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수는 검 한 자루-9화 (9/164)

00009 2. 싸움에 이기고 =========================

엘테르트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보좌관이 어리둥절한 낯빛을 띠었다. 젊은 소공작은 똑똑하고 성실했다. 시간을 능률적으로 나누어 쓸 줄 알았다. 지금처럼 길에서 뭉그적대기는 처음이었다. 엘테르트는 고개를 치켜들었다. 해가 하늘의 꼭대기로 나아가는 중이었다. 정오가 가까웠다.

툭 내뱉었다.

“입단 시험.”

“예?”

“기사단 입단 시험이 한창이겠군.”

보좌관은 눈을 끔뻑였다. 엘테르트는 유난스러울 정도로 기사를 싫어했다. 공석에서 호위를 맡는 이에게도 쌀쌀맞았다. 병참 쪽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황궁에서 마주친 기사가 인사를 건네 와도, “수고하게.” 하고는 서둘러 자리를 떠 버렸다. 그런 엘테르트가 기사단 입단 시험을 입에 올릴 줄이야.

“아, 소철궁이 근처군요. 지금쯤 1차 시험이 끝나갈 겁니다.”

“수험자들끼리 칼을 겨누는 그거 말인가.”

“예. 절반을 거르는 관문이죠.”

보좌관이 엘테르트의 표정을 살폈다. 엘테르트는 역시나, 눈 아래에 수심을 매달았다. 꺼림칙하다면 왜 화두를 꺼냈는가? 보좌관으로서는 영문을 모를 노릇이었다.

엘테르트의 머릿속은 ‘이에샤 앨저’로 어지러웠다. 인상이 나빴다고는 해도―다짜고짜 서재로 밀고 들어왔던 이에샤의 잘못도 있었다―자신도 너무했었다. 이에샤는 귀부인이었다. 예를 갖추어 대해야 했다. 검을 싫어하는 저다우면서,  고상한 저답지 않게 굴어 버렸다. 그 탓으로 이에샤가 마음에 밟혔다.

‘그리고 루시온.’

루시온이 눈을 빛내는 것은 당연했다. ‘내 발밑에서 모두가 평등’이 루시온의 신조였다. 계집이 사내의 자리로 기어오르려는 모습이 재밌었으리라. 다만, 루시온은 무능한 자에게 가차없었다. 이에샤가 성과를 내지 못한다면 질려 버릴 터였다.

그것이 걱정되었다. 엘테르트는 루시온이―기사단장들을 압박해―이에샤의 편의를 봐 주었음을 알았다. 루시온의 뒷받침이 사라진다면 어찌될까? 남자는 괜찮았다. 망신살이 뻗치더라도 지저분한 소리를 듣지는 않을 테니. 미움을 사서 입는 해는 레이디 쪽이 치명적이었다. 귀족들은 온갖 말로 이에샤를 물어뜯을 것이다.

“황태자 전하께서는 이번 시험도 참관하시겠지?”

“예. 그럴 겁니다.”

“소철궁으로 가자. 전하를 뵙고 드릴 말씀이 떠올랐다.”

보좌관은 의구심을 품지 않았다. 멘델린 소공작이 황태자와 가깝다는 사실은 유명했다. 소철궁을 지나는 김에 볼일을 보려는 거겠거니 할 따름이었다.

엘테르트는 소철궁으로 가는 길을 몰랐다. 신년맞이 토너먼트조차 구경한 적이 없었다. 황궁은 넓었다. 거듭된 증축으로 구조가 꼬이기도 했다. 엘테르트의 보좌관은 눈치가 재빨랐다. 앞장서서 소철궁으로 걷기 시작했다.

대연무장은 수선스러웠다. 100명을 모아 놓고 등수를 매기는 날이 아닌가.

엘테르트는 눈살을 찌푸렸다. 분위기가 묘했다. 열띤 시험장이라기보다, 시비가 붙어 주먹다짐할 때의 난리통 같았다. 그 느낌은 안으로 들어갈수록 뚜렷해졌다.

투기장 어귀는 불투명한 막으로 뒤덮였다. 검이 백 자루 이상 쓰이는 행사였다. 불온한 자가 무기를 들고 뛰쳐나갈까 염려한 결계였다. 엘테르트는 막을 지나며 ‘사고라도 생겼나?’ 하고 생각했다. 이윽고 안쪽의 풍경이 보였다.

엘테르트의 눈길을 잡아끈 사람은 이에샤였다. 당연하다면 당연할까, 아침부터 생각해 온 사람이었으니까. 뿐만 아니었다. 이에샤는 소란의 중심에 있었다.

“에르디?”

“루, 아니. 전하를 뵙습니다.”

엘테르트가 무릎을 비대칭적으로 굽혔다. 허리도 살짝 숙였다. 간추린 절에 루시온도 손만 휘저어 답했다.

루시온은 가장자리 벽에 기대어 팔짱을 꼈다. 얼굴에 재미있다는 빛이 가득했다. 엘테르트는 루시온을 물끄러미 보았다. 갈색 눈동자에 뜻이 깊었다.

