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수는 검 한 자루-8화 (8/164)

00008 2. 싸움에 이기고 =========================

델페레타 제국의 황궁―에브라힐 궁전은 부산스러웠다. 12월이 밝았다. 겨울철 기사단 입단 시험이 이르러 닥쳤다. 하인들이 투구·검·방패 따위를 옮겼다. 하녀는 대연무장을 쓸고 닦았다.

대연무장. 300명을 너끈하게 받아들이는 콜로세움은 황실의 위엄이었다. 여느 때에는 잠가 두었다가 기사단 합동 훈련이나 신년맞이 토너먼트, 오늘 같은 입단 시험 날에만 열었다.

이에샤는 삯마차를 탔다. 기사가 되는 데 자격은 필요하지 않았으나, 평민에게는 넘보기 힘든 일이었다. 걸음마를 떼면서 검을 쥐는 귀족들을 어찌 이기겠는가? 올해의 수험자도 모두 귀족이었다. 쟁쟁한 집안부터 기울어서 아들의 장래만 바라보는 집안까지, 문장을 단 마차가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삯마차로 온 사람은 이에샤뿐이었다. 기실 이에샤는 앨저 백작가의 문장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가물가물했다.

마차를 빌리면서도 셈브리온의 지갑이 열렸다. 이에샤가 기사가 되어야 할 까닭이 하나 늘었다. 이에샤는 그럴싸한 저택을 사, 셈브리온에게 볕 드는 방을 골라 줄 꿈에 부풀었다.

“성함과 방문하신 용건을 말해 주십시오.”

성문의 경비병이 창대를 기울였다. 이에샤를 가로막았다. 짧은 머리에 키가 훤칠하고, 바지를 입었어도 이에샤는 여성스러웠다. 얼굴선은 나긋하고 허리는 잘록했다. 경비병은 이에샤가 계집종이겠거니 했지만, 몸가짐이 당당하여 예의를 갖추어 보았다.

“앨저 백작. 기사단 입단 시험을 보러 왔습니다.”

“……뭐라고요?”

“수험증은 여기 있어요.”

이에샤는 허릿단에 매단 패를 끌렀다. 경비병에게 내밀었다. 동그란 모양으로 두드린 은판에 사자 무늬가 새겨진 물건은, 그끄제 알디온 후작가에 배달되었다. 기사 수험자에게 주어지는 증명패였다. 경비병은 입을 헤벌렸다. 사실은 여자가 아니고, 곱상하게 생긴 청년인가 싶었다.

긴가민가하며 경비병이 방명록에 ‘앨저 백작’이라고 적었다. 이에샤는 고개를 까딱하고 궁전으로 들어섰다. 대연무장이 자리한 소철궁까지는 거리가 있었다. 보통은 자기 마차를 끌고 갈 터이나, 빌린 마차를 황궁에 들일 수는 없었다. 이에샤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정원사가 관목을 다듬는 중이었다. 허드레꾼이 오락가락했다. 복도에는 하녀의 치마폭이 늘어졌다. 관리인 듯한 귀족 남자가 책을 껴안고 걸어갔다.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시녀를 거느리고 행차하기도 했다. 에브라힐 궁전에는 길거리만큼이나 갖가지 사람이 다녔다.

거기서 누구도 이에샤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알디온의 맏딸이자 앨저의 주인은 그만큼 하잘것없었다.

‘기사가 되면 달라지겠지. 나도, 남도.’

감상에 빠졌을 때였다. 웬 손가락이 이에샤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에샤는 누군가 가까워지는 건 느꼈지만, 저를 부르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황궁은 처음이었으니까. 셈브리온이 안다는 기사도 누구인지까지는 듣지 못했다.

“누구……?”

이에샤는 서둘러 무릎부터 굽혔다. 눈앞의 청년은 ‘높으신 분’ 같았다. 장식은 없지만 실크로 짠 셔츠. 금실로 자수가 들어간 바지. 보석이 달린 허리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부티가 났다.

새카만 머리카락에 윤이 흘렀다. 아침저녁으로 기름을 발라 대는 밀레나 못지않았다. 얼굴 생김은 미술가가 깎은 양 반듯반듯했다. 엘테르트 멘델린만큼이나 빛나는 미남이었다. 엘테르트가 아침 이슬만 마시고 살게 생겼다면, 청년은 술과 고기를 사랑할 듯싶었다. 점잖지는 않아도 활력이 넘쳤다.

“이에샤 앨저. 맞지?”

“예. 그렇습니다.”

“소철궁은 여기보다 저쪽으로 가로지르는 편이 빨라. 장미 정원으로 들어가면 길이 나 있거든. 황궁의 안내판에는 사람을 뺑이 치겠다는 심보가 덕지덕지하지.”

