말에도 반발할 정도라면 보통 고집이 아닐 터였다. 이에샤는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공주님의 선물은 정말 반가운데요, 그 사람은 좀 걱정되네요.”

“그렇습니까? 경과 비슷한 부류로 보였습니다만.”

“그게 무슨 뜻이죠?”

엘테르트는 움찔했다. 예상보다 이에샤의 반응이 날카로웠다. 이에샤와 마주할 때는 나아졌지만, 브링어가 껄끄럽고 무섭기는 매한가지였다.

이에샤는 울분을 느꼈다. 바지를 입고 검을 찬다는 사실만으로 한데 묶어 버리다니, 실례가 따로 없었다. 이에샤도 자존심이 하늘을 찔렀지만 스란과 같지는 않았다. 저였다면 경쟁자의 밑으로 옮겨가는 길은 떠올리지 못했다. 장갑을 던졌으면 던졌지.

“멘델린 경.”

“죄송합니다.”

“뭘 잘못했는지 알고 사과하시는 건가요? 멘델린 경, 저 ‘어떤 부류’라는 말을 들을 만큼 이상하고 괴상한 사람 아니에요. 별난 구경거리 취급당하는 건 지긋지긋합니다.”

“앨저 경, 오해입니다. 그렇게까지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이에샤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마찬가지였다. 엘테르트도 이에샤를 보통 여자와 다르게 튄다고 여겼을 것이다. 이에샤는 그러한 시선이 싫었다.

“경도 스란을 잘 알지는 못하는 거 같은데, 함부로 판단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우리 공통점이라곤 여자이고 검을 쓴다, 그거 하나니까요.”

“정말 죄송합니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화가 풀리겠습니까?”

“……으으.”

난처했다. 엘테르트는 성실한 태도로 잘못을 빌었다. 거기에 대고 덤벼들기는 무엇했다. 엘테르트는 이에샤가 일을 그르칠 때마다 미안합니다, 한 마디면 용서했었다. 이에샤는 손사래를 치고 말았다. 더 쏘아붙이자니 제가 인색하게 느껴졌다.

“됐어요. 이제 화 안 납니다. 앞으로만 조심해 주시길.”

“감사합니다, 앨저 경.”

엘테르트가 부드러운 낯빛을 띠었다. 이에샤는 몹시 어색해졌다. 얼마 전까지 까닭도 모르게 적개심을 불태우던 남자였는데, 어느 순간부터 정중해졌다. 신년맞이 무도회가 끝나고 엘테르트는 이에샤에게 상냥히 굴었다. 다른 사람을 대하듯이 이에샤도 대해 주었다.

“그럼 두 사람은 언제 석곡궁으로 나오죠?”

“다음주 첫날부터입니다.”

이에샤는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 따져 보았다. 나흘 뒤에 동료가 들어오게 되었다.

표현하기 어려운 기분에 휩싸였다. 한 기사단의 우두머리가 되었다는 실감이 났다. 초조감이 들었다. 한쪽은 공주가 인정한 머리이고, 다른 쪽은 황제의 호위병이었다. 자신이 뒤처지지는 않을까 걱정되었다.

엘테르트는 이에샤의 안색이 바뀌는 걸 보며 속내를 읽었다. 황궁의 모든 부처를 감독하고, 인사에도 관여하는 엘테르트에게 익숙한 모습이었다.

“겁내지 마십시오.”

“예?”

“브링어잖습니까. 기사가 거머쥘 수 있는 최고의 명예를 열다섯에 가진 분이 불안해할 것 없습니다.”

이에샤는 두 눈을 끔뻑했다. 속마음을 들켰다는 깨달음보다 먼저 쑥스러움이 치밀었다. 북돋는 말을 듣고도 기분이 이상했다. 뺨이 뜨거워지는 듯했다.

“누가 겁을 내요? 말했잖아요, 난 천재예요.”

“예. 그렇지요.”

“대강대강 넘어가지 말아요!”

시더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차를 끓여 왔더니, 이에샤가 멘델린 소공작을 나무라는 소리가 들렸다. 사무실 문을 열지 못하던 참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뭔가? 연초까지 둘의 분위기는 깍듯이 대화하면서도 살얼음판이었다. 이제는 목청을 돋우는데도 친구끼리 장난치는 것 같았다.

좋은 일이었다. 사이가 가까워진다면 엘테르트가 석곡궁에 오는 날도 늘 테고, 미남의 얼굴을 실컷 감상할 수 있었다. 시더는 경쾌하게 사무실로 들어섰다. 책상에 찻잔 두 개와 쿠키 접시를 내려놓았다.

“드시면서 하세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속이 비쳐 보이는 연녹색 찻물에서 향긋한 냄새가 풍겼다. 시더라면 딱 알맞게 우렸을 것이다. 이에샤는 엘테르트에게 손짓했다.

“단 거 좋아하세요?”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습니다. 있으면 먹죠.”

그렇게 말하며 엘테르트는 설탕 가루가 뿌려진 쿠키를 집었다. 이에샤는 찻잔을 들었다. 혀를 데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들이마셨다. 손가락 길이만 한 쿠키를 엘테르트가 한입에 털어 넣었다. 이에샤의 눈이 동그래졌다.

“왜 그렇게 봅니까?”

“아니,”

“뭔가 무례한 생각을 하는 것 같습니다.”

“절대 아닙니다.”

이에샤는 눈살을 찌푸렸다. 머릿속에 떠올린 바가 무례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고하지 못할 이유도 없었다. 찻잔을 내리며 말했다.

“생각보다 잘 먹는구나 싶어서. 이만한 쿠키도 깨작깨작 세 번에 나누어 드실 것 같았거든요.”

“……그러는 앨저 경도 의외로 차 마시는 동작이 제대로 됐군요. 술처럼 들이킬 줄 알았습니다.”

“뭐예요?!”

“똑같이 얘기했을 뿐인데 왜 화를 냅니까!”

역시 저에게만 말본새가 재수없었다. 이에샤는 잠깐이라도 괜찮은 감정을 품었던 저를 뉘우치며, 앞으로는 맹물도 주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시더는 한숨지었다. 모시는 기사님과 잘생긴 소공작의 사이를 참 종잡을 수가 없었다.

============================ 작품 후기 ============================

오전 8시 30분, 부적절한 표현을 수정했습니다. 지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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