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수는 검 한 자루-6화 (6/164)

00006 1. 골칫덩이 이에샤 =========================

루시온은 눈을 깜빡했다. 체사로는 루시온이 알지 못한다고 가정하고 물었을 터이나, 며칠 전 들어 본 이름이었다. 엘테르트가 싫어하는 여자. ‘천둥벌거숭이’라는 표현이 떠올랐다. 엘테르트가 그렇게까지 헐뜯는 사람은 드물었다. 비법이 궁금했었다.

“어. 누군지는 알아.”

“아신다고요? 아, 하긴. 큰 스캔들이었으니까요. 지금은 기억하는 사람이 적어서 모르실 줄 알았습니다. 전하께서도 어리셨고.”

“알디온의 딸이 요즘 유명하잖아. 그 언니니까 알음알음 들리는 게 있지.”

체사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많은 귀족과 같이 체사로도 알디온 후작을 좋아하지 않았다. 배필을 저버린 자가 아닌가. 밀레나 알디온까지 부모의 죄로 꺼림칙했다. 팔은 안으로 굽는 법이라고, 이에샤가 셈브리온의 제자인 까닭도 있었다.

“저도 얼마 전에 들은 일로, 여백작이 제 친우로부터 검술을 사사했다고 합니다. 그는 뛰어난 검사입니다. 제자에게 길을 열어 주고 싶다며 제게 부탁해 왔습니다.”

“결국은 청탁이잖나? 얼마나 뛰어나길래 그래.”

“브링어입니다.”

그 말에는 루시온도 놀랐다. 델페레타 제국의 브링어 중 열이 기사였다. 넷은 은퇴한 기사였고. 모두 루시온과 안면이 있었다. 그들의 후계자 또한 이름쯤은 알았다. 체사로의 친구는 제국인은 아닐 터였다. 체사로 에버렛이 외국인을 사귀었을 만한 기회라면……. 루시온은 날카롭게 물어보았다.

“벨체터인?”

“영명하십니다. 파병되었을 때 만난 인연입니다. 11년째 제국에 체류했고, 앨저 백작을 가르친 기간은 10년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죽상 할 것 없어. 딴 나라의 브링어한테까지는 관심 없으니까. 행여나 내가 경의 친우를 물고 늘어질 걱정은 말게.”

“그런. 제가 불충하여 전하께 심려를 끼쳤습니다.”

체사로가 겸연히 답했다.

루시온은 와작, 쿠키를 깨물었다. 초콜릿 칩을 입안에서 굴렸다. 생각에 잠겨 들었다. 브링어가 가르쳤다면 예사 검술사가 아니었다. 브링어 스승을 둔 자는―브링을 깨치지 못하더라도―빼어난 기사로 거듭나는 일이 많았다.

신원도 믿음직했다. 스승은 외국인이어도 제자는 델페레타의 귀족이었다. 앨저 백작가는 내력이 긴 편이었다. 그런 집안의 딸이 소박맞은 사건은 실로 안타까웠다. 그 딸의 딸이 검술을 배우고, 기사가 되려 한다? 루시온의 구미를 당기기에 넘치는 이야기였다.

“콜.”

“예?”

“내가 다른 놈들 다물게 해 주겠다고. 재밌겠네. 그 여자, 시험 치게 해.”

“……어엿한 귀부인입니다. ‘그 여자’가 아니라 앨저 백작이라고 불러 주셔야지요.”

“뭐 어때? 앞에 있을 땐 귀부인 대접해 줄 테니 우리끼리는 대충 살자고.”

루시온이 키득거렸다. 체사로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조금 미안한 말이 오가기는 했지만, 셈브리온에게 얼굴을 세울 수 있을 듯했다.

* * *

11월이 저물어 갔다. 사람들의 옷이 두툼해졌다. 차가운 바람에 마른잎이 치이는 철이었다. 이에샤는 가을에나 어울릴 외투를 걸쳤다. 겨울용은 가지지 못했다. 오스터는 이에샤에게 한푼도 주지 않았다. 소지품 거의가 셈브리온이 사 준 것이었다. 이에샤는 물욕을 죽여야만 했다. 셈브리온에게 폐 끼치기 싫었으므로. 몸속에 브링을 돌리면 춥지도 않았다.

대문 밖은 오랜만이었다. 두 달도 넘은 듯했다. 이에샤는 나들이를 즐기지 않았다. 단련할 시간이 아까웠다. 만날 사람도 없었다. 어디를 가더라도 돈이 필요했고 말이다. 오늘 나온 까닭도 셈브리온의 심부름이었다. 철공소에서 검을 찾아가야 했다. 이에샤가 쓸 것이었으므로, 아주 남의 일도 아니었다.

무늬도 장식도 없는 원피스를 입었다. 평민 여자의 노동복과 비슷했다. 보디스가 밝은 초록색이기는 했지만―신분이 낮을수록 때가 타지 않는 빛깔을 선호했다. 치맛자락이 발목을 간질였다. 움직임에 불편은 없었으나, 가랑이가 휑하여 어색했다.

