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3 3. 마모(磨耗) =========================
루시온 이벨리오노에게는 동생이 둘 있었다. 12월의 마지막 밤에 태어난 황녀와 이듬해 첫 새벽에 태어난 황자 쌍둥이였다.
루시온은 동생을 두루 아꼈다. 계집애와 사내애여도 쌍둥이라고, 판박이로 닮은 녀석들이 귀여웠다. 그러나 누군가가 “황자 저하와 공주님 중 어느 분이 똑똑하십니까?” 하고 묻는다면 답은 정해졌다.
“내 아우는 행운을 손에 쥐었고, 누이는 평온한 삶을 타고났지.”
물샐틈없었다. 황자는 늠름하게. 황녀는 정숙하게. 자신은 남동생도 여동생도 사랑하는 황태자로.
란델 황자는 서글서글한 소년이었다. 떼를 쓰거나 욕심부리는 일이 없었다. 그뿐이었다. 뛰어나지도 않았고, 모자라지도 않았다. 핏줄을 가리고 보면 거리에서 사탕을 빨아 먹는 꼬마와 비슷했다. 평범하면 평범한 대로 행복하며, 군주 자리는 형님에게 어울린다고 말하고는 했다.
반면에 라제카 공주는 슬기로웠다. 수예를 가르치는 부인에게 코바늘의 기원을 물으면서, 이 막대기가 얼마나 실리적인 발명품인지에 관해 조잘거렸다. 루시온은 설마설마하며 라제카에게 고등 교사를 붙여 주었다. 라제카는 열세 살 나이에 아카데미 졸업생의 논문을 술술 읽었다. 엘테르트와 마주칠 때마다 공부를 봐 달라며 조르기도 했다.
루시온이 살면서 가장 진땀을 뺐던 질문도 라제카의 것이었다. 왜 저는 공주 저하라고 불리지 못하나요? 루시온은 라제카를 무릎에 앉혔다. 밤하늘 빛깔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중얼거렸다.
「네가 여자아이라 다행이다. 란델과 네 몸이 뒤바뀌었다면 우리는 전쟁을 벌여야 했을 거야.」
라제카는 루시온의 뜻을 꿰뚫어 보았다. 그 뒤로는 루시온에게 저와 란델의 차이점을 고하지 않게 되었다. 라제카가 황녀가 아니라 귀족의 딸만 되었어도, 루시온은 갖은 수를 써서 정계로 끌어들였을 것이다. 재야에 묻혀야만 하는 공주의 삶은 평온하리라.
라제카의 재능은 루시온을 고민케 했다. 거기다 이에샤가 더해졌다.
“……에버렛 경과 내가 그대를 입단 시험에 끼우면서 한바탕 돈 소문이 있어.”
이에샤는 어리둥절한 낯빛을 지었다. 생뚱스러운 소리였다. 루시온의 눈매가 비뚤어졌다. 오물 구덩이라도 본 사람처럼 질색하는 얼굴이 되었다. 의아심이 깊어졌다.
“문제의 여자 수험자가 근위 기사단장에게 다리를 벌렸다.”
루시온이 입에 올리기조차 꺼림칙하다는 목소리로 내뱉었다. 이에샤는 “아야!” 하고 신음했다. 셈브리온이 팔목을 으스러지라 쥐었기 때문이다. 달거리 탓으로 피부 자극에 약해져, 죽을 만큼 아팠다.
“아프잖아, 세비!”
“어떤 호로 잡놈들이 그딴 소리를, 내 이-샤에게.”
“진정하도록, 앨저의 스승. 슬프게도 이런 일은 드물지 않다네.”
루시온의 숨결이 흐트러졌다. 셈브리온이 내뿜는 노기에 짓눌릴 것만 같았다. 검술 실력도 괜찮은 편인 루시온은 입맛을 다셨다. 제국의 브링어 중 누구도 셈브리온과 맞설 깜냥이 없었다. 탐이 났다. 하지만 벨체터에서 온 용병과 황태자는 한자리에 들어서도 안 되는 사이였다.
