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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수는 검 한 자루-7화 (7/164)

00007 1. 골칫덩이 이에샤 =========================

“황태자 전하와 무슨 사이냐고요?”

멘델린의 마차는 눈부셨다. 하얀 몸체에, 금으로 파도 무늬를 양각한 지붕을 이었다. 창문에는 붉은색 휘장이 드리웠다―날갯짓하는 독수리가 크게 수놓였다. 안은 여덟 명쯤 들어갈 만큼 넓었다. 벨벳이 좌석을 감쌌다. 솜을 채웠는지 푹신푹신했다. 천장에 등잔이 달렸는데, 심지도 없이 타올랐다. 마법의 불인 모양이었다. “나 부자요.” 하고 외치는 듯한 마차에 이에샤는 기가 질렸다.

엘테르트의 물음에도 기가 막혔다. 이에샤와 엘테르트는 되도록 멀리, 마주보는 자리의 반대쪽 끝에 앉았다.

“뵌 적도 없는데요.”

“거짓말하지 마시오. 루, 전하께서.”

“그보다 멘델린 경.”

엘테르트는 말을 끊고, 호칭을 고쳤다. 황태자의 이름이 튀어나올 뻔했다. 그 틈에 이에샤가 끼어들었다.

“왜 하대하세요?”

“뭐라고?”

“멘델린 남작이 차기 멘델린 공작이라고 해도 지금은 아니잖아요. 보니까 제 여동생한테는 존댓말 쓰시던데요. 저한테도 그래야 하지 않겠어요?”

“아니, 나는, 그건.”

엘테르트의 미간이 죄어들었다. 이에샤는 배알이 꼬였다. 후작의 딸보다는 백작인 저의 지체가 높았다. 밀레나가 꽃답고 이에샤는 말구종 같더라도, 누가 윗사람인지는 뚜렷했다. 제가 왜 밀레나보다 못한 취급을 받아야 하는가? 엘테르트에게 따지고 들었다.

“저, 집도 돈도 없어도 한 가문의 여주인이에요. 인간관계에서는 겉치레란 것도 중요하잖아요? 멘델린 경이 지금까지 제 명예를 얼마나 무시하셨는지 아세요?”

“……알겠습니다. 그간의 무례를 사죄하죠.”

엘테르트는 께름하게 잘못을 받아들였다. 이에샤가 주는 것 없이 밉다고 해도, 펼치는 주장은 옳았다. 신사는 귀부인에게 친절해야 했다. 루시온도 신경질을 부리는 엘테르트에게 “너 좀 이상하다? 왜 그렇게까지 싫어해?” 하지 않았는가.

“이야기로 돌아갑시다. 앨저 백작. 황태자 전하께서 제게 당신을 얼마나 아느냐 물어 오셨습니다. 그저 한 번 스치듯이 만났을 뿐이라고 답했습니다만, 백작, 어째서 전하가 당신의 이름을 입에 담으셨습니까?”

“그걸 저라고 알겠어요? 경은 저 같은 사람이 황태자 전하의 존안을 먼발치에서나마 볼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당연히, 그건 아닙니다.”

이에샤는 울컥했다. 먼저 누워서 침을 뱉기는 했지만, 엘테르트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긍정할 줄은 몰랐다. “네까짓 게 황태자를 만날 수 있을 리 없지.” 하고.

분해도 사실이었다. 이에샤는 이를 갈아붙였다. 근위 기사가 되면 두고 보자.

그때, 짚이는 점이 떠올랐다.

“다음주면 12월이죠. 초일에 제국 기사단 입단 시험이 있잖아요?”

“기사?”

“네. ……왜 그래요? 안색이 나빠진 거 같은데.”

엘테르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뜻밖의 화제에 놀랐을 뿐이었다. 이에샤의 입에서 ‘기사’라는 낱말이 나올 줄은 몰랐으므로. 거북한 기분이 치솟았다.

엘테르트는 기사를 싫어했다. 정확히는, 폭력과 싸움이 싫었다. 살상 무기를 휘두르면서 ‘진정한 사나이’라고 뽐내는 족속이 끔찍했다. 루시온도 검술에 일가견이 있었으나 엘테르트 앞에서는 드러내지 않았다. 그만큼 엘테르트는 검이니, 기사니 하는 이야기들이 껄끄러웠다. 해마다 치르는 기사단 입단 시험에도 신경을 끄고 살았다.

“갑자기 그 얘기는 왜 꺼내십니까?”

“저 그거 칠 거예요. 치기로 했어요.”

“예?”

멍청히 되묻고 말았다. 이에샤의 말뜻을 알아듣지 못했다. 엘테르트의 머릿속에서 퍼즐 조각처럼 정보가 어우러졌다.

뭘 친다고? 시험을? 이에샤 앨저가? 여자가?

앨저 여백작이 기사단 입단 시험을 친다.

