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35 5. 무도회 속 함정 =========================
(연참 2/2)
한숨이 입술을 비집었다. 고달픈 기색이 뚜렷했다. 이에샤는 황당함을 느꼈다. 몸 쓰는 일은 제가 했는데, 이야기만 듣고 다녔을 엘테르트가 피곤해하다니. 엄살이 심했다. 그러한 이에샤의 속내를 읽고 엘테르트 또한 울컥했다.
“방금 베빈 반데스하고의 이혼이 성립되었습니다. 제 보좌관이 죽어라 뛰었으니 나중에 고맙다고 인사라도 해 주십시오.”
“뭐? 네? 어떻게 됐다고요?”
“엘먼 공에게 전령을 보내면서 부인, 아니, 반데스 자작 영애의 일도 함께 전달하도록 조치했습니다. 페하께서는 렌디드만을 역모죄로 다스릴 겁니다.”
이에샤가 입을 헤벌렸다. 엘테르트는 이에샤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했다. 목뒤를 긁적였다. 귀끝까지 벌겠다. 엘테르트가 어색해하는 것도 모르고 이에샤는 생각했다.
‘끝났다.’
팔다리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몸이 허물어지려 했다. 엘테르트가 또다시 붙들어 주었다. 이번에는 제대로 팔만 쥐어 지탱했다. 이에샤가 “아하하.” 하고 싱거운 웃음소리를 냈다.
“미안해요. 긴장이 풀려서.”
“백화 기사로서 첫 공을 세웠으니 당연합니다. 처음 정보를 손에 넣은 게 앨저 경이었으니까요.”
“고마워요. 경이 아니었다면 난, 베빈을 어떻게 구해야 할지도 모르고, 어디를 살펴야 하는지도 모르고. 아무튼 그랬을 거예요.”
눈꺼풀이 무거웠다. 정신을 다잡으려고 용쓰며 말했다.
엘테르트는 얼어붙었다. 이에샤에게 감사 인사를 들을 줄은 몰랐다. 이에샤의 몸은 뜻밖에 딱딱함이 적었다. 탄력적인 근육이 붙었으나, 뭇 여자와 비슷했다. 새삼스레 이에샤가 브링어라는 사실이 신기했다.
“그리고…….”
이에샤가 웅얼거렸다. 엘테르트는 또 뭐가 남았나 싶어, 잠자코 뒷말을 기다렸다. 기어들어갈 듯이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미안해요.”
사과하고 이에샤는 엘테르트의 손을 풀어 냈다. 스스로 몸을 버텼다. 아직은 드러누워선 안 되었다. 뒤처리에 도울 일이 있을지도 몰랐다. 엘먼에게 다가가 말을 거는 이에샤를 보며, 엘테르트는 우두커니 섰다.
* * *
2월도 중순으로 접어들었다.
반데스 자작가는 처벌을 면치 못했다. 이혼했다고 해도 역모죄였다. 빠져나가기는 어려웠다. 이오르 황제는 반데스의 일원이 평생 수도에 발붙이지 못하도록 했다. 기실 봐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베빈은 닐보칸으로 떠났다. 마차에 오르며 막막한 표정을 지었지만, 홀가분해진 듯도 했다. 이에샤는 성문까지 베빈을 배웅했다. 수도를 떠나지 않는 한 다시는 만나지 못하리라.
이에샤에게는 반 년 치 봉급에 달하는 보너스가 내려졌다. 휴가는 얻지 못했다―일을 대신할 백화 기사가 없었다. 총무부 관리는 너도 고생이 많다, 다독이는 목소리로 “달아 두겠습니다.” 하고 말해 주었다.
‘렌디드 자작은 어떻게 됐을까.’
이에샤는 딜란의 처분을 몰랐다. 감옥에 갇혔을 텐데, 형벌은 은밀하게 이루어진 모양이었다. 뜬소문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물어볼 사람도 없었다. 무도회 뒤로 한 번도 엘테르트와 만나지 못했다.
