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34 5. 무도회 속 함정 =========================
(연참 1/2)
겨울이었다. 공기에 물이 배지 않았다. 불이 나기 쉬운 철이었다. 바람이 들이치는 복도, 꽉 막힌 구석자리, 파티 참가자끼리 소모임을 벌이는 객실, 땔감을 쌓아 두는 창고, 층계참……. 이에샤는 엘테르트가 일러 준 장소들을 꼼꼼히 살폈다. 사람이 빠져나간 수레국화궁은 겉모습만 빛나고 분위기가 죽어, 을씨년스러웠다.
그런데도 힘이 넘쳐흘렀다. 온몸의 신경이 활짝 열린 듯했다. 오감이 어느 때보다도 날카로워졌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비상사태인 것이 안타까웠다. 연무장이었다면 그동안 실패를 거듭해 온 일도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굉장해! 이렇게 절실한 마음으로 뛰기는 처음이라 그런가?’
긴장이 고조를 불러들였을까? 얼굴이 발갛게 달떴다. 다릿심을 키우려고 뛰거나 달린 적은 많았지만, 지금처럼 전력 질주 해 보지는 못했다. 날아오를 수도 있을 듯한 기분이 낯설었다. 이러한 상황에 웃음이 나오다니. 이에샤의 호전적인 성미가 들끓었다.
3층까지 둘러보았다. 남은 곳은 4층뿐이었다. 계단을 겅중겅중 올라갔다. 도중 층계참에 멈추어, 무언가 놓이지는 않았는지 보았다. 이윽고 위층에 다다랐다.
이번 복도에도 커다란 창문이 났다. 폭발이 일어나면 유리가 깨지고 바람이 들어와, 불길을 키울 법했다. 이에샤는 양쪽으로 늘어선 창가를 샅샅이 뒤졌다.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인기척이 잡힌 까닭이었다. 가까운 객실에 사람이 있었다. 이에샤는 침을 모아 마른입을 축였다. 칼자루에 손을 얹었다. 습격당하더라도 받아칠 수 있도록 걸었다. 셈브리온과 대련하면서 거리를 잴 때만큼이나 조심스럽게.
“거기, 누구 계십니까? 여기는 지금 위험합니다.”
경고는 의례에 지나지 않았다. 그자가 누구인지는 단박에 알아차렸다. 직감이 외쳤다.
문고리를 잡아당길까 하다가 관두었다. 대신에 검을 휘둘렀다. 빠각! 파열음이 울리며 쌍여닫이가 가로로 갈라졌다. 충격으로 경첩이 떨어져 나갔다. 문짝이 무너졌다. 방안의 풍경이 보였다.
놀란 낯을 한 남자가 창문가에 섰다. 키가 작고 코는 뭉뚝했다. 번들거리는 초록빛 눈을 지녔는데, 개구리의 피부를 연상시켰다. 이에샤는 금방의 위협이 먹혀들었기를 바라며 딜란 렌디드를 노려보았다.
딜란이 표정을 바꾸었다. 한쪽 입꼬리를 당겨 올렸다. 눈매가 기묘하게 샐그러졌다. 이에샤는 딜란이 웃었다는 걸 1분쯤 뒤에야 깨달았다. 꺼림칙한 미소였다.
“뭐가 재밌다고 웃지? 렌디드 자작.”
“재밌지. 안 재밌겠나? 남자한테 아양 떨어 기사 놀이를 한다는 여자애가 칼로 문을 잘랐는데. 소문은 믿을 게 못 된다니까.”
노여웠으나 내색은 하지 않았다. 기사가 되고 한 달여가 흘렀다. 자신의 추문쯤은 알았다. 우스운 점은, 이에샤를 지원한다는 남자 귀족의 이름을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무슨무슨 백작일 때도 있었고 아무개 후작이 되기도 했다. 사람들은 실체 없는 소리를 내세우며 이에샤를 인정하지 않으려 들었다.
이에샤는 엘테르트처럼 철두철미하지는 못해도 일의 경중은 가릴 수 있었다. 지금은 명예를 걸고 다툴 때가 아니었다. 딜란을 잡아야 했다.
“나에게 발견된 이상 네놈한테 승산은 없다. 마법사니까 똑똑하겠지? 나는 브링어야.”
“그래, 아주 흥미로워. 도대체 몇 살에 브링어가 됐지? 근위 기사단장이 서른아홉에 브링을 체득했다고 들었는데. 얘기 좀 해 줘, 백작.”
“다물고 폭발물을 어디에 뒀는지나 말해.”
딜란이 두 팔을 벌렸다. 얼굴에 기쁨이 그득했다. 이에샤는 불안해졌다. 딜란은 정점에 오른 검술사와 마주하고도 태연했다. 현자조차도 코앞에 브링어를 두고 달아나지는 못할 텐데.
