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태자비의 대역으로 살아남기-125화 (125/126)

epilogue(I). 카일의 소원은...

2018.08.30.

"레길루스, 페레스!"

"으아아악, 어마마마다! 도망쳐."

저것들이!!

"에우루스, 저 말썽쟁이 황자들을 잡아다 줘."

내 부름에 초록빛의 회오리바람이 두 개구쟁이를 감싸 안았다.

"너무해! 맨날 어마마마 말만 듣고!"

"황자들은 우리의 여왕도, 계약자도 아니질 않느냐."

에우루스의 입바른 소리에 두 녀석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둘은 내 앞에 끌려와 앉아 있게 되었다.

6살과 5살의 두 형제는 둘 다 카일을 쏙 빼닮았다. 큰 아들인 레길루스는 카일의 푸른 머릿결을, 둘째 페레스는 카일의 금안을 물려받았다. 대신 첫째는 아버지의 눈을 닮은 녹안이었고 둘째는 아주버님의 검은 머리였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닮은 것은 카일의 성격이었다.

"오늘 글자 공부하는 날 아니니? 어째서 두 아들 놈들이 똑같아?"

"공부는 재미없단 말이에요."

"형아랑 놀 시간이 없잖아요."

"카일!!!"

나의 부름에 이 아이들의 아버지가 급히 달려왔다.

"세이, 왜 불렀어?"

카일은 언제나처럼 촐싹맞게 나를 찾아왔다. 그러다가 나의 성난 표정을 보고 급히 꼬리를 말았다.

"이놈들!! 어마마마의 말을 또 안 들은 게냐?"

"아바마마. 저는 공부보다 검을 배우고 싶어요."

"저는 형아랑 놀고 싶어요."

"누굴 닮았는지, 참 누구 어릴 때랑 똑같이 땡땡일까요?"

"흠흠흠."

카일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고 기가 팍 죽었다. 그러더니 두 황자들에게 허리를 숙이고 속삭이기 시작했다.

이거, 예감이 좋지 않은데?

카일의 말에 방긋방긋 웃기 시작하던 황자들의 미소가 위험했다.

"자, 준비됐지?"

"네!"

"네에!"

윽!! 이것은!! 이 세 부자가 나를 죽이려고 작정했구나!!

자신들의 아버지까지 합세하여 사슴처럼 동그랗게 눈을 뜨고 나를 깜박깜박 쳐다보는데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난, 아직도 카일의 사슴눈 공격에 약했다. 그런데 아들들까지 저러다니.

"아, 안, 돼, 이런 것으로 넘어가 줄 수 없어!"

"나도 땡땡이치고 다녔지만 이렇게 훌륭한 황제가 됐잖아. 아직은 공부하기에 아이들이 어려. 좀, 봐 줘."

카일이 자상하게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이야기를 했다. 아버지의 지원사격에 힘입어 동시에 고개를 끄덕끄덕하는 황자들을 보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래도 검은 안 돼, 레길루스."

"왜요?"

"목검도 아직 제대로 못 들잖아."

"히잉."

"그럼 나뭇가지로 우리 대련해 볼까?"

기운이 빠져 울 것 같던 첫째 아들이 카일의 말에 다시 꼬리 흔드는 강아지가 되었다.

"네, 네! 좋아요."

"나도, 나도!"

"그래, 페레스. 둘이서 같이 아빠한테 덤비는 거다!"

"네!"

"네에!"

귀여운 악동 둘은 카일과 함께 태양궁 후원의 잔디밭으로 갔다. 햇살이 산산이 부딪혀 흩어지는 후원에는 봄꽃들이 한가득이었다.

"자, 덤벼라, 애송이들아!"

저기, 남편님? 애들에게 말버릇이 그게 뭐야!! 애들이 참 좋은 것을 보고 배우겠네!

사실 카일은 좋은 아빠였다. 황제가 되고 나서는 황태자일 때 보다 더 바빠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꼬박꼬박 하루 2시간 이상 아이들과 놀아줬다.

덕분에 두 황자들은 밝고 건강한 성격이 되어가고 있고.

"으아아앙!"

"페레스, 괜찮아. 혼자 일어나야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아이도 잘 달랬다.

"그래, 우리 둘째, 옳지, 잘하네. 눈물도 그치면 더 멋질 것 같은데?"

"뚝!"

꽤 괜찮은 아빠란 말이야. 물론 여전히 괜찮은 남편이고.

"꺄하하하, 내가 아바마마를 찔렀어!"

"으윽, 너의 승리로구나, 페레스!"

흐으으음, 황궁에 어린이가 세 명이나 있는 것 같군요. 언제 다 키워!!

아이들은 격하게 놀아 준 아버지 때문에 지쳐서 간식을 먹고 잠이 들었다. 후원에 펼쳐놓은 돗자리 위에 잠이 든 두 황자들의 모습은 참으로 평화로운 광경이었다.

