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수는 검 한 자루-2화 (2/164)

00002 1. 골칫덩이 이에샤 =========================

딱딱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이에샤는 돌아보지도 않고 떠올렸다. 또 얼굴에 홀린 얼간이야?

밀레나는 예뻤다. 오스터와 셀더리의 얼굴에서 장점만 물려받았다. 큰 눈은 어머니의 자랑이었고 오뚝한 코와 도톰한 입술은 아버지를 닮았다―오스터는 입술이 두꺼웠다. 눈동자는 가을 하늘 같은 색깔에, 살갗은 뽀얬다. 극장가를 뒤져 보아도 밀레나만큼 아름다운 배우는 드물었다.

올봄에 데뷔 무도회를 치렀다. 거기에서 밀레나는 가장 많은 꽃을 받았다. 다음날에는 연서가 열세 통이나 도착했다. 오스터는 권세가 높았다. 그 딸에 예쁘기까지 한 밀레나는 인기인일 수밖에 없었다. 저택에까지 남자가 줄을 섰다. 한 번만 파트너가 되어 달라느니, 보석 반지를 받아 달라느니. 그럴 때마다 이에샤는 떡갈나무 위로 도망쳐야 했다. 알디온 부부가 이에샤를 수치스럽게 여겼기 때문이다.

“아니에요, 엘테르트 님.”

“이자가 영애를 겁박하지 않았습니까? 금방도 제게 무례를 범했습니다만.”

“그, 그런 게 아니에요. 아닌데…….”

밀레나는 앵무새처럼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이에샤는 얼간이의 표정이 궁금해졌다. 뒤로 돌아섰다. 서재에 있던 남자가, 문설주에 기대어 팔짱을 꼈다. 잘생긴 놈이 그러니까 그림이 되었다. 이에샤는 ‘어울리기는 하네.’ 하고 인정해 버렸다.

“여동생이 중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걸 잘 가리지 못해서 주의시키던 중이었답니다.”

“동생? 아하. 그대가 바로.”

엘테르트가 한숨을 내뽑았다. 눈길이 외양간의 거름더미라도 보는 듯했다. 이에샤는 인상을 찌푸렸다. 사교계에는 코빼기도 내밀지 않았지만, 앨저 백작은 어엿한 귀부인이었다. 차림새가 어떠하든 외간남자에게 경멸의 눈초리를 받을 몸이 아니었다.

“알디온 후작의 골칫덩이 첫째 영애로군.”

“앨저 백작이라고 불러 주시겠어요? 어머니는 정식으로 후작님과 이혼하셨거든요.”

“부모가 갈라섰다고 부녀의 피도 끊어지나? 하기야, 꼴이 볼만해서 마구간지기라도 되는 줄 알았소.”

짜증이 솟았다. 엘테르트의 비아냥은, 알디온 부부가 쏟아 내는 욕설과는 다른 느낌으로 열받았다. 저보다 기껏해야 한 뼘 큰 주제에―이에샤의 키는 170㎝였다―깔아 보는 시선이 고까웠다. 검을 든다면 상대조차 되지 못할 놈이.

밀레나는 안절부절못했다. 엘테르트가 이에샤를 핀잔할 줄은 몰랐다. 엘테르트는 기본적으로 친절한 사람이었다. 여자와 아이에게 상냥했고, 남자는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다루었다. 뒤에서 헐뜯기도 앞에서 비꼬기도 싫어했다. 이에샤에게 보이는 적의는 유별했다.

이에샤가 그런 일을 알 턱이 없었다. 원래 싹수가 노란 놈이겠거니 할 따름이었다.

“언니, 그러면 안 돼. 사과드려. 이분은 멘델린의 엘테르트 님이셔.”

“멘델린?”

밀레나의 말에는 이에샤도 흠칫했다. 멘델린 공작가. 개국 공신의 가문이며, 황족과 결혼하면서 피도 섞였다. 알디온 후작이 떵떵거린다 한들 멘델린에 댈 바가 못 되었다. 이에샤는 귀족 이름에 깜깜했다. 소문에도 느렸다. 하지만 멘델린 공작의 이름 정도는 들어 보았고, 그게 ‘엘테르트’는 아니었다. 엘테르트는 공작의 아들이나 동생이리라.

“제가 서재에 아버지가 계신 줄 알고, 밀고 들어간 일은 죄송합니다. 하지만 멘델린 경? 밀레나하고 하던 얘기는 우리 자매의 사사로운 문제랍니다. 귀하께 사죄할 필요는 없죠.”

“언니!”

“경이 앨저 백작인 제게 모욕적인 언사를 하신 점은 너그러운 마음으로 넘어가겠습니다.”

밀레나는 까무러치도록 놀랐다. 엘테르트는 헛웃음을 흘렸다.

이에샤의 태도에는 어긋남이 없었다. 엘테르트는 공작위를 잇기 전까진 멘델린 남작에 지나지 않았다. 모양만 낸 작위이기에, 영지도 가지지 못했다. 어찌 보면 이에샤와 비슷했다.

