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5 1. 골칫덩이 이에샤 =========================
싱겁게 끝난 대련 뒤로, 셈브리온은 더 싸우려 하지 않았다. 이에샤는 두어 번 조르다가 그만두었다. 근력 운동이나 하기로 했다.
종아리에 팔뚝보다 굵은 나무를 묶었다. 땅을 짚고 엎드렸다. 양다리를 접었다, 폈다 하였다. 팔심보다 다릿심이 중요했다. 이에샤의 검은 가벼운 롱소드였다. 들고 휘두를 수 있으면 족했다. 그보다는 몸을 버틸 힘을 길러야 했다. 다리 운동 50번을 마친 다음에는 달렸다. 연무장을 돌기도 하고, 숲도 누볐다.
이에샤의 몸은 어지간한 남자보다 튼튼했다. 타고난 근골부터가 남달랐다. 거기에 단련을 더하니, 장정에도 뒤지지 않았다. 그러나 본인은 힘으로 남자를 찍어 누르지 못한다고 믿었다. 이에샤의 기준은 셈브리온에게 맞춰졌다. 입단 시험에서 브링을 숨길 셈이었으므로 평소보다 혹독하게 움직였다.
셈브리온은 그 착각을 고쳐 주지 않았다. 이에샤는 브링에 의존하는 면이 있었다. 오롯한 제힘이 늘어난다면 브링을 효율적으로 돌리는 깜냥도 생길 터였다.
결과적으로, 이에샤는 땀에 젖었다. 셔츠와 바지가 몸에 딱 달라붙었다. 하녀들이 비명을 질렀다. 큰아가씨는 아랫것에게 까다롭게 굴지 않는 상전이었지만, 기행이 지나쳤다. 귀족 영애가―이에샤는 따지자면 귀부인이었지만 말이다―말구종 같은 몰골로 돌아다니다니! 마님이 기함할 만도 했다.
불행히도 오늘은 밀레나가 밖에 있었다. 다과회에 나가거나 공부방에서 신부 수업만 받더니 별일이었다. 이에샤는 밀레나와 마주치자마자 이맛살을 구겼다. 밀레나는 이에샤의 꼬락서니를 보고, 입가를 가렸다. 놀란 모양이었다. 이에샤의 눈에는 땀냄새 탓에 코를 쥐는 것처럼 비쳤지만.
“안녕. 오랜만이다.”
“으응, 안녕.”
자매답지 않은 인사가 오갔다. 이에샤는 콧방귀를 뀌었다. 밀레나와 하녀들을 지나치려 했다.
“검술 배우고 오는 길이야? 언니의 그, 선생님은 어디 갔어?”
“네가 왜 세비한테 관심을 가져?”
“미, 미안. 난 그냥 언니가 그분이랑 늘 같이 있으니까…….”
“밀레나.”
이에샤에게서 지긋지긋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밀레나가 움찔했다.
이에샤는 밀레나의 말본새가 정말로, 지독하게 싫었다. 밀레나 같은 숙녀가 사람을 바보로 만든다고 떠들면, 이에샤가 질투에 눈이 멀었다고들 할 것이다. 하지만 이에샤는 제 느낌이 피해 망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고픈 말이 뭐야? 시집도 안 간 처녀가 나이 차 나는 외간남자랑 붙어다닌다 하고 싶은 거니? 아니면 백작이나 돼서 변변한 기사도, 사병도 없이 용병밖에 못 거느린다고 비꼬려는 거야?”
“아, 아냐! 왜 말을 그렇게 받아들여, 언니. 난 그냥.”
“네가 정말로 순수하게 날 생각한다면 그런 말 하지 마. 나 추문에 휩싸이기 딱 좋은 이야기란다, 그거.”
밀레나는 토 달지 않았다. 이에샤는 저에게 쏟아지는 눈총을 느꼈다. 하녀들과 자두나무의 가지를 치던 정원사가 이에샤를 쏘아보았다. 너무하다고 여기는 티가 팍팍 났다. 밀레나는 가엾어할 테고.
이마저 노림수라면, 이에샤는 인정해야 했다. 남의 마음을 쥐락펴락하는 솜씨는 밀레나를 쫓아갈 수 없었다.
“정원을 둘러보던 모양인데.”
“아, 응. 어머니가 바쁘셔서. 토피어리를 늘리면 어떨까 하던 중이었어. 어, 언니 생각은 어때?”
“됐어. 앨저 백작이 알디온 후작가의 정원에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도 무례하잖니. 난 간다.”
짜증스럽게 내뱉고 돌아섰다. 땀 때문에 찝찝했다. 씻고 싶었다. 저택으로 들어가며 또 하녀를 기겁시키는 이에샤를, 밀레나는 슬픈 눈으로 지켜보았다.
“안녕하십니까, 알디온 영애.”
연분홍색 숄을 두른 어깨가 튀어올랐다. 밀레나는 하늘과 땅이 뒤집힌 양 놀랐다. 홍차처럼 말간 갈색 눈이 밀레나를 담았다. 우아한 몸가짐으로 선 남자, 엘테르트였다. 모르는 틈에 다가온 엘테르트가 밀레나의 숄에서 풀씨를 떼어 주었다.
