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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수는 검 한 자루-27화 (27/164)

00027 4. 기사와 귀부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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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피르력 753년 1월 25일. 셈브리온의 눈물겨운 만류는 먹혀들지 않았다.

아침때가 지났다. 이에샤는 거울 앞에 섰다. 뭇 귀부인은 꼭두새벽부터 몸치레에 들어갔을 테지만, 이에샤로서는 출근 준비와 다름없었다.

여러 번 무두질한 다음 희게 물들인 가죽 바지를 입었다. 벨트를 찼다. 버클은 금으로 만들어졌다. 자보가 달린 블라우스에 광택이 흘렀다. 마지막으로 코트를 펄럭, 등뒤로 휘돌려 걸쳤다.

참빗을 들었다.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빗어 넘겼다. 향유를 묻혀 고정했다. 저잣거리에서 산 입술 연지도 발랐다. 화장지를 살짝 물었다가 빼냈다. 흐린 분홍색이었던 입술이 발긋해졌다.

셈브리온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예쁘네.”

“잘 어울리지?”

“너무 어울려서 눈물이 다 나려고 해, 이-샤.”

생각을 거듭해 보아도, 기사단 정복을 입고 무도회에 나간다니 허황스러웠다. 그렇더라도 이에샤는 아름다웠다. 원래부터 삼삼히 생긴 얼굴이었다. 마음먹고 꾸미니 남자 두엇은 홀릴 성싶었다. 삶의 목표가 ‘이에샤 귀부인 만들기’인 셈브리온에게는 반길 만한 일이었다.

‘그러니까 저 바지만 아니었다면!’

셈브리온은 바지 차림의 여자를 자주 보았다. 벨체터 여자는 치마를 입지 않았으므로. 왜냐?

편하게 머무를 장소가 없었기 때문이다. 언제든 전란에서 도망치려면 치렁치렁한 옷은 금물이었다. 민심이 사나운 나라는 모두 비슷할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제국이었다. 브링어 열넷을 보유했고―이에샤를 더하면 열다섯이었다―현자 칭호를 받은 마법사가 다섯에, 수학의 전당이라는 아카데미까지 자리했다. 땅에는 자원이 넘쳐흘렀다. 주변국으로부터 받는 공물도 산더미 같았다. ‘무너지지 않는 하늘탑’ 델페레타에서는 여인이 치장을 포기할 필요가 없었다.

백화 기사단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다. 지금으로서는 여자가 바지를 입는다면 곧 허드레꾼이라는 뜻이었다. 이에샤를 보는 눈길이 고울 리가 없었다.

“나 다녀올게, 세비!”

“……그으래애…….”

이에샤가 생글거리며 팔을 흔들었다. 셈브리온은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오래간만입니다, 후작. 잘 지냈습니까? 여식의 미모가 브로칸까지 소문이 났소이다.”

“과찬의 말씀을. 폭설 때문에 수도까지 오기가 힘들었겠군요.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신년맞이 무도회가 열리는 수레국화궁 대연회장은 눈이 돌아가게끔 화려했다. 샹들리에 다섯 개가 초승달 꼴로 매달렸다. 수백의 초에 불이 켜졌다. 마법사가 만들어 낸 불꽃은 흰색에서 연노랑을 거쳐 주황이 되었다가 흰색으로, 물결치듯이 타올랐다. 벽에는 태피스트리 여러 장이 걸렸다. 그 사이사이 난 유리창마다 연회장의 풍경이 어룽졌다.

오스터는 기분이 좋았다. 브로칸(제국 북부의 통칭)에서 올라온 펠트런 후작과 인사를 나누었다. 펠트런은 브로칸의 내로라하는 거부였다. 셀더리와 친척이기도 했다. 알디온과 펠트런은 여러 사업을 함께했는데, 펠트런이 밀레나를 몹시 귀여워했다. 입버릇처럼 “내게 밀레나 양과 짝지어 줄 아들이 없어서 안타깝군!” 하고 되뇔 만큼.

“……한데, 부인과 따님은 어디에 있습니까? 후작과 같이 오지 않았습니까?”

“셀더리는 다른 레이디와 인사 중입니다. 밀레는,”

오스터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삼켰다. 밀레나가 나타나면 펠트런은 놀라 자빠질 것이다. 뿐만 아니었다. 연회장의 귀족 모두가 놀랄 터라고, 오스터는 장담했다.

