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36 6. 폐허에 틔운 싹 =========================
봄이 다가들었다. 나뭇가지에 다닥다닥 눈이 텄다. 추위에 갇혔던 볕이 부르터 나왔다. 산뜻한 철이었다. 셈브리온은 이맘때를 좋아했다. 셈브리온의 고국은 몹시 추워, 봄에도 살얼음이 끼었다. 여름은 짧았다. 가을은 겨울과 다를 바가 없었다. 델페레타의 봄은 아름다웠다.
셈브리온은 눈길을 잡아끌었다. 익은 사과처럼 새빨간 머리카락이 튀었다. 덩치 탓도 있었다. 보통 사람보다 머리 하나는 큰데다 맨팔뚝에는 흉터가 많았다. 허리에는 검을 찼다. 그러한 사내가 시장바구니를 들고 채소 가게에 들어가는 모습은 괴이했다.
일에 익숙해졌다고, 이에샤가 늑장을 부리기 시작했다. 셈브리온은 이에샤를 다그쳐 아침밥을 먹여야만 했다. 꿍얼대는 걸 달래어 출근시켰다. 집 안을 청소했다. 저녁거리를 사러 나온 참이었다. 지지난달 이에샤가 보너스를 탄 덕분에 살림은 넉넉했다. 요즈음 끌어안은 고민은, 이에샤에게 채소를 먹이는 방법이었다―정작 셈브리온도 샐러드를 염소 밥이라고 부르는 사람이었다.
‘이제 완전히 살림꾼이 됐군.’
실웃음을 머금었다. 알디온 저택의 군식구였을 때도 빨래나 청소는 했지만, 식사는 받아먹었다. 부엌일에 장보기에 일하러 나가는 제자 바라지까지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셈브리온의 조리란 이빠진 솥에 뱀을 넣고 향이 강한 풀―독초인지 아닌지는 운에 맡겼다―을 쏟아부어 끓이는 것이었다. 백작님인 이에샤에게 그런 터프한 음식을 먹일 수는 없었다. 결국은 요리책에도 흥미가 생겼다.
많이도 달라졌다.
“잘게 다져서 고기랑 섞어 먹이라고요?”
“그려. 밥투정하는 애한테는 그게 최고지. 홀홀, 딸이 몇 살이랬지?”
“열아홉입니다.”
“저런. 그 나이면 그냥 용돈을 주고 먹으라 하게.”
남편을 떠나보낸 지 10년이 된 노파가 딱하다는 눈길로 셈브리온을 보았다. 셈브리온은 쓰게 웃었다. 용돈은 제가 받는 판국이었다. 이에샤를 돌보느라 재산이 거덜나기는 했으나, 기사단장의 봉급은 컸다. 이에샤는 3년만 일해도 그동안 진 빚을 갚을 수 있을 것이다.
“홀애비가 애 키우느라 고생이 많어. 그래, 딸이 몇 살이랬지?”
“……필요한 건 다 샀으니 가 보겠습니다. 할머니,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십쇼.”
“그려. 고마우이.”
셈브리온은 한숨을 쉬었다. 세월이란 덧없었다. 어린아이를 어른으로 만들고, 맑았던 머리를 흐리멍덩하게 했다. 용병 길드의 황금알이었던 청년도 집안일 하는 아저씨로 바꾸어 버렸다. 감상적이 된 채 가게를 나왔다.
여행객이 보였다. 낡은 망토를 두르고, 후드를 뒤집어쓴 남자였다. 등에는 가죽 배낭을 멨다. 길을 잃었는지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셈브리온은 신경쓰지 않고 지나쳤다.
여행객의 손에서 지도가 떨어졌다. 그는 홱 돌아서, 스쳐간 사내를 바라보았다. 믿을 수 없었다. 셈브리온 데힐은 채소와 과일이 담긴 바구니를 살랑이며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지도를 주워 들었다. 후드를 더욱 눌러썼다. 손끝이 떨렸다.
‘이브론. 왜 제국에?’
