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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수는 검 한 자루-26화 (26/164)

00026 4. 기사와 귀부인 =========================

입꼬리와 볼살을 끌어올렸다. 애교 담뿍한 웃음이 이루어졌다.

엘테르트는 밀레나의 낯꽃을 보며, 속수무책으로 이에샤를 떠올렸다. 피가 반뿐이 섞이지 않았다 해도 딴판인 자매였다. 이에샤는 어진 귀부인이 될 마음은 조금도 없어 보였다. 귀족의 딸이라면 걸음마할 적부터 배우는 ‘남자의 낙이 되는 방법’을 모르는 듯싶었다.

몸가짐이 사내 같은 것도 아니었다. 어느 날은 찾아갔더니, 하녀와 마주앉아 바느질을 했었다. 무얼 만드느냐 묻자 시더에게 덩굴장미 자수를 가르친다고 하였다―다섯 살에 배웠다면서. 그러한 일을 싫어하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복잡한 스티치는 못 해요. 꽃꽂이나 피아노도 젬병이고. 쑥스러운 듯이 말했었다. 이에샤에게 여자의 교양이란 검술만큼 사랑하지는 않아도 심심풀이는 되는 것이었다.

‘또, 또.’

엘테르트는 한 손으로 얼굴을 부여잡았다. 무엇을 보아도 생각이 ‘이에샤 앨저’로 미쳤다. 브링어라는 사실이 충격이기는 했다. 덮어놓고 이에샤를 꺼리던 까닭을 알자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첫 만남을 돌이켜보았다. 오스터 알디온의 서재에서였다. 여름이 무르녹았고, 창문을 열어 두었었다. 문을 쾅쾅대더니 마구잡이로 밀고 들어온 바지 차림의 여인. 곧바로 드는 느낌이 어고트를 닮아서―생각해 보면 제국 기사단장들과도 같았다―짜증이 났었다.

마구간지기인 줄 알았다느니 했지. 엘테르트는 제 망발이 떠올라 죽고 싶어졌다.

“……엘테르트 님?”

“아, 예. 예?”

“저기, 쉬고 계시는데 제가 방해가 되었나 봐요. 불편해 보이셔요.”

밀레나가 울상을 띤 채 올려다보았다. 새파란 눈에 물기가 어룽졌다. 엘테르트는 자꾸만 이에샤에게로 달려가는 의식을 속으로 욕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제가 잠시 딴생각을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영애.”

“언니 얘기를 꺼내서 언짢으셨나요?”

“예?”

뜬금없는 물음이 날아들었다. 어리둥절하여 되물었다.

밀레나가 부채를 올렸다. 얼굴을 감추었다. 깃털 장식이 하느작거리며 곱다란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수줍으면서도 매혹적인 자태였다. 엘테르트는 호사가들이 밀레나를 두고 소싯적의 엘로나 같다고 떠들던 것을 기억했다. 틀리지 않은 소리였다.

“엘테르트 님과 언니는 서로 인상이 좋지 않았잖아요. 혹여 제가 언니 걱정에 눈이 멀어 불쾌한 말씀을 드린 게 아닌지.”

“아닙니다. 앨저 경과의 문제는 정리되었습니다. 요즘은 부딪치는 일도 줄었으니 영애가 괘념할 것은 없습니다.”

“그, 렇군요. 정말 다행이에요. 덕분에 한시름 놓았습니다.”

밀레나는 옥깨문 입술을 가려서 다행이라고 여겼다.

이에샤를 걱정했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저택 뒷마당에 틀어박혀 지낸 이복언니가 황궁에서 실수하지는 않을까, 망신당하지나 않을까 애끓여 왔다. 멘델린 소공작이 백화 기사단장을 돕는다 전해 듣고 얼마나 안도했던가? 엘테르트라면 믿을 수 있었다. 이에샤를 잘 보살펴 줄 터라고.

……가슴 한구석이 뜨끔거렸다. 숨쉬기가 답답하게 느껴졌다. 이에샤가 안녕하기를 바라면서도, 엘테르트와 함께한다고 생각하면 마음을 추스르기 힘들었다. “아악!” 하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밀레나 알디온은 방정맞은 짓을 할 아가씨가 아니었다. 참고 참고 참았다.

참을 수가 없었다.

“죄송합니다. 사실은, 엘테르트 님.”

밀레나는 슬픈 기색을 지우지 않았다. 눈을 꽉 감았다가 떴다. 눈동자 전체가 젖어 들었다. 밀레나의 이러한 표정에 사교계의 어떤 남자도 태연하지 못했다.

엘테르트는 굴러 떨어질 것만 같은 눈망울을 의아히 보았다. 밀레나가 사과해 오는 까닭을 알 수가 없었다.

“언니 때문만이 아니라 제가 부탁드리고 싶은 일도 있었어요.”

