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24 4. 기사와 귀부인 =========================
해질녘에는 서쪽을 알 수 있다. 궁전에서 여인의 영역을 찾으려면, 저녁노을을 등지고 나아가면 된다.
이에샤는 터덜터덜 걸었다. 무슨무슨 백작 영애―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를 아버지의 근무처까지 데려다준 참이었다. 뒷머리를 내리쬐는 붉은빛이 따사로웠다. 긴긴 하루였다. 호랑가시궁을 나오고서 어떻게 보냈는지도 헛갈렸다. 브링이 바닥난 탓일까? 몸도 머리도 고달팠다.
엘테르트 멘델린은 이상한 남자였다.
이에샤는 브링어라는 사실을 밝히며 각오를 굳혔다. 거짓말쟁이로 몰려도, 천방지축이라고 손가락질당해도, 소문이 나서 구경거리가 되어 버리더라도 자신을 드러내고 싶었다.
엘테르트는 두드러지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말로 나타내기 어려운 낯빛을 띤 채, “그래서였군요.” 하고 중얼거렸을 따름이었다. 이에샤가 제 말을 믿느냐고 묻자 엘테르트는 그렇다 하였다.
“어떻게 그렇게 쉽게 믿죠?”
“나도 열여섯 살에 아카데미를 졸업했는데 경이 그 나이에 브링어인 게 못 일어날 일이겠습니까?”
재수없었다. 동시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엘테르트는 이에샤를 괴롭힐 속셈이라곤 없어 보였다.
두렵기도 했다. 시작부터 운이 좋으면 현실이 녹록치 않음을 잊게 마련이었다. 작년 말까지 셈브리온 같은 사람이 많을 줄로 믿은 것처럼. 엘테르트는 이상한 남자가 틀림없었다. 예사 사람이라면 19살 브링어를 가만두지 않을 터였다. 그것만은 인간관계에 서투른 이에샤도 장담했다.
‘결과적으로는 고마운 사람, 인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좋은 사람’이나 ‘착한 사람’은 아니었다. 만났을 적부터 이에샤를 깔아뭉개고 적대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고마워할 만한 일은 많았다. 기사단 입단 시험에서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고, 황궁에 익숙해지도록 이끌어 주었다―우거지상을 했지만 말이다.
이에샤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상념을 떨어냈다. 석곡궁이 코앞이었다. 동쪽 하늘까지 퍼져 나간 노을빛이 성곽을 집어삼켰다. 작약이 흐드러진 정원 또한 꽃송이와 잎의 채도 때문에 불긋불긋했다. 풍경 속에 누군가가 있었다.
드레스를 입은 사람의 윤곽이 보였다. 스커트를 작게 부풀린 모양새가 소심스러웠다. 틀어 올린 머리카락은 젊은 얼굴에 어울리지 않았다.
“베빈?”
“애, 앨저 경. 오래간만입니다. 저, 저어, 퇴궐하실 시간에 이렇게 찾아뵙게 되어서…….”
“아니, 전 괜찮은데! 이 추운 날 왜 바깥에 계세요.”
이에샤는 베빈 렌디드 부인에게 달려갔다. 뜻밖의 손님이었다. 1월의 첫날 뒤로 만나지 못했으니.
석곡궁은 문을 잠그지 않았다. 이에샤의 사무실도 마찬가지였다. 순찰하는 동안 누가 찾아올지 몰랐으므로, 자유롭게 들어와서 기다리도록 했다. 베빈은 계면쩍게 웃었다.
“제가 작약을 좋아해서요. 이 계절에 다른 곳에서는 보기 어려우니까.”
“뺨이 빨갛게 얼었잖아요.”
“석양 때문에 그래 보이는 거예요.”
어설픈 변명을 늘어놓았다. 이에샤는 눈살을 찌푸렸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베빈은 모습은 멀쩡했으나, 태도에 초조감이 그득했다. 어깨를 가늘게 떨었다. 추워서일까? 두려워서일까.
이에샤는 백화 기사단의 본분을 생각해 냈다―남성으로부터 벌어지는 여성의 위험에 대응하라. 기사·관료가 예쁘장한 소녀를 막아서기에 몇 번 뜯어말린 적이 있었다. 피해자는 모두 작물이나 공산품을 대러 온 평민의 딸이었다. 귀족 여인들은 호위와 자질구레한 심부름만 부탁해 왔다.
베빈에게서는 희롱당하던 소녀와 비슷한 공포심이 느껴졌다.
“우선 들어가서 얘기하죠. 시간이 늦었는데, 남편은…….”
“오늘 새벽에 아버님 영지로 갔어요. 저는, 저기, 오늘 탈리아 부인의 살롱에 참가해야 해서 쫓아갈 수 없었답니다.”