퍼즐이 짜맞춰졌다. 루시온의 심산이 들여다보였다. 엘테르트는 루시온을 속속들이 꿰었다. 사촌동생이자 미래의 주군은 기행을 일삼았다. 새로운 시도를 반기고, 스릴을 즐겼다. 여자가 기사가 되려 한다는 소식에 솔깃했을 터였다. 또는 제 손으로 이에샤를 시험에 밀어넣었는지도 몰랐다.

자신이 왜 이에샤를 싫어하는지도 알 듯싶었다. 입단 시험을 치를 정도라면 이에샤도 검술을 익혔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이에샤에게 느끼는 거부감은, 허리에 검을 찬 기사를 마주할 때와 비슷했다. 무의식이라는 놈이 날카로웠다.

“유례없는 일이니까 황태자 전하의 귀에도 들어가지 않았을까요?”

“아, 예. 아마도. 아니, 확실히 그럴 겁니다. 그래서 그런 거였군.”

“기사 하니까 생각났는데, 멘델린 공작 각하는 저명한 기사이기도 하시죠? 경도 아버님과 같나요?”

말문이 막혀 버렸다. 애버토스 멘델린 공작은 검을 잘 썼다. 브링어의 경지에 닿지는 못했으나, 젊었을 때는 근위 기사에 뒤지지 않았다. 엘테르트는 아버지를 존경했다. 그 마음은 아버지의 인격과 학식과 업적을 향한 것이었다. 검술이나 기사도 따위를 우러른 적은 없었다.

“아니요. 저는 기사 작위가 없습니다. 황송하게도 폐하의 성의를 거절한지라.”

“그렇군요.”

이에샤는 대화를 이어 나가려 하지 않았다. 엘테르트의 태도가 바뀌었다고 인상까지 좋아지겠는가. 멘델린이든 황태자든 황제든, 이에샤는 관심 없었다. 두 사람 모두 입을 다물었다. 마차 안에 고요가 내려앉았다.

화려한 마차는 부드럽게 미끄러졌다. 알디온 후작가가 멀지 않았다.

오스터 알디온은 발목을 접질렀다. 기별도 하지 않고 멘델린 소공작이 찾아온 탓이었다. 점심 식사를 즐기던 오스터는, 하인에게 차를 내오라 이르고 응접실로 달려가다가 휘청했다. 계단에서 두 바퀴 굴러 떨어졌다. 눈앞에서 별이 반짝했다. 더욱이 헛것 같은 광경이 있었다. 소공작의 에스코트를 받는 맏딸이었다.

에스코트라고 해도 별것 없었다. 엘테르트와 이에샤는 나란히 걸었을 따름이었다. 저택으로 들어섰더니 오스터가 쓰러진 채였다. 하녀장이 구급상자를 들고 왔다. 엘테르트는 “날이 아닌가 보군요. 쾌차하십시오.” 하고는 떠나 버렸다. 찬바람이 쌩쌩 돌았다.

오스터는 이에샤에게 소리소리 질러 댔다.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느냐. 둘이 어떻게 만났느냐. 멘델린의 노여움을 사지는 않았느냐. 이에샤는 귓구멍을 후비며 자기 방으로 올라갔다. 여느 귀족의 딸이었다면 매를 맞았을 것이다. 오스터는 이에샤를 힘으로 억누르지 못했다. 키도 비슷했고, 옹골지기로는 이에샤가 더했다.

“지 어미를 닮아서 되바라진 년 같으니라고!”

“진정해요, 여보. 자아. 내가 주물러 줄게요.”

셀더리가 오스터의 허벅다리를 어루만졌다. 오스터는 종아리부터 발끝까지 석고 붕대를 감고―엄살이 심했다―침대에 드러누웠다. 아내의 마사지를 받으니 화도 누그러졌다. 셀더리의 뒤쪽에는 밀레나가 있었다. 드레스를 펼치고 앉은 모습이 다소곳했다.

밀레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눈동자에 슬픔이 깃들었다. 그늘진 딸의 낯을 오스터는 안쓰러운 마음으로 쳐다보았다.

“밀레, 네가 걱정할 건 아무것도 없다.”

“걱정하지 않아요. 언니가 혼자 나가서 마음에 걸렸는데, 엘테르트 님이 태워다 주셨으니 얼마나 다행인가요.”

“이 착한 녀석아. 아비가 앨저 핏줄이랑은 인연을 끊었는데, 어떻게 그것이 네 언니씩이나 되겠느냐.”

밀레나의 입술이 달싹였다. 속삭임 같이 나지막하게 “이에샤 언니도 아버지의 딸이잖아요.” 하고 중얼거렸다. 그 말마저 오스터와 셀더리의 눈시울을 찡하게 했다. 알디온 부부에게 밀레나는 누구보다도 어여쁘고 다정한 소녀였다. 성서에 나오는 신의 딸처럼.

“엄마가 너를 모르겠니? 밀레. 멘델린 소공작은 네가 사모하는 분이잖니.”

