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4 3. 마모(磨耗) =========================
“어머나.”
엘테르트는 라제카를 빤히 보았다. 뜻밖의 일을 들어 놀랐다기보다, 재미있어하는 듯한 감탄성이었다. 공주는 벌써 부황에게 간언을 올리고는 했다. 어린 딸의 아양인 척해도 내용에는 품위와 총기가 흘렀다.
“벌써 들으셨군요.”
“여자 기사단의 본부를 마련한다고만요. 석곡궁을 쓸 줄은 몰랐어요.”
“폐하의 은총이죠. 상징성을 따지셨을 겁니다.”
석곡궁은 에브라힐 궁전의 동쪽에 세워진 태황태후의 거처였다. 황후가 지내는 겨우살이궁이나 공주의 서향궁과도 가까웠다.
현 황제의 할머니는 명사수였다. 활쏘기와 사냥을 즐겼다. 손자에게 직접 여우를 잡아 주기도 했었다. 늘그막에도 자세가 꼿꼿했으며, 죽기 전날까지 말을 탔다. 황후일 무렵부터 만류를 물리치고 사냥터에 나가던 여인. 태황태후는 델페레타 역사에서 가장 독특한 황후로 기억되었다.
그동안 황제는 석곡궁을 잠가 놓았다. 태후는 병약했으므로, 황제를 어머니처럼 가르친 이는 태황태후였다. 할머니에게 정이 깊었던 황제는 석곡궁에 누군가가 들어앉지 못하도록 했다.
그런 곳을 새로운 기사단에 내준 것이다.
“상징적인 게 아니라 합리적인 결정이에요. 석곡궁은 입지가 좋잖아요. 어마마마와 저를 지키기에 그보다 알맞은 궁이 있겠어요?”
“후후, 추상과 실리는 병립할 수 있잖습니까. 한 가지 더 말해 볼까요? 석곡궁을 내림으로써 새로운 기사단이 황은을 받는다는 사실이 공고해졌습니다. 공주님, 하나의 정책에는 수십 가지 이유가 따르는 법입니다.”
“으우, 듣고 보니 그렇군요. 라제카가 섣불렀어요.”
라제카가 분한 얼굴을 했다. 엘테르트는 라제카의 머리를 쓰다듬고 싶다는 충동을 눌렀다.
“나는 그냥, 뭐랄까. 여자 기사단이 그저 허울뿐인 쇼가 아니라 황실의 구성체로서 어연번듯한 임무를 띤 조직이라고 말하고 싶었어요.”
“예. 자애롭고 영명하십니다.”
라제카는 어린 만큼 순수했다. 순수한 만큼 착했다. 입바른 소리에만 집착하는 면이 있었으나, 엘테르트는 그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걷기 시작했다. 말비다가 두어 발짝 떨어져서 따라왔다.
“멘델린 경은 기사를 싫어하는데, 석곡궁에 가는 건 오라버니 명령으로인가요?”
“아뇨. 총무부 관리 대부분이 걸어 다닐 만한 상태가 못돼서 제가 갑니다. 그래도 책상에 앉아서 펜 움직이는 데엔 문제없더군요.”
“가엾어라. 적당히 퇴궐 좀 시켜 주세요.”
엘테르트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퇴궐은 물론 휴가까지 안겨 주면 좋겠으나, 연말에는 일이 쏟아지는 법이었다. 멘델린 소공작조차 며칠째 푸른 사자 성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쥐어짜이듯이 밤샘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특혜였다.
그 와중에 루시온은―체사로를 끌고―놀러 나갔다. 엘테르트는 황태자고 뭐고 담을 지어 버릴까 고민했다. 엘테르트의 기색이 싸늘해지자, 라제카는 ‘오라버니 때문이구나.’ 하며 한숨지었다.
“라제카는 멘델린 경이 이번 일을 크게 반대할 줄 알았어요.”
“전하가 바라셨고 폐하께서 허락하신 건입니다. 제 마음은 중요치 않습니다.”
“그럼, 라제카가 오라버니를 거들었다고 해도 싫어하지 않을 거죠?”
“…….”
엘테르트는 답을 삼갔다. 자신이 라제카를 원망할 턱이야 없었다. 다만 엘테르트는, 라제카가 정치에 끼어들기에는 어리다고 느꼈다. 깨끗하고 아름다운 것만 보아야 할 나이가 아닌가? ‘남자와 여자 간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새로운 체제’ 따위는 몰랐으면 싶었다.
