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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수는 검 한 자루-21화 (21/164)

00021 4. 기사와 귀부인 =========================

엘테르트는 뒷말을 잇지 못했다. 이에샤를 쳐다보면서도 고개를 비끼고 싶어 미치겠다는 얼굴로 머뭇거렸다. 이에샤의 속에서 싫증이 피어올랐다. 놀란 모양이라 다그치지는 않았으나, 갑갑했다. 똑 부러지던 놈이 이러니까 더더욱.

엘테르트는 주먹을 그러쥐었다. 숨이 막혔다. 이에샤의 섬세하면서도 다부진 손이 목울대를 조르는 듯했다. 의식이 ‘무언가’에 짓눌렸다. 이에샤로부터 풍기는 느낌이 케케묵은 기억의 옹이를 건드렸다. 돌이키기 싫은 날을 떠오르게 했다.

짝!

시야가 또렷해졌다. 이에샤가 손뼉을 마주댄 채였다. 의아쩍은 눈길로 엘테르트를 보았다. 이에샤의 박수 소리에 정신을 차린 엘테르트는 “하!” 하고 숨을 토해 냈다. 손바닥에 땀이 배었다.

“멘델린 경, 괜찮으세요? 왜 그래요?”

“앨저 경.”

“예.”

이에샤가 멀겋게 대답했다. 짙은 푸른색 눈동자가 엘테르트를 비추었다. 잔잔한 모습이었다. 위압하려 들지도 않았고, 노여워하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엘테르트는 어깨가 움츠러들까 봐 용썼다.

지금까지 자신을 괴롭힌 의문점이 있었다. 물어봐야 쓸 성싶었다.

“경은, 어고트 프리슬리와 아는 사이입니까?”

귀에 익은 이름인데. 이에샤는 눈살을 찌푸렸다. 머릿속을 들추어 보았다. 끝내 ‘어고트 프리슬리’가 누구인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확실한 점은, 모르는 사람이었다. 이름은 들었어도 만난 적은 없는 사람.

“친족이라거나 외척이라거나, 하다못해 선대에 프리슬리 가와 연이 있었다든가.”

“전혀 모릅니다만. 가문도 들어 본 적 없어요. 누구길래 그래요?”

엘테르트는 말로 나타내기 힘든 기분이 되었다. 뜻밖이었다. 이에샤가 어고트의 지인이 아니라는 것도 그러했지만, 기사이면서 어고트를 모른다는 게 황당했다. 현대 제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었으므로.

“전대 근위 기사단장입니다. 델페레타 사상 최강의 검사로 꼽히는.”

“아! 맞아, 그 얘기는 알아요. 갑작스러워서 기억이 안 났어요.”

“나는 당신이 분명 프리슬리, 경과 혈연 관계가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금시초문이랍니다. 전혀 그런 거 없어요.”

엘테르트 또한 알디온이나 앨저가 프리슬리와 교분이 있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다. 하나 이에샤를 볼 때마다 어고트의 모습이 되살아나는 듯했다. 속이 메슥거려 왔다. 백화 기사단 문제로 의논할 때, 이에샤의 자질구레한 팔짓조차도 어고트를 연상시켰다.

수련을 마치고 돌아온 이에샤는 지독히도 어고트와 닮았다. 똑같은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 악마적인 폭력성을 지닌 남자와. 욕지기가 치밀었다.

“미안합니다. 나는, 나는 가 보겠습니다. 몸이 좋지 않아서 쉬어야겠군요.”

“아, 그래요. 가 보세요. 제가 보기에도 지금 멘델린 경은 환자 같네요.”

“……정말로 미안합니다. 나중에 다시 오죠.”

엘테르트는 서둘렀다. 이에샤와 같은 자리에 머무르고 싶지 않았다. 한 손으로 입가를 움키고 이에샤의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이에샤는 어깨를 으쓱했다.

“대체 왜 온 거람?”

이해할 수 없는 남자였다. 첫 만남부터 지금까지 쭉.

라제카 공주는 두세 날에 한 번씩 석곡궁으로 놀러 왔다. 사무실에서 책을 읽거나 이에샤가 수련하는 모습을 구경했다. 늘 깜찍한 차림새를 갖추었다. 오늘은 연두색 공단 위로 반투명한 레이스가 늘어진 드레스를 입었다. 1월에 핀 봄꽃이 따로 없었다. 이에샤는 밀레나가 아리땁게 꾸밀 때는 심드렁했지만, 라제카의 치장은 흐뭇이 여겼다.

라제카가 사무실 바닥에 하얀 깔개를 펼쳤다. 바구니에다 티세트와 간식까지 챙겨 왔다. 이에샤는―총무부에 말해서 테이블을 하나 들여놔야겠다고 생각하며―피크닉 기분을 내는 라제카를 지켜보았다. 말비다는 공주님을 끌고 나가고 싶어서 근질거린다는 표정으로 문가에 섰다.

라제카가 찻잔을 입가로 가져갔다.

“프리슬리 경이요?”

“예. 어고트 프리슬리 경. 공주님도 아시는 분인가요?”

