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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수는 검 한 자루-32화 (32/164)

00032 5. 무도회 속 함정 =========================

사람으로 득시글한 수레국화궁에서 루시온을 찾기는 불가능했다. 이에샤의 감각에 오만 기척이 걸려들었다. 머릿속이 어수선했다. 이에샤는 이를 악물고 달렸다. 스치는 이마다 뜨악한 표정을 지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루시온을 만나야 했다. 시종이라도 붙잡아, 황태자가 어디에 있는지 물어보아야 했다.

‘폐하랑 함께 입장한다고 하셨지. 한자리에 계실지도 몰라.’

황제란 숱한 시중꾼을 달고 다니게 마련이었다. 이에샤는 복도를 누비며 시종과 하인, 하녀가 몰린 곳이 있나 살폈다. 지고지상의 사람을 만나는 데에 두려움은 없었다. 그보다 급한 문제를 떠안았으므로.

엘테르트는 연회장으로 돌아갔다. 마찬가지로 루시온이나 황제를 찾기 위해서였다. 두 사람이 나타나기로 한 시각은 5시였지만, 당겨졌을 수도 있었다. 아버지라도 마주치기를 빌었다. 멘델린 공작은 황실에 큰 영향력을 지녔다. 유사시에 제국 기사단을 통솔할 권한도 갖추었다. 기사단뿐 아니라 마법부에도 전갈을 보내야 했다.

딜란 렌디드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폭발물을 가져왔어요. 수레국화궁 어딘가에 풀어놓을 셈이라 했어요.」

딜란의 가학성은 커져만 갔다고 했다. 지난가을―베빈과 결혼한 무렵부터 계획을 세운 모양이었다. 다음해의 신년맞이 무도회를 불바다로 바꾸어 버리겠다고. 성공하든 성공하지 못하든, 렌디드 자작가는 끝장날 터였다. 안주인인 베빈이 무사할 리 없었다. 베빈은 울면서 “고통이 끝나길 바랐지만 이런 식으로 불명예를 쓰고 싶지는 않았어요.” 하고 고했다. 고향의 부모와 오빠까지 화를 입으리라.

이에샤는 허리에 매단 칼자루를 어루만졌다. 가슴이 잔잔해졌다. 찬찬히 풀어 나가면 괜찮아. 속으로 되뇌었다. 루시온에게 사건을 알리고, 사람들을 도망시키고, 딜란을 찾아내어 벌하면 되는 일이었다. 베빈은 폭발이 밤에 일어날 거라고 말했다.

얼마나 헤맸을까? 2층으로 올라와서야 이에샤는 그리던 광경을 맞닥뜨렸다. 양손을 앞치마 뒤로 감추고 고개 숙인 하녀들. 뻣뻣한 자세로 선 하인들. 제국 기사단 정복을 입은 남자가 여섯 명. 연미복 차림의 남자 둘과 귀부인. 수많은 사람이 어느 문 앞에 줄지었다. 이에샤의 낯빛이 환해졌다.

“실례합니다. 혹시 여기에 황태자 전하가……!”

“누구냐? 이름부터 밝혀라.”

깐깐하게 생긴 시종이 말허리를 잘랐다. 이에샤는 눈살을 찌푸렸다. 제 옷차림을 보고도 누구인지 모를 턱이 없었다. 방안으로 들어가는 일도 만만치 않을 성싶었다. 엘테르트가 연회장을 포기하고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할까? 조바심이 났다. 황족의 수행원들은 이에샤의 이야기를 들어 줄 마음이 없어 보였다.

“백화 기사단장, 앨저 백작 이에샤입니다. 황제 폐하나 황태자 전하께 급하게 아뢸 말씀이,”

“백화 기사단장 따위가 폐하를 알현하겠다고?”

“폐하께서는 영년 축제를 굽어살피고자 홀로 명상 중이시다. 아무도 들이지 말라 명하셨으니 돌아가라.”

이에샤는 거센 분노를 느꼈다. 백화 기사단장은 제국 기사단장과 동등했다. 황제와의 만남을 청할 자격이 되었다. 이에샤의 지위는 업신여김당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기사가 되고 숱한 푸대접을 받았지만, 서둘러야 할 상황에까지 이러하니 어처구니없었다. 딜란의 마법보다 제가 먼저 터질 노릇이었다.

여기에서 다툼을 벌여서는 안 되었다. 지금은 수그리고, 살살 구슬려야 할 때였다.

“급한 일입니다. 제발 폐하를 만나 뵙게 해 주십시오. 이 궁에 있는 사람들 모두 피신해야 합니다.”

“피신? 무슨 얼빠진 소리냐! 황제 폐하께서 망아지 같은 계집의 혓바닥에 연회를 무를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찬물을 뒤집어쓴 듯했다. 화가 북받치니, 도리어 머리가 가라앉았다. 멍하니 방해꾼들을 쳐다보았다. 믿을 수 없었다. 사람들을 도망시켜야 한다고까지 말했다. 예삿일이 아님을 알아채야 마땅했다. 시종 둘은 이에샤의 호소를 장난질로만 받아들였다. 모멸감이 밀려들었다.