“엘테르트 님? 어찌 오셨나요? 연통을 주셨다면 맞이할 준비를 했을 텐데요.”
“지난번에 가문의 마차를 타고 왔다가 후작가를 번잡하게 만든 듯하여. 오늘은 삯마차를 타고 왔습니다. 문지기가 알리겠다고 달려갔는데, 영애는 연락을 받지 못했나 보군요.”
“네, 네에! 전 줄곧 정원에 있어서 몰랐나 봐요. 어, 어서 드세요. 제가 안내할게요.”
밀레나가 앞장에 섰다. 귀공녀가 남자를 이끌면 망측하다 하겠으나, 앞세울 만한 하녀가 없었다. 한 명은 양산을 들었다. 한 명은 밀레나의 소지품이 담긴 바구니를 들었다. 마지막 한 명은 엘테르트를 보자마자 저택으로 달려갔다. 현관에 정렬하여 멘델린 소공작을 맞아들이라 전하고자.
그러니 밀레나의 행동은 예의에 어긋나지 않았다. 엘테르트는 점잖게 따랐다.
“오늘도 아버지와 사업 이야기를 하러 오셨나요?”
“예. 저의 아버님께서는 돌보실 일이 많아, 몇 가지는 제가 일임받아 처리합니다. 영애의 집안을 소홀히 보는 건 아니니 불쾌해하지 마시길.”
“그럴 리가요! 엘테르트 님은 벌써 황제 폐하의 신임을 받는다고 소문이 자자하신걸요.”
“부풀려진 소리입니다. 페하께서 정이 많으시니, 조카를 어여삐 여겨 주실 뿐이지요.”
엘테르트와 밀레나는 도란거리며 걸었다. 하녀 둘이 눈짓을 주고받았다. 얌전 피워야 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어머, 어머!” 하며 손뼉을 부딪쳤을 것이다. 알디온의 보배인 밀레나가 멘델린 소공작과 오붓하니, 경사가 따로 없었다.
엘테르트는 부드럽고 정답게 밀레나를 대했다. 밀레나의 눈빛이 꿈꾸는 듯해졌다. 엘테르트가 누구에게나 이만큼의 친절은 보인다는 건 알았지만, 밀레나로서는 황홀할 따름이었다.
엘테르트의 머릿속에는 바람같이 떠나 버린 이에샤가 있었다. 자매를 보았을 때, 이에샤는 돌아선 참이었다. 여전히 걸음이 빨랐다.
“영애의 언니는.”
“네?”
“늘 그렇게 경박한 차림새로 다닙니까? 일전에 봤을 때도 바지를 입었었죠.”
밀레나가 볼을 붉혔다. 이에샤가 무얼 입더라도 참견하지 않아 왔지만―눈살은 찌푸렸어도―엘테르트에게 들키자 후회되었다. 언니를 나쁘게 보시면 안 되는데.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생각했다.
“언니는, 이에샤 언니는 법도에 연연하지 않아요. 그런 걸 싫어하는 것 같아요.”
“좋다, 싫다 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제 추측이지만 법도를 어겨서 부모님께 누가 되길 바라는 모양이에요. 언니는, 그, 저어, 아버지하고 제 어머니께 받은 상처가 많아요. 저도……, 미안하게 생각하고요.”
엘테르트는 입을 다물었다. 가슴 아픈 사정을 털어놓는 여자에게, 어찌 답하면 좋은지는 알았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고 타일러 주면 되었다. 한쪽의 편을 들지 않으면서 품위는 지켜지도록.
무슨 까닭일까? 입에 발린 소리를 꺼내기보다 이에샤의 잘못을 파고들고 싶었다.
‘왜 이렇게 그 여자가 싫은 건지.’
드러날락 말락 고개를 털었다. 밀레나를 향해 웃음 지었다.
“괜찮을 겁니다. 지나간 일로 속앓이해서야 영애만 다치지 않습니까.”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엘테르트 님.”
감사는 빠르게 돌아왔다. 엘테르트도 밀레나도 서로가 무슨 말을 할지 읽을 줄 알았다. 엘테르트는 ‘영리한 아가씨로군.’ 하고 떠올렸다. 눈치가 날래고 이야기하기 편한 사람은 호감이 갔다. 오스터 알디온은 천박한 남자였다. 엘로나의 말대로 과분한 딸을 두었다.
딸이 하나 더 있었지. 엘테르트는 이에샤를 떠올렸다. 아름답지는 않았으나, 기지는 뛰어나 보였었다.
“앨저 여백작도 곧 떠나고, 영애 혼자 남겠군요.”
“아, 아셨나요? 언니가 떠난다는 걸…….”
“제 또래라고 들었을 뿐입니다. 성년이 되거나 이미 성년일 테니, 친권도 없는 아버지 밑에 계속 있을 수는 없겠지요. 자신의 가문도 있으니까요.”
밀레나는 “휴.” 하고 한숨지었다. 떠난다는 게 기사단 입단 시험을 말하는 줄 알았다. 엘테르트가 이에샤와 사귐이라도 있나 싶었던 것이다.