“그러지 말고 느긋하게 대화해 보자고. 언제부터 정보가 샜지? 모두를 깜짝 놀래 주려고 했는데 죄 도망쳐 버렸잖아.”
“……말하라니까!”
“역시 내 아내인가? 그 다람쥐보다 소심한 계집이 내 뒤통수를 쳤나?”
소심한 계집이라니. 처녀 적의 베빈은 명랑하고 꿈꾸기 좋아하는 아가씨였다. 수도에서 온 남자를 집으로 불러들일 만큼. 딜란의 폭력, 귀부인 사이의 따돌림으로 움츠러들었을 뿐이었다. 딜란이 멀쩡한 배우자였다면 베빈을 존중으로 보듬었을 터였다. 베빈은 바라 마지않던 수도 생활을 즐겼을 테고.
이에샤는 이번에야말로 화를 터뜨렸다.
“베빈을 뭐로 생각하는 거야! 잘 살던 그녀의 삶을 당신이 망가뜨렸잖아!”
“오, 이름까지 부르는 사이야? 내 아내가 백작을 유혹하기라도 했나 보지? 하기야 백작은 사내보다 계집을 좋아하게 생겼어.”
이어지는 모욕에 손이 떨렸다. 하다, 하다 대식(對食)까지 들먹이는 딜란을 믿을 수 없었다. 미친놈이었다. 말이 통할 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애가 끓었다. 딜란을 찾아냈는데도 폭발을 막을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마법의 발동은 여덟 시야. 한 시간 남았지.”
“네놈!”
“진정해, 그때까지는 안전하니까 조바심치지 말라고. 그래, 백작이 자기 얘기를 하기 싫다면 내가 하지 뭐. 난 제법 수다를 잘 떠는 편이야.”
이에샤는 모든 브링을 쏟아부어, 딜란을 베어 버리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였다. 오스터 알디온을 최악으로 꼽았던 제가 틀렸다. 세상은 넓어서 오스터보다 더한 놈도 살았다. 이런 식으로 시야를 넓히고 싶지는 않았다.
마음 같아서야 코를 후려갈겨서 요철 없이 판판한 얼굴로 만들어 주고 싶었지만, 폭발물의 위치부터 캐내야 했다.
‘차라리 기절시켜서 마법장한테 끌고 갈까?’
현자 엘먼이 딜란의 마력을 잡아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못하더라도 인명 피해는 없어야 했다. 뭉그적대다가 제가 폭발에 휘말린다면 바보짓이었다. 엘테르트라면 어떻게 할까? 루시온은. 라제카는.
고민해 보아야 자신은 이에샤 앨저였다. 남의 길은 헤아리지 못했다. 이에샤에게는 이에샤의 길밖에 없었다.
칼자루를 쥐고 앞으로 나서려던 차였다.
“마파랑.”
“뭐?”
“마파랑, 본 적 없지? 22년 전이 마지막이었으니까.”
딜란이 뜬금없는 말을 했다. 이에샤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불길한 느낌이 피어올랐다. 딜란의 흉계가 폭발로 수레국화궁을 무너뜨리려는 게 맞을까, 의심이 들었다.
마파랑. 자연적인 마력이 돌연변이를 일으켜 재해를 부르는 현상. 그것이 화두에 오르는 까닭이 의아스러웠다. 어쩐지 으스스해졌다. 딜란이 이에샤의 낯빛을 보고 즐거운 웃음을 터뜨렸다.
“굉장히 아름다웠어. 괴물에게 어머니가 잡아먹혔지! 내가 매일 드시던 약에 잿물을 타고 있었던 게 좀 아쉬웠지만. 아무튼 난 깨달은 거야. 마법이야말로 인간을 뭉개기에 알맞는 수단이라고! 그래서 마법사가 됐어!”
“설마…….”
“작년에야 비로소 인공 마력으로 마파랑을 일으키는 이론이 완성됐지. 하하, 여덟 시가 되면 내 연구가 성공했는지 알 수 있다고. 베빈 그년은 마력 폭발이 진짜 폭발인 줄 알았나 보지?”
“미친 새끼!”
이에샤는 앞뒤를 잴 상황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저 또라이를 끌고 황실 마법장에게 가야 했다.
마파랑을 겪은 적은 없었으나 세상에서 가장 무시무시한 재앙이라고 들었다. 지진과 홍수와 눈사태가 한꺼번에 일어나고, 죽은 화산이 폭발한다고. 수도는 사람이 많은 만큼 건물도 바글바글했다. 지진이 나면 끝장이었다.
