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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수는 검 한 자루-16화 (16/164)

00016 3. 마모(磨耗) =========================

이에샤는 어깨를 옆벽에 기대었다. 귀를 기울였다. 엘테르트는 부드러운 음색과 또박또박한 발음을 지녔다. 듣자 하니 긴장이 녹아내리는 것 같아, 이에샤는 ‘왜 인기 많다는지는 알겠다.’ 하고 생각했다. 저 얼굴에 목소리라면 간이고 쓸개고 빼 주겠다는 여자가 줄을 설 만했다.

한숨을 삼켰다. 저만한 미모를 갖추었는데도 싹수없이 느껴지다니, 어찌 보면 대단했다. 엘테르트와 일을 해 나갈 자신이 안 났다.

“이제부터 백화 기사단이 곤경에 처한 여성의 사정을 듣고 조율할 겁니다. 앨저 경 혼자서는 힘에 부칠 테니, 자리잡을 때까지 제가 돕겠습니다.”

“이해 안 되는 점이 있어요. 그동안 왜 아녀자 희롱에 대책이 없었죠? 시녀가 맡아도 되는 일이잖아요.”

“개인적으론 동의하지 않는 사실입니다만,”

엘테르트의 말끝이 잦아들었다. 반듯하던 눈매가 비뚤어졌다. 엘테르트는 상한 음식을 먹은 듯한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분쟁 해결에 무력이 필수불가결한 경우도 있다, 라는 게 황태자 전하의 고견입니다.”

“아하, 남자랑 쌈박질할 수 있는 여자를 찾아다녔다?”

“예. 평범한 귀부인이 기사나 귀족 남성을 추궁하기는 아무래도 어려우니까.”

입맛이 썼다. 엘테르트는 인간의 이지를 믿었고, 대화로 풀어내지 못할 일은 없다고 여겼다. 긴 시간이 걸리더라도 말이다.

동시에 자신이 이상론을 내세운다는 것도 알았다. 벨체터는 내란에 휩싸였다. 해안 왕국인 쟐레는 해적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다. 레오웰 왕국은 송두리째 무너지고 도시 단위로 쪼개졌다. 온 세계에서 싸움이 한창이었다. 대륙의 패권을 쥔 델페레타만이 평화로웠다. 외국인이 보기에 엘테르트는 꿈속에 사는 도련님 같을 터였다.

상관없었다. 엘테르트는 꿈을 현실로 끌어오기 위해 일생을 바칠 셈이었으므로.

“내가 앨저 경에게 드리고 싶은 부탁이 있습니다.”

“부탁……? 경이 저한테요?”

“예. 제가, 백화 기사단장인 당신에게.”

이에샤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엘테르트의 입술이 호선을 그린 까닭이었다. 엘테르트는 흐릿했으나, 타이르듯이 간절한 미소로 말했다.

“몸을 지키기 위해서만 검을 뽑으십시오. 상대방이 죄를 지었더라도, 완력으로 저항하지 않는다면 앨저 경도 언어로만 대하십시오.”

“그, 그건 무리예요.”

이에샤는 저도 모르게 대꾸해 버렸다. 엘테르트의 부탁은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이에샤에게는 어려운 일이었다. 아니꼬운 놈을 주먹과 발로 다스려 온 지 8년이 아닌가? 이에샤―그리고 셈브리온―의 사전에 ‘원만한 해결’이란 없었다.

엘테르트가 울컥한 낯빛을 지었다. 이에샤는 사라진 웃음에 묘한 아쉬움을 느끼면서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라고 되뇌었다.

석곡궁은 멋스럽고 깨끗했다. 오랫동안 비었던 곳답지 않았다. 마법으로 피운 작약이 흐드러졌다. 정원수는 네모반듯하게 다듬어 놓았다. 작은 연못이 파였는데, 수초를 들여다볼 수 있도록 돌다리가 걸렸다. 메마른 분수대만 아니라면 주인이 살아 머무른다고 해도 믿을 성싶었다.

웅장했다. 이에샤뿐인 기사단의 본부로 쓰기에는 지나쳤다. 제국 기사단 여섯이 함께 쓰는 부용궁보다도 석곡궁이 넓었다. 황은이 넘쳐 부담스러울 지경이었다. 기가 질린 이에샤를 보며, 엘테르트도 쓴웃음을 흘렸다.

“에브라힐 궁전 동쪽은 여인의 구역입니다. 아랫것들이 부르는 별명으로 치마폭이라고도 합니다.”

이에샤는 ‘백화 기사단’만큼이나 껄끄러운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황후 마마와 공주님만이 각자 별궁을 다스리고 계시죠. 이백여 년 전에는 태황태후에 태후, 황후와 일곱 황녀가 머무른 적도 있다고 합니다.”

“그거 진짜 듣기만 해도 숨이 턱턱 막히네요.”

“마마와 공주님은 자애롭고 온화하신 분들입니다. 앨저 경의 입궁을 고대하셨으니 오후에 인사 올리러 가십시오.”

