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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수는 검 한 자루-19화 (19/164)

00019 4. 기사와 귀부인 =========================

베빈은 허풍선이라도 보는 듯했다. 눈빛에 불신이 그득했다. 이에샤는 쓴웃음을 흘렸다. 수상쩍어할 만도 했다. 모임이 열린 객실에는 들어가지도 않았으니. 입다물고 앞장에 섰다. 베빈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에샤가 성큼성큼 걸어, 정확히 자신이 머물렀던 살롱 앞에 멈춘 까닭이었다.

“여기, 맞습니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이에샤는 뿌듯한 낯빛을 떠올렸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재주를 내보이는 일은 즐거웠다. 셈브리온의 안녕을 위하여 참는다뿐이지, 자기 자랑은 해 줘야 하는 법이었다. 젊은 여자가 힘을 떨치더라도 솜이 물 빨아들이듯 받아들여진다면 좋을 텐데.

객실은 빈 채였다. 문을 열어젖혔다. 청소부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베빈은 당황했으나, 이에샤는 스스럼없었다. 100m 밖에서 떠드는 소리도 듣는 몸이었다. 벽 너머의 인기척쯤이야. 베빈이 따라 들어오며 “이미 찾아본 곳인걸요.” 하고 한숨지었다.

“찾아보셨다고 해도 말이죠.”

이에샤는 소파 틈을 살피거나, 양탄자를 들추거나 하지 않았다. 벽 귀퉁이로 다가갔다. 커다란 꽃병이 놓였다. 이파리가 천장까지 닿는 관엽 식물이 심어졌다. 뿌리는 고동빛 상토로 뒤덮였다. 그 밑에서 귀금속의 존재감이 느껴졌다. 흙이 묻는 것도 아랑곳없이 손으로 헤집었다.

“이런 데까지 뒤져 보진 않으셨을 테니까.”

“어, 어떻게?”

“제가 눈만큼 감도 좋거든요.”

백금 두 줄로 이루어진 고리 사이에 다이아몬드가 박힌 반지를 훅, 불었다. 흙먼지가 떨어져 나갔다. 베빈에게 넘겨주었다. 베빈은 울음을 터뜨릴 듯한 얼굴로 받아들었다. 자신의 결혼 반지가 왜 나무 밑에서 나왔단 말인가? 이에샤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자리를 비운 적이 있으시죠?”

“네. 자, 잠시, 흑, 화장을 고치러…….”

“그때 떨어뜨리신 걸 누가 감췄나 봅니다.”

작정하고 빼돌렸거나. 베빈의 입술이 걸레짝이 될 법한 말은 삼켰다. 초조하면 아랫입술을 물어뜯는 모양이었다. 부르트고 갈라진 자리에 핏물이 고여서 안쓰러웠다.

결혼한 지 반년. 아가씨의 모임에서 부인의 모임으로 옮긴 때도 최근이리라. 남에게 원한을 사고 견딜 배짱은 없어 보였다. 괴롭힘당하는 걸까? 귀족 여자의 표본이 밀레나와 같다면, 가능성 있는 일이었다.

베빈은 어깨를 떨며 반지를 갈무리했다. 들고 다니던 퀼팅 백에 집어넣었다. 손가락에 끼우지는 않았다. 반지가 없어진 일로 그토록 두려워했으면서, 뜻밖이었다.

“끼고 계시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다시 잃어버리지 않게.”

“아, 아뇨. 저기, 장갑을 벗는 게 부끄러워요. 제가 손이 못났거든요. 경께서 돌아가시면 끼울 거랍니다.”

“그렇습니까? 제가 보기엔 예쁘기만 한데.”

이에샤가 능청스레 칭찬을 건넸다. 베빈은 입매를 휘었다. 힘겹게나마 웃음을 보여 주었다.

“부인께 도움이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또 곤란한 일이 있다면 언제든 석곡궁을 찾아 주십시오.”

이에샤는 가슴만 숙여서 인사했다. 마차까지 배웅할까도 했지만, 베빈이 바라지 않는 성싶었다. 떠나 달라는 시선이 느껴졌다.

“정말 감사해요, 앨저 경.”

시치미를 떼고 참견하는 짓은 성미에 안 맞았다. 이에샤는 의구심을 품지 않고, 베빈과 헤어졌다.

