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23 4. 기사와 귀부인 =========================
검을 위아래로 털어 보았다. 손목이 지르르했다. 처음보다 수그러든 브링이 빠직, 소리를 내며 물결쳤다. 검은 덩어리들이―얼굴도 팔다리도 없었지만―이에샤의 눈치를 살피는 것 같았다.
이에샤는 “하아.” 하고 뜨거운 숨결을 뱉었다. 셈브리온에게 쪽도 못 쓰던 시절이 떠올랐다. 그때도 지금처럼 열이 오르곤 했었다. 때에 맞지 않게 웃음이 새었다. 이에샤의 서슬이 누그러들자, 세 덩어리가 반응했다. 꾸무럭꾸무럭 뭉치기 시작했다. 저희의 몸을 합쳤다. 이에샤는 눈을 치켜떴다.
‘힘을 모으는 편이 낫겠다고 판단한 건가?’
사위에서 덮치는 공격은 막혀 버렸다. ‘그것’은 자잘히 밀어붙이기보다 맞서 겨루는 쪽으로 속셈을 바꾼 모양이었다. 이에샤는 한숨을 내쉬었다. 지치고 막막해서가 아니었다.
“미련하기는.”
“미―련―.”
안도한 까닭이었다.
칼자루를 두 손으로 움켰다. 검을 높이 치켰다. 윗몸을 비스듬하게 틀었다. 바직, 빠지직! 쥐어짜 낸 브링이 불꽃처럼 튀었다. 앞쪽으로 튀어 나가며 검을 내리쳤다. 마지막까지 버틴 한 덩어리가 비명을 질렀다.
챙그랑!
유리가 깨지는 듯하였다. 거울 한복판에 송곳을 내꽂은 양, 이에샤가 선 자리로부터 금이 퍼졌다. 허공이 좍좍 갈라졌다. 커튼을 걷어 냈더니 안쪽에 한 꺼풀이 남았다면 이러할까? 풍경이 우그러져 내리고 별반 차이 없는 정원이 드러났다.
달라진 점은 한 가지.
“앨저 경……?”
단정하던 금발이 헝클어진 남자가 이에샤를 쳐다보았다. 엘테르트는 호랑가시궁 출입문으로 이어지는 계단에 섰다. 넋을 잃은 얼굴이었다. 이에샤도 당황했다. 제 몸을 내려다보았다. 상아색 코트가 흙먼지로 뒤덮인 채였다. 허둥지둥 가슴부터 허리까지 손등으로 털었다.
“아, 제가 꼴이 말이 아니죠. 싸움이, 여기 왔다가 싸움에 휘말렸는데, 멘델린 경은 괜찮은 거예요? 괜찮아 보이네. 황태자 전하께서도 무사하신가요? 저는 황태자궁에 자객이라도 숨어든 줄 알고.”
“당신이 이곳을 지키는 결계에 빠졌던 겁니다.”
엘테르트는 정신을 가다듬었다. 계단을 두 개씩 건너뛰어 내려갔다. 결계가 무너졌다. 루시온이 마법사들을 다그친 결과일까?
아닐 것이다. 엘테르트는 고개를 저었다. 그만한 마법을 거둬들일 때는 반작용이 따르게 마련이었다. 마력이 흔들리며 비바람이 몰아치든, 땅이 뒤집히든 했을 터였다. 이에샤는 자연스럽게 모습을 드러냈다. 엘테르트는 아무도 없어 보이는 정원에서 존재감을 내뿜던 기운을 돌이켰다.
‘자력으로 빠져나왔는가. 어떻게?’
묻고 싶은 말이 많았다. 무슨 수로 결계를 깼습니까. 파수꾼을 쓰러뜨렸습니까. 당신은 얼마나 되는 힘을 숨긴 겁니까. 당신의 스승은 어고트 프리슬리가 아닙니까…….
머릿속의 생각들을 몰아냈다. 무엇보다도 확인해야 할 게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다친 곳은 없습니까? 앨저 경.”
“아, 네. 난 괜찮은데, 잠깐만요, 당신 왜 그래요? 안색이 너무 나빠요.”
“누굴 걱정하는 겁니까. 자기가 위험했으면서.”
이에샤는 ‘딱히 위험하지는 않았는데.’ 하고 떠올렸으나 입다물기로 했다. 엘테르트는 이에샤의 몸을 차근차근 뜯어보았다. 본인의 말대로 멀쩡한 듯했다. 망가진 차림새에도 피는 묻지 않았다. 이에샤는 열없는 기분에 휩싸였다. 엘테르트의 걱정을 사려니 낯설었다.
엘테르트는 복잡한 눈길로 이에샤를 보았다. 손에 검을 든 채였다. 생리적인 거부감이 치솟았다. 당장에라도 이에샤를 의료원으로 보내고, 저도 쉬고 싶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되었다.
“죄송합니다.”
“네? 예? 경이 왜요?”
이에샤가 의아히 대꾸했다. 엘테르트 속에서 죄책감과 자괴감이 부풀어올랐다.
