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1 1. 골칫덩이 이에샤 =========================
이에샤 앨저는 이상한 아가씨였다. 머리채를 귀밑에서 잘라, 목덜미를 드러낸 점이 그러했다. 귀족 가운데 머리를 기르지 않는 여자는 없었다. 엉덩이까지 내려오는 머리카락을 윤기 나게 가꾸는 일에는 돈이 들었다. 길고 아름다운 머리카락이란 부유함을 뜻했다. 이에샤는 세도가 알디온 후작의 맏딸이었지만, 도무지 귀족답지 않았다.
이에샤의 아버지―오스터 알디온에게는 사랑하는 여자가 있었다. 이에샤가 돌배기일 적에 만난 영애로, 둘은 오스터가 이혼하기도 전에 자식을 보았다. 알디온 후작 부인 에이릴리는 이에샤의 나이 일곱에 이혼을 받아들였다. 이에샤는 어머니의 친정인 앨저 백작가로 떠나게 되었다. 오스터는 연인을 부인 자리에 앉혔으며, 밀레나 알디온도 사생아에서 후작 영애로 바뀌었다.
에이릴리 앨저는 마음에 병을 키웠다. 의당 남편의 계집질 탓이었다. 마음의 아픔은 몸의 아픔이 되어, 3년 만에 에이릴리의 목숨을 앗아갔다. 외조부모도 없어 이에샤가 작위를 이었다. 열 살에 앨저 여백작이 되었지만 어머니는 모아 둔 재산이 없었고, 오스터가 준 위자료는 치료비로 써 버렸다. 어린 이에샤는 아버지의 슬하로 돌아가야만 했다.
돌아가기 전날 머리카락을 잘랐다. 귀족 여자가 짤따란 머리로 다니면, 눈총이 쏟아질 것이었다. 아버지의 얼굴에 먹칠할 수만 있다면 좋았다. 이에샤는 오스터도, 후작 부인 셀더리도, 배다른 여동생 밀레나도 싫었다. 어른이 되면 돈이 있든 없든 집을 떠날 셈이었다.
나뭇가지에서 사람 다리가 삐져나왔다. 알디온 후작가의 뒤뜰에는 백 년은 묵었을 법한 떡갈나무가 살았다. 어른 허벅다리만 한 가지가 뻗어, 부채 같은 잎사귀들이 주렁주렁 늘어졌다. 아래에 서면 햇빛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이에샤가 거기를 기어오르자, 오스터는 지팡이를 휘두르며 역정 냈었다. 이에샤는 나무를 잘 탔다. 끈기도 강했다. 떡갈나무 위에서 이틀을 버티니 오스터도 포기했다. “네 멋대로 굴어라, 망할 년 같으니라고!” 하고 외치면서. 그 뒤로 이에샤는 틈만 나면 나무에 올라갔다.
낮잠을 청하는 중이었다. 중요한 손님이 온다고 들었다. 천덕꾸러기인 저는 사라져 주는 편이 나았다. 오늘도 이에샤는 셔츠에 가죽 바지를 입고, 새어머니와 한바탕했다. 셀더리는 의붓딸의 남성적인 차림을 못 견뎌 했다. 이에샤로서는 ‘치마를 입고 나무를 타라니, 제정신인가?’ 싶을 뿐이었다.
불꽃처럼 뻘건 머리카락을 지닌 사내가 떡갈나무로 다가왔다. 고개를 쳐들고 두리번거렸다. 이에샤의 다리를 발견하자, 사내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이-샤!”
‘이’를 늘여 말하는 것은 벨체터인의 특징이었다. 벨체터어에는 에 발음이 없었다. 제국어를 따라하려 해 보아야 이으, 이이, 으이 따위만 나오기 일쑤였다. 사내는 벨체터 출신 용병이었다. 용병 나부랭이를 가까이하다니! 오스터와 셀더리는 날뛰었으나, 이에샤는 길바닥에 나앉으면 나앉았지 셈브리온을 내치고 알디온 후작가에 머물 생각은 없었다.
“이-샤, 내려와 봐! 안 자는 거 알아!”
이에샤의 이름을 빼면 셈브리온의 제국어는 나무랄 데 없었다.
에이릴리가 사병을 두지 못해, 딸을 지켜 달라며 고용한 용병은 이에샤를 사랑했다. 남녀 간의 정은 아니었으나 조카를 아끼는 마음과는 비슷했다. 이에샤가 더는 삯을 내지 못하는데도 남았을 정도였다.
이에샤는 땅 쪽을 곁눈질했다. 빽빽한 나뭇잎 틈새로 붉은색이 언뜻언뜻했다. 언제 봐도 튀는 머리카락이라니까. 늘어지라 하품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무시했을 것이다. 보란듯이 높은 가지로 옮겨갈 수도 있었다. 셈브리온이기에 이에샤는 브링을 끌어올렸다.
