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33 5. 무도회 속 함정 =========================
칙령은 지엄한 법이었다. 이에샤가 선보인 무위도 놀라운 바였다. 불안한 낌새를 감추지는 못했지만, 모든 사람이 물러갔다. 엘테르트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대연회장에 이오르와 루시온, 애버토스마저 없음을 확인하고 달려온 차였다. 혼이 빠질 것 같았다.
꿇어앉은 이에샤가 눈에 들어왔다. 엘테르트는 안절부절못하다가 몸을 낮추었다. 이에샤의 팔을 잡았다. 보는 눈도 없으니 괜찮겠지 싶었다. 끌어당기자 이에샤는 주저하며 일어났다. 엘테르트는 한숨을 쉬었다.
“서 있어도 됩니다. 내가 함께이니.”
이에샤가 엘테르트의 손을 팩 뿌리쳤다. 낯이 근지러웠다. 엘테르트는 제가 이에샤를 놓지 않았다는 걸 깨닫고 흠칫했다. 일으켜 주었으니, 레이디의 몸에서 손을 떼야 마땅했다. 당연한 생각을 하지 못했다. 정신이 없기는 없는 모양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실례를.”
“됐어요. 그보다 폐하를 안전한 곳으로 모셔야죠.”
이오르가 변함없이 잔잔한 얼굴로 엘테르트와 이에샤를 보았다. 이에샤는 몰랐으나 조카인 엘테르트는 이오르의 내심을 읽었다. 이오르는 재미있어하는 중이었다. 엘테르트를 놀리는 티가 빤했다. 엘테르트는 영문도 모르는 채 억울해졌다. 갈팡질팡하던 마당에 실수 좀 했기로서니, 저 눈길은 무어란 말인가.
“어찌 그런 표정이십니까, 폐하.”
“내 뭘 했다고, 멘델린 경이야말로 쌍심지가 섰구나. 버릇없는 조카로다.”
“그거야 폐하께서……!”
이번에는 이에샤 쪽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이에샤는 따분한 낯빛을 지었다. 한심하게 여기는 듯도 했다. 엘테르트는 이에샤 앞에서 어린애 취급당했다고 생각하자 죽고 싶어졌다. 이에샤가 새침히 말했다.
“노닥거릴 시간이 없어요, 멘델린 경.”
“나도 압니다, 앨저 경.”
엘테르트는 그답지 않게 으득, 이를 갈아붙였다.
황제와 기사와 관료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대연회장은 다른 이들이 정리할 터였다. 경호를 도맡은 몸으로서 이에샤는 황제만 보아야 했다. 이오르가 지팡이를 짚으며 앞장섰다. 이에샤는 붙어서 따라갔다. 엘테르트는 두어 발짝 뒤에서 걸었다.
길에서도 서류를 본다는 엘테르트였다. 이동하는 짬을 허비할 턱이 없었다.
“폭발물이 들어왔다는 정보는 렌디드 자작 부인으로부터 들었습니다. 용의자는 그녀의 남편입니다.”
“남편의 죄를 아내가 고했다?”
“예. 하오나 폐하, 렌디드 자작은 부인에게 가혹 행위를 저질러 온 자입니다. 자작 부인만은 선처해 주십시오.”
이에샤는 언뜻언뜻 비치는 이오르의 옆얼굴을 살폈다. 이오르는 생각에 잠긴 듯했다. 초조해졌다. 황궁에 폭발물을 들였다니, 모반의 속셈이 없었더라도 역모죄로 다스릴 만했다. 베빈과 반데스 자작가까지 줄줄이 걸려들 것이다.
“그것참. 실은 나도 너희의 말을 믿지 않는다. 엘테르트, 네가 섣부르게 행동할 아이가 아니고 앨저 경, 너는 루시온이 아끼는 자이니 체면을 세워 줬을 뿐이지.”
이오르의 말씨가 달라졌다. 황제로서의 격식을 미뤄 두고, 정말로 삼촌이 조카를 대하는 양 누그러졌다. 이에샤는 어색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보아서는 안 될 것을 엿본 듯했다. 이오르와 엘테르트 사이에는 제가 낄 수 없는 분위기가 감돌았다.
“사실은 폐하.”
“말하거라.”