드넓은 황궁에 편들어 줄 사람도 없는 외톨이. 구경거리에 지나지 않는 여기사. 자신이 얼마나 위태로운지도 모르는 이에샤 앨저. 약자를 위하겠노라 다짐한 엘테르트에게는 이에샤가 자리잡을 때까지 뒷받침할 의무가 있었다. 사사로운 마음에 휩쓸려, 책임을 방기했다는 점이 엘테르트를 괴롭게 했다.
“내가 경한테 결계에 대해 가르쳐 줬어야 했는데…….”
“멘델린 남작! 앨저 경!”
큰 소리로 부름이 떨어졌다. 엘테르트의 말허리가 잘렸다. 엘테르트는 인상을 썼지만, 이에샤는 달갑게 고개를 뺐다. 호랑가시궁에서 루시온이 걸어 나왔다. 엘테르트에게 결계였을 뿐이라고 설명받았어도 황태자의 안위가 궁금하던 차였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남루한 차림에 용서를 구합니다.”
“그런 건 됐어. 무사해 보여서 다행이군, 정말로.”
“제가 소란을 피운 모양이더군요. 멘델린 경한테 자초지종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루시온도 엘테르트처럼 이에샤의 상태부터 살폈다. 이에샤는 더 쑥스러워졌다. 지금껏 큰일을 당했을 때, 놀라서 달려와 준 사람은 셈브리온뿐이었다. 다행히 루시온은 엘테르트보다 침착했다. 고갯짓하며 “내가 무심했어. 사죄하지.” 하고는 주변으로 관심을 돌렸다.
“결계를 멈추라고 엘먼 공을 족치고 있었는데 그가 갑자기 경악하더군.”
“엘먼 공은 연로하셨습니다. 쓰러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어쩌긴 뭘 어째? 황실 마법장이 젊은 놈으로 바뀌는 거지.”
“루……, 전하.”
엘테르트는 황실 마법사의 우두머리인 엘먼에게 동정을 표했다. 루시온이 키득거렸다. 기실, 어렵다는 엘먼에게 꼭 구해야 할 사람이 말려들었다며 사정사정하고 온 터였다.
“대단하더군, 앨저 경.”
“죄송합니다.”
이에샤가 고개를 수그렸다. 비아냥으로 받아들인 것 같았다. 루시온은 손사래를 쳤다. 자신은 이에샤 안에 지독히도 몹쓸 놈으로 박힌 모양이었다.
“아니, 아니. 그대, 정법으로 결계를 무너뜨렸다며?”
“정법이요?”
“결계 지킴이가 죽임당했다면서 엘먼 공이 놀라 자빠지던데.”
엘테르트는 눈살을 찌푸렸다. 터무니없는 이야기였다. 호랑가시궁은 훗날 옥좌에 앉을 몸이 머무르는 장소였다. 수비 결계가 녹록할 턱이 없었다. 그 파수꾼을 이에샤가 쓰러뜨렸다니. 믿기 어려웠지만, 엘테르트 또한 사실임을 느꼈다.
“……앨저 경, 호랑가시궁에는 무슨 일로 온 겁니까? 황태자 전하께 아뢸 말이라도 있습니까?”
“아, 아니요. 제가 왜 왔냐면.”
당신을 만나고 싶어서요. 이에샤는 대답을 뱉으려다가 ‘이건 좀 아닌 것 같은데.’ 하고 머뭇거렸다. 퍽 다정하게 들리지 않겠는가? 저는 엘테르트에게 의상실에 관하여 묻고 싶었을 따름이었다.
목소리가 말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에샤는 엘테르트로부터 시선을 비꼈다. 루시온 쪽을 보았다.
“초대해 주신 무도회에 나갈 수 없다고 아뢰고자 왔습니다.”
“음?”
“전하. 제가 그런 자리에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습니다. 명을 거두어 주십시오.”
“어울리든 어울리지 않든, 그런 건 상관없어. 나의 권위로 백화 기사단장을 소개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대의 입지가 좀 나아질 테니까.”
황태자고 소공작이고, 거리끼지 않고 한숨지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갑갑하고 짜증스러웠다. 드레스 한 벌 가지지 못했다는 사정은 밝히기 싫었다. 봉급을 가불해 달라고 하는 편이 나을 성싶었다.
이에샤가 마음을 다졌을 때였다. 엘테르트가 팔을 뻗었다. 루시온과 이에샤의 사이를 가로막았다.
“전하.”
“왜 그러지? 멘델린 남작.”
“앨저 경의 청을 들어 주시지요. 경의 일은 곤란한 여인을 돕는 것이지, 스스로 곤란해하는 게 아닙니다.”
이것참. 루시온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엘테르트가 이에샤를 거들고 나설 줄은 몰랐다. 이에샤 또한 놀란 눈치였다. 입술을 작게 벌리고 엘테르트를 올려다보았다.
루시온이 양손을 들어 보였다.