영년 토너먼트는 취소되어 버렸다. 신년맞이 무도회가 결딴났으니, 토너먼트도 점검해 보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관리들은 비명을 질렀으나―우리가 생명을 갈아 넣으면서 준비했는데!―황제의 뜻이 굳건했다.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일상이 돌아왔다.
이에샤는 오전 수련을 끝마치고 사무실에 앉았다. 시더가 밀크티와 저며서 말린 과일을 가져다주었다. 이에샤는 과자처럼 딱딱해진 과일을 오도독거렸다. 처리할 서류가 없었다.
날이 풀리기 시작했다. 쌀쌀하기는 해도, 맹추위는 잦아들었다. 삼월이 오면 따뜻해질 것이다. 사월에는 봄기운이 흐를 테고. 청소하는 시더에게 “얘, 내 인생에도 봄이 올까?” 하고 우스개를 건네 보았다. 시더는 까르륵하며 답했다. 지금부터 바리바리 준비하셔서 내년에 참한 남자 들이세요. 이에샤도 픽 웃고 말았다.
한가로웠다.
“……뭐하는 겁니까, 앨저 경.”
“어라?”
반짝, 눈이 뜨였다. 책상에 엎드린 채 잠들어 버린 모양이었다. 얼굴을 들었다. 엘테르트가 엄한 눈초리로 이에샤를 내려다보았다. 이에샤는 잠깐 고민했다. 꿈인가, 생시인가. 엘테르트가 석곡궁에 오기는 한 달 만이었다. 짙푸른 눈동자에 미운 정이 든 남자의 상이 맺혔다.
“멘델린 경?”
“기사단장씩이나 돼서 근무 중에 잠을 자다니.”
“아, 아니거든요. 저 안 잤습니다.”
“입에 침이나 닦고 말하십시오.”
이에샤는 허둥지둥 입가를 훔쳤다. 손등에는 아무것도 묻어나지 않았다. 이에샤의 살갗은 보송보송 말랐을 따름이었다. 엘테르트가 무뚝뚝한 태도로 말했다.
“농담입니다.”
“경, 그렇게 세상에서 제일가는 멍청이 보는 듯한 얼굴로 농담하지 마세요. 부하들이 겁먹겠어요.”
“겁먹었습니까?”
“설마요.”
그렇게 심한 얼굴이었나. 혀를 차며 낯빛을 누그러뜨렸다. 응접 소파에 엉덩이를 내렸다. 이에샤는 시더를 부르려 했으나, 사무실에서 보이지 않았다. 찻잔과 과일 접시도 치워진 채였다. 얼마나 잔 걸까.
두 사람은 한참이나 묵묵했다.
이에샤는 엘테르트의 얼굴을 곁눈질했다. 섬세한 눈매, 반듯한 콧매, 부드러운 입매가 어우러졌다. 참으로 잘난 얼굴이었다. 신년맞이 무도회에서 만났던 엘로나를 떠올렸다. 그 같은 어머니를 두었으니 당연한지도 몰랐다. 에이릴리도 딱 이에샤만큼 예뻤으니까.
말문을 연 쪽은 엘테르트였다.
“렌디드 자작이 죽었습니다.”
“아, 역시?”
“식솔도 모두 처벌받을 겁니다. 극형까지 내려지진 않겠지만 죄목이 죄목입니다. 엄벌로 다스릴 수밖에 없죠.”
이에샤는 심드렁하게 생각했다. 그렇게 됐구나. 마른하늘에 날벼락 맞은 이들에게 미안하지만, 렌디드 가문이 딜란의 폭력성을 몰랐을 것 같지는 않았다. 미친놈을 사회에 풀어 둔 죗값은 치러야 했다.
“그 얘기 전해 주러 온 건가요?”
“예. 그리고 앨저 경한테 물을 말이 있습니다.”