“무엇입니까? 부친하고는 관계없는 알디온 영애의 개인적인 부탁입니까?”

“네. 그래요.”

밀레나는 침을 모아 삼켰다. 초조감에 입안이 말랐다. 아무렇지도 않은 체했지만, 휴게실 문을 두드릴 때까지 숱하게 망설였다. “후우!” 하고 숨을 몰아쉬었다.

“나흘 뒤 무도회에 저랑 함께 가 주지 않으시겠어요?”

엘테르트는 얼떨떨해졌다. 밀레나의 인상을 고쳐야 할 듯싶었다. 그저 소극적인 아가씨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 * *

「친애하는 앨저 경.

이 편지에 얼마나 많은 저의 용기가 담겼는지 경께서 짐작할 수 있으실까요?

만남은 두 번뿐이었지만, 베빈 렌디드는 앨저 경을 친우로 생각한답니다. 앨저 경이 불쾌하지 않으셨다면 좋겠어요. 남부의 작은 도시에서 온 제게는 수도가 너무나 외롭습니다.

처음 앨저 경이 제게로 다가오셨을 때는 무서웠어요. 귀부인이 어찌 검을 차고 기사가 될까, 제 머리로는 상상할 수가 없었거든요. 하지만 경은 친절하고 근사한 기사님이셨습니다. 그날 저는 누군가의 악의에 두려웠지만 동시에 경이 보인 호의에 위안을 얻었습니다.

앨저 경.

앨저 경. 당신을 만나고 싶습니다. 제가 수도에서 의지할 사람이라고는 당신뿐입니다. 이 편지가 시간에 맞게 도착하면 좋겠습니다. 앨저 경, 경께 저를 향한 일말의 동정심이 있다면 제 부탁을 들어주세요.

나흘 뒤의 무도회에 나와서 저를 만나 주세요. 그 무도회에서 저는…… 말벗 삼을 부인 한 사람 없답니다. 부디 앨저 경이 저의 쓸쓸함을 달래 주신다면 좋겠습니다.

당신의 친구이고 싶은, 렌디드 자작 부인 드림.」

이에샤는 나무틀에 천을 씌운 싸구려 소파에 드러누웠다. 셈브리온이 사들인 가구는 석곡궁의 물건에 비할 수조차 없었지만, 이에샤는 개의치 않았다. 나무 위에서도 잠들던 이에샤였다. 이만하면 안락했다.

베빈의 편지는 신년맞이 무도회를 코앞에 두고 다다랐다. 가지런하던 글씨가 끝줄로 갈수록 휘갈겨졌다. 애끓는 마음이 느껴졌다. 양피지를 팔락팔락 흔들어 보았다. 실낱같은 바람이 일었다. 셈브리온이 소파 등받이 뒤쪽에서 허리를 구부렸다. 고민하는 이에샤와 얼굴을 마주했다.

“누구 편지?”

“렌디드 부인.”

“누구였더라?”

“당신은 모르는 사람이야. 나더러 내일 무도회에 나와 달래.”

셈브리온의 눈이 둥그레졌다. 이윽고 씨익 웃었다. 이에샤는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제법인데? 이-샤. 귀부인한테 데이트 신청도 다 받고. 렌디드 부인을 레이디로 섬길 거야? 춤은 출 줄 알아? 연미복이 없어서 어쩌지?”

“세비, 지난번에 내가 나이로 놀려서 삐졌어?”

“설마아.”

셈브리온이 낄낄거렸다. 이에샤는 잔소리를 늘어놓으려다가, ‘풋’하고 웃어 버렸다. 목청을 돋우고 싶지 않았다. 쉬는 날이 아닌가?

모처럼 느긋했다. 귀족 여자들이 신년맞이 무도회 준비로 바쁠 때였다. 에브라힐 궁전의 손님이 줄었다. 백화 기사단에도 휴가가 주어졌다. 이에샤는 무도회에 나가지 않을 셈이었으므로 이틀 쉬는 셈이었다.

편지가 날아들기 전까지는 그랬다.

“난감하네. 웬만하면 가고 싶은데.”

“네가? 별일이구만. 사람 득시글대는 곳 싫어하잖아. 일하다 보니 마음이 변했어?”

“여전히 질색이야. 이 편지를 보낸 부인한테 들을 이야기가 있거든. 일전에는 통 입을 안 열었는데, 털어놓을 마음이 생겼나 싶어서. 뭔가 큰 고민이 있는 것 같아.”

셈브리온이 양 팔뚝을 등받이에 올렸다. 턱을 얹었다. 덩치 큰 사내가 그리하니 벌집을 들여다보는 곰 같았다.