“알았어, 알았어. 앨저 경의 뜻을 존중하지.”
“아, 감사합니다!”
“혹여 마음이 바뀌면 부담없이 참가하라고. 관리들을 갈아 넣은 파티라서 볼만할걸. 나는 다시 마법진 수습하러 가야겠으니 에르디, 앨저 경을 배웅해 줘.”
이에샤와 엘테르트가 무릎을 굽혔다. 루시온은 둘 다 깍듯하구만, 투덜거리고는 떠났다. 호랑가시궁 입구로 루시온의 뒷모습이 사라졌다. 이에샤는 실없이 생각했다. 애칭 귀엽네.
그제야 검을 허리띠에 매달 수 있었다. 제국 기사는 멋들어진 검집을 갖추곤 했지만, 이에샤는 드러내 놓고 다녔다. 셈브리온이 검집을 쓰지 않는 까닭이었다. 벨체터의 용병이라면 당연했다. 그 나라에서는 언제 검을 들 일이 생길지 몰랐으므로. 이에샤는 사소한 버릇까지 스승을 따라갔다.
엘테르트는 이에샤가 익숙히 검을 추르스는 모습에 움찔했다.
“도와줘서 고마워요. 솔직히, 정말 가기 싫었거든요.”
“사교 모임에는 돈이 들기 때문입니까?”
“……알면서 굳이 묻지 말아요.”
“짐작했을 뿐입니다. 성보다 벽난로가 친숙하다고 말했던 게 떠올라서.”
너 잘났다. 모르는 척해 주면 어디 덧나냐? 이에샤는 속가슴으로만 엘테르트를 씹었다. 엘테르트는 알아차리지 못하고 고민에 빠졌다.
따지고 보면 이상했다. 어고트 프리슬리는 3년 전에 수도를 떠났다. 그 전해까지는 근위 기사단장을 지냈고. 이에샤를 가르칠 겨를이 없었다. 이에샤는 알디온에서 살아왔으니, 셰올 지방에는 가 보지도 못했을 터였다.
또 어고트는 제 아랫사람을 아꼈다. 죄를 지어도 덮어 주려던 자였다. 재능 있는 제자가 궁핍하게 사는 꼴을 두고 볼 성미가 아니었다.
어떻게 이에샤는 어고트와 똑같은 기세로 저를 압박했는가? 두 사람의 공통점이 무얼까?
「믿지도 않으면서 보증은 왜 서요? 남작의 의구심을 풀어 주자면, 난 천재예요.」
엘테르트는 이에샤의 얼굴을 뚫어지라 보았다. 날카로운 눈매 탓으로 사나운 분위기가 풍겼다. 수련 시간이 되면 풀어지리라. 이에샤 앨저는 마음 깊숙이로부터 검술을 좋아했다. 검술에 미친 사람처럼 느껴지기조차 했다.
“앨저 경.”
“멘델린 경? 왜 그래요? 멍해 보이는데.”
옆구리가 쿡쿡 쑤셨다. 엘테르트의 왼쪽 옆구리에는 커다란 흉터가 자리했다.
머릿속에서 ‘그날’이 되살아났다. 창자가 잘리고 몸이 두 동강 나는 줄 알았던 날. 어고트의 브링에 베이고 어린 엘테르트는 죽을 고비에 빠졌다. 어고트는 소공작의 무른 근성을 고쳐 놓고자 했을 뿐이라며, 몸뚱이가 머리의 비상함을 못 따른다고 빈정거렸다. 애버토스 멘델린은 그 일을 계기로 아들에게 검술 지도를 포기했다.
그때부터 브링어가 끔찍했다. 브링이 살갗에 닿던 느낌을 상상만 해도 소름 끼쳤다. 온화한 체사로 에버렛마저 껄끄러웠다.
만에 하나, 올해로 열아홉 나이가 된 여백작이 그들과 같다면.
“경은 혹시, 브링어입니까?”
“…….”
“대답해 주십시오.”
이에샤는 셈브리온을 떠올렸다. 이-샤, 남에게 브링을 보이면 안 돼. 꼭이야. 약속해.
줄곧 못마땅했다. 어째서 힘을 드러내면 안 되는가? 셈브리온은 이에샤를 검술사로서 내보이지 못하는 데에 분을 느끼면서도, 이에샤가 세상의 흐름에서 벗어나지 않았으면 했다. 귀족 여자답게 살아가기를 바랐다. 이에샤는 셈브리온의 현실적인 체념이 싫었다.
“네.”
“정말로 브링어라고?”
“그래요. 나 브링 쓸 수 있어요. 말했잖아요, 천재라고.”
미안해, 세비. 나는 아직 당신처럼 될 수는 없나 봐. 멍하니 생각했다. 처음으로 자신의 재주를 긍정한 기분은 이상했다. 홀가분하면서도 무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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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쩐지 맥주가 땡기는 밤이네요 @[email protected]~
내일은 작가가 병원에 가야 해서 못 올릴 것 같아요~
선추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