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20 4. 기사와 귀부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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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단장과 황족을 지키는 근위 기사가 아니라면, 기사의 출근은 자유로웠다. 대부분의 이에게 다스릴―또는 이어받을―가문이 있었다. 할일이 많았다. 기사로서 입궁하는 날은 달에 열 번만 채우면 되었다. 행사가 열리거나 귀빈이라도 맞지 않는 한 널널한 것이 제국 기사였다.
백화 기사단은 그렇지 않았다. 임무의 궤가 다르니만큼 이에샤는 매일 에브라힐 궁전으로 나가야 했다. 언제 도움을 구하는 여자가 찾아올지 몰랐다. 이에샤 혼자서 살펴야 하는 ‘황궁 여인’이 수두룩한 까닭도 있었다. 이에샤는 바쁜 게 싫지 않았다. 고단하기는 해도, 세상과 부대끼며 살겠다 다짐했으니 바깥에 나가는 편이 나았다.
셈브리온은 외로운 내색을 하지 않았다. 이에샤가 평범하게 살아가기를 누구보다도 바란 사람이 셈브리온이었다. 반가워할 만한 변화였다. 아침마다 이에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잘하고 와.” 하고 말해 주는 일도 썩 괜찮았다. 어린 딸을 학교에 보내는 기분이 이러할까? 이에샤가 나가면 셈브리온도 피올라 거리의 새집을 손보러 향했다. 다음주에는 이사할 수 있을 성싶었다.
이에샤가 백화 기사단장으로 일한 지 보름. 적응은 순조로웠다. 프록코트를 여성복 양식에 맞추어 고친 정복이 이에샤와 어울렸다. 훤칠하고 날씬한 몸태를 돋보이게 했다. 이에샤를 좋아하지 않는 알디온의 하녀들조차 “큰아가씨가 저렇게 근사하신 줄은 몰랐어.” 하고 속닥댈 정도였다.
“그 싫어서 죽겠다는 표정 좀 어떻게 해 봐.”
“네 탓이지 않습니까? 전하.”
“존대랑 반말, 하나만 해라. 너 진짜 대놓고 화내지도 않고 살살 비꼬기만 하니까 성가셔 죽겠다.”
황태자의 거처―호랑가시궁. 루시온은 서류를 들여다보는 중이었다. 옆에서 엘테르트가 설명하거나 첨언하거나 하며 거들었다. 두 사람은 오전마다 정무를 함께 보았다. 이 시간은 루시온이 즉위하고 나서도 이어지리라.
요즈음 루시온은 엘테르트가 달갑지 않았다. 낯빛은 잔잔한데, 눈에 힘이 들어갔다. 드러내 놓고 인상을 구기는 것보다 신경쓰였다. 끝내 루시온은 “아오!” 하며 깃펜을 내동댕이쳐 버렸다. 종잇장에 잉크가 튀었다. 엘테르트의 눈썹이 꿈틀했다.
“앨저를 돕는 일이 그렇게 고까워? 이유가 뭔데? 도대체 왜 그 여자 만나고 올 때마다 갖은 짜증을 다 부리는 거야?”
“고깝지 않아. 앨저 경은 일머리도 잘 이해하고 근면하니까. 누가 시키지 않아도 곤란해하는 부인이 보이면 나서서 돕더군.”
“그렇게 일 잘하는 앨저 경을,”
손을 들어올렸다. 제 미간을 톡톡 두드려 보였다. 엘테르트의 우거지상을 지적하는 몸짓이었다.
“왜 싫어하냐니까? 친애하는 사촌형님.”
“…….”
“칙칙한 사내놈들 모아 놓고 회의하는 것보다야 예쁜 여자랑 농담 따먹기도 하는 편이 기분이 나잖아.”
엘테르트는 루시온의 말본새에 불편을 느꼈다.
이에샤 앨저는 당당한 기사였다. 한 사람 몫을 해내는. 솔직히 엘테르트의 기대를 넘어섰다. 교양이나 상식이 모자라기는 했지만, 알려 주면 받아들였다. 예법은 제대로 가르침 받은 모양이었다. 나무랄 데 없었다. 눈치가 빨랐고, 성실하면서도 요령이 좋았다. 사내에 문관이었다면 아끼는 부하가 됐을지도 몰랐다.
그런 사람을 우스갯거리로 삼다니 마뜩잖았다. 루시온도 진심은 아니리라. 이에샤의 가치를 알아보고 탐낸 쪽은 루시온이었으니까. 백화 기사단의 보고서도 다른 일의 두 배는 꼼꼼하게 읽었다. 다만, 천성이 짓궂은 탓일 터였다.