하지만 라제카는 날 때부터 오빠와 남동생을 앞질러선 안 된다는 굴레를 쓴 소녀였다. 이런 문제를 지나칠 수 없었으리라.
“남자만의 일을 여자 손에도 맡긴다는 건 신선하고 가치 있는 시도라고 생각합니다. 단지 공주님, 저는, 기사라는 족속이, 몹시, 폭력적이기 때문에.”
엘테르트가 딱딱하게 끊어 내뱉었다. 라제카는 안타까운 눈길로 엘테르트를 올려다보았다.
“제국을 지키고 폐하께 충성하는 분들인걸요.”
“싸움을 업으로 삼은 자는 자기도 모르는 새에 주변을 찍어 누르려 듭니다. 황궁에서 기사들이 문관이나 아녀자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것만 봐도 그렇습니다.”
엘테르트의 말대로였다. 황궁에는 바람 잘 날 없었다. 그중 많은 사건이 기사에게서 비롯되었다. 근위 기사단부터 제6 기사단까지―커다란 집단이 검을 차고 다니다 보니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기사들은 비리비리하다며 관리를 비웃고, 작물을 대러 온 농가의 아낙을 희롱해 댔다. 귀공녀를 두고 음담을 주고받다가 말썽을 빚기도 했다. 엿들은 귀가 남편이나 아버지에게 말을 옮기면 항의가 빗발쳤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며 엘테르트의 혐오감은 커져 갔다. 옛날부터 검과 검술을 꺼렸지만, 검을 잡는 사람이 보이는 폭력성은 끔찍할 정도였다.
라제카가 “그건 그래도요.” 하며 고개를 주억였다―엄숙하기는커녕 앙증맞기 그지없었다.
“새로운 기사단은 바로 그 아녀자를 지키려고 태어났잖아요? 다른 기사와는 다를 거예요. 멘델린 경도 믿고 도와주세요.”
“그럴 겁니다. 자리를 잡기까지 잡음이 많을 테니 말입니다.”
“경은 온화하고 친절한데다 멋있으니까, 이번에 오는 앨저 경도 분명 좋아할 거예요.”
엘테르트는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낯빛이 되었다. 라제카는 엘테르트와 이에샤가 마주치기만 하면 으르렁대는 사이임을 모르는 모양이었다. 무구히 빛나는 얼굴로 물어 왔다.
“어서 만나 보고 싶죠?”
“……아, 그, ……예.”
엘테르트는 반쯤 뭉개진 발음으로 대답했다.
* * *
셈브리온은 발부리만 보고 걸었다. 이에샤에게 말도 붙이지 못했다. 달거리하는 아가씨를 끌고 다녔다니! 민망함에 몸서리가 났다. 이에샤는 아프지도 않았으나, 셈브리온은 이에샤가 죽을병에라도 걸린 듯이 굴었다. 옛 애인이 지옥의 월경통 환자라도 되었던 걸까. 이에샤는 싱겁게 생각했다.
루시온은 ‘백화(百花) 기사단’에 관하여 가르치고 돌아갔다. 이에샤는 말을 잊어버렸다. 끔찍스러운 작명에 닭살이 올라왔다. 어떤 놈이 지은 이름이냐고 물어보니, 아니나다를까 남자만 모인 회의에서 정해진 것이었다. 이에샤는 높으신 분―황후라든가 황녀라든가―께 잘 보여서 기사단 이름부터 갈아치우겠다고 다짐했다.
백화 기사단. 여자만을 뽑는 새 기사단은, 여자를 표적 삼은 악행에 대응하도록 만들어졌다. 지금은 이에샤밖에 들지 않았지만 말이다. 루시온은 기존의 시험과는 다른 등용문을 만들겠노라 하였다. 검술을 배우는 여인이 드문 만큼, 어떠한 재주라도 갖추었다면 받아들일 계획이었다.
저녁때가 넘었다. 해가 서녘의 지평선으로 스며들었다. 이에샤와 셈브리온은 알디온 저택의 정문을 지났다. 둘이서 살 집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번에는 셈브리온이 돌아가서 쉬자며 안달복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에샤와 침대 사이에는 장벽이 남았다. 아주 어여쁜 벽이.
“네가 왜 나와 있어?”
밀레나가 고개를 들었다. 꽃을 구경하던 참이었다. 오므라진 꽃에 코를 댄 모습이 명화처럼 아름다웠다. 밀레나는 셈브리온을 본체만체하고, 이에샤에게 웃어 보였다. 귀족의 딸로서 당연한 행동이었다.
