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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비의 대역으로 살아남기-121화 (121/126)

121화. 미안해, 안녕...

2018.08.29.

"카일!!"

"세이, 피해!"

카일이 나를 밀어냈다. 카일의 앞으로 날라오던 불길은 다행히 카일이 급히 정령을 소환했는지 물 안개와 함께 사라졌다.

"아직 힘이 있나 봐? 네 아내를 지키려면 더 노력하라고."

깐족대는 마법사가 너무 얄미웠다. 실실 웃으면서 사방으로 마법을 펼지는 마법사는 지나치게 건강했다. 그에 비해 카일은 많이 지쳐있었다. 체력은 아니지만 마나의 소모가 그를 정신적으로 지치게 만들었나 보았다.

"세이, 내가 주의를 끌 테니 도망쳐."

"싫어요. 절대 혼자 도망가지 않아."

게다가 카일과 떨어지는 것이 더 위험하다고! 나는 카일을 두고 갈 수 없었다.

하필, 여긴 바위 위라서 식물들도 없어 카일을 돕기 힘들었다.

잠깐, 이 바위... 낯익은데? 늑대 대장의 주 사냥터는 금지된 숲이었지만 그들이 서식하던 곳은 이 바위 근처였다. 혹시 아직 근처에 무리가 있지 않을까?

나는 간절히 늑대 무리를 불렀다.

그사이 카일은 검을 들고 마법사와 힘겹게 싸우고 있었다. 아까에 비해 확연히 줄어든 마나로 만든 푸른빛이 카일이 지친 것을 알려주었다.

"아까만큼 힘을 쓰지 못하네? 이래서야 네 형의 복수를 하겠어?"

"닥쳐라."

"정령의 여왕이면서 정령의 힘을 쓰지 못한다니 아쉽네. 하지만 키메라 연구에 필수니까, 네 아내는 내가 데려가야겠어."

저 미친 게 왜 계속 헛소리야?

카일은 마법사와 싸우는 것만으로도 힘들 텐데 나를 보호하느라 급속도로 지쳐갔다. 나도 정령을 부를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괜히 내가 카일을 찾아와서, 카일의 짐이 됐구나.

"세이, 조심해."

카일의 외침과 함께 얼음덩어리가 날라왔다. 카일의 살리맨더가 내 주변을 보호해 주고 있었지만 날아오는 얼음덩어리의 양이 많았다.

그래서 결국 작은 얼음덩어리 하나가 나를 향해 날아왔다.

"알비케라!"

놀랍게도 알비가 내게 날라오는 작은 얼음덩어리를 쳐내 주었다. 저 미친놈은 날 얼려서 잡아갈 생각인 건가?

"쳇, 저 개는 뭐지?"

마법사의 공격은 더 거세졌다. 쉬면서 마나를 모아야 하는 카일은 점점 힘에 버거워 보였다.

시간을 끌수록 불리해질 것 같았다. 카일의 공격은 번번이 막혔다. 결국 카일은 공격보다는 방어에 힘쓸 수밖에 없었다.

"대장, 빨리 와줘. 케이와 내가 위험하면 언제든지 도와준다고 했잖아."

마법사는 카일을 공격하는 와중에 얼음덩어리를 주변 땅으로 쏘아대기 시작했다. 무슨 속셈인지는 몰라도 불길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막기에는 카일이 힘에 겨웠다.

결국 점점 내 주변 바위들이 얼어가는 것이 보였다. 어느 정도 바위가 얼자 마법사가 뭔가 주문을 외우는 것이 들렸다.

"카일!!"

갑자기 내 주변으로 퍼진 얼음이 내 발밑으로 엉겨 붙기 시작했다. 바닥에 떨어진 얼음덩어리를 씨앗 삼아서 나를 얼리려고 한 것이다.

빨리 걸음을 뗐지만 주변은 이미 다 얼음 천지였다.

"세이!!"

어느새 내 무릎 위로 올라오는 얼음덩어리에 몸이 덜덜 떨려왔다. 이제는 발을 떼려고 해도 소용이 없었다. 알비도 온몸이 얼어 붙어 움직이지 못했다.

"살리맨더!"

카일이 손으로 소환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안 되는데, 카일이 쓰러질 거야. 내 걱정을 내뱉지도 못하고 어느새 굳어서 잘 움직이지 않는 몸으로 카일을 쳐다보았다.