다른 점이라면 엘테르트는 천덕꾸러기가 아니라 도련님이었고, 돈과 부동산이 넘쳐났다. 이에샤에게 죄를 물을 수 없다뿐이었다. 모두가 원론적인 이야기였다.

“그렇군. 우리 사이에는 갚고 치를 것이 없다는 거지.”

“동생을 보러 오신 모양인데, 오붓한 시간 보내기를 바랍니다. 그럼.”

“아, 아니야, 이에샤 언니……!”

이에샤는 밀레나의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았다. 자리를 벗어났다. 다리에 브링을 돌리며 걸었다. 엘테르트는 무슨 여자가 저리도 빠른가, 이에샤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엘테르트가 찾아온 목적은 명료했다. 알디온의 사업에 멘델린이 투자했으니까. 오스터는 계약서를 가지러 갔다. 밀레나는 엘테르트를 보고 싶지만 끼어들지 못하고, 서재 앞에서 알짱거리던 참이었다. 그때 이에샤가 나타난 것이다.

엘테르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영애의 이복언니는 분방한 사람이군요.”

“죄, 죄송해요. 언니가 무례해서 죄송합니다, 엘테르트 님.”

“아닙니다. 울지 마십시오. 자신이 잘못하지 않은 일로 사과하지도 말고.”

무슨 까닭으로 이에샤가 껄끄러웠을까? 엘테르트 자신도 몰랐다. 이에샤를 둘러싼 무언가를 느낀 탓이었다. 엘테르트가 좋아하지 않는 것. 그래, 어릴 적 혹독했던 검술 스승처럼…….

‘그놈과 한갓 여백작이 비슷하게 보이다니. 나도 참.’

이에샤 앨저는 꺼림칙하고 천방지축인 여자였다. 다시 만날 일은 없겠지. 엘테르트는 가볍게 마무리지었다.

이에샤는 이에샤대로 골이 났다. 엘테르트를 잘생겼다고 생각한 일까지 후회스러웠다. 밀레나에 견주면 저는 말구유나 닦을 여자처럼 생겨서, 신사적인 대접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바라지도 않았다. 이에샤에게는 셈브리온만 있으면 족했기에. 그러나 드러내 놓고 모욕당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귀족답지 않아도 귀족이었고, 자존심은 남의 배로 셌다. 그러지 않았다면 멘델린에게 시비를 걸지도 못했으리라.

“세비! 세비, 어딨어!”

셈브리온을 찾은 곳은 샘터였다. 셈브리온은 물구멍 옆의 바위에 걸터앉았다. 어지간해선 물이 끊어지지 않는 샘터는, 서늘한 공기로 뒤덮였다. 벨체터는 추운 나라였다. 그런 식으로 고향을 되새기는지도 몰랐다.

셈브리온이 고개를 돌렸다. 이에샤와 눈이 마주쳤다.

“어떻게 됐어? 후작이 해도 된대? 기사?”

“못 만났어.”

“뭐?”

“서재에 박혀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어. 그보다 세비.”

셈브리온의 사랑하는 제자는 좀처럼 꽁해지지 않았다. 셀더리에게 밥벌레 소리를 듣고도 코웃음 친 이에샤였다. 오스터가 재떨이를 집어 던진 날에는 백과사전으로 창문을 깼다. 이에샤는 앙갚음하고 털어 버리기를 잘했다.

아, 밀레나가 펠트런 후작 앞에서 울음을 터뜨렸을 때는 오래갔나. 펠트런이 이에샤를 비난했고―이에샤는 밀레나가 모두에게 돌린 자수 손수건으로 손을 닦았을 뿐이었다. 레이디가 만든 손수건으론 무얼 닦으면 안 되는지조차 몰랐다. 왜 쓸데없는 짓을 하는 걸까?―펠트런과 거래 중이었던 오스터가 밥을 굶겼었다.

그만큼의 건이 아니라면 이에샤를 뒤흔들지 못했다. 이에샤는 신경줄이 굵었다.

“무슨 일이야? 이-샤.”

“내가 천해 보여?”

셈브리온은 샘물이 고인 자리에 발을 빠뜨리고 말았다.

이에샤의 지체가 낮아 보이느냐 묻는다면, 그러했다. 튼튼함을 최우선으로 고른 셔츠와 가죽 바지는 허드레꾼이나 입을 성싶었다. 하나 여자에게 “천하다.”라고 하면 뜻이 달라지는 법이었다. 훨씬 지저분한 험담이 되어 버렸다.

“누, 누, 누가 그런 말을? 어떤 개새, 아니, 개자식이?”

“개새끼나 개자식이나 차이는 없는 것 같은데.”

“아무튼! 어떤 놈이 너한테 천하다고 한 거야?”

이에샤는 고개를 털었다. 엘테르트 멘델린은 그렇게까지 말하지는 않았다. 마구간지기 같다고 했지. 이에샤는 초면인 사람이 저에게 적개심을 불태우는 까닭이, 자신의 차림새 때문이라고 결론지었다. 다른 탓이 있을 리가 없었다. 둘은 만난 지 1분 만에 으르렁댔으므로.