이에샤는 둥실둥실한 의식을 가다듬었다. 서서히 소문의 내용이 이해되었다. 피가 식는 기분이었다. 체사로를 힐끗했다. 체사로는 음담패설의 주인공이 되고도 담담해 보였다. 연륜의 힘일까? 이에샤는 얼굴이 벌게지는 걸 막을 수 없었다.
“제국 기사단은 오랫동안 남자로만 굴러온 집단이야. 대뜸 백작을 집어넣을 수는 없었지. 윗사람으로서, 다스리는 자로서, 더 많이 아는 자로서. 난 인재를 망가뜨리는 짓을 용납 못해.”
“거기서 제가 전하의 비호를 등에 업고 합격했다면…….”
“세상 물정을 몰라도 머리는 잘 돌아간다니까. 그래, 그대는 기사가 되어서 황태자의 창부 소리를 듣고 싶었던 게 아니잖아?”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거죽이 부르터 피가 맺힐 때까지. 셈브리온이 이에샤의 안색을 살피려고 했다. 이에샤는 가까스로 웃어 보였다.
대화를 이어 가려면 앉아야 할 성싶었다. 루시온도 같이 생각한 모양이었다. “앉지.” 하고 권했다. 이에샤는 고개를 꾸벅하고, 길쭉한 소파에 엉덩이를 내렸다. 셈브리온에게도 손짓했다. 셈브리온은 팔을 내저으며 거절했다.
“제가 전하의 이름에 먹칠을 하게 되었겠군요.”
“틀렸어. 내 이름은 깨끗하고, 그대만 더럽혀졌을 거다.”
이에샤는 이해하지 못했다. 명예가 떨어지지 않는다면, 루시온이 저를 실격시킬 까닭도 흐려졌다. 루시온은 이에샤만을 바랐다고 했다. 이에샤가 무슨 욕을 듣든 뽑아서 써먹는 편이 낫지 않겠는가? 이에샤 안에서 루시온은 퍽 인정머리 없는 놈이었다.
“말하지 않았나, 앨저 백작. 시류와 기류를 모른다고.”
“남자뿐인 집단에서 제가 음담의 대상이 된다는 건 알아들었습니다.”
“발상을 좀 더 심화해 봐.”
루시온이 고개를 절레절레했다. 이에샤는 발끈했지만, 루시온이 답답한 것은 제국 기사단의 꼴통들 때문이었다. 되새길수록 아까웠다. 이에샤만 한 검술사를 근위 기사로 쓸 수 없다니!
괴상한 이치가 있다. 남자의 정사(情事)는 얼마나 문란하든지 왈가왈부해선 안 될 일이고, 여자의 정사는 틈을 보이는 순간 산처럼 부풀려진다.
기사단은 사교계와 여러 부분이 겹쳤다. 이에샤를 헐뜯는 말은 사교계로 옮겨가, 고용인들을 통하여 퍼질 터였다. 평민까지 이에샤의 이름을 알게 될지도 몰랐다. ‘황태자를 홀린 부덕한 여백작’으로.
루시온으로서는 자신과 이에샤의 연결 고리를 끊어야만 했다.
“예, 인정하겠습니다, 저는 전하의 뜻을 전혀 모르겠어요! 도대체 제가 어떻게 했어야 했다는 겁니까? 일단 기사가 되면 잘 풀렸을지도 모르잖아요!”
“아니. 백작은 절대로 기사단에 들어가서 잘해 낼 수 없었어. 그것이 사람과 사람 간의 약속이고 사회의 흐름이야.”
“저한테는 능력이 있다고요!”
“그 사실을 남이 받아들여 주는가가 문제지.”
루시온은 침착했다. 루시온에게는 이에샤가 던지는 모든 항변을 반박할 자신이 있었다. 그만큼 이에샤의 말은 현실과 동떨어졌다.
“그대는 똑똑해. 오직 나 하나에게 걸고 그런 과감한 장면을 연출한 걸 안다. 그 판단은 들어맞았어. 나는 그대가 아까워 밤잠도 이루지 못했지.”