"역시, 애들은 잘 때 제일 이뻐."

"나 닮은 개구쟁이들 낳고 싶다더니 후회해?"

"음... 당신이 부모님들 고생하던 것을 좀 겪길 바랐는데, 너무 즐거운 것 같아서 아쉽네요."

"그래도 나는 아직 널 닮은 황녀가 갖고 싶어. 지금은 좋지만, 조금만 더 크면 시커멓게 변해서 반항하고 말도 듣지 않고 그럴 거 아냐?"

"당신처럼 말이죠."

"윽... 찔리네. 하지만 나의 경우는 상황이 그랬잖아. 그래서 아이들이 구김살 없이 자라도록 애쓰려고."

사실 두 개구쟁이를 연년생으로 낳고는 전쟁터나 다름없는 황궁 생활에 지쳐 셋째는 천천히 갖기로 했었다. 셋째마저 아들이라면, 나는 폭발할 거야.

황족들은 물론 유모도 두고 궁인들도 다 도와줘서 다른 평민들보다는 수월하게 육아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의 소중한 아드님들은 자신들의 아버지를 닮은 엄마 바라기들이라 힘들었다.

하긴, 카일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였지. 걸음마를 배우고부터는 나랑 잔다고 난리 치는 바람에 카일이 본의 아니게 독수공방을 해야 했다.

"아무튼, 처제네도, 처남네도, 심지어 프리케와 테일러네 집에도 다 딸이 있는데 우리만 없잖아. 애들도 제법 컸고, 우리 딸 하나만 만들자. 내 소원이야."

카일이 치사하게 또 사슴눈 공격을 시전했다.

사실, 첫째는 입덧을 수월하게 넘겼다. 한창 입덧해야 할 시기에 잠을 푹 잤지. 그런데 둘째를 가졌을 때는 난리가 났었다.

"나, 입덧 힘든데... 당신이 입덧해 줄 것도 아니잖아. 게다가 애 낳을 때 얼마나 아픈지 알아요?"

"그래서 두 번 다 세이가 나 죽이고 싶다고 욕을 했지."

"아기는 같이 만들었는데 고통은 내가 받고. 쳇."

"내가 앞으로 더 잘할게. 응? 나도 귀엽고 깜찍한 딸 갖고 싶어. 그것들이 딸 있는 유세를 얼마나 한다고!!"

사실 프리케가 얼마 전 놀러 와서 많이 놀리고 갔다. 편지로도 놀렸다. 카일이 딸을 갖고 싶어 하는 것을 안 프리케의 짓궂은 장난이었지.

... 전쟁의 위기를 넘겨서 다행이야.

카일이 약이 올라 북부 왕국을 밀어버리겠다고 날뛰는 것을 말리느라 힘들었다.

"그러면... 흠, 고아원 열 개만 더 지어줘요."

"그 정도야 얼마든지!"

"최신식으로."

"당연하지."

"감찰은 당신이 나가서 비리나 부정 없게 만들 것."

"네네, 분부 받들겠습니다."

그날 밤부터 우리는 다시 열심히 아기를 만들기 위해 애를 썼다. 뭐 그렇다고 그 사이 우리 관계가 소원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애가 탔었지. 아들들이 밤마다 침실을 습격해대서 같은 침실에서 손만 잡고 자야 할 때가 많았다고나 할까?

그래서 한 번씩 둘만의 시간을 가지면 서로 끝장을 보겠다는 듯이 달려들곤 했다.

"혼자서 잘 수 있는 남자가 되어야 검술을 배울 수 있어."

근엄한 카일의 말에 레길루스는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페레스는 눈물을 터트려서 달래느라 개고생을 했지. 페레스가 잠들고 나서야 우리 둘은 겨우 둘만의 시간을 가졌다.

"오랜만이라서 어색하네."

어쩐지 쑥스러워하는 카일이었다. 하지만 어색했던 시간은 짧았다.

키스로 시작한 우리들만의 시간은 그 어느 때보다 농밀하고 깊었다. 카일의 손길이 닿은 곳마다 뜨거웠고, 카일의 입술이 내려앉은 곳은 강렬했다.

그리고 하나가 되었을 때의 우리는 누구도 우리 사이에 들어올 틈이 없었다. 그리고 카일은 사그라들지 않고 점점 불 타올랐다.

오랜만의 깊은 관계라 지친 나는 카일의 맨 가슴에 기대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너무도 그리운 아이를 만났다.

"알비케라! 어디 가는 거야? 가지마!"

내가 애타게 부르는 것이 들리지 않는지 나의 하얀 강아지는 앞만 보고 달렸다.

나는 그런 알비의 뒤를 하염없이 뒤쫓았다. 하지만 내 강아지는 나를 돌아봐 주지 않았다.

아직 고맙다는 인사도 제대로 못했는데, 이별의 인사도 하지 못하고 떠나보냈는데, 놓칠 수 없어!