이에샤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엘테르트가 저에게 궁금해할 만한 일이 있는가. 고민해 보아도 짚이지 않았다. 백화 기사단의 보고서가 잘못됐다면 훨씬 재수없는 태도였을 것이다.
엘테르트는 양손을 맞잡았다. 손깍지를 엮었다. 가지런한 허벅다리 위에 얹었다. 흠잡을 데 없이 우아한 모습이었다. 꾸벅꾸벅하는 이에샤와는 다르게.
“경이 제게 미안하다고 사과한 까닭을 알 수가 없어서요.”
“아.”
“왜 그랬습니까? 당신은 사과할 만한 일을 저지르지 않았는데.”
진지한 물음이 흘러나왔다. 정말로 의문스러운 듯했다. 이에샤야말로 어리둥절해졌다. 엘테르트가 이해하지 못할 줄이야! 답답한 낯으로 물으러 온 꼴이 우습기도 했다. 이에샤는 자세를 고쳤다. 의자에 파묻었던 등허리를 곧추세웠다.
“멘델린 경이 그랬잖아요.”
“뭘 말입니까?”
“폭력 쓰지 말라고. 저 부임한 첫날, 마차 안에서요.”
이번에는 엘테르트가 “아.” 하고 깨달은 소리를 냈다. 생각지도 못한 까닭이었다. 제가 말해 놓고도, 기대하지 않았으므로. 그자리에서 “그건 무리예요.” 하는 답을 받지 않았는가? 이에샤가 마음에 담아 두었다니 뜻밖이었다.
이에샤는 드러나지 않게 침을 삼켰다. 어물쩍 넘어갈 수도 있는 일을 들추었나 싶어서 걱정스러웠다. 엘테르트에게 욕먹을 각오는 다졌지만, 긴장을 떨칠 수 없었다.
하나 엘테르트는 긴 한숨만 내쉬었다.
“정말 싫었습니다.”
“아니, 그러니까 미안하다고…….”
“평생을 믿어 온 신념 앞에서 내가 틀렸다고 인정하기란 싫은 일이었습니다.”
이에샤의 눈이 동그래졌다.
엘테르트의 얼굴이 붉었다. 그 모습을 보자니 이에샤도 공연스레 뺨에 열이 모였다.
“마력은 현자라는 사람들도 끝을 모르는 미지의 힘입니다. 그때 엘먼 공이 렌디드의 마력을 탐지하지 못할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습니다. 시간도 촉박했고, 실토를 받아 내고자 고문을 가한 당신의 행동이 최선이었습니다. 그는 고통을 맛보자 두려워졌는지 심문관 앞에서 모든 죄를 털어놓더군요.”
“그, 그런가요?”
“예. 이번만큼은 앨저 경이 옳았습니다.”
딜란은 넋 빠진 사람처럼 늘어놓았다. 자기가 본 마파랑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마법의 원칙이 얼마나 바보같은지. 베빈은 멍청한 계집이고, 계획이 어그러지더라도 상관없었다는 이야기까지. 매개체가 치워진다면 제 몸으로 대체하여 마법을 쓸 셈이었던 듯싶었다. 이에샤가 막아 줘서 다행이었다.
한 가지 불가사의라면 딜란의 “하늘을 날았어! 날았다고!” 하는 헛소리일까. 어째서인지 딜란은 겁을 집어먹었다.
엘테르트는 이에샤의 방식을, 무위에 기댄 해결을 따를 수 없었다. 목에 칼이 들어오더라도 따르지 않을 셈이었다. 다만 인정하기로 했다. 때마다 어울리는 해결책이 다른 법이라고. 간단한 이치인데도 그동안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게 한심스러웠다.
또다시 한숨을 쉬었다. 이에샤와 시선을 맞추었다. 아름다운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고생했습니다, 잘하셨습니다.”
이상한 일을 겪었다.