“에버렛 경이 브링어가 되자 자리를 넘기고 은퇴했어요. 라제카가 열 살 때요. 꼬장꼬장한 노기사였죠.”

그렇게 말하고 과일 향이 나는 차를 들이마셨다. 좋아하는 차인데도 미간에 주름이 팼다.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이에샤는 라제카가 전 근위 기사단장을 좋아하지 않는구나, 알아차렸다.

라제카는 얼마간 뜸을 들였다. 노릇한 버터 쿠키를 찻숟가락으로 두드려 부쉈다. 이에샤는 라제카의 말문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라제카는 에버렛 경이 정말 좋아요.”

“네? 에버렛 경?”

“그처럼 사근사근한 기사님은 드물거든요. 에버렛 경이 제국 기사단을 이끌게 된 뒤로 기사들이 아무렇지 않게 폭력을 휘두르는 일도 줄어들었어요. 에버렛 경은 약자를 위할 줄 아는 기사 중의 기사랍니다.”

“공주님. 저는 은퇴한 프리슬리 경이 궁금한 겁니다만…….”

“프리슬리 경은 에버렛 경과 정반대였어요.”

앳된 목소리가 딱딱해졌다. 살며시 떨리기까지 했다.

지금보다 어릴 적, 라제카는 황궁이 살얼음판 같다고 생각했었다. 기사 몇이 괜스레 검을 절그럭거렸다. 몇은 길 가는 하녀를 가로막고 우쭐댔다. 관리를 윽박지르는 몇도 있었다. 몇몇이 모이고 모여―대부분의 기사가 그러했다.

“프리슬리 경은 황가에는 충직했지만요, 세상이 무력으로 돌아간다고 믿는 사람이었어요. 힘이 없다면 굴종해야 하고 힘있는 자는 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그래서 부하가 문관을 때려도 감싸고돌았지요. 라제카는 그가 너무너무 싫었답니다.”

“아…….”

“제국 최강의 브링어라는 점 때문에 섣불리 건드리지도 못했어요. 지금도 기사단장들이 왕년의 프리슬리 경 발끝도 못 따라간다는 소리가 돌 정도인걸요.”

이에샤는 고민에 잠겼다. 모르긴 몰라도, 체사로가 셈브리온을 이기지 못함은 분명했다. 주먹을 한 번 부딪쳤을 뿐이지만 장담할 수 있었다. 셈브리온의 역량은 델페레타 근위 기사단장을 까마득하게 앞질렀다. 이에샤의 스승은 브링어치고도 빼어난 것이 틀림없었다. 어고트 프리슬리와 견주어 보면 어떨까?

솔직히, 이에샤 자신도 체사로와 싸워봄 직했다. 이에샤는 제 재능이 어림잡은 바보다 터무니없을지도 모른다고 깨달았다.

“프리슬리 경은 천재였지만 기사에 어울리는 사람은 아니었어요. 라제카는 그런 자가 권력의 좌에 앉아선 안 된다고 생각해요. 에버렛 경이야말로 근위 기사단장 자리에 더없이 어울리죠.”

“그렇군요.”

“앨저 경은 왜 갑자기 프리슬리 경을 궁금해하나요?”

이에샤는 대답을 삼켰다.

엘테르트의 물음을 돌이켜보았다. 어고트와 친척이 아니냐는 것은, 두 사람이 닮았다는 뜻일까? 인상이 구겨졌다. 짜증이 솟았다. 라제카의 말로 미루어 보건대 어고트는 힘자랑하는 머저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자와 저를 한데 묶다니! 엘테르트 멘델린은 참으로 무례한 자식이었다.

“그냥 어떤 사람한테 이름을 들었습니다.”

“어떤 사람? 누군데요?”

“그냥, 어떤 싹수없는 남자가 있답니다. 공주님.”

이에샤에게는 열네 살짜리 공주 앞에서 사촌오빠를 헐뜯지 않을 만큼의 주변머리가 있었다. 빙그레하며 “공주님이 신경 쓰실 가치도 없는 작자예요.” 하고 못박았다―진심이었다. 라제카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에샤는 화두를 돌리기로 했다.

“프리슬리 경은 지금 뭘 하나요?”

“셰올의 자기 영지에서 쉰다더군요. 재작년까지 제자를 받아 가르치기도 했다는데, 노쇠한 모양이에요. 최강의 브링어라도 세월을 비껴갈 수는 없나 봐요.”

라제카가 애늙은이 같은 소리를 조잘거렸다.

이에샤는 한숨지었다. 셰올이라면 델페레타 서부에서도 구석진 지방이었다. 수도에서 한 달도 넘게 걸리리라. 어고트를 만날 수는 없을 듯했다. 어느 부분이 저와 비슷한지 궁금했으나, 그만 파고들기로 했다. 퇴역 기사와 첫걸음을 내디딘 신생 기사단의 단장은 평행선처럼 동떨어진 사이였으니.

“그러고 보니 앨저 경은 기사단장 중에선 유일하게 브링어가 아니네요.”

“……예? 네? 아, 뭐라고 하셨죠?”

“브링어요, 브링어! 남들이 하는 말은 괘념치 마세요. 백화 기사단은 제국 기사단하고 전혀 다른 조직이니까요.”