이에샤는 입지가 좁았다. 괜스레 황태자의 입에 오르내려서 이로울 것이 없었다. 엘테르트는 걱정스러웠다.
‘지금 황궁에서 가장 위태로운 인물이니까.’
약자를 벼랑 끝으로 몰고 가는 짓은 질색이었다. 사사로운 감정은 제쳐두고, 이에샤의 처지는 배려받을 필요가 있었다. 기실 이에샤와 만날 때마다 속이 메스꺼운 까닭을 엘테르트 자신도 몰랐다.
“앨저 경이라고 똑바로 부르시지요, 전하. 한 기사단의 단장이잖아. ‘예쁜 여자’가 아니라.”
“오! 에르디는 앨저 경이 못생겼다고 생각하나 보군?”
“그런 뜻이…….”
루시온이 말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엘테르트의 낯에 노기가 번졌다. 황태자는 냉철하고 생각도 깊었으나, 겉으로 드러내는 태도가 싹수없었다. 엘테르트는 루시온을 윗전이자 사촌으로 경애했지만 도통 성격이 맞지 않았다.
“그런 뜻이 아니잖아.” 하고 말을 맺으려던 참이었다. 머릿속에 이에샤의 모습이 그려졌다. 루시온이 예쁘다, 예쁘다 해 대니 도리가 없었다. 돌이켜보면 지난주에도 두어 번 미인이라고 칭찬했었다. 엘테르트는 고개를 기울였다.
“루시온, 앨저 경한테 호감이라도 있어? 예쁘단 말 여러 번 한다.”
“엉? 호감은 무슨. 매력적이잖아. 머리만 기르면 인기 좋을 얼굴인데.”
“그, 런가. 난 잘 모르겠군.”
엘테르트가 보기에 이에샤는 범상했다. 콧대가 미끈한 걸 빼면 눈길을 잡아끄는 구석이 없었다. 이복동생의 미모를 떠올리면 더욱 그랬다. 검술 수련 시간이 되면 나름대로 귀여운 표정을 지었지만, 케이크를 먹는 어린아이와 닮았기 때문이다. 얼굴이 예쁘냐 한다면 글쎄.
루시온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엘테르트의 생각이 손에 잡힐 듯싶었다. 하기야 엘테르트의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만도 했다. 델페레타 최고의 미인이었다는 엘로나 공주를 어머니로 둔 놈이 아닌가? 엘로나는 지금도 젊은 아가씨 못지않았다.
엘테르트는 “그만.” 하고 잘랐다. 루시온의 눈이 삐었든 제가 장님이든 중요치 않았다. 이에샤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기사로서의 자질로 평가받아야 할 사람이었다. 엘테르트는 책상에 뒹구는 깃펜을 집어 들었다.
“그녀가 그렇게 예쁘다면 나중에 본인한테 칭찬해. 없는 자리에서 우리끼리 이러쿵저러쿵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다.”
“아, 그건 동감. 근데 내가 앨저를 보러 갈 시간이 전혀 안 나잖아.”
“앨저 ‘경’.”
딱딱하게 호칭을 바로잡아 주었다. 깃펜을 루시온에게 건넸다. 두 사람은 다시 서류를 붙잡았다.
멀리서 이야깃거리가 되었다고는 상상하지 못하고―이에샤는 수련에 파묻혔다.
석곡궁 연무장에는 만반의 도구가 갖추어졌다. 찾는 물건이 있을 때는 내무부에 부탁하면 되었다. 기사가 되어서 좋았다. 이토록 멋진 연무장을 얻게 될 줄이야! 한동안은 이에샤의 독차지이기까지 했다.
검은색 칼몸이 떨렸다. 배 깊숙이에서 세찬 기운이 치밀어 올랐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팽팽 순환했다. 이에샤는 감각을 가다듬었다. 저는 브링을 세밀하게 다루지 못했다. 셈브리온의 브링은 고요하고, 은밀했다. 검에 브링을 싣더라도 이에샤처럼 파르스름한 빛이 눈에 띄지 않았다.
「팔다리에 브링을 모으는 거랑 같은 느낌으로 해 봐, 이-샤.」
조언을 얻기는 했으나 이에샤의 귀에는 “헤엄치는 법? 물의 흐름을 이해해 봐.” 정도로 들렸다.
