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기다림의 시간.
2018.08.29.
세이가 정령왕들과 떠난 지 벌써 사흘이 되었다. 그 사이 금지된 숲에 숨은 그림자 군의 잔당은 빠짐없이 소탕되었다.
처남은 제 누나가 정령의 여왕이라는 소식에 얼이 빠졌으나 빨리 수긍했다. 그리고 세이가 각성한 뒤 음산했던 금지된 숲이 변하는 것을 보고 감탄했다.
"그러고 보니, 누님이 어릴 때 가출하면 꼭 이쪽 숲으로 도망쳤죠. 아버지께서는 금지된 숲이라 크게 걱정하셨구요."
"그랬군."
"누님이 계실 때의 숲은 생각해보니 최근처럼 음산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결국 정령의 여왕이기에 정령들의 보호로 살아남았다. 하지만 아니었다면?
내 능력 부족으로 세이도, 나의 아이도 잃을 뻔했다.
처음 내 다짐처럼 황후와 각종 위험을 다 제거한 뒤 아이를 가졌어야 했는데... 그때는 나를 아직 사랑하지 않던 세이를 안심시키려는 생각도 있어서 한 말이었다.
그 말을 지켰어야 했다.
임신한 사실을 말도 하지 못하고, 혼자 앓았을 세이를 생각하자 마음이 찢어질 것 같았다.
"세이가 내게 준다던 선물을 잃을 뻔했다."
"네?"
"이제 다시는 잃을 위기 같은 것 만들지 않을 생각이야. 이번에는 반드시 황후파와 몬테 공작을 쓸어 버리겠어."
"매형이면 가능할 겁니다."
"가을에 조카에게 줄 선물 미리미리 준비해둬."
"네? 정말입니까?"
내가 처남을 향해 웃어주자 알리페르도 활짝 웃었다. 처남의 미소에서 세이의 얼굴이 겹쳐졌다. 핏줄이란 이렇게 진하구나.
하지만 세이의 미소가 더 예뻤다. 그녀의 예쁜 웃음소리가 그리웠다.
"세이를 보러 가려면 얼른 황궁을 찾아야겠어."
"저도 누님이 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아바마마도 구해야지. 그리고 온실로 가서 정령계에서 회복하고 있을 세이를 보러 가자.
치사한 정령놈들. 자기들은 정령계의 문을 아무 곳에서나 열면서 나는 온실에서만 들어가게 열어주다니.
더럽고 치사해서라도 얼른 황궁으로 돌아가야 했다.
이제는 한계였다. 세이의 입술이, 그녀의 손길이 너무 그리웠으니까.
"전군, 진격하라!!"
황성 밖에 포진한 콘스탄트의 사병의 수는 대략 만이었다. 비스 기사단을 포함한 제국군의 수는 8천정도 밖에 안 됐다.
하지만 무서울 것이 없었다. 왜냐하면 이 군에는 창공의 황태자, 바로 내가 있기 때문이었다.
"아르도르, 테라!"
"계약자여, 우리를 이제 마음껏 써먹는구나."
예전에도 세이를 위해서 마음껏 써먹던 놈들이었다.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저러나 싶었다. 마음껏 이용하라고 할 때는 언제고?
"여왕이 내가 다치는 것을 원하지 않을 테니 어쩌겠어? 부탁할게."
내 말에 불만스러워하면서도 성실하게 적군들을 공격하고 아군들을 방어해 주는 정령왕들이었다.
덕분에 쉽게 황성의 봉쇄를 풀 수 있을 것 같았다.
공작의 사병들은 정령왕에게 질려서 오합지졸 흩어지기 바빴다. 그런 자들을 잘 훈련되고 사기가 높은 나와 비스가의 기사들이 제압해 나가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공작, 이제 그만 포기하시지?"
성문 앞에서 성벽 위의 공작을 올려다보며 외쳤다. 공작은 나를 내려다보면서 활시위를 겨누었다.