황후는 엘테르트의 외숙모라고 들었다. ‘이 남자, 높으신 분이구나.’ 하는 실감이 났다. 황후와 공주를 입에 올릴 때, 엘테르트의 얼굴에는 부드러운 빛이 스쳤다. 윗전이라기보다 가족을 떠올리는 모습이었다.

그러고 보면 애버토스 멘델린 공작과 엘로나 황녀는 금실 좋기로 유명했다. 그들의 연애결혼이 온 제국을 설레게 했다고―어머니가 울적하게 이야기했었다.

황후에게는 자식이 적었다. 골육상잔할 염려도 없었다. 멘델린은 황제에게 충성했다. 지금 황실과 멘델린 공작가의 관계는 역대 중 으뜸이라 할 만했다. 화목한 집안이구나. 이에샤는 딴 세상 일을 보듯이 감탄했다.

“앨저 경?”

“네? 어라?”

“……한눈을 팔았군요. 여기가 앨저 경의 개인 사무실입니다.”

엘테르트가 어느 문 앞에 멈춘 채였다. 사무실을 등지고 이에샤를 보며, 손등으로 문짝을 톡톡 두드렸다. 이에샤는 자신이 엘테르트보다 세 걸음이나 앞서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엘테르트는 언짢은 티를 숨기지 않았다. 무시당했다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그런 거 아닌데.’

이에샤는 둘러댈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엘테르트의 마음속에서 제 평가가 곤두박질치든 말든 알 게 무언가?

사무실도 정원과 마찬가지로 손질된 뒤였다. 양탄자가 빈틈없이 깔렸다. 중앙에 책걸상과 응접 소파가 놓였고, 한쪽 벽에는 책꽂이가 들어찼다. 다른 가구는 없었다. 예상과 달리 으리으리한 넓이는 아니었다.

엘테르트가 이에샤의 속을 읽은 듯이 설명했다.

“시녀장의 침실이었던 곳입니다. 다른 방들은 사무실로 쓰기엔 크다 보니……. 마음에 차지 않으면 다음달에 총무부에 말해서 바꾸십시오.”

“괜찮아요. 여기도 제 방보다는 커요.”

“예?”

이에샤는 짜증을 느꼈다. 어떻게 그런 방에서 사람이 지낼 수 있느냐? 묻는 듯한 엘테르트의 표정이 아니꼬웠다. 밀레나가 이에샤를 숨쉬듯이 동정하는 것과 반대로, 엘테르트는 이에샤가 얼마나 ‘귀족답지 않게’ 살아왔는지 상상조차 못 했다.

“뭘 그렇게 놀라요? 모르긴 몰라도, 멘델린 공작성의 벽난로에서 평민 넷이 살 수도 있을걸요? 나한테는 이런 별궁보다 그쪽이 친숙해요.”

“당신은 백작 가문의 주인이잖습니까.”

“백작이고 후작이고, 가진 돈만큼 누리고 사는 거죠. 당장 내 목표는 기사로 성공해서 저택 한 채 사는 거예요.”

피올라 거리로 이사를 준비하며 셈브리온의 저금도 동났다. 전쟁터에서 벌어들인 돈과 에이릴리의 위자료에서 나온 삯 모두. 10년 동안 이에샤를 보살폈으니 당연했다. 오스터와 셀더리는 이에샤에게 원피스 한 벌 사 주지 않았으니까.

이에샤는 재차 마음을 다졌다. 셈브리온에게 은혜를 갚기 위해서라면 엘테르트가 아니라, 제 일격에 당했던 오르겔 소후작과도 일할 수 있었다. 이에샤는 엘테르트의 삶이 유복하다고 부러워하지 않았다. 저에게도 셈브리온이 있었다. 브링어를 가족으로 두었으니, 자랑스러워 해도 모자랐다.

“뭐어, 일단은 고마워요. 데려다줘서. 지도가 있으면 혼자서도 괜찮아요. 경도 백화 기사단에만 달라붙을 순 없죠?”

“예. 근처엔 하녀 기숙사나 시녀들의 휴게실도 있습니다. 귀부인이 모이는 극장까지 앨저 경의 순찰 범위입니다. 찾아오는 여성의 이야기를 성심껏 들어 주시고…….”

“설마 내가 대충 할까 봐요? 여자 마음은 경보다 제가 잘 알 테니 걱정일랑 관둬요.”

엘테르트는 머쓱히 뒷목을 긁었다. 이에샤의 말이 옳았다. 여자가 겪는 아픔이야 같은 여자 쪽이 이해할 터였다. 이에샤가 꾀부리며 일할 사람으로 보이지도 않았다. 맡기고 떠나도 될 것이다.

몸을 돌린 참이었다. 깜빡했던 일이 퍼뜩 떠올랐다. 엘테르트가 다시 뒤돌자, 이에샤는 의아한 낯빛을 지었다.