시험을 치르면 이에샤는 붙든 떨어지든, 후작가를 떠나기로 약속했다. 엘테르트의 말마따나 다 큰 자식이었다. 작위도 가졌다. 독립하는 편이 옳았다. 오스터는 이에샤가 떨어질 거라고 호언장담했다. 거리에 나앉기라도 기대하는 눈치였다.
밀레나는 ‘만약 언니가 붙으면?’ 하고 상상해 보았다. 날마다 검을 휘두르지 않았나. 아버지처럼 이에샤의 실패를 바라지는 않았으나, 입단 시험에 붙어도 껄끄러웠다. 여자 기사를 언니로 두다니! 저마저 드센 여자로 보일까 걱정되었다.
“알디온 영애?”
“아, 아니에요. 네. 언니도 독립해야지요. 좋은 집안의 자제분도 만났으면 좋겠고요.”
“그렇군요. 영애의 언니도 잘될 겁니다. 백작가에 데릴사위로 들어가고 싶어 하는 이는 많을 테니.”
손끝으로 가슴을 눌렀다. 엘테르트에게 사실을 숨긴 탓일까? 밀레나의 심장이 불안스레 뛰었다.
* * *
루시온 이벨리오노 델피르.
델페레타 제국의 황태자는 모험을 즐겼다. 앞서 닦인 길보다 까다롭게 돌아가는 길을 택하고, 끝에 다다랐을 때 성취감을 느꼈다. 갖가지 사람을 만나기도 좋아했다. 죄인의 아들을 “눈빛이 형형해서 마음에 든다.” 하고 시종으로 들인 일은 유명했다. 그 시종이 3년 전 물난리에서 구호책을 내놓았으니, 보는 눈은 뛰어난 셈이었다.
루시온에게는 아끼는 사람이 많았다. 황제와 황후, 동생인 황자와 황녀를 사랑했다. 사촌형인 멘델린 소공작과도 사이좋았다. 황궁 사람 대부분이 루시온의 관심을 받아 보았다. 루시온의 취미란 인재를 골라내, 뒤를 봐주는 것이었다.
낮은 자리로부터 꼭대기까지 온 외골수―근위 기사단장은 루시온의 신임을 받았다. 루시온이 손바닥만 한 쿠키를 이로 부쉈다. 부동자세로 선 체사로를 바라보았다.
“이거 맛있는데, 경도 먹을래?”
“송구합니다, 전하. 초콜릿을 먹으면 두드러기가 나는 몸입니다.”
“그래? 그랬지. 그래서 내가 경을 위해 시나몬 쿠키도 가져오라고 했거든.”
“……황공히 받잡겠습니다.”
체사로가 한숨지었다. 하녀가 탁상에 놓인 접시를 들었다. 체사로에게 옮겨다 주었다. 체사로는 초콜릿 알갱이가 박히지 않은 쿠키를 집었다. 황태자의 앞에서 뭘 으적대려니 얹힐 것만 같았다.
“그래서 에버렛 경은, 나한테 권력의 힘으로 다른 기사단장들을 핍박해 달라는 건가?”
“내일 회의에서 제 의견에 힘을 실어 주십사 청하였습니다.”
루시온은 킬킬 웃었다. 체사로는 딱딱한 성미가 아니었지만, 보잘것없는 자작가 출신다웠다. 황족 앞에서는 얼어 버렸다. 괴롭히는 재미가 쏠쏠했다.
오늘 체사로가 물어 온 건이 흥미롭기도 했다. 자신의 취향을 아주 정확하게 두드리는 이야기였다.
“겨울철 시험에 여자 수험생 하나 넣자는 게 기사단장 모아 놓고 회의할 거리가 돼?”
“되는가 봅니다. 2기사단부터 6기사단 단장까지 전원 들고 일어났습니다.”
“재밌네. 백 명 중 하나한테 거시기가 안 달렸다고 기사 뽑는 시험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기라도 하나.”
황태자로는 여길 수 없이 저속한 말씨가 흘러나왔다. 체사로는 익숙하게 넘겼다. 루시온은 격식을 차려야 할 때는 스스로 알았다.
“누구야?”
“예?”
“에버렛 경이 적극 추천하는 특별 수험생 ‘양’.”
체사로는 고민에 빠졌다. 앨저 백작을 만나 보지는 못했다. 12년이라는 세월이 셈브리온의 눈을 흐렸는지도 몰랐다. 밀어붙이는 까닭은 옛정 때문일까? 황태자까지 끌어들일 만한 가치가 이에샤 앨저에게 있는가?
체사로가 굳게 믿는 사실이 있었다. 셈브리온 데힐은 천재였다. 벨체터 파병에서 셈브리온을 만나고, 눈부신 검술을 보며 얼마나 절망했던가. 그런 셈브리온이 이에샤를 저보다 낫다고 했다. 사실이라면, 여자라는 이유로 기회를 빼앗는 것은 다시없을 등신짓이었다.
체사로와 이에샤는 통하는 구석이 있었다.
“이에샤 앨저 백작입니다. 들어 보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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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추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