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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수는 검 한 자루-22화 (22/164)

00022 4. 기사와 귀부인 =========================

* * *

며칠 사이 이에샤는 고민에 잠겼다.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일이 많았다.

옛날에는 어떻게 아무것도 개의치 않고 살았을까? 제 앞가림을 셈브리온이 도맡아 주었다는 게 실감났다. 입맛이 썼다. 셈브리온이 없었다면 자신은 스무 살까지 허송세월만 하다가 오스터에게 쫓겨났을 것이다.

이에샤를 괴롭히는 이 중 하나는 황태자였다. ‘루시온 이벨리오노가 그대의 참석을 기다리겠소.’ 하고 이름까지 적어 보낸 쪽지는, 말하자면 영지(令旨)였다.

신년맞이 무도회란 1월 25일에 치르는 성대한 행사를 말했다. 세도가부터 약소 귀족까지, 누구나 즐길 수 있다는 점이 특이했다. 데뷔하지 않은 어린아이 또한 황자와 공주가 여는 파티로 모여들었다. 궁전 바깥에서는 평민에게 술과 음식을 나누어 줬다. 축포도 터뜨렸다. 하루뿐이어도 온 수도가 들썩이는 축제. 이에샤는 동떨어져 지냈지만, 밀레나가 새벽부터 몸치장에 열 올리는 모습은 매년 보았다.

짜증이 났다. 무도회 따위 관심 없었다. 사교계에 나갈지 말지도 결정 못 한 마당에. 그보다는 말일에 열리는 토너먼트가 기대되었다. 제국 기사단의 행사라고는 해도, 관전만으로도 재미있을 듯싶었다. 셈브리온의 수련 구경이 질리지 않는 것처럼.

무도회가 꺼려지는 까닭은 명료했다. 입고 갈 옷이 없었다. 이에샤의 옷장 안에는 여염집 아낙에게나 어울릴 원피스뿐이었다. 밀레나가 실내복으로 입는 슈미즈 드레스조차 들지 않았다. 황태자의 명령을 씹기는 힘들었다. 빚을 내서라도 드레스를 맞춰야 하나. 봉급을 땡기고 싶다고 말해야 하나. 돈이란 사람을 고달프게 만들었다. 이에샤는 저를 위하여 재산을 들어먹은 셈브리온이 존경스러워졌다.

다른 고민은…….

‘오늘도 안 오네.’

윗몸만 책상에 대고 엎어졌다. 백화 기사단의 사무라고 해 봐야, 누구를 만났고 무엇을 했는지 정리하는 게 다였다. 사무실에서 할 일이 드물었다. 이전에는 방침과 단원의 등용 문제를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러나 의논 상대가 며칠째 감감했다.

엘테르트는 몸 상태가 나쁘다며 떠난 뒤로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다. 이에샤는 탁상에 뺨을 문대었다. 게으른 꼬락서니였다. 아무러면 어떠한가? 야단칠 사람도 없는데. 어려운 낱말로 복잡한 설명을 늘어놓던 엘테르트가 사라지니, 석곡궁은 고요해졌다.

이에샤는 찜찜한 기분이 되었다. 은퇴한 근위 기사단장과 제 어디가 닮았냐고 따지고 싶었다. 라제카 공주가 얼마나 귀여운지 토로할 상대도 필요했다. 엘테르트는 이에샤의 상식을 채워 주는 선생님이기도 했었다. 발길을 뚝 끊자 허전하기 그지없었다.

이에샤 쪽에서 찾아가려 해도 모양새가 웃겼다. 엘테르트는 일 때문에 석곡궁에 드나들었지만, 이에샤는 다른 부처에 볼일이 없었으므로.

‘드레스는 어떻게 사는지도 물어보고 싶은데 말이지.’

드레스를 다루는 의상실에서 자신을 손님으로 받아 줄까? 저택에 디자이너와 재봉사를 부르려면 어떡해야 하지? 알디온 일가에 묻느니 혀를 깨무는 편이 나았다. 도움을 구할 사람은 엘테르트뿐이었다. 라제카에게도 물어보았으나, 공주는 황궁을 떠난 적이 없었다. 옷 짓는 과정을 모르기는 매한가지였다.

“으으으음…….”

앓는 소리가 입술을 비집었다.

엘테르트가 호랑가시궁에서 일할 시간이었다. 지금이라면 이에샤를 괴롭히는 두 남자―황태자와 소공작을 한꺼번에 만날 수 있으리라. 이에샤는 새로운 고민거리를 안았다. 머쓱하더라도 참고 만나러 갈 것인가, 묘안이 떠오를 때까지 골머리만 썩일 것인가.

결국은 허리를 곧추세웠다. 자리를 박찼다. 이에샤 앨저에게는 궁리보다 돌진이 어울렸다. 코트를 뒷몸으로 빙글 돌려 걸쳤다. 사무실을 나섰다.

호랑가시궁은 에브라힐 중심부에 자리했다. 동쪽으로 치우친 석곡궁에서 멀지 않았다. 한 시간가량 걸어야 하는 거리는, 종일을 쏟아부어도 둘러볼 수 없다는 황궁에서 별것도 아니었다. 이동을 돕는 이륜마차도 있었다. 이에샤는 때마침 놀던 마차를 잡아탔다.

