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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수는 검 한 자루-18화 (18/164)

00018 4. 기사와 귀부인 =========================

이실리아 황후는 쇠약했다. 튼튼했었으나, 쌍둥이를 낳으며 몸이 망가졌다. 허리가 아파서 오래 앉지도 못했다. 코르셋이나 크리놀린을 받치기도 힘들어했다. 겨우살이궁에서 자수로 소일하는 것만이 이실리아의 낙이었다.

오늘도 이실리아는 몸져누웠다. 편두통이 지독했다. 말도 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새해 첫날부터 끙끙거리는 황후를 보며 겨우살이궁의 시녀들은 가슴 아파했다. 이실리아는 일정을 모조리 무르고, 침대에 틀어박혔다.

“황후 마마께서는 편찮으십니다. 다음에 맞아들이시겠다는 명입니다.”

이에샤는 허탕 치고 겨우살이궁을 나와야 했다. 라제카는 말비다의 손에 끌려 서향궁으로 돌아간 뒤였다. 마지막까지 이에샤에게 미안한 낯빛을 띠었지만, 이에샤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말비다도 마음이 가라앉자 무례를 사과해 왔으니까. 탐탁지 않은 태도였지만 말이다.

포장된 길을 거닐었다. 백화 기사가 할일은 여럿 있었지만, 순찰 말고는 손님을 상대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첫날부터 억울한 사정을 품은 여인이 번쩍 용기를 내어 찾아오지는 않을 터였다. 한가로웠다.

엘테르트가 말한 대로 에브라힐 동쪽에는 여자가 많았다. 하녀들이 바쁘게 오갔다. 시녀와 방문객으로 보이는 귀공녀도 눈에 띄었다. 호기심을 숨기지 않고 이에샤에게 인사하는 사람과 망측하다는 양 달아나는 사람이 갈렸다. 이에샤는 잔잔한 기분으로, 흘러가는 황궁의 풍경을 구경했다.

석곡궁의 연무장으로 돌아갈까도 했었다. 그러나 황궁에 익숙해지는 것이 급선무일 성싶었다. 이에샤에게는 앨저 백작가를 일으켜 세우겠다는 야심이 있었다. 여자가 남자에 뒤지지 않는다는 사실도 증명하고 싶었다. 세상이 움직이는 이치를 알아야만 했다. 검만 쥐고 사느라 배우지 못한 일들을.

‘사교계라…….’

사교계에 나가 보면 어떨까. 귀족이 한데 모여 속닥거리는 모임. 온갖 정보가 거쳐가고, 싸움이 시작되는 장. 이에샤는 밀레나에게 쏟아지던 편지와 선물을 기억했다. 복장 뒤집히는 이복동생의 무대라고 생각하니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앨저 백작으로 살아가기 위하여 귀족다워질 필요가 있었다.

고민에 잠긴 와중이었다. 누군가가 이에샤의 시야에 걸렸다. 한 여자가 아까부터 같은 자리를 맴돌았다. 스무 살쯤 되었을까? 여자는 드레스 자락을 움키고 허리를 수그린 채, 땅을 두리번거렸다. 무언가를 찾는 모양새였다. 이에샤는 여자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기척을 느끼고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살갗이 희었다. 눈도 코도 귀도 동글동글했다. 다람쥐처럼 순한 인상을 지닌 사람이었다. 보호 본능이 일어날 것 같았다. 그녀는 이에샤의 차림새를 보고 화들짝 물러섰다. 황궁 최고의 쟁점인 여기사를 만날 줄이야!

이에샤는 정중히 말을 붙였다.

“곤란한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아, 아니, 전. 저는.”

“괜찮으시다면 제가 돕겠습니다.”

“아니, 안 돼요, 아니아니, 괜찮아요. 전 괜찮습니다. 뭘 좀 땅에 떨어뜨린 것 같아서. 별일 아니에요.”

“무슨 물건이죠?”

그녀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잘근잘근 씹기 시작했다. 눈동자를 도록도록 굴렸다. 한참 만에야 대답이 흘러나왔다.

“손수건이요.”

‘거짓말이군.’

