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4 1. 골칫덩이 이에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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멘델린 공작성은 수도 변두리에 자리했다. 둘러친 담 아래로 해자가 파였다. 도개교는 밤마다 올라가, 공작의 허락 없이는 떨어지지 않았다. ‘푸른 사자’ 성. 5대 전의 황제가 공신 멘델린에게 내린 성이었다. 멘델린의 문장은 독수리였다. 이름에 사자가 들어가는 까닭은 왕가의 문장이 사자이며, 공작성이 한때 궁전이었기 때문이다.
엘테르트는 멘델린 공작의 외아들이었다. 황제의 조카이기도 했다. 머리가 남의 세 배는 비상해,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알려졌다. 무얼 배워도 반년이면 스승과 논쟁을 벌일 수 있었다. 생김새는 이름난 미인인 엘로나 황녀를 빼닮았다. 거기다 상냥하기까지. 제국의 숙녀라면 누구나 멘델린 소공작과 만나기를 꿈꿨다.
그런 남자가 우거지상을 했다. 루시온은 웃음을 참았다. 푸른 사자 성에 놀러 왔더니 재미있는 꼴이 기다리지 않겠는가. 엘테르트는 곤란한 눈으로 어머니를 보았다. 멘델린 공작 부인 엘로나는 양피지 다발을 들었는데, 장마다 여인의 신상이 빼곡했다. 모두 쟁쟁한 집안의 딸이었다.
“고모님이 이번에 단단히 작정을 하셨군요.”
“앞자리가 바뀌었습니다, 전하. 언제까지나 어미의 아들일 순 없어요. 누군가의 지아비가 되는 것이 순리입니다.”
엘테르트가 스무 살이 되었다는 뜻이었다. 여자 보기를 돌같이 하니, 어머니의 애가 달을 만도 했다. 루시온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황태자비를 들이라 들이라 볶아 대도 “여자가 없다고 나랏일을 못 봅니까?” 하며 내뺄 뿐이었다. 엘로나로서는 아들도 조카도 마뜩잖았다.
“모두 미인이고 재녀들이란다. 끌리는 영애가 없니? 에르디.”
“어머님, 그런 건 제게 좋아하는 여자가 생겼을 때 생각해도 된다고 하셨잖아요.”
“그건 네가 열서넛 적 얘기였지. 처지를 생각하렴. 결혼도 안 하고 아버지의 자리를 이어받을 셈은 아니겠지?”
루시온이 엘로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엘로나는 양피지를 건넸다. 루시온은 다발을 팔락팔락 넘기며, ‘정말로 괜찮은 여자만 모아 놨네.’ 하고 감탄했다. 엘로나는 아들 사랑이 깊은 어머니였다. 이 신상명세서들은 궁의 조사관도 혀를 내두르리만치 꼼꼼했다.
루시온의 손가락이 한 영애의 페이지에서 멈추었다.
“고모님, 이 여자는 좀 아니지 않나요?”
“누구……, 아아. 저도 고민했습니다. 요즘 그녀의 인기가 워낙 좋아야지요.”
“누군데 그래?”
엘테르트도 건너다보았다. 엘로나는 엘테르트의 말본새를 꾸짖으려다가 말았다. 엘테르트와 황태자는 사촌이었고, 젖형제였다. 루시온이 태어나자 궁에서 돌배기 엘테르트를 데려다 함께 돌본 것이다. 다음 멘델린 공작을 위한 황제의 안배였으리라.
엘테르트가 “아.” 하고 감탄사를 흘렸다. 첫 줄에 ‘밀레나 알디온’이라고 쓰였다.
“지금이야 떳떳하다지만 말입니다, 고모님, 이 많은 아가씨 중에 사생아였던 여자를 끼울 필요가 있을까요?”
“저도 알디온 후작을 좋게 보지는 않습니다. 그런 자와 사돈을 맺는다니 싫어요. 집안의 권세가 나쁘지 않고, 뺄 명분이 없으니까 끼운 겁니다.”
“공정을 기하셨다?”
“알디온 양 본인은 나쁘지 않아요. 몸가짐도 바르고 정숙하니. 그 부모가 과분한 여식을 두었죠.”
루시온과 엘로나가 주거니 받거니 떠드는데, 엘테르트의 마음은 딴 곳으로 갔다.
머리가 짧은 여인이 떠올랐다. 밀레나도 파란 눈동자를 지녔으나, 이에샤의 눈은 물속에 잠겨 든 양 짙었다. 머리카락까지 더해서 우중충한 빛깔이었다. 그런데도 발랄하게 느껴졌다. 별난 여자였다.
무심코 중얼거렸다.
“그 집에, 아가씨가 한 사람 더 있더군요.”
“어머?”
엘로나가 놀란 소리를 냈다. 엘테르트 쪽에서 여자 이야기를 꺼내다니! 처음이었다. 머릿속을 뒤져 보았다. 이윽고 알디온 후작 부부의 스캔들을 기억해 냈다. 전처도 딸을 두었었지.