“……알았어. 설명할게. 설명할 테니 그렇게 보니 좀 마. 난 너 그럴 때마다 무섭더라.”

“무슨 일입니까? 저들은 대체 뭘 하는 겁니까?”

투기장 한복판을 가리켰다. 남자 일고여덟 명이 이에샤를 둘러쌌다. 핏대를 세우고 무어라 무어라 소리지르는데, ‘반칙’이니 ‘부정’ 따위의 낱말이 섞였다. 나머지 수험자도 불만스러운 낯들이었다. 이에샤는 움츠러들지 않았다. 윽박지르는 남자에게 칼끝을 겨누며―엘테르트는 참으로 정이 안 가는 여자라고 생각했다―고함을 쳤다.

“무능한 놈이 꼭 도구 탓을 하지! 몸 수색이라도 해 보면 되잖아!”

“시녀도 없는데 어찌 아녀자의 몸을 뒤지겠소! 그걸 노리고 벌인 짓이 아니오?”

“지랄 마! 내가 여기서 훌떡 벗어 버리기 전에!”

엘테르트의 낯빛이 허예졌다. 루시온은 끅끅대고 웃느라 죽어갔다. 저도 나오는 대로 지껄이는 편이었지만, 이에샤의 입담은 걸쭉하기 그지없었다.

셈브리온은 제국어로 제국인보다 다양한 욕을 구사할 수 있었다. 고운 말은 9년 전부터야 쓰게 되었다. 어린 이에샤가 “세비, 아빠 꿈 꿨어. X같아.” 하고 칭얼거린 아침이 계기였다. 엎질러진 물이었지만 말이다.

엘테르트는 방금보다 힘이 들어간 눈으로 루시온을 보았다.

“알았다니까. 에르디. 진짜 장난 아니야, 저 여백작. 일격에 상대방 검을 날려 버렸어.”

“뭐?”

“심지어 그 상대가 오르겔 후작의 아들이었거든.”

“뭐?”

루시온은 엘테르트가 지금처럼 얼빠진 적이 있었나 돌이켜보았다. 퍽 볼만했다. 남 앞에서는 깍듯이 지키던 존대마저 잊어버린 듯했다.

오르겔 소후작이라면 엘테르트도 알았다. 소문난 검술 신동. 서른 살 즈음에는 브링어가 될 거라는 기대가 자자하였다. 오르겔 후작도 명망 있는 기사였다. 아들이 검을 쥔 무렵부터 밤낮으로 달라붙어 가르쳤다고 들었다.

믿기 어려웠다. 그의 검을 이에샤가 쳐 냈다니. 엘테르트는 침착한 태도로 물어보았다.

“오르겔 측이 실수를 저질렀을 가능성은?”

“글쎄. 시작하자마자 벌어진 일이라 모르지.”

“여자라서 방심했을 수도 있잖아.”

“그건 근거 있는 추측이다만, 인정하겠어? 자기가 방심해서 계집애한테 당했다고. 그러니까 앨저를 쥐 잡듯이 잡는 거야. 아티팩트를 몰래 들여온 거라면서.”

엘테르트는 고개를 주억였다. 어찌된 영문인지 알 성싶었다. 품에 지녀서 근력을 키우는 아티팩트는―비교적―흔했다. 몸으로 하는 일에 두루두루 쓸만한 덕택이었다. 많은 마법사가 근력 강화 아티팩트로 연구비를 벌었다. 그만큼 구하기 쉬웠고, 값도 싼 편이었다.

“수사관 불러라, 몸 수색을 해야 하니까 시녀도 불러라, 여자가 신성한 시험에 먹칠을 했다 난리 났지. 그럼 또 외부인이 들어오는 틈에 다른 부정이 생길지도 모른다고 항의하는 놈들도 있고.”

“개판이군.”

짤막한 낱말로 정리했다. 루시온이 “푸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엘테르트의 미간이 죄어들었다. 루시온의 반응이 마뜩지 않았다. 자기 손으로 시험에 끼워 넣은 여자가 곤욕을 겪는데, 남의 일처럼 무엇을 하는가.

“해결해야지. 왜 가만있어?”

“시험의 책임자는 내가 아니잖아. 에버렛 경을 제외한 모든 기사단장이 저 개판을 묵인하는데 나라고 별수 있겠어?”

“에버렛 경은 어디 갔는데.”

“심문당하는 중.”

“뭐?”

같은 음절이 세 번째로 튀어나왔다. 엘테르트는 이에샤로부터 눈을 떼지 않은 채 “대체 근위 기사단장이 심문받을 일이 뭔데?” 하고 물었다.

“처음 이에샤 앨저를 추천한 사람은 에버렛 경이야. 여자에게 기회를 주자는 것만으로도 파격적이었는데, 그 여자가 부정을 저지르니까―아니, 남들이 그렇게 생각한다고. 난 오르겔이 방심했다는 데에 걸었어. 그래서 에버렛 경도 수상하다는 소리가 나오고, 2 기사단이랑 4 기사단에서 추궁에 들어갔어. 둘이 어떤 사이냐? 뭐 그런.”

