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5 3. 마모(磨耗) =========================
“뭐?”
어리둥절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밀레나는 이에샤가 말하는 바를 알아듣지 못했다. 반달꼴을 띠어, 가만있어도 웃는 듯한 눈매가 찡그려졌다.
이에샤는 기사단 입단 시험에서 떨어졌다. 사교계까지 “알디온 후작의 맏딸이 아주 천방지축이라죠?” 하는 입방아가 휩쓸고 갔다. 다행스럽게도 이에샤는 존재감이 없었다. 나흘 만에 다른 화젯거리가 이에샤의 추문을 몰아냈다. 밀레나는 가슴을 쓸어내렸었다.
기사가 되었다니. 어찌된 영문인지 알 수 없었다. 정말이라면 큰일이었다. 사교계가 들썩일 것이 뻔했다. 알디온에는 딸을 단속하지 못했다는 눈총이 쏟아지고, 오가던 혼담도 깨질 것이다.
밀레나는 이에샤의 장래를 위해서라도 제가 막아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언니는, 저기, 시험에 붙지 못했잖아. 화가 나서 거짓말하는 거라면 이에샤 언니, 제발 그러지 마. 내가 사과할게.”
“네가 사과할 일이 뭐 있니? 나는 진짜로 기사가 됐는데. 황실에 여자 기사단이 새로 생겼어. 나는 그 첫 번째 단원이자 단장이고.”
이에샤는 찬바람이 도는 태도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밀레나가 안절부절못하는 꼴이 즐거웠다. 뱃속에서 사납고 축축한 감정이 솟구쳤다. ‘괴롭혀 주고 싶다.’ 하고. 달거리로 곤두선 탓일까? 여느 때처럼 무시하고 넘어가기가 싫었다.
떠올려 보면 머리카락을 자른 일도 비슷했다. 오스터에게 폐를 끼칠 셈이었다. 여자가 기사가 된다는 게 세간에 얼마나 망측하게 비치는지, 이제는 잘 알았다. 알디온의 이름에도 먹칠이 되리라. 이에샤는 소리 내서 웃고 말았다.
“왜 그래? 내가 꿈을 이뤘는데 축하도 해 주지 않을 거니?”
“아, 아니야. 물론 축하하지. 축하, 하는데. 그렇지만…….”
8년.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 그동안 이에샤는 골칫덩이 취급만 받았다. 밀레나는 언니를 걱정한다고 말하면서도 도와준 적이 없었다. 지금이야 아무렇지도 않다지만, 어린 이에샤는 억울하고 서러웠었다. 알디온을 떠나기 전에 조금이라도 밀레나를 상처입히고 싶었다.
셈브리온이 이에샤의 어깨를 건드렸다. ‘그러지 마.’ 하는 뜻이 느껴졌다. 이에샤는 셈브리온을 힐끗했다. 찌푸린 얼굴이 보였다. 셈브리온은 무언가를 염려하는 기색이었다.
이에샤는 한숨을 쉬었다. 셈브리온이 말리는데도 뿌리칠 만큼의 가치는 밀레나에게 없었다.
“난 지금 정말, 정말로 피곤해. 관두자. 할 얘기 있으면 나중에 하자고.’
“알, 았어. 푹 쉬어. 내가 따뜻한 우유라도 올리라고 주방에 전해 줄까?”
“됐어. 들어가자마자 잘 거니까.”
밀레나는 무어라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시름에 잠긴 낯으로 이에샤를 보았다. 이윽고 스르륵 돌아섰다. 저택을 향해 갔다. 이에샤는 어스름에 젖어드는 드레스 자락을 눈으로 좇았다.
밀레나의 뒷모습이 사라졌다. 풀벌레가 겨울잠에 빠지는 무렵이었다. 정원에는 바람 소리만 메아리쳤다. 이에샤는 셈브리온을 돌아보았다.
“내가 뭐 잘못했어? 세비.”
“아니, 훌륭한 대처였어. 아가씨한테 크게 한 방 먹였네. 가르친 보람이 있어.”
“그럼 왜 말렸어?”
성깔대로 뒤엎으며 살거라 가르친 쪽은 셈브리온이었다. 밀레나를 몰아붙였다고 나무라다니 이상했다.
셈브리온은 좋지 못한 예감을 받았다. 이에샤는 밀레나를 천치인 체하는 불여우로 여겼지만, 셈브리온의 생각은 달랐다. 밀레나 알디온은 참마음으로 이에샤의 안녕을 바랐다.
남이 어떻게 살아야 행복할지 제멋대로 정하려 들 뿐. 밀레나로서는 당연할지도 몰랐다. 밀레나가 방긋 웃기만 해도 기뻐하는 사람이 오죽 많았던가? 사랑받고 사랑하는 일에 익숙한 밀레나는, 이복언니를 바로잡아 주어야 한다는 사명감에 찬 것 같았다. 사람 경험이 많은 셈브리온은 꿰뚫어 보았다.
“너무 자극하지 마. 저런 부류가 마음먹고 뒤통수치면 골치 아파.”