* * *
이에샤는 고민에 빠졌다. 편지 봉투를 든 채였다. 괜스레 봉투로 햇빛을 가려 보았다. 얇은 종이를 투과한 빛살이 각막에 닿았다. 초록색 잉크로 쓰인 발신인 이름이 반짝거렸다. 벨제아 백작 부인은 유려한 필기체를 자랑했다.
말비다 벨제아. 공주가 지내는 서향궁의 시녀장. 황후의 소꿉동무. 명망 있는 남편을 둔 백작 부인. 이에샤 앨저를 껄끄럽게 여기는. 이에샤 앨저를 티 파티에 초대한.
머릿속으로 조각조각 정보를 맞추어 보았다. 초대장이 온 까닭을 알 수가 없었다. 말비다는 라제카가 석곡궁에 놀러 올 때마다, 나이로 놀림받은 셈브리온 같은 표정을 지었다. 내가 너 진짜 마음에 안 드는데 참는다.
카드에는 조촐한 다과회라고 적혔다. 앨저 백작의 ‘조촐’과 벨제아 부인의 ‘조촐’은 뜻이 다를 터였다. 마땅한 옷이 없었다. 기사단 정복은 논외로 두었다. 바지를 입고 갔다가는 말비다 속에서 이에샤의 평가가 ‘바닥에도 밑바닥이 있음을 증명’쯤으로 바뀔 터였다. 말비다 또래의 귀부인이 모일 텐데, 성년도 안 된 제가 가서 무얼 하나 싶기도 했다.
“부담스러워 죽겠네. 거절해야겠지?”
“거절하셔도 문제 아닌가요? 저쪽에서 마음이 상할 거 아녜요.”
“네가 대신 가 줄래?”
“무시무시한 소리 하지 마셔요.”
시더가 핀잔했다. 이에샤는 “나도 무섭단 말이야.” 하고 꿍얼거렸다. 책상에 턱을 댔다. 입술을 쭉 내밀었다. 윗입술과 코 사이에 펜을 얹었다. 시더는 예쁜 얼굴 함부로 쓰는 것도 재주라고 혀를 내둘렀다.
“요즘 이상하게 파티 초대장들이 온단 말이야.”
“앨저 경이 유명해졌다는 뜻 아니겠어요? 1월 무도회 때 공을 세우셨다면서요. 그 무용담을 듣고 싶은 거 아니에요?”
“아냐, 아냐. 내 인생이 그렇게 잘 풀릴 리 없어.”
종잡을 수가 없었다. 이에샤는 검술 연습을 끝내고 “역시 난 천재라니까!” 하고 외치는가 하면, 일어나지도 않은 일까지 내다보며 부정적인 소리를 했다. 변덕이라기에는 지속적이고 성격이라기에는 모순적이었다. 시더로서는 모시기 쉽기만 하면 되었지만.
빨래한 셔츠를 개켰다. 이에샤는 오전·오후에 한 번씩 검을 잡았다. 최소 두 장의 셔츠가 땀범벅이 된다는 뜻이었다. 그밖의 시간에는 기사단 정복에 들어가는 블라우스를 입었다. 시더는 아무런 장식도 없는 셔츠 쪽이 이에샤에게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저 같은 사람들일지도 몰라요.”
“너 같은?”
“앨저 경을 근사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요. 경, 레이디한테서 온 초대장이 대부분이죠?”
이에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시더의 말이 맞았다. 받은 초대는 모두 귀부인이나 아가씨의 것이었다. 남자의 모임에 이에샤가 가도 웃기겠으나, 자택에서 여는 무도회나 사냥 대회에는 부를 법도 했다. 하지만 남자 귀족들은 이에샤를 없는 셈 쳤다.
“앨저 경은 예쁘기도 하지만 멋있다는 말이 딱이에요.”
“둘이 무슨 차이인데?”
“글쎄요. 여자한테 쓰는 말이랑 남자한테 쓰는 말?”