문득 이에샤는 어머니가 읽어 주었던 동화를 떠올렸다. 아버지와 단둘이 사는 소녀의 이야기. 나무하러 나간 아버지를 기다리며 저녁 식사를 준비한다는, 별날 것 없는 내용이었다. 밀빵을 굽고 우유를 끓이는 흐름에 군침이 돌았었다―호화로운 음식도 아니건만 왜 그리 먹음직스럽게 느껴졌는지. 마지막에는 아버지와 식탁에 둘러앉는 장면으로 끝났다. 어째서 해묵은 기억이 되살아날까?

“가야지 싶으면서도 가기 싫네. 휴일이니까 오랜만에 세비하고 종일 빈둥거릴 예정이었는데.”

“나는 아무래도 좋다만. 간다손 쳐도 이-샤, 입을 옷은 있어? 아! 연미복 말고 드레스 얘기인 거 알지?”

“……당신 끈질겨. 그러니까 결혼을 못 했지.”

스승과 제자 사이에 싸늘한 눈길이 오갔다.

너 그러다 후회한다. 셈브리온이 투덜거렸다. 가정을 이루겠노라 하면 아쉬울 사람은 저면서, 이에샤는 잘도 재깔여 댔다. 결혼할 뜻은 없었으나 ‘확 애인이나 만들까?’ 하는 마음이 치밀게 했다. 실지로 셈브리온은 생김새도 번듯하고 동안이었다. 이에샤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한숨이 흘러나왔다. 셈브리온이 말한 대로, 베빈을 만나고 싶어도 옷이 마땅치 않았다. 노동복 같은 원피스를 입고 갈 수야 없는 노릇이었다. 이름뿐인 백작이어도 귀부인. 차려입을 필요가 있었다.

“당장 내일이니 어쩔 수 없네. 아쉽긴 해도 촉박하게 연락한 것도 그쪽이니 이해하겠지, 뭐.”

“안 가게?”

“왜, 당신이 고른 원피스랑 머릿수건을 사교계에 선보였으면 좋겠어? 그렇다면 내가 걸치고 나가 줄 수 있지.”

“제발 참아 줘.”

셈브리온은 두 손 들고 말았다. 에브라힐 궁전의 번쩍번쩍한 파티 홀에, 농가의 아낙처럼 꾸민 이에샤가 들어간다? 인파가 물이랑처럼 갈라질 터였다. 상상만 해도 민망스러웠다.

벨체터에 묶인 재산만 가져왔어도 드레스를 열 벌은 사 줬을 텐데! 안타깝고 답답했다. 가슴속에 든 말을 뱉어 냈다.

“거참, 기사 옷을 입고 갈 수도 없고.”

“…….”

이에샤는 눈을 끔뻑였다. 셈브리온의 말에 깜빡, 불이 켜지는 듯했다.

백화 기사단 정복은 이에샤가 지닌 옷 가운데 으뜸갔다. 황실에서 지은 물건이었다. 디자인도, 재료도, 재봉사도 빼어난 것이 당연했다. 프록코트를 여성복답게 고친 상앗빛 코트는 아름다웠다. 이에샤를 위하여 태어난 양 어울리기도 했다.

그를 걸친 이에샤는 제국 기사단 녀석들에게 뒤지지 않을 만큼 멋들어졌다.

“그거다!”

“뭐?”

“역시 내 사부야!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세비, 당신 정말 천잰가 봐!”

셈브리온은 당황했다. 기시감이 차올랐다. 이에샤가 터무니없는 짓을 꾸미는 게 틀림없었다. 머릿속에 바지를 입고, 코트를 걸치고, 검을 찬 채 무도회장에 나타나는 여백작이 그려졌다. 셈브리온의 낯빛이 바랬다. 또 이에샤에게 ‘헛바람’을 불어넣어 버렸다.

“안 돼! 절대 안 돼!”

“안 되긴 뭐가 안 돼? 멋지잖아. 기사 정복으로 사교계 데뷔!”

“멋진 게 아니라 망측한 거겠지! 사람들이 앨저 백작은 미쳤다고 수군댈 거야. 이-샤, 너 그러다 진짜로 혼삿길 막힌다! 아빠는 그 꼴 못 봐요!”

“징그러운 소리하지 마, 우리 아빤 뒈졌으니까! 어차피 난 나보다 약한 놈이랑은 결혼 안 해.”

셈브리온은 망연자실했다. 기가 막히니 헛웃음이 터졌다. 아무래도, 살아서 이에샤가 시집가는 모습을 보기는 글러 먹은 성싶었다.

이에샤는 모든 시름이 사라진 얼굴로 “저녁 메뉴는 뭐야?” 하고 조잘거렸다.

============================ 작품 후기 ============================

집안일은 전부 셈브리온이 합니다

이에샤는 (일단은)큰아가씨 대우를 받아서 손에 물을 묻혀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에르디는 미모 면역 만렙입니다 어머니가 예뻐서(+자기가 예뻐서)...

선추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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