잠깐 얼이 빠졌다.

제국 기사단의 여섯 단장은 모두 브링어였다. 라제카는 그것을 떠올리고, 이에샤를 북돋워 주려고 한 모양이었다. 이에샤는 어설프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오늘 오전만 해도 석곡궁의 연무장에서는 새파란 브링이 춤추었다.

“……루시온.”

“오, 빨리 다녀왔네? 앨저 경한테 말은 잘 전했, 에르디?”

루시온은 깜짝 놀랐다. 심부름을 다녀온 엘테르트가 집무실로 들어서자마자 무너진 탓이었다. 엘테르트는 출입문을 등지고 주저앉았다. 이마를 부여잡았다. 호랑가시궁에 어떻게 다다랐는지도 가물가물했다. 루시온은 서류를 집어던졌다. 의자에서 일어났다.

“왜 그래? 앨저가 주먹질이라도 했냐?”

엘테르트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목소리에 걱정기가 스몄다. 엘테르트가 얼굴을 들었다. 눈빛이 불안스레 흔들렸다. 루시온은 이에샤가 주먹질이 아니라, 칼부림이라도 했는가 의문하였다. 멘델린 소공작이 이 정도로 침착을 잃는 일은 드물었다.

헐떡이던 숨결이 가라앉았다. 낯빛도 차츰 돌아왔다. 얘기해 봐. 루시온이 까딱, 턱짓하며 말했다.

“앨저 경, 말이야.”

“둘이 싸웠냐? 어느 쪽이 먼저 시비 걸었어?”

“스승이 누구지? 너 안다면서.”

엘테르트는 루시온의 농지거리를 없는 셈 쳤다. 루시온은 입을 다물었다. 엘테르트의 물음에 담긴 뜻을 헤아릴 수 없었으므로.

이에샤의 스승이라면 만나 본 적까지 있었다. 하나 답하기가 껄끄러웠다. 귀족 여자가 용병과 어울린다니! 소문이라도 퍼졌다가는 큰일이었다. 엘테르트가 남의 이야기를 떠들고 다닐 녀석은 아니었지만, 이에샤에 관해서는 냉정치 못했으니 말이다.

“그건 좀, 내 입으로 말하긴 뭣한데.”

“나한테 말하기 어려운 사람이야?”

“뭐라고 해야 하나. 앨저 경 스승이 좀 독특한 자라서.”

엘테르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속에서 확신이 섰다. 애끓이던 문제의 답을 구해 냈다―달갑지 않은 쪽으로. 체사로와 루시온이 이에샤를 천거한 까닭을 알 성싶었다.

근위 기사단장과 황태자가 아는 사람. 엘테르트에게 가르치지 못할 사람. 검술에 능한 사람. 조각을 맞추다 보면, 누군가가 그려졌다.

이에샤가 거짓말한 것이 틀림없었다. “어고트 프리슬리를 모른다.”라고.

“……그래. 알겠다.”

“도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 앨저한테 말은 잘 전했어?”

“나중에, 아니, 아니다. 딴 사람 보내. 난 그 여자랑 더 얽히고 싶지 않으니까. 백화 기사단 담당도 다른 사람으로 바꿔 줘.”

“뭐?”

루시온이 눈을 치켜떴다. 이 자식 갑자기 왜 이래? 마음 같아서는 짤래짤래 흔들며 캐묻고 싶었다. 엘테르트의 안색이 납덩이같지만 않았다면 그리했을 것이다. 엘테르트에게는 휴식이 필요해 보였다.

“일단 오늘은 휴게실에서 좀 추스르고 퇴궐해. 나중에 다시 얘기하지.”

“루시온!”

“아, 사람을 바꾸더라도 인수인계는 해야 할 거 아니야? 당장 가서 식은땀 닦고 잠이나 자!”

엘테르트가 울컥한 표정을 지었다. 루시온은 모르는 체 딴전을 피웠다. 엘테르트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관두고, 비척비척 몸을 일으켰다. 집무실을 뛰쳐나갔다. 복도를 지나던 시종이 고개를 수그렸다.

루시온은 아쉬운 대로 시종에게 손짓했다. 방 안쪽의 책상으로 돌아갔다. 시종도 조용히 따라왔다.

“하명하십시오, 전하.”

“전령 역할을 해 줘야겠다. 석곡궁의 앨저 기사단장한테 전해 다오.”

하얀 종잇조각을 꺼냈다. 펜을 미끄러뜨렸다. 유려한 필기체가 이뤄져 나갔다.

시종은 공손히 절한 다음, 황태자의 친필로 ‘신년맞이 무도회 초청’이라 적힌 카드를 들고 떠났다.

============================ 작품 후기 ============================

셈브리온을 이상한 놈과 혼동한 엘테르트...

에르디가 기사 극혐하는 이유에 관해서는 거의 다 암시가 된 거 같네요~ 자세한 사정은 차근차근 풀어 가고 싶습니다~

어제는 친구와 약속이 있어서 나가 노느라 올리지 못했어요...

선추코 감사합니다!!!

+) 오전 8시 30분, 누락된 문장을 발견해서 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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