“쟨 이미 나를 수백 번 골때리게 했어. 여기서 더 긁기도 힘들걸.”
“혹시 모르잖아. 이-샤가 마지막이라니까 무슨 대형 사고를 칠지.”
이에샤는 고개를 갸웃했다. 오스터가 추방령을 내렸는데, 딸인 밀레나가 무얼 한단 말인가? 슬픈 목소리로 “언니를 용서해 주세요.” 하고 매달리다가 그칠 것이다. 주변은 밀레나를 갸륵히 보아 줄 테고. 이에샤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지도 내가 없어지면 좋아할 텐데 뭐.”
* * *
이에샤는 전에 없이 바쁘게 연말을 보냈다.
부유한 평민이 사는 거리에―셈브리온의 돈으로―집을 구했다. 손볼 부분이 남아서 알디온에 머물렀지만, 1월 중순에는 들어갈 수 있을 성싶었다. 오스터와 셀더리는 별말을 하지 않았다. 잔소리해 봐야 이에샤가 무시해 버렸다. 새집은 소박하니 귀여웠다. 귀족의 눈에는 돼지우리로 비칠 테지만, 이에샤는 흡족했다.
백화 기사단의 정복도 받았다. 치수를 재고 사흘 만이었다. 상앗빛 코트의 왼 가슴에 꽃무늬 수가 놓였다. 이에샤는 때가 타겠다고 생각했지만, 아름답기는 했다. 치마가 아닌 것만으로도 다행스러웠다. 여자 기사의 옷이라고 드레스가 나올까 봐 불안했었다.
알디온 일가는 조용했다. 이에샤가 하는 양을 지켜보기만 했다. 기실, 참견할 수도 없었다. 이에샤는 황제가 뒷받침하는 기사단의 으뜸이 되었다. 집안 망신이라며 머리채를 잡았다가는―가만히 당할 녀석도 아니었지만―불충으로 몰려도 이상치 않았다. 이혼 스캔들로 들어 먹던 욕에 딸 이야기가 더해졌다고 여기니 차라리 편해졌다.
밀레나는 포기하지 말자고 하였으나, 이에샤의 혼처를 찾아 무엇하겠는가? 집까지 나가는 마당에 부질없었다. 오스터는 이에샤의 삶에 끼어들지 않기로 했다. 알디온과 앨저 간에 평화가 찾아온 듯이 보였다.
델피르력 753년 1월 1일. 이에샤가 백화 기사단장으로서 입궁하는 날이 밝았다. 전전날에 삯마차를 불러 두었다. 셈브리온이 마차도 장만해 주겠다 했지만 물리쳤다. 이사하게 될 피올라 거리에는 황궁으로 향하는 역마차가 있었다. 굳이 셈브리온의 등골을 뽑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알디온 후작가 앞에는 초라한 이륜마차가 아니라, 육두마차가 섰다. 붉은 휘장 속에서 날갯짓하는 독수리가 용맹스러웠다.
“멘델린 남작께서 이 집에 볼일이 있나 보군요.”
“알디온이 아니라 당신에게 볼일이 있습니다, 앨저 경.”
“그런가요? 죄송하지만 제가 출근을 해야 해서요. 나중을 기약하도록 하죠, 언제 시간이 날지는 모르겠지만!”
엘테르트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에샤라면 제가 찾아온 목적쯤 눈치챘을 터였다. 따돌리려는 태도가 못마땅했다. 마차 문을 열어젖혔다. 이에샤의 곁에 다가붙었다. 귀부인을 에스코트할 때처럼.
“비켜 줘요.”
“앨저 경을 안내하라는 황태자 전하의 명령입니다. 어차피 오늘뿐이니 타십시오.”
“어째서 멘델린 경이죠? 고작 그런 일에 소공작을 부린단 말인가요?”
“저를 부릴 만큼 백화 기사단에 쏟는 전하의 관심이 지대합니다.”
기사단 이름은 들어도 들어도 소름 끼쳤다. 이에샤는 대화를 끝내 버리기로 마음먹었다. 루시온이 시킨 일이라면 내뺄 처지도 못 되었다. 마차에 올랐다. 엘테르트도 고개를 털며, 따라 탔다.
언젠가와 같이, 이에샤는 구석자리를 골랐다. 엘테르트도 반대쪽 건너에 앉았다. 워어이! 마부의 외침이 들려왔다. 마차 바퀴가 구르기 시작했다.
“백화 기사단장이 된 걸 축하합니다. 앨저 경.”
엘테르트로부터 죽을 만큼 내키지 않는다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치레할 필요 없어요. 그거 아세요? 경께서는 아직도 저에게 존대할 때마다 입꼬리가 떨린답니다.”
“……미숙한 모습을 보이고 말았군요.”
부정하기 어려웠다. 첫인상이란 중요했다. 배알이 뒤틀리는 것을 막을 도리가 없었다. 이에샤가 크게 잘못하지도 않았건만 말이다. 엘테르트도 제가 어리석게 구는 까닭을 꼬집어 내지 못했다.