“어서 와, 언니. 언니 기다리면서 산책 좀 했어.”
“뭐? 네가 왜 날 기다려? 무슨 꿍꿍이야?”
“꾸, 꿍꿍이라니. 그런 거 없어. 난 그냥 언니가 늦어지니까 걱정돼서, 아침 식사 때……, 안색도 나빴고.”
이에샤는 콧방귀를 뀌었다. 밀레나의 걱정이라니! 꺼림칙하기만 했다.
“너한테 걱정받을 만한 일 없어. 날이 쌀쌀하니 들어가렴. 감기라도 걸려서 나한테 불똥 튀게 하지 말고.”
밀레나는 울상을 지었다. 섭섭하기 그지없었다. 기사 시험에서 떨어지고 망신살이 뻗친 언니를 위로하고 싶은데, 이에샤는 통 몰라주었다. 고용인들이 속닥속닥 비웃는 것도 안타까웠다.
“이에샤 언니. 저기, 우리 터놓고 얘기해 본 적이 없잖아? 같이 산 지 8년이나 됐는데.”
“앞으로도 없을 거야. 난 이 집에서 나갈 거거든.”
“그, 그러지 마, 언니. 아버지도 진심으로 언니한테 나가라고 하신 건 아니야. 언니 유산도 못 받았다며. 이 추운 계절에 어디를 간다고 그래.”
이에샤는 입술을 달싹이다, 다물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밀레나는 앨저 가문이 망했다고 놀리는 걸까? 아니면 제 어머니한테 밀려난 에이릴리를 비꼬는가? 노여움이 치밀었다. 대화를 계속하다가는 없던 월경통도 생길 듯싶었다.
“네가 신경 쓸 건 아무것도 없단다, 지상에 떨어진 천사 같은 내 동생! 이름뿐인 앨저 백작도 세톨트 거리의 이층집 정도는 구할 수 있으니까!”
독이 올라서 쏘아붙였다. 밀레나의 낯빛이 하얘졌다. 못 들을 소리라도 들은 양 허둥거렸다. 쥐꼬리만큼이나마 속이 시원해졌다.
“세, 세톨트? 거기는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잖아.”
“평민 동네 중에서는 잘사는 축에 들어. 난 너처럼 고상하지가 못해서 그런 데에 가도 충분히 적응할 수 있단다.”
“언니, 제발. 고집 피우지 마. 나도 아버지께 부탁드릴게. 언니를 계속 우리 집에서 살 수 있게 해 주자고…….”
“어떡하지? 난 너희 집에 머무를 생각이 요만큼도 없는데.”
쌀쌀하게 말허리를 잘랐다. ‘우리 집’이라는 낱말이 비위를 뒤집어 놓았다. 일곱 살 때까지는 이에샤도 이곳이 제 집인 줄 알았었다. 어머니가 어떤 굴욕을 겪는지도 모르는 채.
밀레나는 치마폭을 꼭 움켰다. 가슴이 아팠다. 이에샤가 날을 세우는 까닭이 이해되지 않았다. 분명한 것은, 이에샤를 말려야만 했다. 자신의 이복언니가 세톨트 거리에서 산다니! 상상만 해 보아도 눈앞이 아득해졌다. 알디온 후작가가 비웃음을 살 거리였다.
“내 말 좀 들어 봐, 이에샤 언니. 영지도 재산도 없으면서 여길 나가서 어쩌려고 그래. 나, 난 지금이라도 언니랑 우리 가족이 잘 지낼 수 있다고 믿어.”
이에샤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더는 들어줄 수가 없었다. 밀레나의 꼴도 보기 싫었다. 셈브리온을 없는 사람 취급하며 고개를 돌리는 모습도 아니꼬웠다.
끈질기게 저를 동정하려 드는 밀레나에게 가르쳐 주기로 했다. 이에샤 앨저가 무얼 하며 살아갈 셈인지.
“밀레나? 잘 들으렴. 나에게 기사 작위가 내려졌단다.”
============================ 작품 후기 ============================
감기몸살이 났어요. 주말에는 쉬어야 할 것 같아요:(...
한동안 루시온이 열심히 나왔으니 슬슬 엘테르트에게 시동을 걸어줘야겠어요. 이 녀석은 언제쯤 이에샤한테 미소 한 번이나마 보여줄까요?
트위터를 만들었어요. @kipapa22
선추코 정말정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