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정령의 여왕.
2018.08.29.
내가 눈을 떴을 때는 테일러가 곁에 있었다. 해가 졌는지 이미 주변은 어둑했다.
"전하! 무슨 일입니까? 도대체 피는 뭡니까? 마법사는요? 여기에 솟았던 불기둥들과 정령왕들은 뭐죠?"
시끄럽게도 떠드는 녀석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마나가 허한 것은 많이 채워졌는데 뭔가 중요한 것이...
"세이!! 세이는 어딨지?"
"예? 비 전하요?"
"그래, 세이와 함께 있었어. 분명히 마지막에 내가 마법사의 목을 베고... 세이가 왜 없지?"
"그, 전하 혼자 하얀 사슴의 등에 얹혀서 왔는데요?"
테일러가 나를 이상한 눈으로 봤다. 마치 내가 세이를 그리워하다가 미쳐버린 것 아닐까 염려하는 눈이었다.
"테일러, 너는 내가 허언을 하는 것 같으냐?"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그런데 하얀 사슴은 어디 갔지? 세이를 데리러 갔나?"
"전하를 내려놓고 홀연히 사라졌습니다. 비 전하의 흔적은 없었습니다."
"그 곳으로 다시 가봐야겠다."
세이가 걱정됐다. 어서 빨리 그녀를 찾아야 했다. 이 추운 겨울밤에 혼자 있을 그녀는 날 얼마나 기다릴까?
게다가, 알비가... 그녀의 소중한 강아지가 죽었다. 슬퍼하고 있을 그녀를 빨리 찾아 꼭 안아주고 싶었다.
내가 실종됐다 하고, 아바마마가 쓰러지고 많이 놀랐을 세이였다. 마법사가 눈앞에서 목이 잘리는 것도 봐버렸으니 얼마나 무서울까?
그런데 어째서 나만 여기 온 거지?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저, 전하, 혹시 두 분이 계셨던 곳이 저 숲 뒤쪽 산입니까?"
내가 대략의 위치를 말해주자 테일러가 하얗게 질렸다.
"전하, 큰일입니다. 그곳에는 그림자 군의 잔당들이 몰려들어갔습니다."
"뭐라고?!"
세이가 혼자 있을지도 모르는데!
"내 검은?"
테일러는 신속하게 내 검을 내어왔다. 아직 마나의 회복은 완벽하지 않았으나 마법사가 아닌 상대들과 싸우는데 지장은 없을 정도였다.
갑옷을 걸치고 바로 막사 밖으로 튀어나갔다.
"휘이익!"
내 말을 잘 데려왔는지 진지 안에 블랙버드가 있었다. 나는 바로 말에 올라탔다.
"전하!"
테일러가 부르는 소리 따위는 대답할 가치가 없었다. 아까 그 바위가 어디지? 내가 진지를 벗어나서 숲으로 들어서는 순간, 갑자기 내 눈앞에 새하얀 사슴이 나타났다.
"알비...케라?"
사슴은 슬픈 눈으로 나를 하염없이 바라봤다. 눈에서 눈물이 흘러떨어지는 사슴을 보고 심장이 내려앉았다.
"알비, 네 주인은, 세이는 어디 있지?"
흰 사슴이 뒤 돌아서서 달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 사슴을 뒤쫓았다.
세이, 어째서 나만 이곳으로 온 거야? 네게 무슨 일이 생겼다면, 나는... 나는, 더 이상 살 이유가 없어.
내게 세이는 전부였다. 형을 잃고 인생을, 삶을 포기하려던 나를 일으켜 세워준 것이 세이였다. 그녀만이 나의 안식처이고 희망이었다. 나는 그녀가 없으면 이 지긋지긋한 세상에서 다시 외톨이가 될 것이었다.
계속 상상하지 않으려고 하는데 나쁜 생각이 떠올랐다.
"누구냐?"
"세이는, 황태자비는 어디 있느냐?"
숲에서 그림자 군을 만났다. 나는 도저히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낮게 경고했다.
"그녀의 몸에 손끝이라도 댔다면 너희는 차라리 지옥에 가게 해달라고 빌게 될 것이다."
나는 매섭게 검을 휘둘렀다. 그들이 세이의 행방을 알 수도 있기에 죽일 수는 없었다. 팔 한쪽, 다리 한쪽씩 베어내어 전투 불능이 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뒤따라오던 테일러와 수하들에게 넘겼다.
점점 검을 휘두르는 내 손에 자비가 사라졌다. 세이와 헤어져 있던 7년의 시간 동안의 나로 돌아갔다. 세이가 걱정되는 만큼 놈들이 증오스러웠고 마음이 얼어붙어갔다.
흰 사슴은 내가 전투를 치를 때마다 기다렸다가 다시 출발했다. 그리고 계속해서 깊은 숲으로 들어갔다.
아까 바위가 있던 곳이 아닌 반대편 산속으로 계속 들어갔다. 진짜 세이가 여기 있는 것이 맞을까? 의심이 들었지만 꾸준히 쫓아갔다.