“이혼한 전 후작 부인의 여식 말이니? 어머니를 여의고 도의적 책임 때문에 후작이 거두었지. 에르디 또래일 텐데, 어떤 모임에도 얼굴을 비추지 않아서 본 적 없단다.”
“얼마 전에 후작가에 들렀다가 마주쳤습니다.”
“어떤 처녀이기에 네가 여자 얘기를 다 할까? 전 부인, 아니, 앨저 백작 영애는 제법 아름다웠지.”
엘테르트는 눈살을 찌푸렸다. 아름답다? 이에샤와 지지리도 맞지 않는 소리였다. 좋게 보아야 시녀쯤 될 만했다. 처음에는 정말로 마구간지기인 줄 알았다. 여자라고 깨닫고는 하녀인가 싶었다. 이에샤 앨저에게는 귀티도 부티도 없었다.
“안타깝게도 부친을 닮은 모양이군요.”
“……저런.”
“어려서 작위를 이었다더니 천둥벌거숭이 같은 이였습니다. 차라리 알디온 영애가 전처의 딸이라고 하는 편이 믿음직스러울 겁니다.”
엘로나의 눈이 둥그레졌다. 루시온도 놀랐다. 엘테르트―웃으면 봄바람이 부는 듯하다는 귀공자가 거짓말처럼 쌀쌀맞았다. 남자도 아니고 레이디에게.
루시온은 어찌하면 순둥이 엘테르트를 이 지경으로 긁어 놓을 수 있는지 궁금해졌다. 만나 보고 싶다, 그 여자.
“아무튼 어머님, 저는 아직 결혼할 생각 없습니다. 이렇게 지면으로 품평하는 것도 부인 될 여성에게 실례이고요. 때가 되면 알아서 양순한 여인으로 찾을 테니, 어머님께서도 더는 말하지 마십시오.”
“그런, 에르디.”
“루시온. 너도 이만 돌아가.”
“멘델린 공이 이 시간에 다리를 내리고 날 보내려 할까?”
엘테르트는 한숨을 쉬었다. 아버지라면 루시온에게 푸른 사자 성에 살림을 차려도 된다고 할 터였다.
* * *
이에샤에게는 연무장이 있었다. 편평한 공터일 따름이지만, 이에샤가 사랑하는 장소였다. 알디온 후작 저택의 뒤편―오래된 떡갈나무에서 10분쯤 걸으면 손질하지 않는 정원이 나왔다. 숲으로 불러도 될 만했다. 셈브리온이 나무를 베고 땅을 다져, 연무장으로 만들어 주었다. 이에샤는 그곳에서 검술을 닦았다.
휑뎅그렁해도 브링어를 길러 낸 연무장이었다. 진녹색 나무 그늘 속에서 이에샤는 검과 하나가 되었다. 검술이 좋았다.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쉽고, 하나를 배우면 열이 떠오르는 공부였으니까.
나중에는 어머니의 죽음을 떨치고자 쓰러질 때까지 검을 휘둘렀다. 아버지에게 돌아와서도 마찬가지였다. 주눅들지 않으려고 검에 미쳤다. 이제 검술은 이에샤의 버릇을 넘어 생활이 되었다.
셈브리온은 연무장 한구석에 주저앉았다. 이에샤를 지켜보는 중이었다. 이에샤는 30분째 가만있었다. 한 손에는 길이 든 롱소드를 들었다. 무얼 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느슨한 태도로 늘어뜨렸을 뿐이었다. 하지만 빈틈이 없었다. 셈브리온은 다양하게 이에샤를 습격하는 상상을 해 보았지만, 가로막힐 미래가 빤했다. 이에샤도 머릿속으로 가상의 적을 그리는 참이었다.
델페레타 제국 기사단 입단 시험은 한해에 두 번 있었다. 여름철과 겨울철. 초여름인 6월에 치르고, 한겨울인 12월에 치렀다. 수험자 정원은 백 명. 합격자는 열두 명이라고 들었다. 이에샤는 연줄로 꽂히는 셈이어서, 수험자에 들지 못할 걱정은 없었다.
처음은 토너먼트로 반을 떨어뜨린다. 경쟁률이 2:1밖에 되지 않는다. 거기서 떨어진다면 애당초 글러 먹은 놈이다. 그다음에는 황실 기사단의 평기사와 싸운다. 대련의 성적으로 합격이 판가름난다.
이에샤는 겨울철 입단 시험을 앞두고 어느 때보다도 검에 파묻혔다. 알디온 부부가 질색했으나, 그들의 눈치를 살폈다면 뒷뜰에 연무장을 만들 엄두조차 못 냈을 것이다.
셈브리온은 새삼 감탄했다. 이에샤의 기세는 아녀자가 가질 만한 게 아니었다. 하늘에 구름보다 화살이 많은 전쟁터에서도, 이에샤만큼 서슬 퍼런 병사는 못 보았다.