정신없는 하루였다. 할일이 많지도 않았는데 어지러이 흘러가 버렸다. 라제카 공주와의 만남이 몇 달은 지난 듯 느껴졌다. 베빈을 도와준 일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침에 누구를 만났던가? 맞아, 멘델린이 데리러 왔지. 언제 헤어졌더라? 연무장을 같이 보러 갔나? 아니야, 먼저 돌아갔어. 이에샤는 반쯤 꿈결에 잠긴 채 삯마차에서 내렸다.

피곤했다. 들어가 쉬고 싶다는 마음이 굴뚝같았다. 셈브리온에게 오늘 무슨 일들을 겪었는지 읊을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그래서 꿈을 꾸는 줄 알았다.

“많이 지쳐 보이네.”

“……너.”

비현실적인 광경에 대답이 늦었다.

이에샤의 침대는 작았다. 못 써먹을 물건은 아니었으나, 열서너 살이면 졸업할 크기였다. 일곱 살 무렵에도 쓰던 것이니 당연했다. 알디온을 나간 동안 손질되지 않은 캐노피는 삭아서 떼어 버렸다. 그 침대에 걸터앉은 밀레나가 곱다랗기 그지없어서, 좁은 방이 꽃그늘처럼 보였다.

밀레나가 이에샤를 올려다보았다. 자매는 아버지로부터 푸른 눈동자를 물려받았지만, 채도가 달랐다. 닮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이에샤는 밀레나의 눈이 싫었다. 얼굴에 유리구슬 둘을 박은 인형 같아서 꺼림칙했다.

“어땠어? 에브라힐은 정말 크지 않아? 몇 번을 가도 갈 때마다 새로운 곳이 보여.”

“나가. 피곤해.”

“이제부터 언니는 매일 가겠지? 시녀나 하녀도 아닌데 마음대로 궁에 드나드는 여자는 이에샤 언니뿐일 거야.”

“내 말 안 들려?”

대화가 맞물리지 않았다. 이에샤가 신경질을 부렸다. 밀레나는 이에샤를 보면서도, 이에샤 따위 안중에 없다는 양 굴었다. 후후 웃기까지 했다. 놀러 온 꼬마 도련님에게 풀꽃을 받았을 때와 비슷한 미소였다.

이에샤는 눈매를 일그러뜨렸다. 술이라도 마셨는가? 샴페인 한두 잔에 취하는 주량이라고 들은 적 있었다.

“포도주라도 한 병 비웠니? 성질 긁지 말고 나가라니까.”

“나 멀쩡해. 언니랑 얘기하려고 기다린 거야.”

“왜 자꾸 날 기다려? 할 일 없어? 그럼 가서 꽃꽂이나 해.”

“그렇게 무시하지 마. 언니는 포컬이랑 필러의 차이도 모르잖아.”

이에샤의 눈이 동그래졌다. 졸음이 달아났다. 포컬 포인트니, 필러 플라워니 하는 낱말보다 밀레나의 태도가 낯설었다. 남을 앞에 두고 가시를 세우다니! 천치처럼 웃고 가련하게 울며 사람의 마음을 주무르는 것이 밀레나의 사교술이었다. 면박을 당하더라도 “내가 잘못했어요.” 하고 입가를 움키는 계집애가 밀레나 알디온이었다.

밀레나는 언제 비꼬았냐는 듯이 생긋했다.

“이에샤 언니, 알아? 난 늘 언니랑 얘기해 보고 싶었어. 8년 동안 쭈욱.”

“그랬니? 난 네가 내 복장을 터뜨려 죽이고 싶어하는 줄 알았지.”

“언니가 그렇게,”

이에샤의 가슴속에서 위화감이 커져 갔다. 여느 때의 밀레나였다면 사나운 말을 쏘아붙이는 순간,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사과했을 터였다.

“그렇게 번번이 피하니까. 기회가 없었던 거야.”

“내가 언제?”

“그럼 대답해 봐. 언니는 내 얘기를 들어 보려고 한 적이 있어?”

“…….”

대꾸하지 못했다.

어린 이에샤는 계모의 딸을 미워할 수밖에 없었다. 철이 들자, 사이를 돌이킬 수가 없어진 채였다. 지금에 와서는 밀레나가 무슨 말을 꺼내도 싫증부터 났다.