“복도를 지나다 보면 안뜰로 나가는 샛문이 나올 겁니다. 백화 기사단 연무장입니다.”

“연무장까지 만들어 놨어요?”

“태황태후께서 생전에 활터로 쓰던 곳을 조금 손봤습니다. 연무장을 따로 지을 필요가 없었다는 점도 석곡궁이 배정된 이유 중 하나죠.”

이에샤의 가슴이 쿵쿵거렸다. 황족이 활을 쏘던 연무장이라니! 알디온의 뒷뜰에 만든 공터는 비할 수조차 없으리라. 어서 둘러보고 싶었다. 엘테르트만 돌아가면 당장에 뛰쳐나가기로 별렀다. 오후까지는 시간이 남았다. 황후와 공주를 만나기 전에 검을 휘두를 수 있을지도 몰랐다.

엘테르트는 미묘한 기분이 되었다. 발갛게 달아오른 뺨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이에샤는 연무장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어린아이 같은 얼굴이 되어, 복도를 힐끗힐끗했다. 엘테르트가 떠나기를 기다리는 기색이 뚜렷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엘트르트는 여인에게 심술을 부리고 싶어진 제가 낯설었다.

“음, 어차피 오늘 오전은 백화 기사단을 위해 비워 놨으니 앞으로의 계획을 좀 의논하는 건 어떻습니까?”

“뭐라고요? 왜요?”

“일은 할 수 있을 때 하는 게 편합니다. 한가하지 않습니까?”

이에샤는 “꺼져!” 하고 소리치고픈 충동을 억눌렀다. 웃음이 오가는 사이도 아니건만, 무슨 바람이 불었단 말인가. 어색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아이 참, 저 혼자서 멘델린 경을 붙잡아 두면 예의가 아니죠. 연말연시에는 바쁘다면서요? 말마따나 여기는 한가하니 가 보세요.”

“…….”

엘테르트는 드러날락 말락 한숨을 쉬었다. 이에샤는 보기 안쓰러울 만큼 온몸으로 엘테르트에게 사라지라고 외쳤다. 이토록 엘테르트를 홀대한 이는 전에 없었다. 허탈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바쁜 것도 사실이었다. 이에샤를 놀릴 짬 따위 없었다. 엘테르트는 고개를 내저으며 돌아섰다. 수고하십시오. 마지막 인사가 흘러나오고, 사무실에 정적이 찾아들었다. 이에샤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어딜 쓸데없이 뭉그적대려고.”

이 순간 이에샤에게 연무장 구경보다 긴한 일은 없었다. “연무장, 연무장.” 하고 가락까지 붙이며 종알거렸다. 한들한들한 걸음새로 사무실을 나섰다.

복도는 일자로 생겼다. 양끝에 올라가는 계단이 자리한 구조였다. 위층은 복잡하다고 들었으나, 1층은 단조로웠다. 어귀에서 멀어지는 쪽으로 움직였다. 오래지 않아 하얀 나무문이 나왔다. 샛문이라고 해도 두 사람은 드나들 만큼 컸다.

문고리를 잡고 밀었다. 선뜻한 공기가 훅 끼쳤다. 희멀건 자갈이 깔린 오솔길이 펼쳐졌다. 좌우로 울타리가 섰고, 꽃이 피지 않은 관목이 우거졌다. 이에샤는 멈칫했다.

‘황궁에 숨어들 간 큰 도둑은 드물겠지만…….’

길 너머―연무장이 있을 곳으로부터 인기척이 느껴졌다.

허리께를 내려다보았다. 날이 검은 롱소드 끄트머리에 햇빛이 맺혔다. 검이 있다면 이에샤는 괜찮았다. 지거나 당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석곡궁에서 숨죽인 이가 누구인지 보고자, 이에샤는 발걸음도 가볍게 걸었다. 오솔길이 끝나는 지점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 작품 후기 ============================

하루 쉬고 돌아왔어요! 작품 소개도 (바꿨다고 하기도 민망할 만큼)고쳐 봤어요~

데스크탑이랑 노트북이 서로 짜기라도 한 듯이 고장나 버려서 윈도우탭으로 올리는데 힘들어 죽겠네요...

맞다, 코멘트로 질문 달아 주신 분이 계셔서 써요~

* 이에샤가 노력하면 마력도 쓸 수 있는가? 브링어는 마검사인가?

누구나 연구하고 공부하면 마력을 다루는 게 일단은 가능...합니다만 영재교육을 시켜도 어려운 학문인지라 이에샤의 머리로는 애로사항이 꽃필 거예요(^^; ) 엘테르트나 라제카 같은 애들도 끝을 보기 힘든 분야에요~

그래서 에르디랑 라제카는 마법에 관심이 없어요...공부할 시간에 돈 내고 마법사 부려먹는 게 훨씬 효율적이니까...

브링은 마력과 전혀 다르기 때문에 마검사라는 이름은 어울리지 않겠네요~

질문이 들어오면 스포가 되지 않는 선에서 답변해 드릴게요.

선추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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