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2 3. 마모(磨耗) =========================
제국 기사단 입단 시험으로부터 일주일.
이에샤는 말짱했다. 기사가 되겠다며 달려들었던 일은 충동적이었다. 오랫동안 품은 꿈도 아니었다. 우울감에 파묻힐 거리가 못 되었다. 무위를 지녔다고 강자가 아니라는 깨달음은 괴로웠지만, 다다음 날에 털어 버렸다. 언제는 세상이 저에게 친절했던가?
오스터와 셀더리의 비웃음도 흘려 넘겼다―그 과정에서 커다란 도자기 꽃병이 박살났다. 이에샤의 짜증을 돋운 사람은 오히려 밀레나였다. “언니는 노력했잖아. 실패에도 가치는 있어.” 하는 위로가 신경을 들쑤셨다. 왜 화가 나는지도 알 수 없었다.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올리며 네 말이 다 맞겠지, 맞장구쳐 주어야 했다. 싸웠다간 밀레나를 때려 버릴 것 같았다.
오늘은 나들이를 나왔다. 셈브리온이 잡아끌었다. 셈브리온은 환기해 주지 않으면 사람이 망가진다며 “검술 금지!” 하고 선언했다. 잠이나 자고 싶었던 이에샤는 비척비척 걸었다. 현실에서 홀로 겉도는 기분이었다.
이에샤는 정말로 괜찮았다. 자기가 기사 시험에서 떨어진 게 뭐 대수라고, 입방아를 찧는 주변이 귀찮기만 했다. 셈브리온도 마찬가지였다. 산책을 하라느니 소설을 읽으라느니 과자를 먹으라느니 참견해 대서 번거로웠다.
“그냥 집에 가면 안 돼?”
“이-샤, 네가 고양이야? 자기 영역 밖으로는 한 발짝도 안 나가게.”
“와, 그거 좋겠다. 털이 북슬북슬해도 목욕을 싫어해도 살이 쪄도 예쁨받는 삶이라니 얼마나 편해.”
싱거운 농담을 지껄였다. 셈브리온이 이에샤를 돌아보았다. 굼뜨게 따라가던 이에샤는 “왜, 뭐, 왜.” 하고 투덜거렸다. 셈브리온은 한숨을 뱉었다. 이에샤의 속내를 맑은 샘처럼 들여다볼 수 있었는데, 지금은 통 읽히지 않았다. 제 입으로는 괜찮다지만 눈에 띄게 기운이 없었다.
정작 이에샤가 얼빠진 까닭은 단순했다. 그제부터 달거리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배도 허리도 아프지 않았으나 기분이 까부라졌다. 침대에 드러눕고 싶다는 마음만 굴뚝같았다.
암코양이는 월경도 안 한댔지. 이에샤는 진심으로 고양이가 부러워졌다.
“배고프진 않아? 우리 비싼 레스토랑에서 점심할까? 고기 요리 어때?”
“입맛이 없어. 당신 배고프면 밥 먹으러 가. 난 앉아만 있을게.”
“너 때문에 나왔는데 그럴 수야 있나. 과자 가게 갈래? 아니면 과일 으깬 거 마시러 갈래? 전에 맛있다 했잖아.”
“저기, 아까부터 왜 다 먹는 얘기야? 내가 그렇게 먹보로 보여?”
셈브리온이 재까닥 고개를 끄덕였다.
“너 많이 먹잖아.”
대꾸가 떠오르지 않았다. 이에샤는 대식가가 맞았으므로. 오스터보다도 많이 먹어서, 셀더리가 굶주린 거지 같다고 비꼬았었다. 밀레나의 다섯 배는 먹는 듯했다. 다만 밀레나의 밥은 새 모이와 비슷했다. 이에샤는 그렇게 먹고도 날씬할 만큼 움직였고. 식사량을 줄였다가는 뼈만 남을 것이다.