30분을 달려서 마차가 호랑가시궁에 다다랐다. 숨을 길게 들이마셨다. 지붕도 문도 달리지 않은 차체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고양이만큼 날렵한 몸놀림에 마부가 탄성을 질렀다. 이에샤는 고갯짓으로 인사했다. 호랑가시궁 어귀로 다가갔다.

경비병이 보이지 않았다. 황태자의 별궁이 뜻밖에 무방비했다. 정원 분위기도 동쪽의 궁들과는 달랐다. 꽃이 적었고, 잎이 뾰족한 늘푸른나무가 우거졌다. 솔방울 한 개가 발에 차였다. 무심코 주워들어 보았다. 이에샤의 머리가 옆으로 기울어졌다.

이에샤는 발부리가 걸리는 일이 드물었다. 자연스럽게 장애물을 피하도록 습관이 들었으므로.

“뭔가 이상한데.”

“뭔―가―이상한데―.”

“……!”

일 초의 망설임도 없었다. 허리에 찼던 검이 오른손으로 옮겨 갔다. 자신의 혼잣말을 따라 한 목소리는 탁 트인 정원에서도 벽에 부딪친 듯이 울려 퍼졌다. 머리털이 곤두서는 줄 알았다. 오한마저 났다. 이에샤의 검에서 새파란 빛이 튀어 올랐다.

“뭔데 황태자 전하의 궁에 숨어들었느냐?”

“뭔―데 황―태자 전하의―.”

‘그것’이 입을 열기 무섭게 이에샤는 발을 굴렀다. 앞으로 쏘아 나갔다. 검은색 칼날이 그보다 훨씬 거무칙칙한 덩어리를 갈랐다.

“전하!”

시종의 이마가 땀에 젖었다. 루시온과 엘테르트는 무도회 준비가 막바지라는 이야기를 나누며, 서류를 처리하던 참이었다. 루시온이 언짢은 낯빛을 띠었다. 호랑가시궁의 시종씩이나 되어서 헐레벌떡대다니. 꾸짖고자 입을 연 순간이었다. 시종이 죽상을 했다.

“불온의 장막에 누군가가 빠졌습니다!”

“뭐라고? 갈팡질팡하지 말고 설명해라, 벌에 처하기 전에!”

루시온은 당혹해서 외쳤다. 어느 멍청이가 호랑가시궁의 수비 결계를 살피는 날 마구잡이로 들어왔단 말인가?

“하필이면 주 마법진을 점검하려는 때에 맞춰 들어온 모양이라……!”

“제자리에 앉아서 벼락도 맞을 수 있겠군, 젠장. 빨리 끄집어내라.”

“마, 마법사들이 장막을 걷는 데 적어도 20분은 걸릴 거라고, 소, 송구합니다!”

루시온은 책상을 내려치지 않으려고 애썼다.

황태자가 머무르는 호랑가시궁에는 강력한 결계가 쳐졌다. 100명의 마법사가 뭉쳐서 만들어 낸 ‘불온의 장막’은, 역심을 품은 자를 골라내 마법 공간으로 끌어들였다. 끈끈이주걱이라는 별명이 퍽 어울렸다. 그 안에서는 가득한 마력 탓으로 감각이 무뎌졌다. 몽롱한 상태에 빠진 침입자를 지킴이가 공격해 없애는 결계였다.

무시무시한 마법에는 잦은 점검이 필요했다. 마법사들이 지하의 마법진을 손질할 동안에는, 역적을 판가름하는 기능이 멈추었다. 때문에 일꾼과 경비병까지 몰아내야 했다. 에브라힐에 호랑가시궁의 아성을 모르는 자가 있을 줄이야!

루시온은 시종에게 외투를 가져오라고 시켰다. 제가 손쓸 수는 없어도, 이곳에서 벌어지는 일은 모두 파악해야 했다. 지하로 내려갈 셈이었다.

그때.

“앨저 경.”

엘테르트가 툭 내뱉었다. 낯빛이 허옇게 질려 버렸다.

“전하. 앨저 경, 그녀가, 불온의 장막을 모릅니다.”

“뭐?”

시종을 의식하여 존댓말로 고했다. 루시온은 곧바로 엘테르트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이에샤는 입궁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았다. 루시온과 엘테르트, 라제카 말고는 아는 사람도 없었다. 원래라면 엘테르트가 주의를 시켰겠으나, 석곡궁에 발길을 끊은 채였다. 사람을 바꾸라는 엘테르트와 싫다는 루시온이 줄다리기했던 것이다. 그동안 이에샤는 홀로 지냈다. 호랑가시궁의 결계를 모를 법도 했다.

“제, 제 실수입니다. 어서 꺼내 줘야 합니다!”

“진정해. 아직 거기 들어간 사람이 앨저 경인지는 확실치 않잖아. 오히려 그녀만 한 강자라면 버틸 수 있을지도 모르니 잘된 일이야.”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엘테르트가 소리질렀다. 루시온이 눈썹을 추켜올렸다. 아무리 멘델린 소공작이라고 해도 넘어갈 수 없는 태도였다.