"호오, 날 맞출 수 있겠나?"
그가 활을 쏘는 순간, 나는 실프를 소환했다. 허무하게도 작은 회오리바람에 휘말린 화살은 방향을 바꾸어 날아갔다.
저 정도는 정령왕을 소환할 필요도 없다고! 공작은 그런 나의 모습을 보다가 도망치기 시작했다.
놓칠 수 없지.
"에우루스!"
바람의 정령왕은 성문 너머의 공작을 강력한 회오리바람을 일으켜 내 눈앞에 가져다주었다.
마법사가 나를 죽여줬길 바랐을 그들의 기대가 무너졌다. 그리고 나는 세이 덕분에 정령왕을 무한하게, 마나 소모도 없이 쓸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공작은 너무나 쉽고 가벼운 상대가 되어버렸다.
"곱게 내려주진 말자. 여왕을 괴롭히던 놈이거든."
내 말에 공작은 바닥에 크게 내팽개쳐졌다. 늙은 공작은 허리를 부여잡고 고통스럽게 뒹굴었다.
"콘스탄트 공작. 북부 왕국과 결탁하여 전쟁을 일으키고, 황제 폐하를 시해하고 감금하였으며, 황태자인 나를 향해 활을 겨누었다."
그가 잡힌 뒤 나의 기사들은 뒤에서 시립해 바닥을 두드리며 함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증거가 명확한 반역자 세타인 콘스탄트 공작의 즉결심판을 명한다."
아바마마께 받은 황제 대리의 인장 반지를 들었다. 아바마마의 인장 반지는 세이가 안전하게 숨겨 뒀기에 현재 제국의 가장 큰 명령권자는 나였다.
내 명이 떨어지자 테일러가 검을 뽑아들었다. 그리고 공작의 오욕에 찬 머리는 땅으로 굴러떨어졌다. 그의 머리는 곧, 성벽에 걸리리라.
"비스 후작. 자네는 성문을 열고, 몬테 공작을 추포 하라. 알리페르, 너는 황성의 경비를 강화해야 한다. 테일러, 너는 나와함께 황궁으로 간다!"
"존명!"
나와 나의 근위대는 말을 몰고 열심히 황궁으로 달렸다. 이제는 내 형을 죽인 황후만 처리하면 됐다.
내가 돌아왔다는 소식이 전해져서 일까? 황궁의 문은 바로 열렸다. 황궁의 문을 연 것은 세이를 지키라고 남겨놨던 나의 근위대 녀석들이었다.
그들이 황후파의 잔당들과 열심히 싸워 문을 사수한 것 같았다.
나는 바로 황후와 아바마마가 있는 태양궁으로 향했다. 온실에 들려서 세이를 보고 싶었지만, 이쪽이 먼저였다.
"대역죄인을 찾아라!"
황후는 이미 도주 중이었다. 기사들에게 황후궁의 시녀들을 체포하고 황후를 찾으라 명령하고는 아바마마의 침실로 향했다.
침실 앞은 아버지의 근위대들이 지키고 있었다. 그들은 나를 보고 침실문을 열어주었다.
"아바마마!!"
흙빛으로 변한 나의 늙은 아버지는 침대에서 겨우 숨만 쉬고 계셨다. 다행히 아직 숨이 끊어지지는 않았지만 살릴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폐하를 지키지 못한 죄! 달게 받겠습니다!"
"일단, 아바마마를 살리고 죄의 경중을 묻겠다."
"예! 전하. 비 전하의 혜안이 아니었으면 폐하를 잃을 뻔했습니다."
세이가 논리적으로 따지는 바람에 그들은 황후의 간계에 넘어가지 않고 아버지와 그를 간호하는 황궁의를 보호할 수 있었다고 했다.
"역시 그녀는 최고의 황태자비지. 임베르!"
나의 부름에 물의 정령왕이 나타났다.
"아바마마가 독에 당한 것 같다. 시간이 얼마 없어. 해독이 가능할까?"