이에샤는 엘테르트 멘델린에게서 긍정적인 말을 듣게 되리라곤 상상조차 못 하였다. 칭찬은커녕 기사로도, 귀부인으로도 대접해 주지 않을 거라 여겼었다. 엘테르트는 타의 없는 눈으로 이에샤를 바라보았다. 진심으로 경의를 표하는 모양새였다.
이에샤의 얼굴이 화르르 달아올랐다.
“아, 아니에요! 멘델린 경이야말로 베빈의 일, 신경써 줘서 고마워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저도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거라고요!”
입술을 깨물었다. 온 얼굴이 근질근질했다. 웃음을 참고자, 기를 써야만 했다. 셈브리온과 함께였다면 목을 끌어안고 뛰었을 터였다. 인정받았다. 처음으로. 가장 어려웠던 상대에게!
엘테르트의 말은 주문 같았다. 무슨 일이 닥치더라도 “잘하셨습니다.” 하는 목소리를 기억하면 자신감이 솟을 듯했다.
앨저 경은 백화 기사로서 첫 일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 작품 후기 ============================
챕터 이름이 수정될 예정입니다. 도중에 스토리가 크게 방향을 틀었기 때문입니다. 훨씬 길고 우울한 이야기가 될 뻔했는데, 베빈을 구해 달라는 독자님들의 코멘트를 보고 정신을 차렸습니다. 행복하자고 보는 로판에서 기존 스토리는 아니다 싶었습니다.
후기에서 주절주절 설명하는 건 모자란 역량을 드러내는 일이라 부끄럽지만,
혹여 엘테르트가 모든 일을 해결했고 이에샤의 노력은 헛고생이 아니었느냐 하는 실망을 느끼실까 싶어 덧붙이려 합니다.
딜란은 계획이 어그러지면 자기 몸을 매개체로 마법을 사용할 생각이었고(자폭) 그걸 막은 것이 이에샤의 검이었습니다. 또 엘테르트가 시기 적절한 대응을 할 수 있었던 건 베빈의 용감한 고발 덕분이었으며 베빈의 용기를 이끌어낸 건 반지를 찾아 준 이에샤의 작은 친절이었습니다. 이에샤는 완벽하게 제 임무를 다했습니다.
/// 오후 6시, 위 내용을 본편에 반영했습니다. 에르디와 이에샤의 대화에서 문단 두 개가 추가되었습니다. ///
비록 속시원한 해결은 아닐지라도 베빈은 씩씩하게 살 겁니다. 베빈은 수도에 비하면 시골이나 다름없는 소도시에서 왔고 그곳에서 반데스 자작가는 어마어마한 부자로 통하거든요. 돈이 있으면 사람은 어떻게든 수렁까지 떨어지지는 않는다고 생각해요.
지금까지 작가가 투척한 고구마가 워낙 많아서 독자님들이 갑갑해 하시는 점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이에샤의 삶이 결실을 거두는 그날까지 계속 쓰겠습니다.
+) 라제카의 호칭 문제로 지적이 들어와서 씁니다.
<혼수는 검 한 자루>는 현실적인 고증을 포기하고 쓴 글로, 서양스러운 배경이지만 델페레타도 봉건제나 군현제냐 하면 군현제에 가깝습니다(영주도 지배자가 아니라 사또 같은 존재죠). 그러나 옛 한국이나 중국 등의 작위를 따온 것은 아닙니다. 공주라는 호칭은 황제의 딸에게도 쓰였으며, 군주 옹주 궁주 등 다양하게 있지만...일단 델페레타는 한자권과 다르게 일부일처제인 시점에서 구분이 무의미하죠. 제 독자적인 설정상 황녀란 황제의 딸을 칭하며, 공주는 황녀를 부를 때의 경칭입니다.
후기가 길어졌네요. 내일이나 모레 새로운 챕터로 찾아뵙겠습니다.
선추코 감사합니다!
ddr06 님, atirebelt 님 후원쿠폰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