“그럼, 대체, 왜……!’
“나를 너무 과대평가했어.”
한숨이 넘쳐흘렀다. 이런 이야기까지는 꺼내고 싶지 않았다. 우아하게 구슬릴 셈이었는데, 이에샤의 고집이 생각보다 드셌다.
“나는 황태자이지, 신이 아니야. 만민의 위에 황족이 있다면 황족의 위에는 눈과 귀와 입이 있으니. 그대는 수험자 중에서 가장 강했다. 아흔아홉 명의 남자, 아니, 슬러그 경까지 포함해서 백 명이 그대를 증오했다는 뜻이야. 민심은 달래지 않으면 폭주한다고.”
백 명을 위하고자 이에샤 하나를 찍어 누른 것은 사실이었다. 다른 수가 떠오르지 않았었다. 루시온은 깍짓손을 엮었다. 한쪽 무릎에 얹었다. 검지만 까딱까딱 움직였다. 초조할 때의 버릇이었다.
“제국 기사가 아녀자에게 흠씬 두들겨 맞은 사건은 알려지지 않을 거야. 슬러그 경뿐만 아니라 남자 전체의 망신이라면서 쉬쉬하겠지. 어차피 그대는 불합격했고.”
이는 라제카에게서 배운 것이었다. 라제카는 학자들과 논쟁을 벌이기도 했는데, 자신이 실수한 부분만 입방아에 오르내림을 깨달았다. 상대방을 압도했던 이야기는 물속의 소금처럼 사라져 버린 채였다.
라제카는 생글생글 웃으며 “앨저 백작은 기사가 되려고 설치다 실패한 말괄량이로만 남겠죠.” 하고 말했다. 묵직한 뼈가 느껴져, 루시온은 식은땀을 흘렸었다.
“이제 그대는 황태자의 침실에 드나드는 여자도, 기사에게 폭력을 휘두른 여자도 되지 않는다. 기사단 입단 시험에서 떨어진 여자일 뿐이지. 대부분 손가락질하겠지만, 누군가―적어도 두 사람은 그대를 용감하다고 기억할 거야.”
황태자는 이에샤의 재주에 마음을 빼앗겼다. 공주는 이에샤의 도전에 박수를 보냈다. 이에샤 앨저는 황제의 아들과 딸에게 자신을 아로새겼다.
라제카는 당돌하게 루시온을 부추겼다.
「오라버니의 바람에 따르세요. 그녀를 놓치기 싫으시죠? 아바마마의 뒤를 잇기도 전에 원하는 사람 하나 뽑지 못했다는 오점을 남기지 마세요. 이 라제카가 돕겠습니다.」
참으로 든든했다. 라제카의 뒷받침 덕분에 루시온은 ‘새로운 기사 자리’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부황은 딸에게 약한 아버지였다.
“그렇게 작은 명예를 잃었지만 큰 불명예로부터 벗어난 그대, 앨저 백작에게 더없이 어울리는 지위를 하사하겠노라. 이는 칙령이다.”
이에샤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허둥지둥 일어섰다. 루시온의 발치에 무릎을 꿇었다. 일주일 동안 무슨 공작이 오갔기에 황제까지 움직였을까?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루시온의 입매에 웃음이 걸렸다. 이에샤를 실격시킨 날과는 달랐다. 가면을 쓴 양 차갑고 매끄러운 얼굴이 아니었다. 진심으로 기뻐하는 듯 보였다.
“황후와 공주, 모든 황궁 여인을 수호하는 기사로서 입궁하라. 앨저 경.”
“저, 전하.”
이에샤가 떨리는 목소리를 냈다. 루시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고픈 말이 있다면 무엇이든지 들어 주겠다는 뜻이었다. 이에샤는 루시온의 자애로운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셈브리온은 어쩐지 이에샤의 낯빛이 파리하다고 생각했다. 이에샤가 말문을 떼었다.
“월경대를 갈고 와서 마저 이야기하면 안 되겠습니까?”