"내가 누구라고 했지?"
"무엇이든 치유 가능한 물의 정령왕이십니다. 부탁해."
하지만 세이는 깨워주지 못하고 있으면서, 쳇
"계약자여 도와주도록 하지."
아바마마의 몸을 물 안개가 감싸 안았다. 그러자 점차 흙빛이었던 폐하의 얼굴에서 조금씩 혈색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계약자여, 지독한 독이구나. 이 인간의 의지가 아니었다면 진작에 죽었을 것이다."
"아바마마."
내가 손을 잡아드리자 혈색이 돌아온 아버지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내가... 손, 주 녀석들을, 보기 전, 에는, 죽, 지 않, 는다고, 했잖느냐."
작은 목소리로 숨을 몰아쉬는 아바마마를 보자 드디어 마음이 놓였다.
"제가 더 대비를 잘하고 갔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며늘, 아기가 이제 먹고, 싶은 것이 많을, 테니, 잘, 챙겨라."
"네."
차마 세이가 쓰러져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말씀을 드릴 수 없었다. 아바마마가 깨어났으니 이제 그 여자들만 처리하면 됐다.
홀에서는 기사들이 황후의 시녀들을 붙잡아 놓았다.
"황후가 어디로 숨었는지 말하면 살려주지."
하지만 아무도 나서지 못했다. 아마도 비밀통로로 도망간 것 같은데, 아직은 황태자인 나는 태양궁의 비밀통로를 알 수 없었다.
"찍찍찍!"
"너는!"
세이의 심복 햄스터였다.
"황후가 어디로 숨었는지 봤니?"
"찍!"
햄스터는 자신을 따라오라는 듯 달려갔다. 그리고 황후의 방 난로 앞에 섰다.
"찍찍찍!"
햄스터는 난로 옆에 꽂혀 있는 부지깽이를 보며 울었다. 나는 부지깽이를 잡아당겨 보았다. 그러자 비밀 공간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 속에는 잔뜩 겁을 먹은 헝클어진 여자가 숨어 있었다.
"반역자를 끌어내라!!"
능력도, 재주도 없으면서, 제국민보다는 자신의 안위와 권력만을 챙기던 사악한 여자. 결국에는 이렇게 파멸하는구나.
모든 것이 끝났다. 황후가 풀어주었던 황후파 죄인과 미친 공녀도 잡혀왔다.
공녀는 세이의 방에서 제가 황태자비인 것처럼 굴고 있었다고했다. 그것을 세이의 시녀들과 하녀들이 참고 견디다가 내가 돌아오자 머리채를 끌고 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몬테 공작도 잡혀 왔다.
"황제 폐하의 명으로 이들은 더 이상의 재판없이 즉시 참수한다."
그렇게, 내 형을 죽이고, 나의 반려를 괴롭히고 죽이려던 자들이 최후를 맞이했다.
특별히 황후는 내가 직접 검을 들어 죽였다. 나의 형님을 죽인 원수를 8년 만에 내 손으로 처리 했다.
이제야, 나의 비와, 나의 아이들이 마음껏 살 수있는 세상이 되었구나.
"세이, 이제 다 끝났어."
정령수를 감싸던 정령석들은 이제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아직은 추운 겨울인 바깥세상과는 달리 화려하고 알록달록한 꽃들이 세이의 주변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꽃이 이렇게나 많은데, 내 눈에는 네가 제일 예쁘네."
"맞는 말이지만, 적당히 해라. 닭살 돋는다."
젠장, 아르도르가 눈치를 팍팍 주며 타박했다. 이 정령왕들, 세이랑 단둘이 시간 좀 보낼랬더니, 딱 붙어서 떨어질 생각을 안 하는군.
"이봐, 내가 아내랑 있는 것이 그리 보기 싫으면 너희들이 나가면 되잖아."
"인간들이 밖에서 우리를 찾지 않으니 어쩌겠나? 여긴 우리의 삶의 터전이라고. 꼬우면 네가 오지 않으면 된다."