열심히 뛰어가다 커다란 바위 뒤로 숨어버리는 알비를 보았다. 그리고 나도 곧바로 뛰어 들어갔다. 하지만 어디에도 알비는 없었다.

그래서 바위 뒤에 주저앉아 서럽게 울었다. 그때 내 눈물을 핥아 닦아주는 존재가 있었다.

"알비!!"

하얗게 빛나는 은빛 사슴이 내 앞에 서 있었다. 나는 그 사슴의 목을 감싸 안고 더 서럽게 울었다.

"보고 싶었어. 알비야. 이제 가지 마. 예전처럼 우리 함께해. 헤어지기 싫어. 너는 내 가족이잖아."

알비는 내게 머리를 비비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내 품 안으로 안겨들어 오기 시작하더니 반짝반짝 빛나는 별이 되어 사라졌다.

"알비!!"

"세이? 왜 그래?"

"알비, 알비가 찾아왔어요."

나는 내가 꾼 꿈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러자 카일이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아마도, 알비가 우리 딸이 되려나 보내?"

"응?"

"태몽일 것 같은데? 게다가 알비는 암컷이었으니 딸이 아닐까?"

"알비가 내 딸로 태어나면 좋겠어요. 그럼 그 아이에게 못 챙겨준 사랑 다 쏟아부어줄래."

"그래, 꼭 알비가 우리 곁에 돌아올 거라고 믿어."

얼마 후 나는 의외의 상황을 통해 임신 사실을 먼저 알게 되었다.

"윽, 오늘 요리사 누구야? 왜 이렇게 요리에 잡냄새가 많아?"

"응? 멀쩡한대요? 카일 내 것을 먹을래요?"

내가 포크에 큰 고깃덩어리를 집어 카일의 입에 넣어주었다.

"어마마마, 나도 넣어 줘요."

"앗, 나도요."

"우욱!"

"우와 아바마마가 어마마마가 넣어 준것을 뱉었어."

"너무해!"

시끄러운 두 황자를 두고 카일을 쳐다봤다. 카일은 입과 코를 막고 있었다.

"카일?"

"읍! 도저히 냄새나서 못 먹겠어."

"뭐야, 입덧하는 사람처럼."

카일은 그 뒤로 한 달 가까이 헛구역질을 해댔다. 그리고 알고 보니 그것은 진짜 입덧이었다.

"가끔, 남편이 대신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황후 폐하께서는 임신한 것이 맞습니다."

카일은 즉시 모두의 놀림을 받았다.

"크크크크, 폐하. 이제 하다 하다 입덧도 대신합니까?"

"루카스."

"네?"

"너, 신혼 휴가 사흘로 줄여줄까?"

"윽, 안됩니다!! 내가 이 날을 얼마나 기다렸는데!"

루카스는 한 달 뒤, 8살이나 어린 영애와 혼례를 치르기로 했다. 도둑놈 같으니라고.

"재상, 폐하를 놀리면 제가 용서 안 합니다."

"그, 네, 황후 폐하."

카일을 위해 내가 직접 요리를 해서 먹였다. 그나마 내가 해주는 것은 희한하게도 잘 먹었다. 덕분에 우리 꼬마 황자들도 내가 해준 것만 먹겠다고 난리해서 요리사들은 할 일이 없었다.

"푸흡, 스타티나가 당신이 입덧한다니까 당연한 거래요. 제부는 첫 애 때부터 입덧을 같이했다는데요?"

"내가 졌군."

한 달 정도의 입덧이 끝난 후, 카일은 내게 지극 정성이였다. 내가 좋아하는 과일은 계절에 관계없이 온실에서 만들어 냈다. 심지어 임베르와 짜고 내 허락도 없이 온실에 작은 바다를 만들었다.

뭐, 덕분에 싱싱한 해산물도 먹고, 아이들은 해수욕을 하고 좋았지 뭐.

"나는 동생 더 생기는 거 싫어."

"나는 형아가 더 있었으면 좋겠어."

두 꼬마 황자님들은 동생이 그다지 좋지 않은가 보았다.

뭐, 이것은 미래의 자신들의 모습을 예상하지 못한 어리석은 발언이었지.

10개월의 시간은 금방 흘러갔다. 그리고 나는 세 번째 산통을 겪기 시작했다.

"내가 당신 꼬임에 넘어가는 게 아니었는... 아악!"

"또 아들이면 다신 낳지 않을 거야. 아아아악!"

세 번째여도 힘든 것은 똑같았다. 누가 뒤로 갈수록 쉽게 낳는다고 했어? 임베르가 곁에서 지켜 주었지만 이번에도 나는 거의 탈진한 상황에서야 아기를 품에 안았다.

"여왕, 널 닮은 예쁜 딸이구나. 그리고, 너만큼이나 자연과 닮은 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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