대화가 너무 길어졌다. 피를 받는 천을 바꿀 즈음이 되었다. 셈브리온은 숨을 삼키다가 사레가 들렸다. 체사로는 귀를 틀어막았다. 루시온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싸며, 다른 손으로는 화장실을 가리켰다.
“……배려하지 못해서 미안…….”
처음으로 루시온에게서 제대로 된 사과의 말이 흘러나왔다.
* * *
“멘델린 경!”
앳된 목소리가 엘테르트를 불렀다. 버들궁을 지나던 엘테르트가 멈칫했다. 옆쪽을 돌아보았다. 엘테르트의 허리 높이보다 조금 큰 여자아이가 다가왔다. 버들궁의 정원을 거닐던 듯했다. 연노란색 드레스는 장식이 적었지만, 귀한 공단으로 지은 옷이었다. 여자아이의 뒤에는 깐깐해 보이는 귀부인이 섰다.
“공주님을 뵙습니다.”
“안녕하세요? 줄곧 경을 보고 싶었는데, 왜 서향궁에 와 주지 않나요? 라제카가 ‘도시 연합의 흥망성쇠’를 다 읽었어요.”
“이런! 빠르시군요. 오늘은 제가 바쁘고, 다음주에 질문을 받으러 찾아뵙겠습니다.”
엘테르트와 라제카는 사촌 오누이 간인데도 깍듯했다―루시온은 둘이 대화할 때마다 숨이 막힌다고 투덜거렸다.
그러나 엘테르트는 ‘풋’하고 웃고 말았다. 라제카의 머리카락에 눈에 띄었다. 정성껏 말았다가, 어정쩡하게 풀린 모양새였다. 라제카는 13살 아이답게 몸가짐이 쾌활했다.
“벨제아 부인. 공주님의 단장을 다시 시켜 드려야겠습니다.”
“식사를 마치시고 다듬어 드릴 셈이었습니다.”
“공주님께선 소매에 잉크를 자주 묻히시니 밝은 색깔 드레스는 불편하지 않겠습니까?”
“아직 어리십니다. 무거운 색을 두르실 나이가 아니지요.”
공주의 시녀이자 황후의 친구, 말비다 벨제아가 핀잔했다. 말비다는 기어다니던 무렵의 엘테르트와 루시온도 알았다. 그 탓인지 엘테르트는 말비다 앞에서 움츠러들었다.
“부인, 멘델린 경은 남자니까 여자 옷에는 깜깜하답니다. 기대하면 안 돼요.”
“공주님…….”
“경이 멋있지 않았다면 저도 화냈을 거예요. 꽃다운 라제카한테 칙칙한 드레스를 입으라니, 어마마마께도 누가 된다고요.”
“그, 죄송합니다. 관용에 감사드립니다.”
라제카가 입가를 가리고 쿡쿡댔다. 상냥한 엘테르트이니 편의를 걱정해 주었을 테지만, 점잖은 드레스를 입기에 라제카는 어렸다. 공부하다가 잉크가 묻는 일쯤은 참아야 했다.
웃음을 멈추고 물어보았다.
“경은 어디를 가던 중이었나요?”
엘테르트의 얼굴에 복잡한 빛이 스쳤다. 라제카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엘테르트는 라제카나 란델―그밖에도 어린아이라면 누구든―앞에서 웃는 낯을 지키려 애쓰는 남자였다. 라제카는 엘테르트가 대놓고 한숨짓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여기사단의 본부를 점검하러 석곡궁으로 갑니다.”
============================ 작품 후기 ============================
소철, 버들, 서향, 석곡 등의 별궁 이름은 식물에서 따오고 있습니다...
엘테르트는 기사 작위를 가지지 않았지만 젊은 관료라서 경이라는 존칭으로 불립니다...나이가 들면 멘델린 공이 되겠죠~
봉건제냐 집권제냐 하는 문제라든가 황실 호칭 같은 건 고증에 신경 쓰지 않고 편의대로 쓰고 있어요~
+) 1월 27일 9시, 오타 수정했습니다. 지적 감사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