그도 평상시의 이야기였다. 달거리 전날에는 식욕이 돋아도, 시작하고는 입맛이 뚝 떨어졌다. 조금만 자극적인 음식을 먹어도 속이 부대꼈다. 지금 이에샤에게는 낮잠만이 간절했다.
“정신 좀 차려 봐, 이-샤! 오늘 집도 알아보기로 했잖아. 준비도 없이 쫓겨나고 싶어?”
“어차피 당신 돈으로 구하는 건데, 당신 마음대로 해.”
“벨체터 촌놈이 무슨 수로 제국 수도에서 부동산 거래를 해? 일단은 너랑 가야 신원 증명이고 뭐고 될 거 아니야.”
“그럼 우리 대충 벨체터로 가서 살자. 이제 역할 바꿀 때도 됐어. 내가 뜨내기, 세비가 토박이 해.”
셈브리온은 어처구니없는 얼굴을 했다. 나라가 반으로 쪼개져 치고받는 곳에서 살자니. 어느 미친놈이 왕성에 신기전을 날렸다고 들었다. 벨체터에서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룬다면, 다음날 기둥뿌리가 뽑혀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셈브리온의 호적 자료가 남았을지조차 미지수였다.
“그럼 이-샤, 다른 일부터 해결하자. 어떻게 생각해?”
“뭘?”
“알잖아. 아까부터 졸졸졸 쫓아오는 그림자 두 개.”
이에샤가 입을 다물었다. 셈브리온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셈브리온이 드러날락 말락 턱을 움직였다. 불이 켜지지 않은 술집과 푸줏간의 샛길을 가리켰다. 이에샤는 따분한 척 뒷목을 잡았다.
저의 착각이 아니었다. 한껏 억누른 인기척이 거리를 지키며 따라붙어 온 것이다. 베테랑 용병인 셈브리온은 이에샤보다 먼저 눈치챘으리라.
“푸줏간에도 파리만 날려. 주인은 조는 중. 눈에 띄지 않게 처리할 수 있겠는데?”
“시체가 발견되면 일이 커지지 않을까?”
“……아니, 붙잡아서 얘기를 들어 보겠다는 뜻이었는데.”
이에샤는 “아.” 하는 소리를 흘렸다. 하기야 셈브리온의 배짱이 두둑하더라도, 델페레타에서 범죄를 저지르려 들지야 않을 터였다. 몽롱했다.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그럼 세비가 알아서 해. 나 지금 너무 졸려.”
“어휴! 오늘따라 고집불통이네. 알겠어.”
셈브리온이 투덜거렸다. 이에샤는 ‘당신이 생리해 봐.’ 하고 마음으로만 씹었다.
둘은 미행자가 숨은 샛길로 향했다.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움찔 놀라는 낌새가 났다. 셈브리온이 깍지를 엮었다. 뚜둑. 손끝부터 팔목까지 구불거리며 관절을 풀었다.
골목 안에는 로브를 두른 사내들이 섰다. 두 명 다 후드를 뒤집어쓴 채였다. 한쪽이 일행을 감추려는 듯 앞으로 나섰다. 셈브리온이 땅을 박찼다. 벼락같이 달려나갔다. 이에샤는 하품을 터뜨리며 지켜보았다.
‘퍽’하고 주먹이 무언가를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뜻밖에도, 사내는 쓰러지지 않았다. 팔뚝으로 막아 내고 셈브리온의 힘을 견뎠다. 셈브리온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 친구야. 외국인이 범죄를 저지르면 더 험하게 다스리는 걸 모르는가? 만약 나부터 공격하지 않았다면 자넨 극형에 처해졌을걸세.”
사내의 후드가 흘러내렸다. 셈브리온이 화들짝 물러섰다. 체사로가 얼얼한 팔을 반대쪽 손으로 문질렀다.
체사로의 뒤에서 큭큭,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이에샤는 입을 헤벌렸다.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순식간에 졸음기가 달아나 버렸다.
“전하?”
“일주일 동안 끊임없이 그대를 생각했지, 앨저 백작.”
루시온도 후드를 젖혔다. 반듯한 얼굴이 드러났다.