“그런 건 아니야. 근데 누가 날 겉모습만 보고 되게 싫어하는 것 같아.”

“귀족? 네 첫인상이 파격적이긴 하지. 처음 만났을 때는 이-샤도 드레스를 입은 아가씨였는데.”

“그 아가씨한테 검에 재능이 있다고 한 건 당신이야.”

셈브리온으로서는 할 말이 없었다.

11년 전, 에이릴리 앨저는 당장에라도 죽을 것 같았다. 이에샤는 아버지에게 입은 상처와 어머니를 향한 연민으로 어린애답지 않은 낯빛을 띠었고. 에이릴리의 의뢰는 ‘이에샤를 지켜 달라.’였다. 그를 위하여 셈브리온은 이에샤에게, 자신을 바로 세울 힘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검술은 반쯤 덤이었다.

하지만 이에샤의 자질은 놀라웠다. 셈브리온이 브링어가 되었을 때는 스물다섯 살이었고, 모두가 셈브리온을 천재로 일컬었다. 이에샤는 그보다 10년이 빨랐다. 계집애가 아니라 사내애였다면 역사서에 이름을 남겼을지도 몰랐다.

셈브리온은 이에샤의 재능을 사랑했다. 검의 오의를 깨친 자로서, 이에샤 같은 타고난 검술사를 아낄 수밖에 없었다.

“그러네. 이-샤는 나 때문에 검을 잡았지.”

“세비는 그냥 호신술일 뿐이랬으니까 생각 못 해 봤는데, 나 기사가 되면 엄청난 거잖아. 지금 제국에 브링어 기사가 몇이나 되더라?”

“열넷. 세계의 브링어 중 삼분지 일을 델페레타가 데리고 있지.”

“내가 열다섯 번째가 될래!”

쓴웃음이 나왔다. 이에샤는 모든 것을 쉽게만 보았다. 어려서일까? 아니면 귀족이라서일까. 셈브리온은 ‘아무리 뛰어나도 여자는 안 된다.’ 하는 간단한 이치를 어떻게 가르쳐야 하나 고민했다.

“이-샤. 사람들은 여자가 용병 일이나 기사 일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해.”

“왜? 능력만 있으면 남녀가 무슨 상관이야. 브링어님이라고. 모셔 가도 모자랄 판에!”

“너는 브링을 쓰지 않고 남자와 힘겨루기해서 이길 수 있어? 브링은 무한히 솟는 게 아니야.”

이에샤는 입을 다물었다. 돌이켜보면 무거운 것을 들거나 빠르게 달리거나 할 때, 브링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다. 브링어이기에 당연하다고 여겼다. 브링 없이는 하지 못하는 일이라고, 생각해 본 적조차 없었다. 처음으로 이에샤 안에 무력감이 피어올랐다. 벽에 부딪친 기분이었다.

셈브리온은 한숨을 내쉬었다. 꿀 먹은 벙어리 같은 낯은 이에샤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셈브리온의 이에샤는 잘 웃고, 우쭐거리는 아가씨였다.

“정말로 기사가 되고 싶어?”

“되고 싶다기보다, 그거밖에 길이 없으니까…….”

“네 마음이 간절하다면 내가 도울 수 있어. 간절하다면, 말이야.”

이에샤의 눈이 커졌다. 당신이 어떻게? 궁금해하는 빛이 뚜렷했다. 셈브리온은 뽐내듯이 가슴을 폈다. 용병 길드에서 내주는 호패 가운데 으뜸―금패를 받은 사람이 저였다. 용병의 일감이 많은 벨체터에서 이름을 떨치기도 했다. 이에샤의 어머니가 유산을 남기지 못한 까닭의 반은 셈브리온의 품삯이었다.

“제국 기사단에 아는 사람이 있어. 이-샤가 바란다면 내가 부탁을 넣어 볼게. 너를 종기사로 받아 달라고.”

“나는 귀족인데, 그게 될까?”

“여자잖아. 평민 남자 이상으로 불리하다고. 너는 자기가 가진 게 쥐뿔도 없다는 걸 좀 깨달아야 해.”

귀족은 기사에게 딸려 다루어지는 종기사를 하찮아했다. 귀족의 아들을 종기사로 두지 않으려고 기사단 입단 시험이 생긴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입단 시험에 붙은 이는 수련 기사로서, 임시라고 해도 기사와 비슷한 대우를 받았다. 누군가의 종자부터 시작하는 쪽에는 평민이 많았다. 믿음직한 하인의 아들 등을 종기사로 넣어, 윗물로 갈 발판을 만들어 주는 식이었다.

이에샤는 터무니없는 나이에 브링을 거머쥐었다. 누구와 맞붙어도 지지 않는다는 자신감이 이에샤의 감각을 망쳐 놓았다. 멘델린 소공작에게 개기는 깡 따위 말이다.

“어떡할래? 이-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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