엘테르트 멘델린은 시건방진 애송이였다. 알디온이 가진 광산의 채굴권을 요구하면서, 경멸 서린 눈초리로 오스터를 보았다. 아내를 저버린 무뢰한이라고 탓하는 듯했다. 셀더리를 만나기 전에 아무하고나 결혼해 버린 게 실수였다. 에이릴리 앨저―그 청승맞은 계집만 없었어도 엘테르트가 저를 홀대하지는 않았을 텐데.

하지만 깔끔을 떨던 멘델린 소공작도 별수 없는 남자였다. 미인의 손길을 뿌리치지 못했다. 밀레나가 엘테르트에게 파트너가 되어 주십사 부탁하겠다고 했을 때, 오스터와 셀더리는 기겁했었다. 여자 쪽에서 나서면 모양새가 삿되지 않은가. 그러나 밀레나는 훌륭하게 엘테르트를 손에 넣고 돌아왔다.

오스터는 딸이 자랑스러워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밀레는 자기 파트너와 함께 오기로 해서 말이지요.”

“호오? 어떤 용감한 구애자가 밀레나 양의 파트너가 되는 영광을 누린답니까?”

“하하!”

대답은 얼버무렸다. 엘테르트가 ‘구애자’가 아님은 덮어 두어야 했다. 어차피 밀레나에게 홀딱 반했을 테니.

밀레나는 지난봄에 데뷔해, 신년맞이 무도회가 처음이었다―그동안은 황자와 황녀의 파티로 갔다. 오늘 대연회장에서 가장 아름다운 아가씨일 것이다. 오스터는 은쟁반을 들고 지나다니는 하인에게 손짓했다. 샴페인 잔을 집었다. 기쁜 마음으로 들이켰다.

타타탕!

급작스럽게 축포가 터졌다. 사레가 들 뻔했다.

황족이나 대귀족이 행차한 모양이었다. 드넓은 홀이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숱한 눈길이 문가로 쏟아졌다. 마법으로 목청을 돋운 시종이 소리질렀다.

“가장 멀리 나는 독수리, 멘델린 공작 각하께서 드십니다!”

열린 문으로 두 사람이 들어왔다.

애버토스 멘델린은 풍채가 당당했다. 중키인데도 등허리가 꼿꼿했고, 어깨가 벌어졌다. 장식용 지팡이조차 들지 않고 맨몸이었다. 옹골찬 인상이 풍겨 나왔다. 백발로 세기 시작한 은색 머리카락에 불그림자가 드리웠다. 우아하게 꾸민 공작 부인―엘로나가 애버토스의 팔짱을 낀 채였다.

많은 귀족이 애버토스에게 다가가고 싶어 하면서도, 다가가지 못했다. 멘델린 공작이 신년맞이 무도회에 나오기는 3년 만이었다. 엘테르트가 가니 되었다며 황제의 부름도 마다해 왔다. 무슨 바람이 분 걸까?

애버토스가 면도해서 매끈한 턱을 어루만졌다.

“신경쓰지 말고들 즐기시게. 오늘은 진귀한 구경이 있어 왔을 뿐이니.”

나지막하면서도 또렷한 말소리가 울려 퍼졌다. 오스터는 거들먹거리며 공작에게 인사하고픈 충동을 억눌렀다. 진귀한 구경! 소공작과 알디온 후작 영애의 꾀꼬리 같은 모습을 뜻하는 것이리라. 틀림없었다.

엘로나가 애버토스의 팔에 몸을 기댔다. 애버토스는 구두를 신은 아내가 불편하지 않도록 받쳐 주었다.

“여보, 정말로 에르디한테는 관심 없어요?”

“물론. 다 큰 아들의 무도회 파트너에게까지 참견할 만큼 정력적인 사람은 못 돼요. 엘테르트가 어떤 여자를 만나든 스스로 책임질 일입니다.”

“매몰차요. 나는 아직도 품 안의 자식 같은데.”

엘로나는 한숨마저 달콤히 쉬었다. 제국을 뒤흔든 미인다웠다. 애버토스는 엘로나의 투정에도 아랑곳 않았다. 요람에 누웠을 적부터 지켜본 아내였다. 하늘나라의 사자 같은 겉가죽에 홀리기에는 인간적인 면모를 너무 많이 알았다. 애버토스에게 엘로나는 사랑스러운 여인이지, 교태로운 여인은 아니었다.

“부인도 녀석을 너무 싸고돌지 마십시오. 우리 아들은 어설퍼 보여도 열 사람 몫을 해냅니다.”

“며느릿감도 못 데려오는 철부지인걸요. 당신은 열셋에 나한테 사랑을 속삭였어요. 나는 열 살이었죠.”