날씬한 몸이 떨어져 내렸다. 셈브리온은 놀라지도 않았다. 이에샤는 숙달된 전사만이 쓸 수 있는 기운, 브링의 힘으로 착지했다. 긁힌 곳 하나 없이 말짱한 모습이었다.
귀밑에서 끊어지는 잿빛 머리카락과 푸른 눈동자. 아버지를 빼닮은 생김새는 이에샤의 콤플렉스였다. 하지만 셈브리온은 무게감 있는 빛깔이 이에샤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무슨 일이야, 세비?”
“방금 네 계모가 나더러 너한테 헛바람 불어넣지 말라고 30분 동안 화내고 갔는데, 어떻게 생각해?”
“음, 미안하게 생각해.”
이에샤는 한숨을 내쉬었다. 셈브리온은 이에샤를 만난 다음해―10년 전부터 작은 손에 검을 쥐였다. 에이릴리는 딸이 용병에게 검술을 배우는데도 개의치 않았다. 제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내다본 듯이. 셈브리온이 알아본 대로 이에샤의 재능은 눈부신 것이었다. 8년 만에 브링을 깨쳤으니.
셀더리는 이에샤가 땀흘리고 검을 휘두르는 꼴이 세상에서 제일 망측한 것인 양 굴었다. 이에샤의 머리카락을 보고도 그랬고, 셈브리온과 이야기할 때도 그랬다. 알디온 후작 부인에게 의붓딸은 미치광이와 같았다. 맛이 가서 계집애가 해선 안 될 짓들만 골라 하는 미치광이.
“나는 네가 좋아서 여기 있는 거니까 뭐라고 해도 상관없지만, 이-샤도 좀 유, 유통,”
“융통성.”
“그래, 융통성을 보일 필요가 있어.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살 수는 없다고.”
이에샤는 딴청을 피웠다. 열여덟 살이 되도록 사교계에 데뷔하지 않은 귀족 여자는 저뿐일 터였다. 후작 영애는 아니어도 앨저 백작이니, 사교계에 그림자 끝자락이나마 비쳐야만 했다.
그것이 싫었다. 이에샤에게는 유산은커녕 후견인에게 묶인 재산조차 없었다. 영지를 가지지도 않았다. 이름뿐인 귀족. 가진 것이라곤 셈브리온 데힐이라는 뛰어난 용병 한 사람. 춤추는 모임에 나가서 무얼 한단 말인가? 뱃속이 갑갑해졌다.
“나 그냥 세비랑 같이 용병 일이나 하며 살고 싶어.”
“귀족이? 여자가? 이-샤, 여자 용병이라는 건 내란으로 불타는 벨체터에서도 드물다고. 너처럼 곱게 큰 제국 여자가 견딜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어차피 여기에서 나가면 돈을 벌어야 하잖아. 2년 남았어. 내가 할 줄 아는 게 칼질 말고 뭐 있어?”
셈브리온은 대꾸하지 못했다. 이에샤의 재주라면 댈 수 있었다. 용병 중에는 글을 몰라서 구두계약만 하는 놈들이 수두룩했고, 예법을 알면 귀족 저택에서 일할 수 있었고, 이에샤는 바느질도 제법 잘했다. 모두가 평민일 때나 쓸만한 능력들이었다.
브링이 있기는 했다. 브링어(브링 사용자)는 대륙을 털어도 한 줌밖에 나오지 않을 테니까. 그렇다고 여자인 이에샤가 기사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셈브리온은 속에 든 말을 뱉어 냈다.
“이-샤가 기사가 될 순 없잖아?”
“기사?”
“그래. 브링어인 귀족이 할 만한 일이 그밖에 뭐…….”
“그거다!”
“뭐?”
이에샤는 손뼉까지 부딪쳤다. 왜 기사를 떠올리지 못했을까? 자신은 델페레타 제국에서도 손꼽히는 검사가 틀림없었다―남과 싸워 본 적은 없었지만. 기사단 입단 시험쯤 식은 죽 먹기였다. 오스터와 셀더리에게 네가 시집은 가겠느냐, 치이는 나날에 참으로 잘되었다. 기사가 되겠다고 받아치면 되니!
“역시 내 사부야, 세비. 나 당장 알디온한테 가서 말하고 올게!”
“이-샤, 잠깐만!”
이에샤는 아버지를 성으로 부르고는 저택으로 달려갔다.
셈브리온은 당혹했다. 제가 셀더리의 잔소리대로 ‘헛바람’을 불어넣은 모양이었다. 여자 기사라니. 현숙한 귀부인에게 기사 작위를 내려 치하하는 일은 있어도, 검을 들고 싸우는 여기사는 듣도 보도 못했다. 이에샤도 모르지 않을 터였다.
