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31 5. 무도회 속 함정 =========================
“예?”
엘테르트는 말을 잊었다. 어울리지 않게 멍청한 낯빛을 지었다. 무슨 소리가 지나갔는가? 고민에 빠졌다. 이에샤가 초조히 앞머리를 쓸어넘겼다. 기름을 바른 회색 머리카락에서 화장품 냄새가 풍겼다. 순간적으로 여인의 느낌이 물씬했다. 엘테르트는 손으로 입가를 움킨 채 고개를 홱 돌려 버렸다.
이에샤는 제가 실수했음을 깨달았다. 사이 나쁜 여자로부터 밀어 비슷한 것을 들었으니, 싫을 만도 했다. 손사래를 쳤다.
“말이 헛나왔어요. 부탁하고픈 일이 있어서 경을 찾아다녔다는 뜻이에요.”
“아, 그, 그렇습니까?”
“뭘 멍하게 있어요? 급한 일이니까 저 좀 따라와요. 빨리!”
엘테르트는 망부석처럼 섰다. 얼이 빠져서는 이에샤를 보았다. 이에샤는 갑갑해졌다. 한시가 급했다. 움직이지 않는 엘테르트가 짜증스러웠다. 붙든 소매를 잡아당겼다.
“가요!”
“자, 잠깐만, 앨저 경!”
엘테르트는 질질 끌려갔다. 이에샤의 손힘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싸움을 싫어한다 하여도 운동량은 많은 편인데―모든 궁을 오가며 일하는 데에는 체력이 필요했다―꼼짝조차 못하니 당황스러웠다. 브링을 끌어올렸으니 당연했지만, 엘테르트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분위기가 술렁거렸다. 모두가 백화 기사단장과 멘델린 소공작을 지켜보았다. 기이한 모양새가 펼쳐졌다. 남자를 잡아끄는 여자와 얼굴을 붉히고 따르는 남자라니. 엘테르트는 사람들의 눈길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에샤의 뒤통수만 살폈다. 가지런히 빗어 넘긴 머리카락이 여느 때보다 어른스러웠다.
쯧. 이에샤는 혀를 찼다. 옷감을 쥐고 가려니 불편했다. 소매를 놓아 주었다가, 곧바로 엘테르트의 손을 잡아챘다. 엘테르트가 움찔거렸다.
발코니의 커튼을 젖혔다. 두 사람의 모습이 바깥으로 사라졌다. 연회장에 소란이 일었다. 이제 관심은 친한 귀족들과 담소를 나누던 밀레나에게로 옮겨갔다. 어느 백작가의 딸이 조심스레 말문을 떼었다.
“밀레. 멘델린 남작님은 네 파트너잖아.”
“응. 그래서 아까 같이 들어왔잖니?”
“근데 왜 저 여자가…….”
“언니가 엘테르트 님하고 할 얘기가 있나 보지. 나도 지금 너희와 있잖아. 엘테르트 님이 아니라.”
밀레나의 대꾸는 잔잔했다. 무슨 일이 있었냐는 양, 아무렇지도 않은 태도였다. 노여워 씩씩대는 알디온 부부와는 딴판이었다. 밀레나가 부채를 들었다. 입가를 가렸다. 그 동작이 점잖으면서도 홀릴 만큼 아리따웠다. 선자지 뒤에서 고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큰일이 아니라면 좋으련만.”
이에샤를 걱정하는 말에, 여기저기에서 탄성이 올랐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부모와 천방지축인 언니 틈에서 어찌 저리도 바르게 자랐는지!
밀레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우리 자매는 엘테르트 님과 어떤 관계도 아닌걸. 언니가 엘테르트 님께 말 붙이지 못할 이유는 없어.”
저하고 이에샤를 묶어, 엘테르트와 선을 그어 버렸다. 이에샤가 엘테르트의 손을 잡고 나갔더라도 둘이 특별한 사이는 아니다―그러한 뜻을 담아서. 기특해하는 시선이 쏟아졌다. 밀레나 알디온은 파트너를 거느리고 와서도, 약혼조차 않은 처녀가 지켜야 할 몸가짐을 완벽하게 갖추었다.
“금방 끝날 거야.”
마지막으로 못박았다. 엘테르트는 제게로 돌아올 터라고. 밀레나는 눈매를 반달꼴로 휘며, 입술을 깨물었다.
이에샤와 엘테르트는 달음박질쳤다. 지금이 오후 몇 시인지도 헷갈렸다. 해는 높았으나, 5시를 넘기면 서쪽으로 떨어질 터였다. 이에샤는 호흡조차 흩뜨리지 않고 렌디드 부부에 관해서 늘어놓았다. 엘테르트는 머릿속으로 정보를 정리했다.
그늘진 아치를 지났다. 미로원에 다다랐다. 엘테르트가 헉헉대며 숨을 골랐다. 심장이 튀어나올 듯이 뛰었다. 이에샤가 딱하다는 얼굴로 “남자가 그거 뛰고 지쳐요?” 하고 종알거렸다. 엘테르트는 억울해졌다. 연회장에서 여기까지, 제국 기사도 한 번씩 쉬어 갈 거리였다.