“아침에 엘먼 공이 이상한 이야기를 하더랍니다.”
귀에 익은 이름이었다. 언제 들었는가 기억해 내려고, 머리를 쥐어짰다. 누구인지 떠오르지 않았다. 이에샤의 궁금증을 눈치챈 엘테르트가 말했다.
“마법부에 들르느라 무도회에도 좀 늦었지요. 파트너에게 미안하게도.”
‘아, 황실 마법장.’
이에샤는 엘테르트의 화술에 감탄했다. 설명하느라 이야기를 끊지도 않고, 저에게 귀띔도 해 주다니. 엘먼은 불온의 장막에 빠졌던 날 루시온이 들들 볶았다는 마법사였다. 현자의 칭호를 지니기도 했다.
어쩐지 속이 답답했다. 이에샤는 가슴께를 문질렀다. 밀레나가 화두에 오르자 부아가 치밀었다. 아까 엘테르트와 밀레나는 정말로 어울렸다. 헛생각할 때가 아니야. 고개를 털며 마음을 다잡았다.
이오르가 물음으로 답했다.
“그가 뭐라고 하더냐.”
“수레국화궁의 마력이 평소보다 성하다더군요. 혹시 모르니 점검해 보자고 하셨습니다만, 아시다시피 드물지 않은 일입니다. 마력이란 게 워낙 제멋대로 흐르는 힘이다 보니…….”
“이미 무도회가 시작된 뒤였다는 얘기구나. 너는 언제나 합리적인 선택을 하지.”
신년맞이 무도회에 들어간 노동력이 엄청났다. 국고에도―손톱만 한―구멍이 뚫릴 정도의 돈이 쓰였다. 물렀다가 별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동안 쓰러져 나간 관리는 물론이고, 무도회를 위하여 값비싼 옷과 보석을 사들인 귀족도 불만을 품을 터였다.
“엘먼 공이 이번 건은 예사롭지 않다고 불안해 했습니다. 마법사에게 정제된 마력이 섞여서 촉진 현상이 일어난 듯하다고.”
“그래서 마법사의 테러라는 소리를 믿는다?”
“공은 현자입니다. 마법에 한해서는 틀린 말을 하지 않습니다.”
엘테르트는 무도회를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엘먼에게 수레국화궁을 지켜보도록 일러 놓았다. 황실 마법사 몇 명이 정원에서 마력 탐지 마법을 펼칠 것이다. 이오르의 말마따나 엘테르트는 최선을 선택했다.
이오르는 구석진 샛문으로 향했다. 비상구인 모양이었다. 이에샤가 바깥으로 나갔다. 노을이 번지기 직전, 분홍색으로 물든 하늘이 보였다. 수레국화궁 뒤뜰은 마법의 등으로 꾸며진 정원보다 수수했다. 정문 쪽이 시끌벅적했다. 기사단이 사람들을 대피시키는 탓이리라.
위험은 없어 보였다. 이에샤는 “나오십시오.” 하고 이오르를 불렀다.
“본궁까지 모시겠습니다.”
“아니. 됐다.”
“예? 여기는 위험합니다, 폐하.”
이오르가 지팡이를 들지 않은 손을 휘저었다.
“스란.”
이오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머리 위에서 무언가가 떨어져 내렸다. 사람이었다. 나무 위에 숨었던 듯했다. 엘테르트는 흠칫했지만, 이에샤는 놀라지 않았다. 인기척이라면 나오자마자 느꼈다. 황궁에는 평소에도 어둠에 녹아든 자가 많았으므로 내버려두었다.
‘스란’은 까맸다. 목을 감싸는 셔츠와 가죽 바지, 터번 모두 검은색이었다. 피부마저 가무잡잡했다. 허리띠에 아밍 소드를 매단 채였다. 이에샤는 눈을 치떴다. 검을 찬 그가 여자였기 때문이다. 얼굴선이 각진데다 근육질이었으나, 여성적인 굴곡이 있었다. 처음 만나 보는 여자 검사였다.
“내 안위는 스란에게 맡기겠다. 앨저 경에겐 미치지 못할 테지만 실력 있는 전사이니.”
스란의 검은 눈동자가 이에샤를 째렸다. 자존심이 상한 것 같았다. 이에샤는 겸양히 고개를 숙이면서, 속으로는 ‘사실인 걸 어쩌라고.’ 하고 생각했다.