‘내가 젊은 여자가 아니라 마흔쯤 먹은 남자 귀족이었다면…….’

가정은 아무리 해 보아도 무의미했다. 남자로 태어났다면 이에샤는 기사단 입단 시험을 으뜸으로 통과했을 테니까.

지쳤다. 해이해지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나자빠지고 싶었다. 더는 용쓰지 말고 쓰러져, 수레국화궁이 불길에 휩싸이면 함께 삼켜지기를 바랐다.

하지만 이에샤에게는 해야 할 일이 남았다.

“내가 아직 저택을 못 샀거든요.”

“뭐라고? 무슨 소리냐?”

“스승님을 잘 모시려면 공을 세워야 해서요.”

앞뒤 따지지 않기로 했다. 딜란 렌디드의 흉계를 막아 낼 수만 있으면 되었다. 일이 터지고 후회하느니, 제 쪽에서 일을 벌리고 훗날 거보라며 승리자의 웃음을 짓는 편이 나았다.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었다. 이 방법을 쓰면 엘테르트 멘델린에게 미움받을 것이다. 처음보다는 사이가 좋아졌는데 안타까웠다.

이에샤가 칼자루를 움켰다. 무릎을 구부렸다. 몸을 낮추고, 당장에라도 검을 휘두를 법한 자세를 취했다. 지켜보던 이들의 얼굴에 경악이 번졌다. 시녀가 외쳤다.

“기사들, 뭐하십니까! 어서 막아……!”

이에샤의 검은 그보다 빨랐다. 칼날이 맹렬한 궤도를 그렸다. 모두가 반사적으로 눈을 감거나, 비명을 질렀다. 하나 검에 베인 사람은 나오지 않았다.

굉음이 울려 퍼졌다. 벽에 붙은 커다란 유리창이 산산조각 났다. 깨진 유리는 들이치지 않고 바깥으로만 떨어져 내렸다. 브링의 압력에 밀려난 덕택이었다.

“어, 어떻게 저런! 말도 안 돼!”

어느 기사가 소리질렀다. 오늘 황제의 경호를 맡은 여섯 명은 근위 기사였지만, 누구도 허공을 베어 유리를 깨뜨리지는 못했다. 그런 일이 가능한 자는 제국 기사단에서도 열 사람―브링어뿐이었다. 어린 계집애가 정점의 경지를 밟았다고? 터무니없었다. 무언가 수를 썼으리라.

이에샤는 공격을 더하지 않았다. 공손하게 무릎을 꿇었을 따름이었다. 모두가 어리벙벙해졌다. 난장판을 만들어 놓더니, 왜 머리를 조아리는가? 이에샤는 심호흡을 했다. 문 너머의 기척에 신경을 기울였다. 황제가 다가오는 중이었다.

끼이익.

장인이 나무겉에 조각칼을 대, 굵은 꽃술부터 얇은 꽃잎까지 수레국화를 양각한 문이 밀려나왔다. 시종과 시녀가 허둥지둥 고개를 숙였다. 세 발자국 뒷걸음질쳤다. 이에샤만이 황제의 발치에 덩그맣게 남았다.

쿵! 지팡이가 바닥을 찍었다. 이에샤의 입안이 바짝 말랐다. 살면서 황제를 만나게 될 줄이야. 긴장으로 어깨가 떨렸다. 제 머리꼭지를 내려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백 송이 가운데 가장 먼저 피어난 꽃이로구나.”

이오르 아르데오노의 목소리는 묵직했다. 듣노라면 어두운 물속으로 가라앉는 듯한 음색이었다. 이에샤는 의아해졌다가, ‘백화 기사단’이라는 이름을 떠올렸다. 이오르 황제는 시와 노래를 사랑한다고 들었다. 그러나 이에샤의 기분은 썩 별로였다. 멀쩡한 사람을 왜 식물에 빗대는가?

못마땅한 내색을 할 수는 없었다. 잠자코 이오르의 말을 기다렸다. 이오르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 난리통을 벌인 까닭은 나를 불러내기 위함이렷다. 앨저 경은 고개를 들라.”

“폐하를 뵙습니다.”

이에샤는 그제야 얼굴을 들며 인사했다.

이오르의 생김새는 루시온과 매우 달랐다. 갈색 눈을 지녔지만 엘로나와도, 라제카와도 닮지 않았다. 표정이 없는 탓인지도 몰랐다. 이목구비 낱낱이 수심이 깃들었다. 우울한 낯빛을 보고 이에샤는 당황했다.