“후우, 하아! 이제 여기서 무슨 수로 렌디드 부인을 찾습니까?”
“브링을 쓰면 돼요.”
“……브링에 사람 찾는 능력도 딸렸습니까?”
이에샤는 고개만 끄떡했다. 앞쪽을 둘러보았다. 멀리서 작은 기척이 느껴졌다. 오들오들 떠는 베빈의 모습이 그려졌다. 서둘러요. 엘테르트를 다그치며, 브링으로 오감을 갈았다.
“베빈은 정원 한복판에 있는 거 같아요. 브링은 육신의 힘을 한계까지 끌어올리는 힘이에요.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요.”
“나는 무기의 절삭력을 높이는 일종의 공격술로 들었습니다.”
“그것도 틀리지는 않네요. 저랑 제 스승님은 몸을 강화하는 데 더 많이 써요. 다른 브링어는 만나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고.”
엘테르트는 ‘스승도 브링어로군.’ 하고 떠올렸다. 어고트 프리슬리가 무관하다는 사실을 알자, 이에샤를 가르친 자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루시온은 아무런 말도 해 주지 않았다.
제국인은 아닐 것이다. 엘테르트는 체사로가 이에샤를 천거했다는 점으로, 이에샤의 스승이 어디 출신인지까지 짐작한 채였다. 체사로는 십 대에 제국 기사가 되었다. 외국에 나간 경험이라고는 벨체터 파병뿐일 터였다.
“중앙쯤인 건 분명한데, 여기 미로를 뒤지려면 또 골치 아프겠네요. 갈라져서 찾을까요?”
“내가 압니다.”
“네?”
이에샤가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엘테르트는 흐트러진 매무시를 고쳤다. 평소의 침착함을 되찾았다. 이에샤에게 닿지 않도록 몸을 비끼며, 앞장으로 나섰다. 이에샤는 울컥했다. 스치기도 싫다는 거냐.
“이 미로원의 구조라면 전부 외웠습니다. 중심부까지 안내하겠습니다.”
“미로가 의외로 짧은가 봐요? 어림짐작으로는 규모가 꽤 될 줄 알았는데.”
“수레국화궁의 미로원은 석곡궁 정원을 두 개 합친 것보다 넓습니다.”
엘테르트의 장담은 터무니없었다. 그만큼 넓은 미로를 외운다고? 엘테르트는 이에샤의 놀라움에도 아랑곳 않고 덧붙였다.
“공주님께서도 외우신 길입니다. 별거 아니지요.”
“아, 그러세요.”
이에샤는 딴죽을 참기로 했다. 엘테르트와 라제카가 똑똑하다는 사실쯤이야 알았다. 제가 몇 번씩 읽어야 이해하는 공문을 슥 보고 이런 뜻입니다, 일러 주는 사람들이었다. 셈이 필요한 일도 엘테르트가 도맡아 주었다. 타고난 머리가 다른 걸 어찌하겠는가.
“좋아요, 부탁드려요.”
“예. 그리고 앨저 경.”
이에샤는 이상하다고 여겼다. 엘테르트의 희고 반듯한 뺨이 달아올랐다. 해가 저물 때까지는 시간이 남았건만.
“앞으로 오늘처럼 마구 잡아끌고 하는 건 없었으면 합니다.”
“멘델린 경이 재깍재깍 움직였으면 안 그랬죠. 싫으면 빨리 좀 따라오세요.”
“안 됩니다. 무슨 연유가 있더라도 그러지 마십시오.”
짜증이 치밀었다. 무엇이 문제라고, 엘테르트가 다짐을 받으려 드는지 알 수 없었다. 베빈부터 찾고 싶었다. 결국은 “알았어요. 조심하면 되잖아요.” 하고 투덜거렸다.
“이번 일은 제가 어떻게든 수습할 테니 경은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에샤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영문을 모를 소리였다. 자신은 실수한 적이 없었다. 수습할 만한 일은 저지르지 않았다.
엘테르트는 한숨지었다. 이에샤는 알아먹은 것 같지가 않았다. 내일이면 앨저 백작이 동생의 남자를 앗아갔다느니, 멘델린을 유혹했다느니 하는 추문이 파다해질 것이다. 골이 쑤셨다.
길을 외웠다는 큰소리는 거짓이 아니었다. 엘테르트는 성큼성큼 모퉁이를 돌아 나갔다. 오래지 않아, 미로 한가운데에 다다랐다. 베빈은 단번에 눈에 띄었다. 분수대의 수반 아래에 여자 하나가 웅크렸다.
이에샤는 안타까운 심정이 되었다. 베빈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베빈이 흠칫했다. 무릎에 파묻었던 얼굴을 들었다. 눈물과 땀으로 화장이 망가져 버렸다.