"... 가져가야 사례를 받지."
멀리서 남자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림자 군중 하나인가? 흰 사슴은 그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뛰어가더니 사라졌다. 나는 그곳으로 말을 몰았다.
"허억, 화, 황태자 전하!"
이들은? 그림자 군이 아니었다. 제국의 옷차림. 두 남자는 나를 보고 크게 당황했다.
"너희는 어디 소속이냐?"
그놈들 중 한 놈이 들고 있는 검에서 비릿한 피 냄새가 났다.
"저, 저희는 용병입니다. 전쟁에 참여하려고 왔다가 길을 잃었습니다."
거짓말을 하는군. 이번 전쟁에는 용병 모집을 하지 않았다. 전쟁 따위 벌써 끝났으니까.
"그래? 원래는 어디 소속이었지?"
"떠돌이들이 소속이 어딨겠습니까?"
"그래, 그렇군. 그럼 질문을 바꾸지. 너희들의 의뢰자보다 얼마를 더 주면 의뢰자를 밝히겠느냐?"
"거물이니 십만 골드 이상은 줘야...!"
"죽음이 두렵지 않나 보구나."
내 검은 이미 그들 중 하나의 목을 베었다. 피비린내를 풍기던 놈은 그런 내 모습에 벌벌떨었다. 실력도 안 되는 주제에, 감히 나를 능멸하려 했나?
"목숨과 십만 골드, 어느 쪽이 너의 선택이지?"
"그, 그 몬테 공작이 황태자비 전하를 살해하라고 의뢰를 했습니다. 황궁에서 사라졌다며 전국의 길드에 의뢰가 들어왔습니다. 사, 살려주십시오."
"네 검에서 나는 피 냄새가 무엇이지?"
"그게..."
차마 내 눈을 쳐다보지 못하는 남자였다. 설마, 아니겠지? 불안한 마음이 내 온몸을 지배했다.
나는 그대로 용병 놈의 팔을 잘랐다.
"으아악!"
내 눈에는 그 어느 때보다 살기가 넘쳤다. 이놈이 감히 나의 세이에게 상처를 입혔다면 이 놈은 지옥에도 떨어지지 못할 것이다.
내 일격에 충격을 받은 남자는 말에서 떨어졌다.
나도 말에서 뛰어내린 뒤 그놈의 목을 잡고 들어 올렸다.
"감히, 네가 나의 비를 해친 것이냐?"
"사, 살려, 크헉. 살려, 주십시, 오."
"내 비의 몸에 검을 대고 살기를 바랐느냐? 세이는, 세이는 어디 있지?"
"저, 저, 쪽 계곡으로, 떠, 떨어졌..."
나는 테일러가 다가오는 소리를 듣고 놈을 바닥으로 내팽개쳤다. 놈이 충격으로 쓰러진 것을 확인한 뒤 그리고 다시 말에 올라탔다.
"테일러, 몬테 공작이 반역을 저질렀다는 증거다."
나는 바로 그가 말한 계곡 쪽으로 달렸다. 그리고 계곡 끝에 서 있는 흰 사슴의 모습을 확인했다.
"세이! 어딨어?"
그 순간, 나는 내가 소환하지 않은 정령왕들이 계곡 아래에 나타난 것을 보았다. 혹시?
험한 계곡을 내려갈 수 없는 말을 버리고 계곡을 달려내려가려는 순간 늑대 한 마리를 만났다.
"너는, 대장?"
그는 내게 등을 내어주었다. 바로 늑대에 올라탔다. 그는 나를 계곡 아래의 정령왕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데려갔다.
"세이!!!"
그들의 가운데에는 피에 젖은 세이가 눈을 감고 반듯하게 누워있었다. 하얗게 질려버린 그녀의 안색에 나는 세상이 무너지는 경험을 했다.
"세이, 세이!!"
"계약자여, 걱정하지 마라."
"운디네?"
푸른빛의 안개에 휩싸여 있는 남자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오랜만에 만나는 물의 정령의 정령왕이었다. 그것도 본체로...
"너희들이 어째서 여기에 있는 거지? 그리고 세이는? 무사한 것인가?"
"내 치유능력을 의심하지 마라. 그녀의 상처는 내가 말끔하게 치료했다. 그녀가 흘린 피도 다 회복시켰다."
운디네의 말에 내가 세이의 뺨을 만져보았다. 얼굴은 차갑게 식었지만 코에서 따뜻한 숨을 천천히 내어쉬고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세이가 눈을 뜨지 못하는 거지?"
"그녀가, 우리의 여왕이 잃었던 기억을 되찾았기 때문이다."
역시, 세이가 정령의 여왕이 맞았구나. 그런데 어째서 지금껏 이들은 서로를 알아보지 못한 걸까? 그리고 기억 때문에 깨어나지 못하는 것이라고?
"그녀는 어린 시절 우리가 인간을 벌하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많이 받았었다. 그녀를 괴롭히던 이들 중 상당수가 천벌을 받아야 했고, 실제로 우리는 징벌을 감행했다."