브링어라는 사실을 숨기고 살기 위하여, 브링을 갈무리할 줄 알아야 편할 성싶었다. 이에샤는 제국 기사를 이기고도 시험에서 떨어졌던 일을 기억했다. 브링을 내보이더라도 간교한 속임수로 몰리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사내들의 질투란 어쩜 그리도 거무칙칙한지.
‘세상 사람의 표준이 세비가 아니라 알디온이라고 생각해야 했어.’
눈앞에 오스터가 섰다고 가정해 보았다. 한 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다릿심을 주었다. 팔을 가로로 저었다. 이에샤의 검이 허공을 그었다. 새파란 기운이 꽃밭에 뿌려 튀어 오르는 물방울처럼 흐트러졌다. 한숨이 새었다. 또 실패했다. 아름다운 광경이 펼쳐지기는 했으나, 싸우는 기술이 아름다워서 무엇하겠는가?
“내 몸에 브링을 모은다고 몸이 파래지지는 않듯이…….”
셈브리온의 가르침을 되뇌었다. 검술을 닦다가 벽에 부딪치기는 처음 같았다. 그동안은 가로막히는 일 없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 낼 수 있었으므로.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으으으. 역시 제국인이 용병의 경험을 따라잡기는 무리인가?”
혼잣말이 흘러나왔다.
셈브리온은 대부분의 브링어가 브링을 감추지 못한다고 말했다. 저는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싸움에 임하는 때가 잦았기에, 익힐 수밖에 없었다고. 알 만했다. 이에샤 또한 기사단 입단 시험 전까지는 브링을 감추려 하지 않았으니까.
‘세비가 할 수 있는 건 나도 할 수 있어야 해. 더 나아가고 싶어. 더 높은 경지로.’
목이 타는 듯했다. 열망이 피어올랐다. 이에샤는 검술을 사랑했다. 쉽고 보람찬 공부에서 생활로까지 바뀐 검술의, 끝을 보고 싶었다. 누구도 깨닫지 못한 오의를 거머쥐고 싶었다. 스승인 셈브리온도 뛰어넘고, 세상 모든 검술사의 정점에 서기를!
“더, 더, 더.”
중얼중얼하며 금방과 같이 검을 휘둘렀다. 이에샤의 가로 베기는 검술을 아는 자가 본다면 놀라서 자빠질 수준이었다. 한 번, 한 치도 검로가 어긋나지 않았다. 수십 번을 자로 잰 양 일정한 궤도로 베어 냈다. 칼끝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움직일 때마다 타닥타닥 브링이 튀었다. 맑은 날에 번개가 치는 것만 같았다.
“내가 최고가 될 거야!”
다짐의 말을 뱉으며 베기를 마쳤다. 이에샤는 검에 한하여 정확했다. 칼몸을 내려뜨리자마자, 정각을 알리는 종이 치기 시작했다. 오전 수련 시간이 끝났다.
“멘델린 남작?”
사무실로 돌아오자 뜻밖의 사람이 보였다. 며칠 사이 익숙해진 금발의 청년. 엘테르트는 응접 소파에 앉은 채였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일어났다. 문 쪽으로 돌아섰다. 이에샤에게 전할 말이 있었다. 찾아왔다가―스스로 정해 준―수련 시간임을 깨닫고 기다리던 차였다.
이에샤는 ‘씻고 올 걸 그랬나?’ 하고 머쓱한 기분에 휩싸였다. 수련을 마치자마자 온 탓에 셔츠는 딱 달라붙었고, 땀냄새가 나는 듯도 했다. 옷을 갈아입고 와도 되겠습니까. 물어보기 위하여 엘테르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그래요? 몸 안 좋아요?”
“아, 아니, 저는.”
엘테르트가 떠듬거렸다. 얼빠진 꼬락서니였다. 이에샤로부터 시선을 떼지 못했다. 낯빛이 백지장처럼 바랬다. 이에샤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엘테르트의 모습이 눈에 익었다. 언제 보았더라?
‘아, 시험.’
기억났다. 기사단 입단 시험 때, 대연무장에서 이에샤가 싸우는 걸 지켜보고도 저러했었다. 엘테르트는 충격에 빠진 것 같았다. 겁에 질린 듯이 보이기도 했다. 이에샤로서는 영문을 모를 노릇이었다.
한참 만에야 엘테르트의 말문이 떨어졌다.
“앨저, 경.”
“네. 말해요.”
“경은, 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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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테르트는 당사자가 없는 자리에서 뒷말 나오는 일은 뭐든 싫어해요
꽤 결벽적인 남자입니다...
어느덧 20화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