하나 잘못했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밀레나는 이에샤가 당하는 괴롭힘을 눈감았다. “언니가 노력하면 모두 사이좋게 지낼 수 있을 거야.” 같은 소리나 지껄여 댔다. 작은 실수를 가지고 엉엉 울어서 큰일로 키우기도 했다. 얌체 같은 이복동생과 도란거리고 싶어 한다면, 그쪽도 제정신은 아닐 것이다.

“네가 제대로 된 애였다면 나도 네 말을 들었겠지.”

고운 미간이 죄어들었다. 밀레나는 찌푸린 얼굴마저 예뻤다. 이에샤가 인상을 쓴다면 어린애가 울음을 터뜨릴 텐데 말이다.

화를 낼 때조차 어여쁘는 방법은 어디서 배웠을까. 정상적인 부모라면 자식에게 그런 일도 가르치는가 고민해 보았다. 이에샤로서는 알 수 없었다. 오스터는 개새끼였고 에이릴리는 환자였다.

“언니는, 아무것도 몰라.”

“그럴지도. 하지만 너한테 듣고 싶은 소리는 아니야.”

“나는 이런 식으로 언니랑 다투고 싶지 않아서 무던 애써 왔어. 나라도 언니가 화내지 않게 잘해야 한다고 말이야. 어머니랑 아버지가 언니한테 너무 심하시니까.”

“그것참.”

이에샤는 진심을 담아 감탄했다. 정말로 몰랐다. 이에샤의 배알을 뒤틀어 놓기로는 알디온 부부보다 밀레나가 한 수 위였으니까.

“결국 그 말이 하고 싶었니? 내가 부탁하지도 않은 일로, 노력했으니까 감사하라고?”

“언니가 좋은 분을 만나서 안전하게 이 집을 떠나길 바랐어.”

“난 충분히 안정적으로 나갈 거야. 집도 구했고 일자리도 생겼는데 뭘.”

“좋은 분이라는 건 언니한테 어울리는 사람이라는 뜻이야. 언니의 분수에 맞고 격에 맞고, 차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사람! 그런 사람이랑 서로 아끼고 살면 참 좋겠다 생각했어.”

밀레나가 숨가쁘도록 늘어놓았다. 이에샤는 밀레나의 이야기를 쫓아갈 수가 없었다. 버들가지처럼 뿌리치면 물러나던 밀레나가, 어찌하여 갑자기 덤벼드는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오늘은 기사로서 첫발을 내디딘 날이었다. 이런 식으로 마무리짓게 될 줄이야! 신물이 치밀었다. 이에샤의 속도 모르고 밀레나가 말을 이었다.

“아침에 오신 손님께서 나한테는 얼굴도 안 비쳐 주셨는데, 언니한테 더없이 정중하시더라.”

“난 진짜, 네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술주정은 네 아빠한테나 가서 부리렴. 뭘 해도 예뻐 죽으려 하시지 않니!”

“그래?”

밀레나가 드레스 자락을 집었다. 발끝을 바닥에 눌렀다. 우아한 몸놀림으로 일어섰다. 이제야 꺼지는구나. 이에샤는 따분한 심정으로, 긴 숨을 몰아쉬었다.

밀레나가 스쳐지나가며 달콤한 냄새가 풍겼다. 향수란 은근하면서도 끈질긴 감이 있어서, 향수를 뿌린 여인은 지워질 듯 지워지지 않는 인상을 남기게 마련이었다. 밀레나는 방문 앞에서 멈칫했다. 고개만 뒤돌려 이에샤를 보았다.

“언니, 한 번도 아버지께 예쁨받으려고 노력해 본 적도 없으면서 참 쉽게 말한다.”

“유감스럽게도 그 작자한테 예쁨받고 싶지가 않아서.”

“……잘 자.”

복도로 나오자마자 손끝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주저앉아 울고 싶었다. 하지만 밀레나 알디온은 그래서는 안 되었다. 이복언니는 제가 쉽게 산다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무슨 일이든 쉽게 보는 쪽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 작품 후기 ============================

전개가 중구난방이라는 자각은 있습니다...

있는데...........어떡하면 고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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