벼락같이 딜란에게 달려들었다. 딜란은 예상한 듯 피하지 않았다. 피할 깜냥도 못 되었다. 이에샤는 칼자루를 내밀어, 딜란의 명치를 폼멜로 찍었다. 딜란이 나자빠졌다. 꺽꺽 숨을 몰아쉬었다. 일부러 기절시키지 않았다. 말을 할 수 있는 채여야 구슬리든 다그치든 할 터였다.
“다리 정도는 부러뜨리는 편이 나으려나?”
소리 내서 중얼거렸다. 딜란이 움찔했다. 아픔이 싫기는 한 모양이었다. 그러면서 베빈을 괴롭혀 왔다고 생각하니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이에샤는 스산한 눈길로 딜란을 내려다보았다. 딜란은 아랑곳없이 침흘리며 실실거렸다.
“목을 베지 않는 건 아직 네놈이 마법을 발동시키지 않도록 설득할 여지가 남았다 생각했기 때문이야.”
“히, 하하, 그럴 일은 없을걸!”
“그래? 난 당신이 고문을 견딜 만한 놈으로는 안 보여서.”
그렇게 말하고 이에샤는 검을 내리꽂았다. 칼날이 딜란의 종아리를 꿰뚫었다. 셈브리온이 선물한 검은 과연 잘 들었다. 딜란이 고통에 찬 비명을 질렀다. 이에샤는 그치지 않고 검을 가로로 그었다. 근육과 지방을 가르는 느낌이 손바닥에 전해졌다. 섬뜩했으나, 상상한 바보다 별것 아니었다.
딜란의 한쪽 다리가 너덜너덜해졌다. 다음에는 어깨를 짓밟았다. 우두둑, 소리가 났다.
“봐, 고작 이 정도로 죽으려고 하는걸. 가자. 마법사한테는 현자하고 만나는 게 영광이겠지? 만나게 해 줄게.”
딜란이 등지고 섰던 창문을 열었다. 딜란의 멱살을 잡았다. 가뿐하게 들어올렸다. 창문턱에 한 발을 디뎠다. 어이, 뭐하려는 거야?! 딜란이 버둥거렸다. 이에샤는 가차없이 딜란을 높이 던지고, 자신도 뛰어내렸다. 발바닥에 힘을 주어 착지했다.
한 박자 느리게 떨어져 내리는 딜란의 몸을 받아 냈다. 낯빛을 보니 새파래졌다.
“멀쩡히 문으로 걸어 나오기엔 촉박하니까. 따라와!”
이에샤는 딜란의 사정을 봐 주지 않았다. 다친 다리가 땅에 쓸리거나 말거나, 덜미를 잡고 끌어당겼다. 정문을 향하여 뛰기 시작했다. 마법의 등이 떠다니는 정원을 가로질렀다. 딜란의 신음과 비명이 풍경에 어울리지 않게 울려 퍼졌다. 멀리서 횃불의 빛이 보였다.
수염을 길게 기른 노신사가 앞장에 선 채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익숙한 사람이었다. 이에샤는 자기도 모르게 외쳤다.
“멘델린 경!”
엘테르트가 고개를 돌렸다. 찻물처럼 말간 갈색 눈동자가 커졌다. 이에샤는 숨을 할딱거렸다. 지치지는 않았으나 아까의 집중력이 흐트러져 버렸다. 의식이 깜빡거리는 듯했다. 엘테르트의 앞에서 멈추지 못하고, 휘청 고꾸라졌다. 딜란도 놓쳐 버렸다. 엘테르트가 당황하여 제 몸으로 이에샤를 받았다.
이에샤는 엘테르트의 품에 안기다시피 한 채 열을 가라앉혔다. 달아오른 뺨과 거친 숨결이 엘테르트에게 가 닿았다. 엘테르트는 말을 잊어버리고 입만 뻐끔거렸다.
곧 이에샤도 화들짝했다. 자세가 영 이상했다. 이 남자는 평범하게 손으로 잡지, 왜 몸을 던져서 민망하게 만드는가?
“미, 미안합니다. 나, 렌디드 자작을 잡아왔, 후우!”
“숨부터 고르십시오. 저도 엘먼 공의 탐지 마법이 완성돼서 인공 마력의 위치를 찾아냈습니다.”
“그럼 폭발은?”
엘테르트가 이에샤의 몸에서 손을 떼었다. 어깨를 밀었다. 윗몸을 바로 세워 주었다. 이에샤의 머리 너머를 힐끗했다. 엉망진창으로 당한 딜란 렌디드가 보였다. 도리 없이 거부감이 들었다.
“우수한 황실 마법사를 여러 명 보냈습니다. 그들이 매개체를 없앨 겁니다. 그리고 렌디드 자작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