이에샤는 자신에 부풀었다. 성별 따위, 실력으로 뛰어넘으면 그만이라고 여겼다. 브링어를 두고도 여자라는 까닭으로 뽑지 않는다면, 지나치게 멍청한 짓이 아닌가? 셈브리온이 읽는다면 10년은 코웃음 칠 생각이었다.
저택으로 뛰어들었다. 바닥을 닦던 하녀가 자루걸레를 떨어뜨렸다. 이에샤는 “미안!” 하고 소리치고 계단을 올랐다. 오스터가 2층 서재에 있을 시간이었다. 복도를 잰걸음으로 나아갔다.
그때였다. 익숙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여문 밀 같기도, 벌꿀 같기도 한 색의 머리카락을 땋아 내린 소녀가 서재 앞에 있었다. 밀레나는 오늘도 어여쁜 드레스를 입었다. 물빛 비단으로 만든 옷과 장갑이 퍽 고상했다. 이에샤는 눈살을 찌푸렸다.
“안녕.”
“아, 언니.”
“아버지한테 볼일 있어? 네가 그럼 난 다음에 오게.”
“그게 아니고…….”
밀레나는 우물쭈물했다. 이에샤는 밀레나의 토끼처럼 잘 놀라고 봉오리처럼 수줍은 면이 싫었다. “같이 차 마실래?” 하기에 “아니.” 하고 물리쳤더니, 천하의 나쁜 년이 되기도 했었다. 소심함은 죄가 아니지만 오스터와 셀더리의 딸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이에샤는 밀레나가 끔찍했다.
“언니, 저어, 그 옷은.”
밀레나의 말소리는 거의 속삭임 같았다. 이에샤는 알아듣겠다고 귓바퀴에 브링을 모으는 상상을 해 보았다. 낭비도 그런 낭비가 없었다.
“크게 말해 줄래? 하고 싶은 말이 뭔지 모르겠어.”
“미, 미안해.”
“됐어. 지금 같은 목소리로 말해 주면 좋겠다.”
“미안해. 그 옷을 입고 아버지를 만나는 건, 음, 어렵지 않을까. 그 말이었어. 미안해.”
순식간에 세 번 사과받은 이에샤는 헛숨을 터뜨렸다.
밀레나가 꼬집고자 하는 바는 눈치챘다. 방으로 돌아가서 원피스라도 입고 오라는 뜻이겠지. 이에샤는 밀레나의 충고를 따르고 싶지 않았다. 오스터에게 저는 눈엣가시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사랑한 적도 없는 전처가 붙여 놓고 간 덤터기. 오스터는 비가 와도 이에샤를 탓했고, 눈이 와도 이에샤를 탓했다. 바지를 치마로 갈아입는다고 좋아할 리가 있나.
“신경 써 줘서 고마워. 난 지금도 충분히 아버지의 격에 맞는 복장이라고 생각해. 괜한 걱정하지 말렴.”
“아, 언니……!”
텅텅! 서재 문을 두드려 댔다. 대답이 흘러나오기도 전에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늘 그리했다. 오스터가 미웠으므로 예의를 차리기도 싫었다.
바람이 뺨에 닿았다. 안에서 창문을 열어 둔 채였다. 먼지 냄새와도 닮은 종이 냄새는 날아가고, 선뜻한 공기가 감돌았다. 이에샤는 눈을 끔뻑였다. 창가에 모르는 사람이 섰다. 빛깔이 엷은 금발을 흐트러지지 않도록 잡고서. 이목구비가 섬세하고도 반듯했다.
미청년도 이에샤를 바라보았다. 눈매가 살며시 일그러졌다.
‘아, 옷차림.’
셔츠와 바지를 입은 여자가 남자의 눈에는 괴상하게 비쳤으리라. 이에샤는 고개를 끄떡했다. ‘실례했습니다.’라는 뜻을 담은 동작이었다.
오스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다른 곳에 있는 듯싶었다. 이에샤는 조심조심 문을 닫았다. 눈을 홉뜨고 밀레나를 보았다.
“아버지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있잖아. 왜 말을 모호하게 해?”
“난 그냥 언니가 아버지를 뵈러 왔다고 해서.”
“그럼 옷차림 지적이 아니라 아버지 없다는 얘기부터 했어야지.”
밀레나의 새파란 눈에 물이 괴었다. 눈물은 막처럼 눈동자를 뒤덮더니, 떨어질락 말락 흔들렸다. 하얀 뺨이 발긋하게 달아올랐다.
“정말 미안해.”
“알디온 영애가 왜 사과하고 있는지 모르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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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