셈브리온은 루시온과 이에샤를 번갈아 보았다. 지금 무슨 소리가 지나갔는가? 웬 놈팡이가 이에샤에게 느끼한 멘트를 날리니, 경계심이 솟구쳤다. 이에샤의 짝은 물론 잘생긴 남자여야 했다. 하나 지나치게 잘생기면 또 믿을 수 없었다.
셈브리온이 터무니없는 망상에 빠진 동안 이에샤는 입을 다물었다. 허리를 굽힐까 하다가 말았다. 수상쩍은 꼬락서니를 보아하니, 알리고 행차한 것은 아닐 터였다. 받들어 모시기 싫다는 심통도 있었다. 이에샤에게는 실격을 선고하던 루시온의 모습이 강렬하게 박혔다.
“위험하게 뭘 하고 계시는 겁니까? 호위를 이중 삼중으로 둘러쳐도 모자라신 분께서.”
“브링어 근위 기사단장을 대동했는데 더는 인력 낭비지.”
“적이 같은 브링어라면 어떻습니까?”
루시온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한 번의 공방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체사로는 붉은 머리카락의 용병에게 이기지 못하리라. 브링어끼리여도 격이 달랐다. 셈브리온이 역심이라도 품는다면 델페레타는 황태자를 잃을 것이다. 이에샤의 적개심이 따끔따끔하게 느껴졌다.
“그대의 스승을 말하는 거라면 물론 위협적이지만, 그가 에버렛 경과 싸우려 하지는 않을걸. 걱정하지 않아.”
“……세비.”
셈브리온이 체사로로부터 떨어졌다. 이에샤의 곁으로 돌아갔다. 이에샤가 당혹스러운 목소리로 물어보았다.
“아는 사람이라는 게 근위 기사단장이었어? 내 추천장을 써 준?”
“어, 응. 말해도 안 믿을 것 같아서 그냥 다물었는데.”
“그야 당신 용병이잖아. 이 정도로 거물일 줄은 몰랐지.”
셈브리온은 머쓱히 웃기만 했다.
체사로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야기를 들어 보니 이에샤는 셈브리온 데힐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 모양이었다. 용병 길드의 전설이 아니던가. 벨체터에서는 ‘붉은 악몽’이라고까지 불렸고 말이다. 둥글둥글해진 성격이 낯설었지만, 실력은 늘었으면 늘었지 떨어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에샤가 루시온을 노려보며 말했다.
“날 만나러 오신 분들 같아. 저쪽은 루시온 이벨리오노 황태자 전하.”
“응? ……어? 뭐라고?”
“세비가 전하께 생채기라도 냈다면 우리 둘 목이 사이좋게 성문에 내걸렸겠다.”
“저기, 이-샤. 저분이 누구시라고?”
셈브리온의 귀가 쫑긋했다. 손에 땀이 배는 듯했다. 이에샤는 시큰둥하게 못박아 주었다.
“황태자 전하. 미래의 황제 폐하.”
셈브리온은 루시온의 눈이 좇지도 못할 속도로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루시온은 오늘의 만남이 알려져서 이로울 게 없다고 말했다. 일주일 동안 이에샤가 바깥으로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기회를 보아 접촉할 셈이었다. 설마 들켜 버릴 줄이야.
이에샤는 세상의 불공평을 또다시 느꼈다. 루시온이 데려간 곳은 으리으리한 호텔이었다. 지배인이 로비에서 기다리던 중이었다. 루시온을 ‘이베르 님’이라고 부르며, 네 사람을 객실로 안내했다. 그곳에 놓인 옷장이 이에샤의 방과 비슷한 크기로 보였다.
루시온은 일인용 소파에 몸을 묻었다. 체사로가 옆쪽에 섰다. 셈브리온은 몸둘 바를 몰라 했고, 이에샤에게는 루시온과 대좌할 마음이 없었다. 루시온은 혼자만 편히 앉은 셈이 되었다.