이마를 감싸쥐었다. 둘이 어떤 사이냐니! 체사로와 이에샤의 명예가 걸린 의심이었다. 기사의 정상인 체사로야 멀쩡할지도 몰랐다. 이에샤는 아니었다. 사십 대 백작의 애인일지도 모른다, 소문이 퍼지면 얼굴을 들고 다니기 힘들 터였다.

“루시온. 당장 에버렛 경을 데려오라고 해.”

“우와, 에르디 이제 나한테 막 명령도 해? 그를 데려와서 뭐하게. 지금 앨저랑 에버렛을 한자리에 두어서 좋을 게 없잖아. 멘델린 소공작, 내가 괜히 구경만 하는 줄 아나?”

루시온의 서슬이 퍼레졌다. 그제야 엘테르트는 루시온의 노여움을 알아차렸다. 기사단 입단 시험은 유서 깊은 황실의 연례행사였다. 루시온은 황태자로서 자부심이 대단했다. 이 소동이 몹시 불미스러워 보일 것이다. 엘테르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시험을 계속하려면 근위 기사단장이 있어야지. 원칙대로 처리하면 돼. 오르겔은 앨저 백작에게 졌으니 불합격으로.”

“그랬다가 무슨 뒷말을 들으려고? 에르디, 답지 않게 생각이 짧다.”

“내가 멘델린 소공작으로서 앨저 백작의 결백을 보증할게.”

루시온이 입술을 벌렸다. 무어라 말하고 싶은 양 달싹이다가, 꾹 붙였다. 놀라웠다. 엘테르트는 자신을 멘델린 남작으로 일컬을 때가 많았다. 소공작이라고 대는 경우는 드물었다. 멘델린의 그늘로 남을 억누르기가 싫다 하면서.

멘델린 소공작이 보증을 선다면 더는 이에샤를 문제 삼지 못하리라. 루시온은 체사로와 같이 유착을 의심받는 처지였으나 엘테르트는 아니었다. 사건을 매듭짓기에 더없이 좋았다.

“무슨 바람이 분 거야?”

“앨저 백작한테는 사과할 일이 있어. 그리고, 알잖아. 그녀의 부정 행위가 명백해진다면 앞으로 얼마나 괴롭게 될지. 여자 한 사람을 두고 충분히 지나쳤어.”

“그럼 넌 앨저가 진짜 부정을 저질렀더라도 감쌀 거란 뜻이야? 레이디니까?”

엘테르트는 루시온을 바라보았다. 대답하기가 어려웠다. 루시온이 ‘공정성을 잃은 게 아니냐.’ 하고 꼬집은 것이다.

“……이 일로 오르겔 소후작이 입을 피해와 앨저 백작의 피해를 저울질했을 뿐이야. 나는 언제나 폭력과 다툼을 피하자는 주의잖아.”

“얼버무리기는.”

루시온이 어깨를 으쓱했다. 엘테르트가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반대할 까닭이 없었다. 한쪽 팔을 쳐들었다. 그만! 시원시원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끓어올라 터질 것 같던 투기장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멘델린 소공작이 앨저 백작의 무고함을 보증했다.”

“그럴 수가! 황태자 전하!”

“앨저 백작은 1차 시험에 합격, 오르겔 소후작은 불합격으로 처리한다. 오르겔 가에서 계속 문제 삼는다면 이는 모함으로 다스리겠다.”

오르겔 소후작의 인상이 구겨졌다. 많은 수험자가 비슷했다. 이에샤는 따가운 눈총을 받으면서도, 루시온과 엘테르트가 선 곳만을 쳐다보았다.

이에샤는 제 상대가 누구인지 몰랐다. 유명한 검술 신동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한 번의 공격으로 그가 검을 놓칠 줄도 몰랐다. 셈브리온은 그런 적이 없었고, 이에샤 또한 셈브리온을 상대로 그러지 않았으니까.

누군가가 “저 여자, 아티팩트를 썼을지도 몰라!” 하고 외치자 어안이 벙벙해졌다. 사내들에게 둘러싸였을 때는 피가 식는 것만 같았다. 브링을 보여야 하나 고민하던 차였다.

‘저 사람이 도와준 건가?’

지붕이 없는 콜로세움에는 바람이 잘 들었다. 엷은 금발이 나부꼈다―처음 만났던 날처럼. 엘테르트는 옆머리를 비스듬하게 쓸어넘기고, 이에샤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루시온과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에샤는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일이 생각처럼 풀리지 않았다.

에브라힐 궁전의 중앙에 있는 종탑에서 정오를 알려 왔다.

============================ 작품 후기 ============================

1차 시험은 별로 중요한 파트가 아니라 엘테르트 시점으로 진행했습니다~ 이다음부터 이에샤 칼질 열심히 시킬게요.

엘테르트는 평화주의자이고 약자를 배려하는 성격이지만...이에샤한테는 좀 날카롭죠. 그래도 사감으로 괴롭히진 않을 거예요.

선추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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