“설마요. 파티에서 한 번 춤췄을 뿐인걸요. 그날 엘테르트 님하고 춤춘 아가씨가 얼마나 많은데요.”

“나도 네 아빠랑 무도회에서 스친 인연으로 사랑에 빠졌단다.”

“어머니…….”

밀레나의 뺨이 불그레해졌다. 오스터는 깜찍해 죽겠다는 듯이 밀레나를 보았다. 다리만 멀쩡했어도, 벌떡 일어나서 해말간 이마에 키스해 줬을 터였다.

“저는 정말 괜찮아요. 엘테르트 님은 친절한 분이니까 레이디를 그냥 둘 수 없으셨겠죠. 그리고 언니는, 음, 데뷔도 치르지 않았잖아요.”

“그렇지! 우리 밀레는 멘델린 공작 부인의 티 파티에도 초대받았는데.”

“아이참, 열 명도 넘는 영애가 참석했어요. 공작 부인께서는 자주 그런 모임을 여신대요.”

멘델린 공작 부인 엘로나는 며느릿감을 찾는 중이었다. 괜찮은 숙녀를 모아다 말벗으로 삼고는 했는데, 밀레나도 불려갔었다. 엘로나는 싱글거리며 “알디온 영애는 재치 있군요.” 하고 칭찬해 주었다.

사십 대의 엘로나는 아름다웠다. 시들어 처지기는커녕, 원숙미가 더해졌다. 밀레나는 저가 엘로나보다 못하다는 느낌마저 받았다. 이에샤가 엘로나의 옆에 선다면 계집종처럼 초라하리라.

‘걱정할 건 아무것도 없는데.’

불안했다. 밀레나는 멘델린의 마차가 왔다는 소식에 저택 밖까지 마중을 나갔었다. 마차 문이 열리고, 내린 사람은 엘테르트와 이에샤뿐이었다. 남녀가 단둘이 한자리에 들다니!

밀레나는 이에샤를 싫어하지 않았다. 천덕꾸러기 취급받는 이복언니를 가엾이 여겼다. 아버지가 가혹하다고, 잘 지내고 싶다고 바랐다. 어린 시절의 상처를 디뎌 내기를 응원했다―이에샤가 알면 황당해서 뒤로 넘어갈 동정이었다. 하지만 이에샤가 분에 넘치는 사람을 탐낸다면, 동생으로서 막아야 했다.

“이에샤 언니도 좋은 배우자를 만나면 사교계에도 얼굴을 비치고, 진짜 귀부인이 될 거예요. 언니는 날씬하고 예쁜데다 작위까지 있잖아요. 혼처를 알아보는 게 어때요?”

이에샤는 예쁘장한 편이었다. 머리카락 길이와 밀레나 때문에 저평가될 뿐. 깎아지른 콧날만큼은 밀레나보다 나았다. 눈매가 매섭기는 해도, 용병 사내와 떠들 때는 곧잘 웃기도 했다.

“그 앤 어차피 다음달이면 이 집에서 나갈 거야. 네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단다.”

“그래! 기사 시험이니 뭐니,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지껄여 놨으면 책임을 져야지. 내 단호히 그년을 내칠 거다.”

“아버지. 언니를 박대하시면 사람들이 흉볼 거예요. 전 아버지처럼 훌륭한 분이 추문에 휩싸이는 게 싫어요.”

오스터가 “큼.” 하고 헛기침했다. 알디온 부부는 귀족 사회에서 좋은 소리를 듣지 못했다. 셀더리와의 사랑에 부끄러움은 없었으나, 뭣 모르는 치들이 찧고 까부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오스터가 부드럽게 손짓했다. 밀레나는 드레스 자락을 잡고 일어섰다. 침대 가까이로 다가갔다. 오스터가 밀레나의 손등을 토닥거렸다.

“내 귀여운 천사. 네가 원한다면 그러마. 이전부터 이에샤에게 들어오던 혼담이 몇 있기는 했다.”

“잘됐어요. 언니를 아껴 주실 분을 찾아요, 우리.”

오스터에게는 이에샤의 친권이 없었다. 이에샤는 앨저 백작가에 입적되었다. 알디온 후작이 멋대로 혼삿말을 주고받는 일은 월권이었다.

알디온 일가는 아무렇지도 않게 저희끼리 이에샤를 어찌할지 이야기했다. 위화감이라고는 없었다. 골칫덩이 이에샤는 알디온이 해를 입지 않도록, 시키는 대로 따라야 마땅했으니까.

============================ 작품 후기 ============================

다음 편부터 드디어 기사 시험 쓸 수 있겠네요^_^ 밀레는 아직 존재감이 적지만 예쁜 악녀로 키우겠습니다...

선추코 감사합니다~

지난 편 코멘트로 mimei님이 추천해 주신 손목 스트레칭 영상도 잘 따라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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