엘테르트는 루시온의 냉정이 답답했다. 두 사람이 고집을 피우느라 이에샤가 위험해졌을지도 몰랐다. 책임감 강하고 사람이 다치는 걸 무엇보다도 경계하는 엘테르트로서는, 자신을 용서하기가 어려웠다.

“앨저 경이란 말이야.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

“대체 뭐야? 에르디. 누가 빠졌든 비상사태지, 앨저 경이라고 특별히 중한 건 아니잖아. 설마 여자라서 그래? 앨저의 무위는 너도 봤다시피…….”

“너야말로 무슨 속 편한 소리야? 지나다니는 사람이 몇인데 누가 호랑가시궁으로 들어가는 걸 못 봤겠어? 아무도 결계가 있다고 일러 주지 않을 만큼 고립된 사람이라고. 장안의 화제인 이단아가 곤궁에 빠지는 꼴을 기대했겠지!”

드러내 놓고 떠밀지 않았으니 죄책감도 없었을 테다.

비로소 루시온은 깨달았다. 엘테르트는 위험을 예방하지 못했다고 후회하는 게 아니었다. ‘의지할 곳 하나 없는 사람’을 내버려둔 데에 자책하는 것이었다. 루시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엘테르트의 꾸중대로, 제 손으로 뽑아낸 여기사의 처지에 안이했었다.

“후우, 전하. 만약 정말로 앨저 경이 장막에 빠졌다면 억울한 일을 당한 겁니다. 그녀가 잘못되는 순간 전하의 명예도, 공주님의 염원도! 여인들의 안전까지도 다 틀어져 버립니다. 제 말을 아시겠습니까?”

“그래. 마법진의 작동을 아예 멈추는 일이 있더라도 구해 내도록 하지.”

“저는 1층에서 추이를 지켜보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엘테르트는 달려나갔다. 루시온도 집무실을 나섰다. 지하로 가야 했다.

바닥에서 검은 덩어리가 꿈틀거렸다. 그림자 같기도 하고, 감초 사탕 같기도 한 그것은 검이 통하지 않았다. 찢어발기면 조각조각이 저마다 움직였다. 이에샤가 무어라 말할 때마다 따라 하는 소리가 메아리쳤다. 소름 끼치는 음색으로, 기묘하게 늘어지는 어조로. 이에샤는 악담을 눌러 참았다.

덩어리들이 모습을 바꾸었다. 분틀에서 면을 뽑듯이 여러 가닥의 덩굴을 내뿜었다. 덩굴이 채찍처럼 쇄도해 왔다. 이에샤는 뱅글 몸을 틀었다. 양날검에 브링까지 실리니 절삭력이 무시무시했다. 두어 번 휘두름으로써 모든 공격을 끊어 버렸다.

후드득 떨어진 덩굴들은 또 제각기 살아났다. 숫자가 너덧 배로 뛰어올랐다.

“끝이 없잖아!”

“끝―이 없―잖아―.”

“닥쳐!”

“닥―.”

이에샤는 지긋지긋한 흉내질이 끝나기도 전에 놈들 틈으로 달려들었다. 브링을 모았다. 이번에는 잘라 내지 않을 셈이었다. 칼몸이 버들버들 떨릴 정도의 브링으로, 한 놈을 휘몰았다. 파르스름한 빛이 허공에 십자 궤적을 남겼다.

아아아아아아.

섬뜩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온 힘으로 베어 버린 덩어리는 한 줌조차 남지 않았다. 이 방법이 정답인 모양이었다. 승기가 보였다. 이에샤는 몸속에 쌓인 모든 브링을 끌어올렸다.

‘황태자 전하를 찾아야 해. 이것들이 뭔진 모르겠지만 전하를 노리는 거라면……. 그리고 그 사람도!’

머릿속에 엘테르트의 상이 그려졌다. 반듯한 이목구비. 이에샤보다 말갛고 미끈한 살갗. 엘테르트는 키도 크고 탄탄해 보이는 몸을 지녔으나, 손에 박인 굳은살은 펜대가 만든 것뿐이었다. 폭신폭신한 금빛 새 같은 남자였다. 몸보다 말로 나아가는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이따위 이지라곤 없이 말꼬리를 물 줄밖에 모르는 것과는 싸울 수 없다. 이런 것들을 상대할 지체가 아니다. 엘테르트 멘델린이 뜻을 펼치는 과정에는 이에샤가 가지지 못한 기품과 관용이 있어서,

아아아아아. 아아아아아아!

지켜 주고 싶어지고 만다. 그 부드러움이 어디까지 통할지가 궁금해진다.

이에샤는 세 개 남은 덩어리를 노려보았다. 이만치 브링을 쓰기는 처음이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이에샤의 힘은 다하지 않았다. 더 싸울 수 있었다.

============================ 작품 후기 ============================

이에샤가 황태자(+에르디)를 걱정하며 썰어버린 그들이 황태자의 보디가드였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선추코 모두모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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