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25 4. 기사와 귀부인 =========================
에이릴리가 떠난 무렵을 돌이켜보았다. 어린 이에샤는 막막했었다. 장례를 도맡아 준 관리가 너에게는 외척이 한 사람도 없노라 하였다. 외조모는 오래전에 눈감았다. 외조부는 사위의 계집질로 충격받고 쓰러졌다. 에이릴리는 앨저의 외딸이었다. 이에샤가 셈브리온과 살겠다고 말했지만, 관리는 시궁쥐라도 보는 눈으로 셈브리온을 보았다. 파발꾼이 알디온 후작가로 달려갔다.
오스터와 셀더리는 용병 나부랭이를 질색했다. 망측하다며 치를 떨었다. 이에샤는 엿새간 음식을 입에 대지 않았다. 쫓겨난 셈브리온을 데려오라고 악써 댔다. 오스터는 아내를 소박 놓아 죽이고, 딸까지 잡았다는 소문이 돌까 봐 두려워했다. 셈브리온이 저택에서 사는 것을 허락하고 말았다. 그러지 않았다면 큰일이 났으리라.
셈브리온이 제국인이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외국인이 델페레타 귀족의 보호자를 자처할 수는 없었다. 그 저택은 숨이 막혔다. 어디를 가도, 무엇을 해도 눈총이 따라붙었다. 제발 나를 내버려 둬! 마음속으로 빌었다. 혼자가 되기를 꿈꿔 왔다.
오늘에 이르러서야.
“실감이 나는 듯하면서 안 나. 자유가 됐다는 게.”
“다들 그래. 손에 거머쥐고 나면 별일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법이지.”
“당신도 그런 적이 있었어?”
“옛날에.”
셈브리온은 씁쓸히 웃었다. 델페레타의 국경선을 넘어온 날이 기억났다. 벨체터와는 딴판인 평화가 비현실적이었다. 내란의 불길에서 도망쳤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었다. 이에샤가 그 같은 기분을 느끼는구나 생각하자, 셈브리온까지 속이 북받쳤다. 알디온이라는 이름은 이에샤에게 감옥이었다.
이에샤가 셈브리온을 돌아보았다. 뾰족한 눈초리가 늘어졌다. 눈매가 둥그레졌다. 활짝 핀 낯꽃에서 설렘이 배어났다.
“이 집, 너무 멋져. 고마워! 언젠가 꼭 받은 거 전부 갚을게. 내 방은 여기로 할래.”
“그으래애.”
셈브리온은 장난스럽게 말끝을 늘였다. 짝! 손뼉을 부딪쳤다. 창문도 닫혔건만, 공기가 바뀌는 듯했다.
“다른 방에 있는 옷장 옮겨 놓을게. 옷도 내가 싹 정리할 테니, 이-샤는 출근 준비!”
“코트만 걸치면 돼.”
그렇게 말하고 이에샤는 뒤쪽을 곁눈질했다. 유리창으로 햇볕이 스몄다. 가늘게 잦아드는 빛살이 포근했다. 후회가 들었다. 무심코 고른 방이 남향일 줄이야. 번듯한 저택을 마련하면 그때야말로 셈브리온에게 가장 좋은 방을 주겠다고 마음먹었다.
* * *
오늘도 엘테르트는 석곡궁에 들르지 않았다.
출근이 여느 날보다 늦었으므로, 하녀 시더에게도 물어보았다. 아침에도 보지 못하였다고 했다. 이에샤는 아쉬운 한숨을 흘렸다. 호랑가시궁에서 이에샤를 배웅하는 동안 엘테르트는 말수가 적었다. 참말로 제가 브링어라는 사실이 아무렇지도 않은가 궁금했다. 얼굴을 마주하면 이야기해 보려고 했는데.
문득 억울해졌다. 어쩌다 엘테르트를 기다리게 되었을까. 싹수 노란 멘델린 소공작이 언제부터 못 만나면 허전한 사람으로 바뀌었을까.
황태자 때문이었다. 백화 기사단 일을 하고많은 사람 중에 엘테르트에게 맡겨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게 하고 미워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이에샤는 애꿎은 루시온에게로 화살을 돌렸다.
“싫다, 정말.”
“뭐가요?”
“나 말이야. 싫은 사람 쉽게 받아들이는 성격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도 않나 봐.”
책꽂이의 먼지를 털던 시더가 “뜻밖이네요.” 하고 조잘거렸다.
이에샤는 착한 윗전이었다. 차를 올리면 불평 없이 마셨다. 구석진 자리에 먼지가 남았어도 문제 삼지 않았다. 무거운 물건을 들어 주기까지 했다. 이에샤만큼 수더분한 귀족은 드물었다. 평민이었던 기사마저도 하녀를 홀대하는 마당이었다. 귀부인과 기사를 여럿 모셔 본 시더는 이에샤가 좋았다.
“저는 앨저 경이 굉장히 너그러우신 줄 알았거든요.”