이에샤는 멍청한 표정을 지어 버렸다. 귀하신 분답지 않게 말씨가 방정맞은 청년이었다. 장난을 치는가 했으나, 청년이 가리킨 방향은 소철궁 쪽이 맞았다. 재차 무릎을 구부렸다.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했다. 청년이 웃음을 터뜨렸다. 시원시원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저, 대체 누구십니까?”

“나? 그대가 시험에 붙는다면 상관이 될 몸이라고 해 두지. 기대가 크다고.”

이에샤는 눈살을 찌푸렸다. 셈브리온의 지인이라는 기사일까? 청년의 허리띠에 짤막한 아밍 소드가 걸린 게 보였다. 하나 기껏해야 이에샤보다 한두 살 많아 보였다. 셈브리온과 아는 사이라기에는 어렸다.

찍어 맞춰 보기로 했다. 이에샤는 대련할 때도 과단성 있게 치고 들어가는 공격을 즐겼다. 오른손을 왼가슴에 얹었다. 부드럽게 허리를 숙였다.

“전하의 관심에, 황공하오나 부응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허!”

“황태자 전하께서도 시험을 참관하십니까?”

루시온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자신의 정체를 들어맞힐 줄이야. 앨저 백작은 어떤 사교 모임에도 나오지 않는다고 들었다. 황태자가 검은색 머리카락에 푸른 눈을 지녔다는 정보야 흔해 빠졌으나, 이에샤에게 꿰뚫린 것은 뜻밖이었다. 이에샤로서는 엘테르트에게서 귀띔을 받은 셈이었지만 말이다.

“글쎄, 고민 중인데. 여름철 시험도 참관했거든. 올해는 통 인재가 없더라고. 이번에도 실망할까 봐, 나중에 결과만 들을지 어떨지……. 그대는 어쩌면 좋겠어?”

이에샤는 의아쩍게 답했다.

“전하의 뜻대로 하십시오. 저 같은 자에게까지 의견을 구하십니까?”

“그대의 어디가 어떻다고. 자기 비하를 하는 부류로는 안 보이는데.”

“저의 스승이.”

머릿속에 셈브리온의 얼굴이 그려졌다. 뱃속이 가라앉았다. 황태자를 만나 얼어붙었던 가슴도 아무렇지 않아졌다. 이에샤에게는 셈브리온만 있으면 되었다.

셈브리온은 이에샤가 눈에 띄지 않기를 바랐다. 걱정 끼치기 싫었다.

“제게는 쥐뿔도 없음을 깨달으라 하더이다.”

“하하, 엄격한걸. 그대도 같은 생각인가?”

“…….”

하지만, 이에샤의 진심은 호전적이었다. 기사가 되기를 다짐했다. 꼭대기―근위 기사단장까지 오르고 싶다는 욕심도 피어올랐다. 황태자와 친해진다면 득이 될 터였다. 이에샤는 씨익,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저는 이번 수험자 중 가장 뛰어날 겁니다.”

“기사가 되겠다면 알아 둬, 앨저 양. 황족 앞에서 허풍을 치면 위험하다고.”

“앨저 백작입니다. 그렇다면 시험을 보러 와 주십시오. 증명해 보이죠.”

“오케이! 처음부터 그렇게 말하면 좀 좋아?”

루시온이 낄낄거렸다. 이에샤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참관해 달라고 매달리기를 바라신 건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용병을 가족 삼아 자란 이에샤는, ‘엎드려 절 받기’에 집착하는 높으신 분들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소철궁은 수수했다. 나무를 베어 낸 정원에 삼 층짜리 저택이 섰을 뿐이었다. 저택은 옆쪽 콜로세움에 통째로 집어넣을 수도 있을 성싶었다. 애당초 주된 쓰임은 대연무장이고, 소철궁은 휴게소에 지나지 않았다.

대연무장은 높다란 담을 둘렀다. 안벽에 층층이 관람석이 마련되었다. 근위 기사단부터 제6 기사단까지―제국 기사들이 승부를 겨루는 영년 행사가 있는데, 황족과 명망 있는 귀족들이 구경하는 자리였다. 기사단 입단 시험에서는 관람석이 쓰이지 않았다.

기사 수험자들은 소철궁에서 기다리거나 대연무장에서 몸을 풀었다. 이에샤는 후자였다. 검은 나눠주는 것을 써야만 했다. 셈브리온이 선물한 명검은 이에샤가 기사가 된 뒤에 빛을 발하리라.

‘엄청 쳐다보네.’

이에샤는 한숨을 내쉬었다. 눈길이 따끔따끔하도록 꽂혔다. 연무장에 나온 사람은 스무 명쯤 되었는데, 모두가 이에샤를 힐끔거렸다. 어쩔 수 없었다. 이에샤는 지나치게 튀었다. 170㎝의 키는 남자와 견주면 작은 편이었고, 셔츠와 바지는 부드러운 몸태를 드러냈다. 누구라도 ‘왜 여기 여자가 있지?’ 할 만했다.