이에샤는 심드렁하게 꿰뚫어 보았다. 손수건 같이 부피가 있는 물건을 찾으면서 몸을 낮추고 뱅글뱅글 돌 까닭이 없었다. 그녀가 지나치게 서투른 탓도 있었다. 거짓말을 뱉었다가, 지레 찔려서 전전긍긍하는 티가 역력했다.

“으음. 성함을 여쭤도 될까요? 어느 가문의 영애십니까?”

“아, 아니요, 저는 렌디드 자작의 아내입니다. 작년 가을에 결혼해서, 아아, 어떡하지…….”

자기가 결혼 이야기를 꺼내 놓고 울상을 지었다. 눈꼬리가 바들바들 떨렸다. 이에샤는 렌디드 부인의 왼손을 곁눈질했다. 올리브색 장갑에 감싸였다. 매끈한 윤곽선이 드러났다.

“실례지만 찾으시는 물건이 반지인가요?”

“아, 아니! 아니에, 아니, 맞아요. 저, 저, 저는 남편에게 순종하지 않으려고 반지를 안 끼운 게 아니라, 그냥 손이 답답해서. 기사님, 제발 비밀로 해 주세요.”

이에샤는 어찌된 영문인지 알아차렸다. 반지를 빼고 다니다가, 모르는 사이에 떨어뜨렸을 것이다. 작년 가을이라면 반년도 지나지 않았다. 결혼 반지를 빼 두기에는 자못 일렀다.

렌디드 부인은 이상하리만큼 횡설수설했다. 이에샤는 위화감을 느끼면서도, 일단은 손사래 쳤다.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을 테니 진정하세요. 반지를 찾아야만 하는 거죠?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하, 하지만, 제가 너무 폐를 끼치는 게 아닌지.”

“부인을 돕는 거야말로 제 일인걸요.”

빙그레 웃어 보였다. 이에샤의 말은 지극히 사실이었다. 황궁에서 어려움에 처한 여자라면 누구든지 이에샤를 부를 권리가 있었으므로. 어쩐지 렌디드 부인의 뺨이 붉어졌다.

베빈 렌디드 자작 부인은 성으로 불리기가 싫은 것 같았다. 이에샤에게 이름을 불러 달라 부탁해 왔다. 이유를 묻자, ‘남편의 성에 익숙해지지 못했다.’라는 답이 돌아왔다. 이에샤는 그 이상 파고들지 않았다. 베빈의 태도만 보아도 부부 사이가 나쁘다는 일쯤은 알 수 있었다.

“오늘 들른 장소는 몽땅 찾아봤어요. 하지만 보이지 않아서, 저, 저는 이제 지나다닌 길을 찾아볼 수밖에 없다고. 훌쩍.”

“그 넓은 길을 다 뒤지려 한 거예요? 날씨도 춥지 않습니까.”

“그래도 찾아야만 해요. 아아, 그게 없어진 걸 알면 남편이…….”

베빈은 “흡!” 하며 입가를 감싸쥐었다. 이에샤는 눈살을 찌푸렸다. 베빈이 벌벌 떠는 까닭을 알 수가 없었다. 이에샤의 부모도 사랑이라고는 없이 결혼했지만, 에이릴리는 오스터를 무서워하지 않았다. 오스터가 보는 앞에서 결혼 반지를 벽난로로 던져 넣기까지 했었다.

베빈이 이에샤의 눈치를 살폈다. 이에샤는 껄끄러운 기억을 털어 버렸다. 상냥히 웃어 보였다.

“남편이 엄격하신가 봐요.”

“어, 엄격하다기보다는.”

“다혈질이라든가?”

“아, 네, 네! 그거예요. 조금 욱하는 성격이어서, 평소에는 괜찮아요. 정말이랍니다.”

베빈의 웅얼거림은 한참이나 이어졌다. 기를 쓰고 둘러대지 않아도 되는데. 이에샤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생각했다.

황궁에는 극장이 많았다. 두 사람은 자그마한 야외극장에 다다랐다. 겨울철에 쓰기에는 부적절했지만, 공중 묘기가 섞여서 어쩔 수 없었다고 했다. 베빈은 연극이 끝나고 가까운 살롱으로 움직였노라고 설명했다. 귀부인들이 궁전의 시설을 빌려서 모이는 일은 드물지 않았다.