거기다가 이오르는 다리를 절었다. 손잡이에 사자 장식이 달린 지팡이를 눌러 중심을 잡았는데, 몸이 기울었다. 왼다리가 오른쪽보다 짧은 모양이었다. 이에샤는 황제의 다리가 불편하리라고는 상상치 못했다.

이오르가 이에샤의 속내를 읽은 양 말했다.

“존귀한 좌에 앉은 여인의 몸이 좋지 않아 내 시름이 깊네.”

“황후 마마의 용태가 나쁘십니까? 하오나 폐하, 제가 폐하의 시름을 더해 드리게 되었습니다.”

“말하라. 무슨 일인가.”

이에샤는 눈을 결연히 떴다. 황제를 올려다보았다. 이오르는 꽃다운 나이에 형형한 기세를 지닌 이에샤가 제 어린 딸과 동류임을 알아차렸다.

이에샤의 말문이 떨어졌다.

“수레국화궁에 폭발물이 들어왔다는 정보를 들었습니다.”

하인·하녀의 무리에서 숨 집어삼키는 소리가 올랐다. 이에샤는 조마조마하게 이오르의 눈치를 살폈다. 이오르는 반응이 없었다. 웃을 줄은 알까 싶을 만큼 무표정했다.

이오르의 집게손가락이 지팡이 꼭대기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이에샤는 이오르가 고민에 잠겼다는 걸 깨달았다. 놀라웠다. 황제가 자신의 상달을 흘려 넘기지 않다니! 돌이켜보면 이에샤에게 기사 작위를 내린 쪽도 루시온이 아니라 이오르였었다.

“황태자가 말하기를.”

이오르가 나직이 이야기했다.

“앨저 경이 참으로 탐나는 인재라 하더군. 특히나 눈치가 날래고 과감하다면서.”

“그러셨습니까? 영광으로 받잡겠습니다.”

그 헤실헤실한 양반이? 이에샤는 야멸차게 생각했다. 겉으로는 엄숙하게 감사를 표하면서. 이오르는 아들이 욕먹는 줄도 모르고 계속하였다.

“이벨리오노의 사람 보는 눈은 정확하지. 허튼소리를 하는 자는 아니라고 믿겠다. 정보의 출처를 이르라.”

“믿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보를 준 사람은 사람은 렌…….”

“폐하!”

이에샤의 말은 끝맺지 못했다. 가로막듯 끼어든 사람이 있었다. 이오르의 눈빛이 바뀌었다. 드러날락 말락 했지만, 부드러워졌다. 허둥지둥 나선 엘테르트가 이에샤 옆에 섰다. 약식 절을 보였다.

“어찌된 일인지 지켜본다는 것이 폐하와 앨저 경의 얘기를 엿들은 셈이 되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앨저 경이 말한 바의 진의는 제가 보장하겠습니다. 지금은 연회장에서 사람을 빼내는 일이 먼저입니다. 폭발물을 두기가 어려운 만큼, 두었을 때 가장 큰 해를 입힐 수도 있는 곳이니까요.”

엘테르트는 숨쉴 틈조차 없이 늘어놓았다. 이에샤로서는 까닭을 알 수 없었다. 이오르가 엘테르트를 물끄러미 보았다.

“그런가. 멘델린 경은 그자를 감싸 주고 싶은 모양이군.”

“듣는 귀가 많습니다. 그의 신분이 알려졌다가 사람에 시달릴까 염려됩니다.”

엘테르트의 말대로였다. 이곳에서 베빈의 이름을 꺼내면, 나중에 베빈이 무슨 고초를 겪을지 몰랐다. 이에샤는 어째서 엘테르트가 제 말을 끊었는지 이해했다.

이오르는 캐물으려 하지 않았다. 자유로운 한쪽 팔을 들어올렸다.

“대연회장의 귀족을 우선 대피시키고 종들도 빠짐없이 버들궁으로 인도하라. 기사는 한 명씩 각 기사단장에게 사태를 알리고 교통을 통제토록 하라.”

시종 두 사람과 시녀는 황제의 보좌관답게 군말하지 않고 움직였다. 기사들도 복도를 달려갔다. 이오르가 마지막으로 아랫것들을 항하며 일렀다.

“본궁의 자리로 돌아가 대기하라. 내 호위는 앨저 경에게 일임하겠다.”

============================ 작품 후기 ============================

지금까지 이에샤가 구르기만 한 거 같네요...앞으로도 많이 구를 텐데...

이번 챕터에서는 이에샤도 엘테르트도 활약시키고 싶습니다...

엘테르트가 베빈의 말을 단번에 믿어주는 연유는 차차 풀립니다.

설에는 다닐 곳이 많아서 쉽니다. 비축분이 없어서...

신경을 안 쓰고 살아서 몰랐는데ㅠㅠ후원쿠폰 주신 분이 계시더라구요... lionlinkin 님 후쿠 감사합니다! 인사가 늦어 죄송해요!

선추코 모두모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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