카일의 눈에는 나에 대한 걱정만이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나를 꼭 구하겠다는 의지가 보였다. 절대 카일은 쓰러지지 않을 거야.

아가, 아빠가 우릴 지켜줄 거야. 추워도 조금만 참자.

마법진 속에서 튀어나온 것은 붉은 기운이었다. 붉은 기운은 점차 타오르더니 커다란 날개를 펼쳤다.

"사악한 냉기를 모두 제거하고 세이를 구해줘.”

"계약자여, 내가 그 소원을 들어주면 저 사악한 자는 어찌할 생각이냐. 이미 기운이 떨어진 것이 아니냐."

"아직은 버틸 수 있어. 부탁해. 저자가 죽는다고 이 마법이 풀리는 것은 아니잖아. 세이부터 구해줘."

"계약자, 너의 의지를 믿는다."

불새는 높게 날아올랐다가 얼어 버린 땅속으로 파고들었다. 카일은 그 사이 마법사의 공격을 검을 이용해서 막아내고 있었다.

곧, 주변의 얼음이 녹으면서 물이 생기기 시작했다. 어느새 녹아버린 물들이 증발하고 사라져 버렸다. 내 몸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끼는 순간 나는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다.

"멍멍!"

"알비, 괜찮아?"

알비도 다행히 무사하게 풀려났다. 하지만 카일의 얼굴이 조금 질려있었다. 무리를 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아직 마법사는 여전히 기세가 등등했다.

"하하하! 이제 검을 들 힘도 남지 않아 보이는데?"

마법사가 카일을 죽이려고 불덩어리를 만들어냈다. 생글생글 웃는 저놈의 얼굴을 진짜 한대 쳐주고 싶었다.

"네놈을 죽이고, 저 여자를 내 것으로 만든 뒤, 최강의 키메라 군대를 만들 거야. 기대해. 네 아내가, 정령의 여왕이 망가지는 모습을!"

"헛소리하지 마라."

마법사가 손을 들어 불덩어리를 날리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크아앙!"

마법사는 갑작스러운 습격에 앞으로 휘청했다.

"대장! 와줬구나!"

늑대 대장과 그 아들들이었다. 많이 늙어 버린 대장은 이제 무리를 이끄는 젊은 늑대들을 통솔해 마법사를 공격했다.

마법사의 불덩어리는 결국 허공을 갈랐고, 늑대들은 일사불란하게 그 불덩어리를 피해 마법사의 팔다리를 물기 시작했다.

"떨어져 이 똥개들아!"

쟤들이 어딜 봐서 개야? 이 멍청한 변태 마법사야!

"대장, 조심해 독한 놈이야."

내 말에 대장은 걱정 말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하울링을 시작했다.

"아오오오!"

늑대들은 더 빠른 속도로 마법사를 물었다 빠지며 공격해 댔다.

많은 수의 늑대들이 퍼붓는 공격에 당황한 마법사가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이곳은 높은 바위 위라 뒤는 낭떠러지였다.

마법사는 끊임없이 불덩어리를 쏘았고, 늑대들은 요리조리 피하면서 마법사의 시선을 분산시켰다.

그때 카일이 검을 들고 늑대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카일을 알아본 늑대들은 카일이 공격할 길을 열어주며 완벽한 호흡으로 피해주었다.

빠른 속도로 틈새를 파고든 카일은 마법사를 향해 거침없이 검을 휘둘렀다. 비록 마나가 없었지만 마나 없이도 경지를 이룬 내 남편의 검은 무서울 것이 없었다.

"감히, 내 아내를 모욕한 죗값이다."

"크헉!"

카일의 검이 마법사의 몸을 관통했다. 그리고 카일이 검을 뽑아내는 순간, 마법사는 뒤로 넘어가며 추락하기 시작했다. 떨어지는 마법사의 몸에서는 피가 터져 흐르기 시작했다.

"카일!!"

마법사가 떨어진 뒤 카일이 무릎을 꿇으며 주저앉았다. 나와 알비가 달려가자 숨을 가쁘게 몰아쉬는 카일이 보였다.

"괜찮아요? 살리맨더를 부르는데 힘을 다 써버린 것 아냐? 설마 생명력까지 써버린 것 아니죠?"

"아니야. 마나가 고갈돼서, 허해서 그래. 잠시 쉬면, 괜찮을..."