“그래요? 잘됐네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이에샤는 무어가 잘되었는지 아리송했다. 베빈은 남편을 싫어하는 듯했다. 벌을 받기도 하는 모양이었으므로, 렌디드 자작이 없다면 잘된 일이 맞을 것이다. 하나 베빈이 끌어안은 문제는 그처럼 간단해 보이지가 않았다. 직감이 외쳤다.
이에샤는 베빈을 에스코트해서 사무실로 들어왔다. 응접 소파를 가리켰다. 하녀를 부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석곡궁의 하녀인 시더는 해가 지면 기숙사로 돌아갔다. 지금쯤 퇴근할 준비를 하거나, 퇴근한 뒤일 성싶었다. 벌벌 떠는 베빈에게는 미안하지만 차를 대접할 수가 없었다.
벽에 돌기를 박아서 걸어 둔 숄을 집었다. 모직 숄을 베빈의 어깨에 둘러 주었다.
“8시에는 성문이 닫혀요. 이야기할 수 있겠어요?”
“미, 미안해요. 난 딱히, 하, 할 말이 있어서 경을 붙잡은 건 아닌데.”
“네?”
“앨저 경이 보고 싶었어요. 그런데 만날 기회가 없어서, 남편은 제가 조금만 늦어도 화내거든요. 그날, 반지를 찾아다닌 날에도 어, 어찌나 노발대발하던지. 제가 황궁에 들어오고 남편도 집을 비우는 날이 정말이지 오늘뿐이라서.”
믿음이 서지 않았다. 베빈은 남에게 폐를 끼치느니 제가 당하고 말 성격이었다. 에둘러 말하면 착한 사람. 솔직하게는 새가슴. 보고 싶었다는 이유만으로, 이에샤를 퇴궐도 못 하게 붙잡을 턱이 없었다.
‘왜 말을 안 하려고 하지?’
베빈은 입술을 잘근거렸다. 아랫입술이 너덜너덜했다. 그동안 애 끓일 일이 많았던 모양이었다. 이에샤는 곤란한 낯빛을 지었다. 저는 루시온처럼 노련하지 못했다. 라제카처럼 똑똑하지도 않았다. 이야기를 들어야만 베빈의 괴로움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입다물고 속만 태우는 사람은 힘들었다. 외도한 남편과 5년여를 같이 산 어머니조차 아직도 떠올리면 답답해 죽겠는데.
“그러지 말고 말해 봐요. 무슨 일인지 알아야 제가 당신을 도울 수 있어요.”
“정말로 아무 일도 없어요. 저, 그냥 그날 앨저 경이 너무 고마웠고, 다니는 살롱들에는 또래 친구 하나 없어서. 앨저 경을 다시 만나고 싶었을 뿐이에요. 정말이에요.”
이에샤의 입에서 “끙.” 하는 소리가 새었다. 베빈은 움찔했다. 상대방이 언짢은 티를 내비치면, 말도 꺼낼 수가 없어졌다. 스스로가 한심스러웠다. 눈물이 차올랐다.
정작 이에샤에게는 아무런 뜻도 없었다. 어찌하면 좋을까 궁리했을 뿐이었다.
“그럼 이렇게 해요. 제가 집주소를 알려 드릴 테니까 편지하세요. 오늘은 성문 닫히기 전까지 수다나 떨까요?”
“아, 그, 그래도 되나요?”
“베빈이 집으로 돌아갈 마차가 있다면, 얼마든지요.”
책상 서랍에서 쪽지를 꺼냈다. 펜을 집어 들었다. 총무부에서는 양피지와 깃펜을 보내겠다고 했지만, 이에샤가 물리쳤다. 그런 물건들은 익숙지도 않을 뿐더러 함부로 쓰기가 어려웠다.
새하얀 종잇조각에 피올라 거리의 주소를 적었다. 내일이면 들어갈 집이었다. 셈브리온이 기본적인 가구도 들여놓았노라 하였다. 알디온 후작가에서 두 골칫덩어리가 사라질 날도 몇 시간 남지 않았다.
“여기, 제가 사는 곳이에요. 얼마든지 편지 보내셔도 돼요.”
“피, 피올라?”
베빈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피올라는 ‘그럭저럭 깨끗한’ 평민의 주택이 늘어선 동네가 아니던가. 상상만으로도 몸이 근지러운 듯했다. 쪽지를 들여다보기도 꺼려졌다. 이에샤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알디온 후작님과 사시는 게 아니었나요? 아버지이신…….”
“저는 알디온 후작의 딸이 아니라 앨저 백작인걸요.”
그다지 예쁘지 않은 글씨로 쓰인 주소에 덧달았다. ‘앨저 백작저’ 하고. 베빈이 얼굴을 붉혔다. “미안해요.” 하고 웅얼거렸다. 이에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상식의 바깥에 선 쪽은 자신이지, 베빈이 아니었다.
“제가 원래 좀 별종이에요.”