‘실전 경험도 모자라지 않지.’
재작년부터 이에샤에게 지도 대련을 해 줄 수가 없어졌다. 힘을 다해 덤벼야 했다. 벨체터의 용병으로서 쌓은 모든 기술을 쏟아부어야만 당하지 않았다. 이에샤는 전장에 던져 놓아도―정신만 가다듬으면―날아다닐 녀석이었다. 벌써 입단 시험에서 이에샤를 상대할 녀석이 불쌍해졌다.
셈브리온이 관목에서 가지를 꺾었다. 그것에 브링을 실었다. 이에샤 쪽으로 쏘아 보냈다.
“언제부터 암기도 쓰게 된 거야? 세비.”
이에샤가 투덜거렸다. 셈브리온이 날린 나뭇가지는 세로로 쪼개져, 떨어져 내렸다. 말이 가지이지 꽃줄기와 다름없었다. 손톱 너비보다 가느다란 막대를 썰어 버린 것이다. 브링도 쓰지 않았다. 이만하면 신기였다.
“이-샤.”
“왜?”
“자라나는 새싹 너무 짓밟지 말라고.”
웃음이 터졌다. 이에샤는 마음먹고 남을 괴롭힐 정도로 모질지 않았다. 실력을 드러내지 않으려면 건성건성 해야 할 테고.
“걱정 말라니까? 수석은 먹을 거지만, 차석하고 큰 차이 안 나게 할게.”
“그냥 수석을 포기하면 안 돼? 일단 합격만 하고 승진은 나중에 하는 거야.”
“싫어. 내 자존심이 용납 안 해.”
셈브리온은 한숨을 내쉬었다. 여자가 포근하고 무르다고 누가 그랬던가? 이에샤에게서는 호승심을 빼면 아무것도 남지 않을 듯싶었다. 그런 주제에 남과 사귀기를 꺼려서, 싸울 일은 또 드물었다. 이상한 아가씨였다.
“세비. 나 오랜만에 당신이랑 대련하고 싶어.”
“아, 싫어, 싫어. 너랑 붙고 나면 뻗는다고. 늦잠 잔단 말이야.”
“늙으면 잠이 줄어든다잖아.”
“…….”
가볍게 던져진 악담에 셈브리온도 열받았다.
엉덩이 옆에 두었던 검을 집어 들었다. 무슨 철로 만들었는지 새카만 빛을 띠는 셈브리온의 검은, 이에샤가 브링을 담아 때려도 망가지지 않았다. 이에샤는 그 검을 좋아했다. 숱한 싸움터를 헤치고 온 검과 마주하면 온몸의 솜털이 곤두섰다. 감각이 날카로워졌다. 혼자 수련할 때보다 즐거웠다.
이에샤가 늘어뜨렸던 손을 조금 올렸다. 대칭된 칼날에 셈브리온이 비치는 것만 같았다.
착각이다. 거울도 아닌데 상이 맺힐 리가 없다.
피식 웃었다. 셈브리온이 먼저 움직였다. 발을 조금씩 옮기며, 이에샤와의 거리를 쟀다. 이에샤는 대담히 덤벼 보기로 했다. 발볼에 힘을 주었다. 땅을 박찼다. 다리에 브링을 돌리지 않아도 이에샤는 빨랐다. 셈브리온은 당황하지 않고 이에샤의 공격을 튕겼다. 힘으로 밀어서 가슴을 베려 했다. 끼기긱! 긁히는 소리가 울렸다.
“……나 생각해 봤는데, 세비.”
“뭘?”
스승과 제자는 합을 주고받으면서도 대화가 되었다. 10년 동안 질릴 만큼 대련했으니까.
“내 남편은 당신처럼 검 쓰는 사람, 웬만하면 브링어였으면 좋겠어.”
셈브리온의 발이 꼬였다. 커다란 몸이 휘청했다. 이에샤는 침착히 셈브리온의 팔뚝을 폼멜로 찔렀다. 기세를 잃은 셈브리온은 검을 놓쳐 버렸다. 이에샤의 칼끝이 목 앞에서 멈추었다.
“뭘 그렇게 놀라? 나 혼기 찬 처녀야.”
“생전 안 하던 남편 타령을 하는데 안 놀라겠냐!”
억울했다. 아까는 나이로 기습하더니, 이번에는 사윗감으로 치고 들어왔다.
“그래서 말인데, 기사단에 들어가면 남자도 좀 찾아보려고.”
“제정신이야?”
“제정신인데.”
셈브리온은 입을 다물었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많았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확실한 점은, 이에샤의 눈이 높다는 것이었다. 브링어 남편이라니. 세상에 저 같은 천재가 또 있을 줄 아나. 아니면 아버지뻘 남자라도 잡겠다는 건가.
셈브리온은 이에샤가 죽을 때까지 홀몸이겠구나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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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에게 가망이 없는 이에샤랑 엘테르트...^^*
선추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