엘테르트는 걱정을 지우지 못했다. 스란과 이오르를 번갈아 보았다. 이오르는―엘테르트만이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이에샤나 스란을 대할 때와는 달리 상냥한 눈빛을 띠었다.
“멘델린 경. 경의 소임이 무엇인지 알리라 믿네.”
“……예. 폐하께서는 본궁으로 돌아가십니까?”
“겨우살이궁으로 갈 셈이다.”
이오르의 낯빛이 우울하게 돌아갔다. 엘테르트는 일어서기도 버거워하는 황후를 떠올리며 고개를 주억였다. “폐하를 배웅합니다.” 하며 절하였다. 이에샤도 기사의 예법대로 황제를 전송했다.
엘테르트가 이에샤를 돌아보았다. 표정이 딱딱했다. 이에샤는 기백에 눌려 움찔했다.
“왜, 왜 그래요?”
“앨저 경. 달리기는 자신 있겠지요.”
“그야 달리기든 뜀뛰기든 뭐든 잘합니다만.”
엘테르트의 입매에 실웃음이 걸렸다. 큰소리를 듣자니 자신은 천재라고 외치던 모습이 기억났다. 오래지 않은 일인데도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그때는 이에샤와 발을 맞추게 되리라곤 상상치 못했는데.
“그럼 앨저 경은 지금부터 내가 꼽는 곳들을 돌며 수상한 자, 수상한 물건이 없는지 살피십시오. 나는 귀족 가운데 렌디드 자작을 본 사람이 있는지 알아보고 다니겠습니다. 이번 일은 우리가 해내야 합니다. 이는 폐하의 안배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게 설명해요. 폐하의 안배라니요?”
엘테르트가 손가락으로 이에샤의 허리를 가리켰다. 칼집에 싸이지 않은 검이 고요히 걸렸다. 속삭임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더는 백화 기사가 무시당하지 않도록.”
이에샤가 깨달은 얼굴을 했다. 엘테르트의 뜻이 헤아려졌다. 이에샤가 딜란의 마법을 막아 낸다면, 백화 기사단의 초석이 될 만한 일이었다. 공을 세우면서 베빈도 구할 수 있었다. 여인을 수호하는 기사로서의 명분과 의무가 맞아떨어졌다.
엘테르트가 짚어 준 장소는 사람이 모이거나, 불길이 번지기 쉽거나, 건물을 이는 주요 기둥이 자리한 곳들이었다. 수소문은 멘델린 소공작이 맡는 편이 좋았다. 귀족 대부분이 이에샤를 꺼릴 터였으므로.
“나는 마법부에 전령부터 보내겠습니다. 마법장을 정문에 대기토록 말해 둘 테니, 경은 무언가 발견하는 즉시 엘먼 공을 찾으십시오.”
“좋아요. 돌아야 할 곳을 다 돌고는 내 임의로 찾아다녀도 되나요?”
“그러십시오. 아! 혹 브링으로 마력을 감지할 수는 없습니까?”
이에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브링은 감각을 곤두세워 줄 뿐이었다. 기척을 잡아내는 데에는 뛰어났으나 물건을 찾지는 못했다. 딜란의 폭발물이 광석이나 금속이더라도 마찬가지였다. 수레국화궁은 금은보화로 치장한 별궁이었으니. 마법에 까막눈인 이에샤가 마력의 느낌을 알 리도 없었다.
“안타깝게도. 하지만 브링을 쓴다면 난 말보다 빨라요!”
“그거 믿음직스럽군요! 어서 가십시오.”
“이따 봐요!”
둘은 갈라져서 뛰기 시작했다. 이에샤는 뒤돌아 샛문으로 들어갔다. 엘테르트는 정문으로 향했다. 에브라힐 중앙의 종탑에서 오후 6시를 알려 왔다.
============================ 작품 후기 ============================
오늘은 설이라 못 올릴 거라 생각했는데 어떻게 쓸 짬이 났네요...
브링어가 탐지할 수 있는 물건은 값진 귀금속, 금속, 희귀한 암석...등등에 한합니다...
선추코 감사합니다!!!
칼같아 님 후원쿠폰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