이에샤는 앞만 바라보았다. 엘테르트와 도란거릴 사이도 아니었다. 벽에 시선을 붙박는 수밖에 없었다. 휘장이 유리창을 뒤덮었다. 마법의 불이 타오르더라도, 마차 안은 침침했다. 그림자가 너울거렸다.
조금 뒤, 엘테르트가 입을 떼었다.
“앨저 경도 알겠지만 나는 황궁의 모든 일을 두루 감독합니다. 훗날 멘델린을 이어받고 황제 폐하의 수족이 되기 위해 공부하는 중이죠.”
“전혀 몰랐는데요.”
“그렇습니까? 상식이니 지금부터라도 알아 두십시오.”
이에샤는 인상을 구겼다. 재수도 없고 어처구니도 없었다. 엘테르트가 무얼 하는 사람이든, 어찌 상식씩이나 된단 말인가?
하지만 엘테르트의 자찬은 들어맞았다. 귀족 사회는 멘델린의 발아래에 엎드렸다. 수백 년 동안 멘델린 공작은 황제의 동반자로서 굳건했다. 엘테르트 또한 루시온의 신임을 받았다. 멘델린의 행보를 알아야만 권력으로 가는 길도 열리는 셈이었다.
“연말연시에는 발등에 불이 떨어집니다. 모든 관리가 일에 짓눌린지라 인사 배치를 바꾸기가 어렵습니다. 특정한 부처에 들지 않은 제가 백화 기사단에 협력할 겁니다.”
“그 말씀은,”
“앞으로 자주 봐야 합니다.”
이에샤의 낯빛이 팍삭 썩었다. 엘테르트는 본체만체하고 설명을 이어 나갔다.
“황궁 지도와 백화 기사단의 일과표, 석곡궁의 내력 등을 양피지에 정리했습니다. 경의 사무실에 두었으니 꼼꼼히 읽으십시오.”
“기사단장인 제가 일과를 짜야 맞지 않나요?”
“적응할 때까지만 간섭하겠습니다. 익숙해지면 재량껏 하십시오.”
“……알았어요. 수련할 시간은 넣으셨겠죠?”
대답을 머뭇거렸다. 이에샤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이에샤가 싸우던 모습이 떠올랐다. 족제비처럼 유연했었다. 팔다리는 사람 몸이 저렇게도 되는구나, 싶을 만큼 다채롭게 움직였다. 철검의 궤적이 멀찍이서 보기에도 매섭고 날카로웠다.
속이 메슥거려 왔다. 엘테르트는 눈길을 아래로 내렸다. 머릿속에 새겨진 이에샤의 상을 몰아내고자 애썼다.
“물론입니다. 제국 기사단만큼의 시간을 배분했습니다. 여자라고 차등을 두지 말라는 폐하의 명이 있었으니.”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요. 다른 일은 어떻게 되죠?”
“백화 기사단의 영역은 제국 기사단과 겹치지 않습니다. 딱 하나, 마파랑(魔波浪) 때만 힘을 모으면 됩니다.”
마파랑―글자 그대로 마력의 물결을 일컬었다. 천연 마력이 돌연변이를 일으키는 현상이었다. 마력이 폭주하면 의당 재해가 뒤따랐다. 기사와 황실 마법사가 총동원되어 수습해야 하는 일이니만큼, 백화 기사단도 빠질 수 없었다.
물론 기본 지침일 따름이었다. 10년에 한 번도 보기 어려운 사태였으니까. 지금은 22년째 감감한 채였다. 엘테르트와 이에샤는 마파랑이 어떠한 모양새로 벌어지는지조차 몰랐다.
“황궁에서 일하는 여성들에게 안내문을 나눠줬습니다. 아십니까? 앨저 경. 궁에서는 기사와 관리, 시종과 하인, 방문객 등―남자가 아녀자를 희롱하는 일이 잦습니다.”
“희롱이라면? 설마…….”
“음욕으로 저지르는 크고 작은 학대를 말하는 게 맞습니다. 그동안은 여자들이 도움을 청할 만한 곳이 마땅치 않았죠. 남자 수사관에게 진술하기를 수치스러워하는 이가 많다 보니.”
엘테르트가 조곤조곤하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 마력과 브링의 차이? : 마력은 자연에서 빌리는 힘이고 브링은 극한의 단련 끝에 얻는 인간의 힘이에요~ 마력은 공부하면 쓸 수 있지만 브링은 어느 경지를 넘어서야만 얻을 수 있어요~
* 이에샤는 망명하는 편이 행복하지 않을까? : 어느 나라를 가도 여자는 괴롭습니다... 오히려 델페레타는 선진국이라 여권이 괜찮은 편이에요~ 황제와 황태자도 신경을 많이 쓰구요~
* 사이다는 언제쯤? : 작가가 노력하겠습니다(_ _)
* 남주는 누구냐? : 셈브리온은 아니에요.
감기 때문에 글을 무슨 정신으로 썼는지도 가물가물하네요~
내일 하루만 쉴게요.
선추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