“그냥 제게 찾아오라고 명령을 하시지요. 거절할 턱도 없는데.”
“화가 많이 났나 보군, 이-샤.”
“제 스승님 흉내내지 마십시오!”
이에샤가 날카롭게 외쳤다. 다른 일은 참더라도, 셈브리온을 바보 취급한다면 넘어갈 수 없었다. 셈브리온이 “난 괜찮은데.” 하고 나섰다가 이에샤의 눈총을 받고 찌그러졌다.
“……내 입장도 좀 이해해 달라고. 이렇게 사과까지 하러 왔잖아.”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전하께 화라도 내고 있습니까? 제까짓 게 어찌.”
“끄응.”
루시온은 뺨을 긁적였다. 이에샤의 불순은 도가 지나쳤다. 체사로가 노여움을 참는 것이 느껴졌다. 여태껏 루시온에게 이에샤처럼 구는 자는 없었다. 귀족 누구나가 루시온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죽으라고 하면 죽는 시늉도 할 터였다.
애꿎은 셈브리온만 속을 끓였다. 이에샤의 옆구리를 쿡쿡 찔러 댔다. 브링이 망쳐 놓은 감각이 사달을 낼 줄은 알았으나, 황태자를 상대로 개기리라곤 상상치 못했다.
루시온은 이에샤가 사교계에 데뷔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했다. 차근차근 풀어 가르치는 일은 엘테르트의 특기였다. 그것을 따라해 보기로 했다.
“그날 내가 앨저 백작의 손을 들어 주지 않은 이유부터 설명하지.”
“알고 있습니다. 제가 기사단의 기강을 해치기 때문 아닙니까?”
“맞아. 하지만 백작은 내 말을 외웠을 뿐이지, 뜻을 이해하지는 못했군.”
이에샤는 울컥했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자신을 머저리로 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엘테르트 멘델린, 황태자, 대연무장에 있던 모든 남자들……. 그동안 괜찮다고 여겼는데, 틀렸다. 역시 화가 났다.
“도대체 제가, 무엇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겁니까? 황태자 전하.”
“사람과 사람 사이에 흐르는 기류. 그리고 시류. 그대는 마치 무인도에서 살아온 것만 같아.”
셈브리온은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루시온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이에샤는 알디온 저택 바깥으로 나가기를 꺼렸다. 저택 안의 사람도 마주하려 하지 않았다. 셈브리온 쪽이 고용인의 얼굴을 훨씬 많이 알 것이다. 뒷뜰에 만든 연무장이 이에샤의 섬이었다.
“먼저 짚고 넘어가지. 이에샤 앨저, 그 시험에서 내가 바란 사람은 그대뿐이다. 여름철과 마찬가지로 쓸만한 놈이 전혀 없었어.”
“전하께선 저를 떨어뜨리셨습니다.”
루시온은 이에샤의 마음이 뜻밖에 철통같음을 깨달았다. 호탕하고 대담하게 생겨서는, 선을 긋고 담을 치는 일에 익숙해 보였다. 예상보다 타이르기 어려울 듯싶었다.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대를 빈틈없이 들어맞는 자리에 올려놓고 싶었기 때문이야.”
============================ 작품 후기 ============================
지난 편에서 고구마 밀어넣고 끝냈으니 이제 쥐구멍에도 볕 좀 들게 해줘야겠어요.
셈브리온의 과거는 언제쯤 쓸 수 있을까요?
작가의 고구마 폭탄으로 갑갑해 하시는 분들이 많아요.
키워드에 주변이 온통 적이라고 써놓은 것처럼...이에샤 많이 구르고 상처받을 예정이에요ㅜㅜ 그만큼 좋은 일 행복한 일도 만들어줄 테니까 지켜봐주세요.
밉상인 애들은 속시원히 욕하시구요~ 심혈을 기울여 밉상으로 쓰고 있답니다. 애들이 예쁜짓만 하면서 크지는 않으니까요~~~! 작가가 캐릭터들 다 좋아하니 괜찮습니다!
선추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