카일은 내게 기대며 쓰러졌다. 숨은 고른 것이 잠이 든 것 같았다. 바보같이... 나를 구하겠다고, 힘을 다 닦아 쓰고도 정신력으로 버텨서 마법사를 죽인 거야?

나는 카일을 껴안고 작게 웃었다. 고마웠다.

"끝났다."

이젠 잠깐 쉬었다가 황궁으로 돌아가서 황후를 벌하고, 아바마마를 구하자. 그러면 가을에 우리, 우리의 아이와 행복한 시간을 보낼 거야.

"이대로 끝은 아니지."

억눌린 목소리가 들렸다. 마법사! 불사신이라도 돼?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날아 오른 마법사는 기괴한 표정을 지으며 우리를 노려봤다.

"키메라에 꼭, 살아있는 것이 필요하진 않거든?"

나를 키메라로 만들어 조정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한 마법사가 카일과 나를 향해 다시 불덩어리를 날렸다.

이젠 꼼짝없이 죽는 거야? 카일, 미안해요. 지켜주지 못해서. 내가 정령의 딸이 아니라 진짜 여왕이었어야 했는데... 그랬으면 정령왕을 내가 불렀을 텐데.

"알비!!"

그 순간 알비가 우리 앞으로 뛰어올랐다. 그리고 날 향하던 불덩어리는 알비를 덮쳤다.

"안 돼!"

알비가 불덩어리를 대신 맞는 순간, 알비의 몸이 하얗게 빛이 났다. 그리고 얼핏 나를 돌아보는 알비의 얼굴에서 예전의 흰 사슴이 보였다.

나의 악몽을 거두어주던 나의 소중한 친구.

알비가 검은 숯 덩어리가 되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와 동시에 갑자기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윽!"

하지만 아픈 머리를 붙잡고 있을 틈이 없었다. 방해꾼이 사라진 틈을 타서 다시 마법사가 우리를 공격하려고 한 것이다.

나는 잘 들어지지도 않는 카일의 검을 부들 거리며 들어 올렸다. 당연하게도 마법사는 나를 비웃었다.

"이봐, 황태자비, 지금이라도 날 따라가겠다고 하면 황태자는 살려주지."

"헛소리하지 마. 그런 거짓말에 속는 바보는 없어."

"크크크, 똑똑하네. 하지만 어차피 할 수 있는 것도 없는데 그냥 얌전히 따라가는 편이 나을 텐데? 안 그러면 저 늑대들도 네 강아지처럼 다 죽일 거야."

마법사의 협박에 나는 검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하하하, 잘해줄 테니 걱정 말라고. 그저 내 아내가 돼서 내 시중을 들면서 동물들을 모아 키메라 만드는 것을 도우면 돼. 황후에게 복수도 해줄게. 나는 키메라 군대로 이 대륙의 유일한 지배자가 될 테니까."

포기한 듯한 내 모습에 마법사는 실실 웃으며 바위로 내려앉았다. 그리고 내게 다가오면서 끈적한 시선을 보냈다.

"예쁘네, 크흐흐, 내 발밑에서 기면서 울며 매달리는 꼴도 보기 좋겠... 크헉!"

갑자기 날아온 커다란 독수리가 발톱으로 마법사의 눈을 할퀴었다. 그리고 동시에 늑대들이 그를 물어뜯기 시작했다.

"이 버러지들이!!"

눈에서도 피를 흘리며 기괴한 꼴이 된 마법사가 괴성을 지르며 마법진을 그리려는 순간이었다.

“크아아악!”

카일이 다시 한 번 초인적인 힘으로 몸을 일으켜 내가 떨어트린 검을 주워 휘둘렀다. 결국 마법사의 머리는 주인과 분리되고 말았다.

"감히, 내 아내를 두고 헛소리라니..."

"카일!"

농담처럼 카일은 다시 기절하듯 주저앉았다. 나를 구하려고 깬 것이었다.

마법사의 몸에서 쏟아지는 피가 바위와 카일의 몸을 적시는 사이, 멀지 않은 곳에서 사람의 소리가 들렸다.

"위다! 얼른 가서 스네이크님을 도와 황태자를 죽이자."

이런, 그림자 군인 모양이었다. 어쩌지? 이젠 진짜 승산이 없어. 그때 알비의 시체가 있던 자리에 은빛 찬란히 빛나는 사슴이 나타났다.