말을 하기 시작한 불의 정령왕은 아까와 달리 활활 타는 불꽃 속에 서있는 인간의 모습이었다. 예전에 장모님이 들려줬던 것 외에도 세이가 하지 말라는 짓을 많이 한 정령들이었다고 했다.
"아르도르, 그러게 내가 여왕이 싫어한다고 적당히 하라고 하지 않았어?"
녹색 회오리바람이 하반신을 가리고 있는 바람의 정령왕이 못마땅한 말투로 말했다.
"에우루스, 결국에는 벌을 받아야만 했던 인간들이었다고! 여왕의 마음을 헤아려주지 못한 것은 잘못이지만."
"결국에는 네놈이 괜히 여왕을 괴롭히던 여자를 죽이는데 도움을 주는 바람에 이사단이 난 것 아닌가?"
황금빛 망치를 지닌 거인, 땅의 정령왕이 불의 정령왕을 비난하며 욕하기 시작했다.
"테, 테라. 그, 그건... 내 잘못이지."
세이가 기억을 잃게 된 원인이었던 화재 당시, 살리맨더는 못된 유모가 피운 불꽂에서 머물고 있었다. 그녀가 불을 끄지 않고, 세이를 모욕하며 죽이겠다고 말하는 순간 유모의 옷자락으로 불을 옮겨붙게 만들었다고 했다.
우연히 불길 속에서 살리맨더를 본 세이는 그로 인해 분노와 배신감으로 그들을 거부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네놈 덕택에 여왕이 그 화재 속에서도 날 부르지 않았잖아!"
"그건, 임베르 네놈이 믿음이 안 간 탓이겠지."
정령들은 지들끼리 남탓을 하며 싸우기 시작했다. 세이가 깨어나면 저놈들을 다 떼어 놔야겠어. 근육질의 헐벗은 몸도 마음에 안 들고.
"그런데, 어떻게 그녀가 기억을 되찾은 거지?"
"계약자여, 하얀 강아지를 기억하는가?"
"알비케라 말인가?"
"그래, 그것이 그녀의 영혼과 기억을 봉인한 열쇠였다."
알비케라가? 그래서 그 강아지에게서 황금빛 영혼의 색이 보였던 것일까?
"예전에도 봉인이 한 번 죽음을 맞이 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여왕이 계속 우리를 거부하는 상태였기에 그 봉인의 영혼이 옮겨간 강아지가 계속 봉인의 역할을 했다."
들은 적 있는 것 같았다. 죽은 후작부인이 흰 사슴의 털이 갖고 싶다고 죽였다고 했던가? 그러고 얼마 있지 않아 알비케라가 왔다고 했다.
불의 정령왕은 내게 계속 말을 이었다.
"이번에는 여왕이 우리에 대한 마음이 많이 풀렸고, 우리를 소환하고자 하는 의지도 생겼기에 새로운 봉인이 생기지 않았다."
"이 금지된 숲을 정화시키고 싶은 마음도 컸던 것이 크게 작용한듯하다."
물의 정령왕이 세이를 다정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안타깝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기억을 한꺼번에 찾은 그녀는 정신적으로 혼란이 와서 깨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언제 깨어날 수 있지?"
"글쎄? 한 달? 두 달? 알 수 없다."
"깨어나지 못하면 죽는 것 아닌가?"
"계약자여, 내가 누군지 잊지 마라. 나는 여왕이 죽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 그녀도 자신의 아기와 함께 살기 위해 노력하고 있고."
아기? 내가 잘못들었나? 아기라고?
"계약자는 아직 몰랐나 보군. 이거 여왕한테 혼나는 것 아닌가 몰라."
"세이가 아기를 가졌다고?"
"그래, 가을에는 만날 수 있을 거다."
그런 몸으로 날 찾아온 거였어? 이런, 내가 더 널 안전하게 지켰어야 했는데... 너를 절대 위험하게 하지 않겠다 다짐했는데.
"일단, 우리는 여왕을 정령수의 곁으로 데려가겠다. 정령수도, 여왕도 같이 있는 편이 서로의 회복에 도움이 될 것이다."
"세이를 영원히 데려가 버리는 것은 아니겠지?"
"너와 갈라놨다가 여왕에게 어떤 원망을 들으려고?"
정령들은 나를 보고 웃었다. 그리고 중요한 이야기를 해줬다.
"우리의 진명을 이젠 알게 되었으니 마음껏 부르거라. 그러면 아무 대가 없이 너의 부름에 임하마."
바람의 정령, 에우루스의 말에 불의 정령 아르도르는 조금 불만스러운 표정이었다. 하지만 땅의 정령, 테라의 말에 입이 쑥 들어갔다.
"여왕이 원하는 것은 우리의 계약자의 무사안전이라고."
"자, 우리는 먼저 정령계로 갈 테니 잘 해보거라."
그들은 세이를 공중에 띄운 뒤, 내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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