“혼자 둬서 미안해요. 제가 쓸만한 사람을 데려왔으니 울지 말아요.”
“애, 앨저, 앨저 경.”
“일어날 수 있겠어요?”
베빈은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목소리를 뽑아 보아야 헐떡거리는 숨결에 삼켜졌다. 비척비척 몸을 일으켰다. 꼴이 말이 아니었다. 구겨지고 흙이 묻은 드레스가 애처로웠다. 이에샤는 베빈의 어깨를 토닥이며 부축해 주었다.
베빈이 가까스로 목을 세웠다. 엘테르트 쪽을 돌아보았다. 엘테르트는 ‘쓸만한 사람’이라는 평가에 인상을 쓴 채였다.
“엘테르트 멘델린 남작입니다. 아시죠?”
“멘, 흑, 멘델린? 어, 어, 어떻게?”
“백화 기사단 일을 도와주고 계세요. 저랑 멘델린 경이 베빈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 거예요.”
베빈이 코를 훌쩍였다. 상상치 못한 거물이 와서 놀란 모양이었다. 엘테르트는 다가가서 인사할까 고민하다가, 그만두기로 했다. 이에샤와 베빈으로부터 물러섰다. 이에샤가 의아한 낯빛을 띠었다.
“어디 가요? 가까이 와야 할 거 아니에요.”
“렌디드 부인하고는 경이 대화를 나누고 저에게 전해 주십시오. 그녀는 지금 겁에 질린 상태입니다. 앨저 경만은 신임하는 모양이니, 제가 끼어들어서 자극하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
“아…….”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러한 일까지는 생각지 못했다. 렌디드 자작을 무너뜨려야 한다는 마음만 급했다. 베빈의 처지에서 헤아리고 움직였어야 했는데. 이에샤는 엘테르트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베빈. 우선 물어볼게요. 렌디드 자작이 당신 말고 다른 사람한테도 폭력을 휘두르나요?”
“하녀를 매질하는 일이 잦기는 해도, 저한테처럼 잔인한 짓은 없었어요. 집 밖에서는 좋은 사람인 척 연기하고요.”
“뭐 그딴 개자식이, 아, 죄송합니다. 생각보다 교활하네요. 경비대는 도움이 안 됐을 거 같고, 사원은요?”
“사원도 마찬가지예요. 딜란은 헌금을 많이 하거든요.”
눈살이 찌푸려졌다. 작은 동물을 죽이고, 아내의 몸에 불을 지르는 놈이 헌금이라니. 욕지기 나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머릿속을 쥐어짰다. 무슨 질문을 해야 할까? 떠오르는 바가 없었다. 엘테르트를 곁눈질했다. 엘테르트는 팔짱을 끼고 지켜보았다. 이에샤가 입다물고 고민에 잠기자, 한숨을 내쉬었다. 매서운 눈총에도 아랑곳없이 고개까지 가로저었다.
‘브링어라니 제국 기사였다면 제 몫을 넘치게 해내는 셈이겠지만.’
백화 기사로서의 실무를 가르쳐야 할 성싶었다. 경비대의 수사관을 교사로 데려와야겠군. 엘테르트는 계획을 짜며, 입을 열었다. 부드러우면서도 결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렌디드 부인.”
베빈의 몸이 굳어졌다. 이에샤가 엘테르트에게 ‘성으로 부르지 말아요.’ 하는 눈짓을 보냈다. 그처럼 자질구레한 뜻이 전달될 리 없었지만 말이다.
엘테르트는 베빈이 당황을 추스르도록 기다려 주었다. 한참이 지나고서야 물어보았다.
“오늘,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겁니까?”
“……!”
“렌디드 자작이 무언가 일을 치려고 하는 게 아닙니까?”
이에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엘테르트의 물음은 급작스러웠다. 염두에 둔 적조차 없는 이야기였다. 불현듯 베빈의 편지 한 구절이 기억났다.
「그 무도회에서 저는…… 말벗 삼을 부인 한 사람 없답니다.」
줄임표의 첫 번째 점이 유달리 진했다. 가슴속에 든 말을 글로 옮길 수가 없어, 펜을 눌렀다가 그만둔 모양새였다. 베빈이 딸꾹질을 했다.
“베빈, 그런 거예요? 저이의 말이 맞나요?”
반들반들 젖은 눈시울에 새로이 물기가 차올랐다. 마침내 베빈의 입에서 큰 소리로 울음이 터져 나왔다.
이에샤는 분에 휩싸였다. 엘테르트 멘델린은 간추린 설명만 듣고 저보다 훨씬 많은 일을 알아차렸다. 얼간이가 된 듯했다. 이래서야 누구를 도울 수도,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수도 없지 않겠는가. 이에샤 또한 울고 싶어졌다.
============================ 작품 후기 ============================
이에샤는 머리가 좋은 편입니다(배운 게 적어서 그렇지)
에르디나 라제카가 정상이 아니지요......
선추코 감사합니다!!!!!
+) 오후 2시 20분, 어색한 문장을 수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