"너는!!"

흰 사슴. 나의 어두운 기억을 먹어치워주던 존재. 그리고...

"알비케라?"

내 말에 사슴은 눈을 깜박이고만 있었다. 알비를 대신해서 나타난 사슴은 내게 얼른 도망칠 것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대장! 카일을 이 사슴 등에 태워줘."

이 사슴은 보통 사슴이 아니었다. 분명, 이 아이는 영물이었다. 그리고 내가 믿고 카일을 맡길 수 있는 존재였다.

"알비케라, 멀지 않은 곳에 알리페르나 테일러경이 있을 거야. 카일을 부탁해."

나는 어쩔 거냐는 알비의 눈에 나는 고개를 숙였다.

"내가 미끼가 돼서 저 사람들의 시선을 분산 시킬 거야. 그사이 카일을 부탁할게."

알비케라는 안 된다면서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나는 나보다 카일을 지키고 싶었다.

"같이 가고 싶지만, 그러면 눈에 띄어. 같이 잡힐 거야. 알비, 너는 내 부탁을 늘 들어 줬잖아. 부탁해."

그랬다. 알비케라는 내가 힘들어하는 기억들을 다 먹어치워주고, 그리고 내가 만나고 싶지 않은 존재들로부터 내 영혼을 숨겨준 나의 봉인이었다.

알비케라는 내게 밀려드는 기억 대신 사라질 존재였다. 지난번과 다르게 내가 그들을 이해하고 용서했기에 더 이상 봉인은 유지되지 않을 테니까.

"가! 어서!"

알비케라는 어쩔 수 없이 떠났다. 날듯이 뛰어가는 알비를 보던 나는 돌아섰다.

"대장, 부탁할게."

늑대 대장은 내게 등을 내어주었다. 그리고 그림자 군이 날 볼 수 있는 쪽으로 이동했다.

"황태자비다! 저 여자를 죽이면 제국의 황후가 영지와 작위를 준댔다. 잡아라!"

역시 황후의 짓이군. 나는 반대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늑대들은 주변에서 날 호위하며 달렸다. 계획대로 카일이 떠난 것은 눈치채지 못했다.

그림자 군들은 활을 쏘기 시작했다.

"다들 흩어져."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맹수들이 인간 군대를 이길 순 없었다. 나 혼자 도망쳐야 해.

그때 독수리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높이 날고 있던 녀석이 카일이 무사히 우리 쪽 기사들을 만났다는 것을 알렸다.

"대장, 숲으로!!"

숲의 식물들의 도움으로 그림자 군을 겨우 따돌렸다. 이 숲은 나에게 버림을 받고도 끝내 날 도와주는구나. 살아남는다면 다시 숲을 살릴 거야.

나는 동굴 속에서 숨어 있다가 달이 뜬 뒤 밖으로 나왔다.

계속해서 밀려드는 기억과 두통이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가야 했다.

"이제 카일에게 가자."

불빛이 보였다. 나를 찾으러 온 알리페르가 아닐까? 내 걱정 많이 했을 텐데.

"이런..."

아쉽게도 아니었다. 그리고 내 위치를 들켜버렸다. 나는 대장과 함께 아까 독수리가 알려준 방향으로 달렸다.

"아, 망했다."

제국군의 깃발이 멀리 보였다. 그런데 그곳은 하필 절벽이 있는 계곡 아래였다. 그리고 내 뒤에는 추격자가 바짝 쫓아왔다.

"몬테 공작께서 기뻐하시겠군."

그림자 군도 아니었어.

"대장, 뛰어내리자."

늑대들은 어디든 달릴 수 있으니까. 그래서 뛰어내리는 순간, 등 뒤가 화끈해지는 것을 느꼈다.

대장의 등에 바짝 드러누운 나는, 등 뒤가 축축해지는 것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대장이 험한 길을 벗어날 때 즈음 나는 더 이상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아가, 미안해... 너를 지킬 수 없나 봐. 카일... 보고 싶어."

마지막 순간, 깨어질듯 아파오던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이름들이 있었다.

"임베르, 테라, 에우루스, 아르도르. 오해해서 미안해."

내 눈앞이 캄캄해지는 순간, 빨강, 파랑, 노랑, 초록의 빛무리들이 내 주변을 감싸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나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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