시더도 뾰족이 대답하지 못했다. 이에샤는 새로운 고민을 맞닥뜨렸다. ‘예쁘다’와 ‘멋있다’는 무어가 다른 걸까? 어느 쪽이든 들으면 기분 좋았다. 셈브리온은 이에샤에게 예쁘다고도, 멋지다고도 자주 말했다.
문득 두 남자가 머릿속에 그려졌다. 섬세하게 빚어낸 듯한 소공작과 쾌락적으로 보이는 황태자. 엘테르트는 아름다웠고 루시온은 멋들어졌다. 그런 뜻인지도 몰랐다.
“나는 황태자 전하 파라는 거지?”
“네, 네? 뭐죠? 저, 저, 저 그런 엄청난 말은 하지 않았는데요?”
“얘, 시더! 내 옷 바닥에 떨어졌잖니. 정치 얘기 아니니까 진정해.”
이에샤는 픽 웃고는 책상에 댔던 얼굴을 들었다. 늘어지게 기지개했다. 시더의 칭찬은 퍽 마음에 들었다. 이에샤의 취향대로 생긴 쪽은 루시온이었기 때문이다.
시더는 제가 무슨 폭탄 발언을 터뜨렸길래 당파 이야기가 나왔는지 몰라 허둥댔다. 이에샤는 곤란하게 중얼거렸다.
“그런 거 아니라니까.”
어차피 황제가 될 사람은 루시온뿐이었다. 황태자와 맞겨룰 만한 황족은 없었다.
말비다의 초대는 물리치기로 했다. 갔다가 무슨 소리를 들을까 상상하면 골이 쑤셨다. 이에샤를 무서워하거나 꺼리는 아가씨는 차라리 나았다. 말비다처럼 여자 기사를 숙녀로 고쳐 놓고 싶어 하는 부인들이 번거로웠다.
“할 일도 없는데 수련이나 더 하고 싶다.”
“여벌 셔츠가 한 장뿐이에요. 오후 수련 때 입으실 거 없어져요.”
“그냥 입었던 거 한 번 더 입으면 안 돼?”
“…….”
시더가 이에샤를 물끄러미 보았다. 눈빛에 뜻이 깊었다. 모시는 사람에게 안 된다고는 못하지만, 그런 짓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외치는 듯했다. 이에샤는 양손을 들어 보였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순찰을 돌 시간은 아니었다. 그래도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느니 바깥에서 거니는 편이 나을 성싶었다.
라제카 공주는 변함없이 사랑스러웠다. 양갈래로 땋아, 둥그렇게 튼 머리 모양이 의젓했다. 옷은 병아리색 실크로 지었다. 부풀려서 구두가 보일락 말락 하는 소풍용 드레스였다. 안타까운 부분이 있다면, 대롱대롱하는 사파이어 귀걸이였다. 라제카의 작은 얼굴에는 무겁고 아파 보였다.
라제카가 치맛자락을 펼치며 인사했다. 이에샤는 어색한 낯빛을 지었다. 반가워하기가 어려웠다. 초대를 거절하기로 마음먹은 사람이 라제카와 함께였으므로. 말비다 벨제아가 피크닉 바구니를 든 채였다.
라제카는 아무것도 모르고 까치발을 들었다. 쓰다듬어 줘요. 그러한 뜻을 읽고, 이에샤는 “안 됩니다. 멘델린 경한테 부탁하세요.” 하고 물리쳤다. 황족의 머리에 손을 올리기는 꺼림칙했다.
“앨저 경, 사무실에 있을 시간이 아닌가요?”
“백화 기사단은 아직 서류 작업이 별로 없어서 나왔습니다.”
라제카가 손뼉을 부딪쳤다. 즐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나. 오라버니랑 멘델린 경이 힘써 주고 있나 보네요.”
“예?”
어리둥절한 소리가 올랐다. 라제카는 친구의 귀에 비밀 이야기를 속닥이는 꼬마처럼 웃었다. 이에샤는 라제카 앞에 서면 제가 멍청이가 되는 듯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라제카가 그랬거든요. 한동안은 여인들이 석곡궁 문을 두드리지 못할 테니, 앨저 경이 많이많이 돌아다닐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사실은 새로운 부처를 만들면 다른 곳에 알리랴, 방침 조율하랴 정신없답니다.”