“뭐? 내 어디가?”
“제가 실수 좀 해도 웃어 넘기시잖아요. 앨저 경처럼 용서해 주시는 분이 어디 흔한가요? 손끝에 먼지 한 톨 묻어났다고 매질을 하시는 나리도 계신걸요.”
“흐음.”
이에샤는 생각에 잠겼다. 한쪽 팔꿈치를 탁상에 붙였다. 손바닥으로 턱을 괴었다.
알디온 후작가에서도 고용인이 매를 맞았다. 셀더리는―남편과 딸을 대할 때 말고는―신경질적이었다. 회초리를 드는 일이 잦았다. 그러한 마님을 작은아가씨가 말리고는 했다. “제발, 끔찍해서 못 보겠어요 어머니!” 하며 눈물짓던 밀레나를 떠올리자 기분이 더러워졌다.
이에샤는 밀레나가 진심을 보였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상냥한 척. 가련한 척.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야단치기도 성가시니 봐주는 것뿐이었다. 그처럼 무성의한 용서를 달가워하는 시더가 이상히 여겨졌다.
“난 너희한테 너그러운 게 아니라 시중받고 부리는 데 익숙하지 않을 뿐이야. 그렇게 정 많은 사람 아니란다.”
“아무렴 어때요? 저희 같은 것들한테는 그저 모시기 편한 분이 최고인걸요.”
“그럼 시더, 야단맞을 때 울면서 말려 주는 아가씨나 도련님은 어때?”
“목숨만 빼고 다 바치죠.”
시더가 명랑하게 말했다.
이에샤도 시더가 마음에 들었다. 덤벙대는 구석이 있었으나, 성실하고 싹싹한 소녀였다. 저를 두고 미친년이라고 속닥대던 알디온 하녀들에 견주면 천사가 따로 없었다.
하나, 이에샤가 엄하게 굴면 돌아설 친절이었다. 이에샤 또한 시더의 잘못을 모조리 봐줄 셈은 없었다. 밀레나와는 달리.
밀레나는 아랫사람의 심리를 꿰뚫어 보고서 감싸는 걸까? 아리송했다. 이에샤조차 밀레나가 능구렁이인지, 자애의 화신인지 헷갈릴 때가 많았다. 분명한 점은 한 가지. 밀레나는 이복언니만은 돕지 않았다. 이에샤는 시중꾼들을 굽어살핀 적이 없었다.
가식이란 나쁜 짓인가? 필요한 행동인가?
“내가 모르고 살아온 게 너무 많아.”
“무얼요?”
“얘, 시더. 나 5년 전부터 내 방 청소를 맡았던 하녀의 이름을 모른단다. 주방장에게 콧수염이 있다는 사실도 작년 가을에 알았고. 아, 집사 눈 색깔이 어땠는지도 기억 안 나.”
“정말 많네요.”
저를 위하지 않는 사람은 이에샤도 필요 없었다. 하지만 주변을 둘러보는 눈은 키우고 싶었다. 이곳은 황궁이었고, 이에샤는 기사단장이었다. 앞으로 많은 사람에게 둘러싸여 지내야 할 터였다.
“……그러니까 그 사람이 필요하다고!”
“깜짝야! 누, 누구를 말씀하시는 거세요?”
“몰라. 있어, 나쁜 놈!”
귀족 사회의 흐름을 아는 남자가, 도통 이에샤를 보려 하지 않았다. 등허리를 펴는 방법은 셈브리온이 가르쳐 주었다. 이제는 사람 틈바구니에 섞이는 법을 배워야 했다. 얄밉도록 잘생긴 엘테르트의 얼굴이 떠올랐다.
미지근하게 식은 차를 들이켰다. 시더는 차 끓이는 솜씨가 제법이었다.
엘테르트는 양볼을 감싸쥐었다. 마른세수했다. 오늘은 호랑가시궁에 가지 않았다. 개인 휴게실로 들어온 채였다. 느른했다. 어디가 아픈 탓인지, 속마음이 몸으로도 나타나서인지 몰랐다. 기분이 나빴다.
“이에샤 앨저…….”
이름을 부르기조차 조심스러웠다. 입 밖으로 냈다가 마주치기라도 할까 봐.
이에샤의 짐작과 달리 엘테르트는 태연하지 못했다. 하얗게 밤을 새웠다. 이에샤에 관한 일들이 머릿속을 뒤덮었다. 여자 기사. 허물어진 백작가의 주인. 열다섯 살에 브링어가 되었다는 불세출의 검술사.
엘테르트는 무위와 폭력성이 비례한다고 믿었다. 무력을 갖춘 자는 사나워지게 마련이었다. 힘에 젖어서 남을 찍어 누르려 드는 치를 질릴 만큼 보아 왔다. 그렇기에 한순간도 펜을 멀리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말과 글은 쓸수록 이성을 다지는 법이었으니까.