아르도르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거만한 것들. 세이가 깨어나기만 해 봐. 다 이를 테다!
"임베르, 세이는 어째서 깨어나지 못하는 거지?"
"여왕도 인간이라... 섬세한 인간의 정신세계는 나도 예측이 힘들구나."
"이상이 있는 것은 아니지?"
"꿈을 꾸는 것이 아닐까 싶다."
세이는 원래 악몽을 많이 꾸는데, 그래서 깨어나지 못하는 것 아닐까?
"내가 오는 시간을 늘려야겠군."
"인간의 황제가 될 자가 그리도 한가한지 몰랐군."
아르도르가 다시 한 번 경계하며 내게 말했다. 내가 세이의 곁에 머무르는 것이 싫은 모양이었다.
"세이가 원래 악몽을 많이 꿔. 내가 곁에 있으면 악몽을 꾸지 않는다 그랬거든. 그래서 내가 지키려는 거야. 여왕이 고통받는 것은 너희도 싫잖아."
내 말에 아무 말도 못 하고 입을 다무는 정령왕들이었다. 후훗. 나의 승리다.
그 후로 매일 시간을 내어 손을 꼭 잡기도 하고, 곁에 같이 눕기도 하고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세이는 깨어날 줄 몰랐다.
이제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영원히 깨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세이, 곧, 처제가 온대. 처제 얼굴 봐야지. 언제 일어날 거야?"
세이 곁이 아니면 나도 잠이 오질 않아서 밤에도 세이 곁에서 잠을 잤다. 세이는 가끔씩 꿈을 꾸는지 웃을 때도 있고, 울 때도 있었다.
울 때 내가 눈물을 닦아주면 옅게 웃는 세이였다.
"이제는 그만 네 목소리를 들려주면 안 될까? 그리워. 네가 혼내는 것도, 찡그리면 이마에 뽀뽀를 해주던 것도, 등짝을 때리는 것도 전부... 네 배속의 아기가 어떻게 커가고 있는지도 듣고 싶어."
아무리 말해도 세이는 답이 없었다. 세이의 푸른 눈이 너무 보고 싶었다.
계속 정령왕들이 눈치를 줘서 그동안 하지 못하던 키스도 하고 싶었다. 잠이 든 네게 키스를 하면 동화처럼 네가 눈을 뜨지 않을까?
"정령왕들, 잠시만 저리들 좀 가지 그래?"
"여왕에게 무슨 응큼한 짓을 하려는 것인가?"
또 아르도르가 시비를 걸었다. 저놈 때문에 세이가 그들을 버린 건데 제일 세이를 챙기는 척하는 재수 없는 놈.
"나는 세이의 남편이다. 내가 무슨 짓을 하던 너희가 참견할 권리는 없다고!"
"으...!"
"아르도르, 맞는 말이야. 계약자는 여왕의 남편이고, 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인간이야."
"쳇."
결국 정령들이 한발 물러났다.
이틈이야. 그들이 돌아선 순간, 나는 세이 얼굴을 향해 고개를 내렸다. 그리고 그녀의 입술 위에 나의 입술을 겹쳤다.
여전히 말랑하고 따사로운 세이의 입술이었다. 천천히 그녀의 향을 느끼며 그녀의 입술을 감상했다.
언제나처럼 황홀한 세이의 향기. 열심히 입술을 놀리는데 뭔가 아쉬웠다. 나만 열렬히 반응하는구나. 세이는 날 느끼지 못하는구나. 나는 이렇게 여전히 널 원하는데, 너와 닿아 뜨거워지는데.
아쉬운 마음에 그만 고개를 들려고 입술을 떼는 순간, 내 목을 감싸는 가녀린 팔이 느껴졌다.
"혼자 즐기기 있어요?"
맞닿은 입술로 전해지는 세이의 숨결이 나를 울컥하게 했다.
"세이!!"
"늦게 돌아와서, 미안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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