“자, 자기 입으로 그렇게 말하시는 분은 처음 봤어요.”
“그렇죠?”
염려한 대로 엘테르트는 감각을 어지럽혀 놓았다. 이다지도 쉬이 귀족에게 피올라 거리의 주소를 밝히도록 만들다니. 한숨이 흘러넘쳤다. 아름다운 얼굴을 그리며, 속으로 투덜거렸다. 나도 이상하지만 당신도 이상해.
‘내일은 오려나.’
이에샤는 엘테르트에게도 피올라 거리의 집주소를 가르쳐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 * *
“한 층에 방이 세 개씩.”
셈브리온이 쾌활하게 말문을 떼었다. 현관문을 열쇠로 땄다. 안쪽으로 들어서며 이에샤에게도 손짓했다. 마침내 지긋지긋한 알디온을 떠나왔다.
“크기는 다 비슷비슷해.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꼭대기에 문이 있어. 잠가 둘 거야. 방 6개를 청소하려면 골치깨나 아플 테니까.”
“하녀를 고용하면 어때?”
“이-샤의 월급은 고이고이 모아 두자고. 나처럼 힘 좋고 일 안 하는 손 뒀다가 어따 써?”
계단을 가리켜 보였다. 괜스레 부엌으로 들어갔다가 나왔다. 벽난로 앞에 멈추어 섰다. 이에샤의 눈길도 셈브리온이 움직이는 대로 좇아갔다.
벽난로 아궁이에는 작은 솥이 놓였다. 스튜를 끓이기에 알맞을 성싶었다. 전에 살던 사람이 버리고 간 물건이었다. 잿더미는 청소된 뒤였다. 셈브리온은 청소에 재능이 있는 듯했다. 피올라의 이층집이 새로 지은 양 번쩍번쩍해졌다.
“이-샤가 쓰고픈 방부터 골라.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하게.”
“그런 덴 세비가 써. 당신 돈으로 산 집인데 왜 나한테 먼저 고르래?”
“난 횃불 든 병사가 오락가락하는 산속에서도 자던 놈이니까.”
이에샤는 한숨지었다. 셈브리온이 저를 위하여 얼마나 많은 일을 해 왔는지 알고 나니, 배려가 달갑지 않았다. 이에샤도 셈브리온에게 좋은 것을 주고 싶었다. 첫 봉급도 받지 못한 지금으로서는 먼일이었다. 봉급이 나오자마자 셈브리온을 고기 요리가 훌륭한 레스토랑으로 끌고 가리라.
“내가 진짜, 돈 많이 벌어서 당신 호강시켜 줄게!”
“고맙기는 한데……, 그런 말 되게 내가 늙은이 같아서 비참해지니까 안 하면 안 될까?”
“뭐 어때? 마흔이면 장가들어도 될 나이지. 아, 이제 마흔하나였나?”
셈브리온이 빙그레 웃었다. 목에 핏대가 섰다. 이에샤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낯으로 집 구경을 나섰다. 짐이라고는 옷가지뿐이어서, 정리할 필요조차 없었다. 가까운 방의 문을 열었다.
서늘한 공기가 터져 나왔다. 창문이 열린 채였다. 회색 커튼이 펄럭거렸다. 이에샤는 나부끼는 머리카락을 붙잡았다. 감회가 새로웠다. 오스터 알디온의 밑에서 벗어나다니. 열 살짜리 계집애가 열아홉 숙녀가 되었다. 길었다.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이-샤.”
“응?”
“지금 보니 머리가 많이 길었네.”
셈브리온이 손가락으로 제 목을 두드려 보였다. 그 말대로였다. 귓가에서 끊어지던 회색 머리카락이, 턱을 지나 목 윗부분까지 내려왔다. 이에샤는 조금 울고 싶어졌다.
“작년 여름부터 안 잘랐으니까.”
“기사가 되겠다고 뛰어다니느라 정신없었지. 이사 준비하느라 정신없었고. 진짜로 기사가 되어서 정신없었고.”
반년도 되지 않는 시간이 까마득했다. 이따금 생각했다. 어느 순간 낮잠에서 깨어나, 커다란 떡갈나무 위에서 눈을 뜨지 않을까. 바보같은 상상이었다. 이에샤가 그 나무를 기어오를 일은 다시 없으리라.
“그래. 이제 정말…….”
방 안으로 들어섰다. 창가로 다가갔다. 창문에 달린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흐릿한 유리창이 바람을 가로막았다. 아직 봄이 오지 않았다.
“정말로 혼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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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못 올릴 것 같다고 한 거 같은데...어찌저찌 올리네요...
이에샤는 카운슬링에 재능이 없습니다~ 인내심도 강한 편은 아니고...
검술 하나 엄청나게 잘하니까 다른 건 좀 못해도...잘 살지 않을까요...?!
선추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