이에샤 앨저는 난폭했다. 기사단 입단 시험에서 보인 모습도 그러했고, 지지난 주에는 제2 기사단의 실력자에게 장갑을 던졌다―이에샤를 두고 저속한 말을 지껄인 놈이었다.
그렇다고 어고트나 다른 기사와 같느냐 한다면, 달랐다. 이에샤는 남아도는 힘으로 폭거를 저지르는 게 아니었다. 검을 뽑지 않으면 이에샤에게는 헤쳐 나갈 방도가 없었다.
엘테르트가 아는 누구보다도 재능 넘치는 무예자. 동시에 어떤 무예자보다도 하잘것없는 위치에 선 여인.
“싫군, 정말.”
싱거이 중얼거렸다. 브링어는 싫었다. 생리적으로 몸서리가 났다. 아슬아슬한 처지에 놓인 사람을 모르는 체하기도 거북살스러웠다. 엘테르트는 따돌려지는 이들을 위하여 일생을 바치겠다고 다짐했다. 어려운 자에게 베푸는 삶이야말로 멘델린의 미덕이 아니던가.
자기 자신이 싫었다. 괴로운 기억에 얽매여서, 신념을 두고 망설이는 제가.
‘찾아가 볼까.’
얼굴이라도 보면 뱃속이 가라앉을지도 몰랐다. 한 획에 그은 양 날카로우면서도 시원스러운 이목구비가 그려졌다. 웃으면 둥글둥글해지는 변화가 신기한…….
똑똑!
상념에서 깨어났다. 지금 무슨 생각을 했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에샤를 무슨 낯으로 대할지 고민하다가, 왜 얼굴 생김을 짚으며 눈은 어떻고 코는 어떻고 했단 말인가? 스스로가 낯설어서 어처구니없었다.
휴게실 문을 돌아보았다. 오늘의 일까지 어제 해치운 터였다. 보좌관이나 부하는 아닐 것이다. 목청을 가다듬었다. “들어오시오!” 하고 외쳤다. 문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엘테르트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재차 청했다.
“들어와 용건을 밝히시오.”
조심스러운 기색으로 문이 밀리기 시작했다.
엘테르트의 눈이 커졌다. 허리를 곧추세웠다. 자리에서 일어나, 차림새를 가다듬었다. 문가로 다가갔다. 한쪽 팔을 펼치며 손님을 맞아들였다. 밀레나가 무릎을 고부려서 인사했다.
“오랜만이에요, 엘테르트 님. 기별도 없이 실례하는 점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들어오십시오, 알디온 영애.”
“감사합니다.”
밀레나는 사뿐사뿐한 발걸음으로 휴게실에 들어섰다. 진분홍색 드레스 자락이 사락거렸다. 속치마를 받치지 않고 몸에 달라붙도록 지은 머메이드 드레스가 아리따웠다. 자줏빛 깃털로 꾸민 부채도 고혹적이었다.
“제가 여기 있다는 걸 어찌 아셨습니까?”
“시종에게 물었답니다. 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릴게요.”
“아뇨. 조금 놀랐을 따름입니다.”
엘테르트는 침착히 밀레나를 에스코트했다.
밀레나와 사사로운 만남을 가지기는 처음이었다. 사업차 알디온 후작가에 들렀을 때 안부만 몇 번 주고받아 보았다. 조용하고 수줍음 많은 아가씨라고 여겼다. 이렇게 찾아오다니 뜻밖이었다.
“영애가 제게 무슨 볼일이 있으신 건지 모르겠군요.”
“별일은 아니옵고.”
밀레나는 뺨을 붉혔다. 엘테르트가 변함없이 근사했으므로. 저의 벌꿀 색 머리카락과는 반대로, 엷고 투명해 보이기까지 하는 금발이 반짝거렸다. 가슴이 두방망이질 쳤다.
“엘테르트 님이 제 언니를 돌봐 주신다고 들어서요.”
“돌본다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군요. 그녀와 일을 함께하기는 합니다.”
“……오늘 아침에 이에샤 언니가 저희 집에서 나간 걸 아시나요?”
지적당한 바를 흘려 넘기고 물었다. 엘테르트는 흠칫 놀랐다. 이에샤로부터는 아무런 언질도 받지 못했다―굳이 이야기할 만한 사이가 아니기는 했지만. 저도 모르게 한숨이 흘러넘쳤다.
밀레나는 엘테르트의 속내를 알지 못하는 채, 부채 끄트머리로 입술을 가렸다. 눈을 치떴다. 남자란 여자가 무언가를 볼 때조차 곱기를 바란다고 배웠다. 엘테르트가 기뻐해 주었으면 했다.
“언니가 에브라힐에서 잘 지내나 궁금했답니다. 앞으로 자주 보지 못할 테니, 동생으로서 걱정이 돼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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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샤가 사회 경험 멘토로 에르디를 락온했습니다...
저는 대자연을 시작했습니다...아프네요...듀랑고도 시작했습니다...
선추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