‘어차피 다들 쳐다보는데, 바지 입고 나올걸 그랬나.’

키만으로도 눈에 띄었다. 머리카락까지 짧았다. 익숙한 옷을 입는 게 속이라도 편할 성싶었다.

철공소는 제2 공업 지대에 자리했다. 1 공업 지대에는 의상실과 재봉소, 섬유 공장, 보석상, 공예방 등이 늘어섰다. 일꾼 아니면 귀족이 다니는 거리였다. 2 공업 지대는 그보다 광활했다. 대형 공장이 모인 곳으로, 갖은 계층의 사람이 오갔다. 역마차에서 내린 이에샤는 여염집 아낙처럼 보였다.

‘오드펠’ 철공소는 역마차 정거장과 꽤 떨어졌다. 20분가량 걸어야 했다. 외국인인 셈브리온이 믿을 만한 대장간·철공소는 많지 않았다. 셈브리온의 검은 값을 매기기조차 어려운 물건이었기에―이에샤는 몰랐지만. 오드펠은 벨체터 대용병의 이름을 들어 본 도공이었고, 브링어와 거래하기를 반겼다.

이에샤는 셈브리온에게 일러 받은 길로 걷기 시작했다. 가슴이 뛰었다. 새 검을 장만해 주다니! 셈브리온도 이에샤의 기사단 입단 시험을 기대하는 눈치였다.

“어서 오십시오.”

“안녕. 데힐이 맡긴 물건을 찾으러 왔어. 앨저 백작 이에샤야.”

철공소 도제는 웬 계집의 반말에 발끈했다가, 소개를 듣고 놀랐다. 그는 이에샤처럼 수수한 귀족을 본 적 없었다. 가난한 귀족이라도 차림새에는 바람이 들게 마련이었다. 이에샤는 백작은커녕 돈 많은 상인의 아내나 딸로도 보이지 않았다.

“아, 예. 장인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철공소는 처음인데, 병장기가 안 보이네?”

“저희가 주로 파는 건 부엌칼 아니면 가위 같은 겁죠. 무기를 찾는 손님은 귀족이나 기사 나리인데, 근방에 훨씬 큰 대장간으로들 갑니다. 용병은 저희 장인께 부탁할 주제가 못 되고요.”

이에샤는 고개를 주억였다. 이름난 도공은 셈브리온 같은 뜨내기를 상대하려 들지 않을 테고, 바가지를 쓸 수도 있었다. 무기 전문이 아니더라도 단골 삼을 만한 곳을 찾는 게 안전했다.

도제가 이에샤를 이끌었다. 둘은 무쇠로 만든 주방 도구나 재봉 도구가 벌어진 판매장을 가로질렀다. 안쪽으로 들어갔다. 복도를 지나, 공방에 다다랐다. 열기가 느껴졌다. 커다란 가마와 풀무가 보였다. 헐렁한 작업복을 입은 남자가 모루 앞에 섰다. 초로의 단조공은 짙은 눈으로 이에샤를 쳐다보았다.

“그 여자는?”

“애, 앨저 백작님입니다. 스승님.”

“저분이 백작님이라고?”

오드펠이 되물었다. 이에샤는 불쾌해하지 않았다. 자신이 남의 눈에 어떻게 비치는가쯤은 알았다. 괴팍하고 어린 여자. 첫인상이 좋게 박히는 경우가 드물었다.

“잘 오셨습니다. 데힐 님이 맡긴 물건은 그제 완성돼서, 가장 날카로운 상태로 주인을 기다리는 중이죠.”

“그거 기대되는걸. 여기서 잡아 봐도 될까?”

“물론입니다.”

오드펠은 기껍게 손짓했다. 이에샤는 오드펠이 가리키는 쪽을 돌아보았다. “아……!” 하는 경탄성이 입술을 비집었다.

그 검은 아름다웠다. 화려하다거나 거창하다는 뜻이 아니라, 잔잔한 영채를 흩뿌렸다. 생김새는 흔한 롱소드와 같았다. 하지만 장인이 열성껏 벼린 물건답게 서슬이 푸르렀다. 검은색 칼몸이 눈을 아릿하게 했다. 셈브리온의 검과 같은 철로 만든 것이 틀림없었다. 자루는 가는 편이었다. 여자의 손 크기를 헤아린 모양이었다. 이에샤는 첫눈에 새 검에 마음을 빼앗겼다.

“저거, 저게 내 거야?”

“그렇습니다. 마음에 드십니까?”

“마음에 드는 정도가 아니야! 손맛은 어떨까? 당신 정말 대단한데?”

아름다운 검은 쥐는 느낌마저 멋졌다. 무게는 가벼웠으나 휘두른 궤적은 묵직하고, 소리는 굵다랬다. 무엇보다도 이에샤의 손에 꼭 맞았다. 지금이라면 셈브리온에게 극존대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쩜 좋아. 이 녀석, 너무 예뻐.”