이에샤는 무대가 한눈에 보이는 자리에 섰다.

베빈은 묘한 느낌을 받았다. 이에샤로부터 서늘한 공기가 흘러나오는 것만 같았다. 이에샤의 브링은 곱게 자란 여인조차도 흠칫할 정도로 강렬한 것이었다.

이에샤는 온몸의 신경을 가다듬었다. 한계까지. 날카롭게. 금속이나 보석은 또렷한 존재감을 지닌 경우가 많았다. 베빈의 결혼 반지에도 다이아몬드가 박혔다 했으니, 브링으로 뒤져 보면 감각에 걸릴 터라는 계산이었다.

“후우. 여기에는 없는 것 같습니다.”

“그걸 어떻게 알죠?”

“제가 눈이 좀 좋거든요.”

떠오르는 대로 얼버무렸다. 베빈의 얼굴에 의심하는 빛이 서렸다. 이에샤는 살롱으로 이동하자며 휙휙 손짓했다. 베빈은 믿음이 서지 않는지 몇 번이나 극장을 돌아보았다.

한동안 입다문 채 걸었다. 멀찌감치 커다란 저택의 지붕이 보였다. 이런저런 모임을 위한 장소로, 두 사람의 목적지였다. 베빈은 이번에야말로 반지가 나타나기를 빌었다.

“앨저 경께서는, 저기.”

“말씀하세요.”

“아직 결혼, 하지 않으셨죠? 저보다 두 살 어리시다 들었는데.”

“아, 예. 적령기라고 해도 결혼은 혼자 하는 게 아니니까요. 이렇다 할 남자도 안 보이고.”

“정말 잘됐어요.”

지금까지와 다르게 단호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이에샤는 베빈을 내려다보았다. 동그란 눈망울에 물이 괴었다. 베빈은 또다시 입술을 물어뜯었다.

“결혼해서 좋을 거 없어요. 단 한 개도요. 어머니는 남의 집 안주인 노릇이 어디 쉬울 줄 알았냐며 웃으시는데, 저, 전, 이럴 줄 알았다면 가출이라도 했을 거예요.”

“그 정도인가요?”

“……아, 아! 나 좀 봐. 내가 무슨 말을. 미, 미안해요.”

제가 정신이 없어서. 베빈의 말끝이 속삭임처럼 잦아들었다.

이에샤는 정말로 이상하다고 느꼈다. 귀족 사회에서는 정략결혼이 연애결혼보다 흔했다. 많은 사람이 그저 그런 상대방과 인연을 맺어, 그냥저냥 살아가고는 했다. 새 신부라면 남편이 시원찮더라도 달라진 생활에 들뜨게 마련이었다.

에이릴리마저도 오스터가 외도하기 전까지 알디온의 정원에서 자두와 산딸기를 따는 재미로 아기자기 지내지 않았는가.

“베빈, 렌디드 자작하고 사이가 많이 안 좋으세요?”

“그, 그렇지 않아요!”

베빈은 까무러칠 기세로 놀랐다. 이에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신이 못할 질문이라도 던졌는가? 부부간에 관하여 묻는 것은 예의에 어긋날지도 몰랐지만, 먼저 비관적인 이야기를 꺼낸 쪽은 베빈이었다. 베빈이 “미안해요. 하지만 난 정말…….” 하며 중얼중얼했다. 들리지도 않았다.

베빈의 안색이 허옇다 못해 푸르죽죽해졌다. 이에샤는 걱정스러워 하다가,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감각이 무언가를 잡아냈다. 싸한 기운이 살갗을 찔렀다. 셀더리의 다이아몬드 귀걸이에서 느끼던 바와 비슷했다. 다행한 일이었다.

“아무래도 살롱에서 떨어뜨린 모양이네요.”

“네, 네?”

“반지요.”

============================ 작품 후기 ============================

자정까지 눈 뜨고 버티기가 힘들어서 업로드 시간을 바꾸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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