루시온은 보이지 않았다. 심사를 맡은 이들은 시험이 시작하고야 나올 모양이었다. 이에샤는 검이 놓인 곳으로 다가갔다. 고만고만한 롱소드들이 나무통에 꽂혔다. 한 자루 뽑아 보았다.

킥!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비웃는 티가 뚜렷했다. 이에샤는 인상을 찌푸렸다. 자신을 보고 웃었다는 건, 너무한 착각일까?

“숙부님 말씀이 사실이었어. 시험에 여자가 낀다더니.”

“좋잖아. 경쟁자 하나 떨구고 시작하는 거니까.”

이번에는 똑똑히 들었다.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셈브리온이 말한 “여자는 안 돼.”가 무슨 뜻이었는지. 검술은 여자의 공부가 아니었다. 머리로는 알았는데, 몸으로는 처음 느꼈다. 성취의 벽이 아니라 남의 잣대에 부딪치다니! 기분이 더러웠다.

이에샤는 쑥덕질이 들려온 쪽을 돌아보았다. 모르는 사내들이 옹기종기했다. 이에샤는 사교계에 데뷔하지 않았으므로 당연했다. 검을 후웅, 세로로 크게 털었다.

“마음대로 떠들어. 어차피 내가 다 이길 테니까.”

“뭐?”

“푸하! 저 영애께서 지금 뭐라는 거야?”

영애―누군가의 딸로 보이는 거구나. 이에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신은 한 집안의 주인이었다. 부모는 죽었다. 어머니는 숨을 거두었고, 오스터는 ‘이에샤의 아버지’ 자리를 스스로 죽여 버렸다.

“난 어느 귀족의 여식이 아니라, 앨저 백작이다. 호칭을 똑바로 해 주지그래.”

“앨저? 들어 본 적 없는데.”

“다 쓰러진 가문이니까. 내가 기사가 돼서 일으킬 거다.”

사내들의 입이 헤벌어졌다. 명예는 목숨보다 귀한 법이었다. 하물며 아들로서 가문의 미래를 짊어진 후계자에게, 이에샤의 말은 망측하기 짝이 없었다.

이에샤는 가슴을 폈다. 앨저 백작가가 망한 것도 사실이고, 일으켜 세우겠다는 포부도 진심이었다. 앨저를 말아먹은 자는 오스터 알디온이고 말이다. 제가 부끄러워할 까닭이 없었다.

“앨저 백작께서는 아무래도 아버지나 오라버니에게 매를 맞아야 쓰겠군요.”

“그딴 거 없어. 내가 가장이니까.”

“검을 휘둘러 본 적은 있습니까? 여기가 어디라고, 아녀자의 몸으로 껴들어서는…….”

“지금 내가 든 게 뭐로 보여? 당신, 눈이 나빠?”

비아냥하던 사내의 낯이 벌게졌다. 이에샤는 칼자루를 움켰다. 팔을 들어올렸다. 팔꿈치를 구부려, 검신을 어깨에 걸쳤다. 사내가 흠칫 놀랐다.

“여자치고 힘은 좀 센가 보죠? 그래 봐야 들고 버티는 게 고작 아닙니까?”

이에샤는 헛웃음을 머금었다. 롱소드란 3㎏에 미치지 않는 검이었다. 밀레나 같은 아가씨라도 들 것이다. 팔에 브링을 모은다면 집채만 한 바위도 들 수 있었다. 깨부술 수도 있었고.

“당장 치고받았다가 찍히거나 실격당할지도 몰라서 가만있는 거야. 당신들 중 하나가 내 상대가 되기를 신께 빌겠어.”

“그렇게만 된다면 저희야 좋지요! 힘쓸 것 없이 다음 관문으로 갈 수 있을 테니까요.”

“작위도 없는 것들이 까불기는.”

“뭐라고!”

아까부터 누구도 이에샤에게 반말을 쓰지 않았다. 작위를 잇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도련님, 다른 말로 애송이는, 대용병 밑에서 개처럼 구른 앨저 백작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검술 스승이라고 해 봐야 점잔 빼는 ‘온실 속 기사’였을 테니까.

이에샤는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시험에서 맞붙지 못해도 좋아. 그대들, 끝나면 내게 장갑을 던져라. 전부 받아 줄 테니.”

============================ 작품 후기 ============================

지금까지 나이가 나온 게 엘테르트뿐인 거 같네요~ 1화에서 유추할 수는 있을 거 같은데 그냥 확실히 적어 놓을게요.

엘테르트 20살, 루시온 19살, 이에샤 18살, 밀레나 16살입니다. (제가 계산하기 귀찮아서)만 나이 아니에요. 셈브리온은 40세에 꽤 동안입니다^_^

선추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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