“검한테 그런 표현을 쓰는 분은 남자 중에도 여자 중에도 없지요. 백작님은 특이하시군요.”

“지금까지 쓴 검들도 좋았어. 세비가 구해 왔으니까 당신 작품이었겠지? 하지만 이건, 얘는 격이 달라. 있지, 내가 베어도 될 만한 게 여기 있을까?”

오드펠이 곤란한 낯빛을 지었다. 이곳은 철공소였다. 널린 물건이라고는 쇳조각뿐이었다. 칼날을 시험해 볼 만한 볏짚이나 목재는 창고를 뒤져야 나올 터였다. 오드펠의 생각을 읽은 이에샤가 “고철 덩어리여도 돼.” 하고 덧붙였다. 오드펠은 미심스러운 얼굴로 자투리 철이 쌓인 자리를 손가락질했다.

이에샤는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좋은 검을 만들어 준 답례로, 좋은 구경을 시켜 줄 셈이었다.

새카만 검신이 바르르 떨렸다. 이에샤의 손은 가만한데도. 이윽고 불투명한 기운이 날에 어렸다. 파란 빛무리가 송골송골 맺혔다. 오드펠보다 도제가 먼저 소리쳤다.

“브링?!”

이에샤의 팔이 일자로 움직였다. 쏘아 보낸 브링이 쇳조각 더미를 서걱, 갈라 버렸다. 중심이 허물어지며 위쪽에 있던 조각들이 가라앉아 내렸다. 오드펠은 흥분으로 몸을 떨었다. 자신이 오늘, 스무 살도 되지 않은 브링어에게 검을 내준 것이다.

이에샤가 완만하게 어깨를 돌렸다. 검이 흔들리며, 브링이 사그라졌다. 가져온 가죽 싸개로 검을 휘감았다.

“비밀이야. 세비가 알려지면 골치 아파진다고 했거든.”

“예, 예! 알겠습니다. 백작님께 제 검을 드려 여, 영광입니다.”

“나야말로 고마워.”

어느새 오드펠의 태도가 바뀌었다. 마지막으로 인사를 나누었다.

뒤돌아 나가려는 참이었다. “실례하오.” 하는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에샤의 인상이 찌그러졌다. 점잖고 부드럽게 울리는 음색이 귀에 익었다.

“단조공 오드펠을 만나러 왔소만, 아.”

“……멘델린 남작.”

엘테르트가 공방 문턱에서 멈칫했다. 불그림자가 넘실거리는 가운데, 이에샤가 있었다. 기다란 막대기 같은 것을 들고서. 엘테르트는 가죽에 싸인 물건이 검이라고는 상상치 못했다.

이에샤의 모습을 멀거니 보았다. ‘치마를 입었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윗몸을 조이는 보디스 탓으로 다른 날보다 맵시가 두드러졌다. 가마의 불길에 머리카락이 적갈색으로 물들었다.

“앨저 백작께서 무슨 일로.”

“주문한 물건을 찾으러 왔어요. 멘델린 남작이 이런 작은 철공소에 다닐 줄은 몰랐네요.”

오드펠은 ‘작은 철공소’라는 평가를 흘려 넘겼다. 틀린 말도 아니었다. 실력은 갖추었으나 철 두드릴 시간이 모자라 공장의 규모를 키우지 않을 따름이었다. 하물며 브링어가 하는 말에 토를 달으랴?

“공업 지대의 소음 문제로, 공장들을 돌며 방음 마법진 설치에 대한 동의서를 받고 있을 뿐이오.”

“그래요? 수고하세요.”

이에샤는 짤막이 대꾸했다. 한 번 만났을 뿐이지만―엘테르트로서는 두 번 보았어도―언짢은 남자였다. 오래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엘테르트를 스쳐지났다.

그때.

“백작! 기다리시오!”

엘테르트가 이에샤의 뒷모습에 대고 외쳤다. 이에샤는 무시할까 고민하다가, 멈추어 섰다. 멘델린 소공작의 부름을 씹었다가 무슨 일이 생길지 몰랐다. 자신은 어디까지나 이름뿐인 여백작이었다.

“무슨 일이에요?”

“물을 말이 있소. 오드펠과 얘기를 마치면 내 마차에서 좀 보지. 끝나고 후작가까지 바래다주겠소.”

고개를 기울였다. 무엇을 물어보려는 걸까? 퍼뜩 밀레나가 떠올랐다. 이에샤는 엘테르트가 밀레나에게 홀린 얼간이 중 하나라고 여겼다. ‘밀레나에 관해 캐려나 보다.’ 하고 결론지었다.

역마차 정거장까지는 또 걸어야 했다. 알디온 저택 근처로 향하는 마차를 기다려야 했고. 태워 준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이에샤는 “좋아요.” 하고 답했다.

============================ 작품 후기 ============================

비축분 끝...이제 하루살이처럼 써야겠네요.

2월 23일,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문장을 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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