“그, 그러셨습니까? 전혀 몰랐습니다.”
“의외예요. 멘델린 경은 몰라도 오라버니는 생색깨나 내실 줄 알았는데.”
그건 그래. 불경한 생각을 품어 버렸다. 루시온이라면 갖은 티를 내며 고마워하라 부추기고, 나중에 갚으라 볶아대는 편이 어울렸다.
하기야 만나는 날이 드물기는 했다. 황태자는 하잘것없는 여자 기사단장과 담소를 나눌 만큼 한가하지 않았다. 신년맞이 무도회 뒤로 세 번은 봤을까.
루시온을 떠올리는 참에, 라제카가 불쑥 불렀다.
“앨저 경.”
“말씀하십시오, 공주님.”
“벨제아 부인의 티 파티에 초대받았다면서요?”
이에샤는 딸꾹질을 터뜨릴 뻔했다. 이렇게 치고 들어올 줄이야! 조심스레 말비다의 눈치를 살폈다. 무표정하던 말비다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에샤는 황태자에게 무도회 초대장을 받았을 때보다 더한 부담을 느꼈다.
“아니, 저, 그게. 카드를 받긴 받았습니다만.”
“벨제아 부인의 저택에 오는 부인들은 모두 사교계에 영향력이 커요. 분명 경의 이름을 알리는 데 도움이 될 거예요.”
“하지만…….”
말비다의 눈썹이 치솟았다. ‘네까짓 게 내 초대를 마다해?’ 하고 쏘아붙이는 듯했다. 이에샤는 움츠러들었다.
몇 달 사이에 깨달았다. 자신은 여자에게 약했다. 남자가 주먹을 치켜들면 코웃음이 나왔지만, 여자가 공손히 청하면 까다로운 일도 거절하지 못했다. 성깔대로 뒤집기 위해서는 상대방도 성깔을 부려야 하는 법이었다. 그동안 여자라고는 밀레나와 셀더리, 알디온의 하녀들밖에 못 봐서 몰랐다.
라제카가 부딪친 손을 꼬옥 맞잡았다. 이에샤는 반사적으로 ‘요정의 기도’라는 유명한 조각 작품을 기억했다. 경매에서 십억 골드까지 올라갔다고 했던가. 라제카는 이에샤가 저를 얼마나 귀여워하는지 눈치채지 못한 채 조잘거렸다.
“점잖고 사리에 밝은 분들이에요. 앨저 경을 곤경에 빠뜨리진 않을 거랍니다.”
“공주님께서는 제가 부인의 티 파티에 나가길 바라십니까?”
“그래요. 기회는 놓치지 말고 잡아야죠.”
홍차색 눈이 기대로 빛났다. 이에샤는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끝내 고개를 아래위로 흔들었다. 말비다가 콧방귀를 뀌었다. 라제카의 삐져나온 옆머리를 갈무리해 주며 말했다.
“앨저 경을 특별한 손님으로 여기고 성심껏 맞이하겠습니다. 초대장에 쓴 시간에 맞추어 찾아와 주십시오.”
이에샤도 귀족의 화법을 꽤 배웠다. ‘늦으면 끝장나겠구나.’ 하고 생각하며 어설프게 웃어 보였다.
============================ 작품 후기 ============================
이에샤는 엘테르트처럼 멀끔하고 고상하게 생긴 얼굴은 별로 안 좋아합니다
루시온은 고기(+술) 좋아하게 생긴 얼굴이라 제법 취향입니다
하지만 엘테르트 정도의 미모라면 is뭔들입니다
벨체터에서는 애칭도 달랐던 스승님의 과거편 시작합니다~ 열심히 굴러라 이에샤 옆에서 같이 굴러라 에르디
선추코 감사합니다!!!
브브이 님 후원 쿠폰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