“……그 얘기는 그만둡시다.”

엘로나가 쿡쿡거렸다. 푸른 사자 성을 꾸려 나가는 안주인도 남편 앞에서만은 개구쟁이가 되곤 했다.

“오랜만에 폐하를 뵙겠네요. 에브라힐을 떠나고 너무 못 왔어요.”

“부인이 원한다면 언제든지 방문해도 좋은데요. 어찌 신하인 제가 누이인 부인보다 폐하를 자주 뵙습니까.”

“시집간 황녀가 궁전에 드나들면 남들이 흉봐요. 부부 사이 문제 있는 거 아니냐고.”

대연회장을 둘러보았다. 1년에 세 번도 열리지 않는 수레국화궁. 어려서는 퍽 신비롭게 느껴졌는데, 이제 와 보니 요란할 따름이었다.

건물이 바뀔 리 없었다. 바뀐 쪽은 자신이었다. 시간은 멈추지 않는 법으로, 공주는 멘델린 공작 부인이 되었다. 가까운 미래에 멘델린 공작의 대도 바뀔 터였다. 세월이 무상했다. 엘로나는 ‘변화’를 눈에 담고 싶다며 무도회에 가겠노라 말한 남편을 이해했다.

“정말로 그녀가 올까요? 전하께 오지 않겠다고 아뢰었다잖아요. 에르디도 안 올 거라고 하던데.”

“오기를 바랍니다. 이런 자리를 그냥 보내서야 새로운 기사단의 앞날도 뻔하니.”

“여자한테 많은 걸 요구하지 말아요. 남자랑은 하는 공부부터가 다르답니다.”

애버토스는 대답을 삼갔다. 엘로나가 말하는 바도 알아들었으나, 애버토스의 생각은 달랐다. 이에샤 앨저는 남성의 영역으로 비집고 들어온 여자였다. 귀부인으로 받들기보다 기사로 마주해야 마땅하리라.

백화 기사란, 도움에 목마른 이들을 위해 마련된 자리였다. 머리를 비우고 검만 휘둘러서는 안 됐다. 하나뿐인 레이디를 만들 필요도 없었다. 기사라는 이름이 어울리지 않는지도 몰랐다. 제국 기사와는 궤를 달리했으니.

아무려면 어떠한가? 새로운 기사도를 세우면 그만이다. 자신을 알려야 한다. 어려운 자가 제 발로 찾아올 수 있도록!

델페레타의 영광을 예견하는 독수리는 이에샤가 나아가야 할 방향도 정확하게 짚었다.

“저는 여기사에게 기대가 큽니다. 그건 부인 때문이에요.”

“나 때문이라고요?”

“딸은 없지만 사랑하는 아내가 있는데, 여인을 위한 변화에 반대할 까닭이 없잖습니까.”

“하오나…….”

엘로나가 무어라 대꾸하려는 참이었다.

누군가가 대연회장으로 들어왔다. 문 가까이에서 숨 집어삼키는 소리들이 올랐다. 호수에 돌을 던진 양, 고요가 퍼져 나갔다. 시끌벅적하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멘델린 부부도 뒤쪽을 돌아보았다.

파티 드레스에는 흰색을 쓰지 않았다. 어디에서는 튀고, 어디에서는 눌리는 빛깔인 탓이었다. 유채색―나이에 따라 채도의 차이는 있어도―옷감을 고르게 마련이었다. 연미복도 군청이나 고동, 잿빛이 많았다. 무도회에서 흰색은 테이블보가 아니면 보기 어려운 것이었다. 상아색도 다를 바 없었다.

백화 기사단 코트 가슴께에 금실로 수놓인 꽃문양이 반짝거렸다. 장내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베빈은 어디 있지?’

이에샤는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사람들 속에서 베빈을 찾기는 힘들었다. 괜히 왔나? 후회가 피어올랐다. 아까부터 따끔따끔히 꽂히는 눈총도 거슬렸다.

그때, 인파가 반으로 갈라졌다. 길이 트였다. 이에샤는 어리둥절해서 그 끝을 바라보았다.

은발의 중년인과 부인인 듯한 여자가 걸어왔다. 여자의 얼굴이 묘하게 익숙했다. 생각보다 빠르게 입이 움직였다.

“멘델린?”

엘테르트와 빼닮은 얼굴이 고운 미간을 찌푸렸다.

============================ 작품 후기 ============================

시부모님 등장

+김칫국을 사발로 마시는 친부...

선추코 감사합니다!!!!!

+) 13시, 어색한 문장을 몇 개 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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