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검은 황금과 불기둥.
2018.08.27.
마법사는 하늘을 날고 있었다. 마법의 힘이겠지?
그는 나를 낚아채기 위해 위에서부터 날아들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주저앉아 머리를 감쌌다. 저자의 손이 닿는 것조차 싫어.
하지만 마법사는 내게 손을 뻗다가 급히 거두며 방향을 틀 수밖에 없었다.
"쳇, 황태자?"
카일은 내 앞을 가로막고 서서 칼을 뽑아들었다. 카일이 뿜어내는 마나는 칼을 감싸고 있었다. 카일의 푸른 머릿결을 닮은 마나가 마법사에 대한 분노의 감정과 함께 일렁이자, 마법사는 뒤로 물러 설 수밖에 없었다.
"드디어, 형님에 대한 복수를 할 수 있겠군."
카일의 낮고 서늘한 말에 나조차도 소름이 돋았다. 카일이 기다리던 순간이었다. 우리를 습격했을 때도 황후와의 연루를 밝히기 위해 삭혀야 했던 복수심을 드디어 마음껏 펼칠 모양이었다.
나는 알비케라와 함께 동굴 속으로 다시 살짝 숨어들었다.
갑자기 허공에 떠 있던 마법사가 휘청휘청 거리며 땅으로 곤두박질을 쳤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카일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카일이 휘두른 검에서 마나가 반달무늬를 그리며 날아갔다. 주변의 나뭇가지가 잘릴 만큼 예리한 검기였다.
바람소리를 내며 허공을 가르던 검기는 마법사가 만든 투명한 방패에 막혔다. 하지만 그 투명한 방패는 산산이부서져 내렸다.
아가를 위해 잔인한 것은 보지 말아야겠어. 눈을 질끔 감았다. 바로 죽지는 않았는지 계속해서 부딪히고 폭발하는 소리가 이어졌다.
"알비, 네 아빠 무사하지? 나 눈 떠도 돼?"
"끼웅."
슬쩍 눈을 떴다. 아쉽게도 마법사는 아직 멀쩡했다. 좀 다쳐 있었어도 좋았을 텐데, 쳇.
"카일, 힘내요."
카일을 조금이라도 돕고 싶어서 숲을 움직였다. 마법사의 움직임을 방해한 것이다.
"쳇, 지난번에도 정령의 여왕의 짓이었군."
마법사가 또 중얼거렸다. 그래, 내가 정령의 여왕이라 착각할만하지.
"더, 갖고 싶어지는군."
미친 새...! 아, 아가야, 미안. 엄마가 나쁜 소리 할뻔했어. 아빠의 활약상을 더 지켜보기나 하자.
"네놈이 죽고 싶어서 환장을 했구나."
흐익, 아가야, 아빠가 저 인간에게 맺힌 게 많아서 그래. 좀 험악하게 말해도 이해해주렴.
나를 노리는 마법사에게 화가 난 카일은 좀 더 속도가 빨라지면서 난폭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카일을 도와서 열심히 엄호했다.
안타깝게도 주변에 식물들은 많은데 동물들이 전혀 없었다. 벌레조차도 없었다. 예전에는 늑대 무리도, 곰 아줌마도 많은 아름다운 숲이었는데...
그러고 보니 이상한 검은 액체가 올라오던 주변에는 식물들도 거의 없었어.
"카일, 조금만 더!"
마법사가 도망가는 방향으로 전나무의 잎이 바늘처럼 쏟아져 내렸다. 이를 피하는 마법사의 등 뒤로 흙이 솟구쳐 퇴로를 막았다.
나의 식물들과 정령들의 합동작전!
나의 응원에 힘을 낸 카일이 마법사를 몰아세웠다. 결국 수세에 몰린 마법사가 날아서 도망치려는지 두둥실 떠오르는 순간 강한 바람에 마법사는 눌려져 땅바닥으로 내팽개쳐졌다.
카일은 마법사의 몸 위로 올라탔다.
"마음대로 해요. 나 안 볼게."
이제는 진짜 죽일 테니까 고개 돌려야지. 그래야 카일이 마음껏 복수를 할 거야. 나는 카일의 마음이 후련해지기를 빌며 뒤돌아섰다.
비명소리가 들릴지도 모르니까 귀를 막자. 아가야 놀라지 말렴.
콰아아앙!
몸이 흔들릴 만큼 큰 폭발 소리가 났다. 그리고 그 폭발의 여파로 숲 전체에 진동이 느껴졌다.
"꺅!"
갑작스러운 흔들림에 동굴 위의 돌들이 떨어져 내렸다. 내 머리 위로 쏟아지던 돌들은 방어막이라도 펼쳐졌는지 내 머리 위에서 사방으로 튕겨져 나갔다.
"세이!!"
"카일 조심해요!"
카일이 나에게 잠시 한 눈을 판 사이 밑에 깔렸던 마법사가 카일을 밀치고 빠져나갔다.
"호오, 이래서 금지된 숲인가?"
마법사는 미묘한 웃음을 짓더니 바람을 강하게 일으켜 하늘로 날아오르더니 두고 보자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그러고 보니 아까 숲에 났던 불길이 더 치솟고 있었다. 게다가 불기둥의 굵기가 남다르게 변했다. 그리고 그 주변의 숲은 불기둥을 중심으로 동심원을 그리며 난장판이 되어있었다.
쾅! 쾅!!
작은 폭발음이 끊이질 않는 가운데, 카일은 놓친 마법사를 경계하며 내 앞으로 다가왔다.
"카일, 무슨 일일까요?"
"글쎄, 숲에 무슨 짓을 한 것 같은데..."
"예전에 우리가 알던 숲이 아니었어요. 그때는 꽃도 나무도 많고, 동물들도 마구 뛰어놀았잖아요. 지금은 이상한 검은 웅덩이도 있고, 그 검은 안개도 피어나고..."
카일이 살리맨더를 불러서 대화를 나누는 동안 나는 숲을 살폈다. 식물들이 고통스러워하는 것이 강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카일이 싸우는 동안에는 미처 신경 쓰지 못한 아우성이 들렸다.
예전에 내가 뛰놀던 드넓은 숲, 카일과 나의 추억이 서린 곳이 화마에 지워져 가고 있었다.
"카일!!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마을이 있어요."
"불을 꺼야 하는데..."
"왜 이렇게 폭발하며 불타는지 살리맨더가 알려주지 않았어요? 저기 아까 이상한 검은 웅덩이들이 많았던 곳 같은데..."
"일단, 우리도 몸을 피해야 해. 알비를 안아들어."
내가 알비를 껴안자 그런 나를 카일이 안아들었다. 그리고 실프를 소환해서 불이 난 곳으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했다.
매캐한 불 냄새는 점점 심해졌다. 민가는 이 산 아래에 있었다. 카일을 위한 옷과 음식을 사던 마을이었다.
"네가 말한 검은 웅덩이 말이야."
"응."
"그건 정령들이 검은 황금이라 부르는 물질이래. 아직은 인간들이 다루기에 위험한 물질이고, 인간들의 탐욕을 불러일으켜 자연을 파괴하는 간악한 물질이라 정령들이 통제해 왔대."
그게 어째서 황금이라는 거지? 냄새도 머리 아프고, 마실 수도 없어 보이는 끈적한 액체였는걸?
"통제라뇨?"
"정령의 여왕은 꼭 인간은 아니었어. 지금껏 정령의 여왕이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은 알려지지 않은 것까지 쳐도 3번이고."
흠, 그중 하나는 못 해먹겠다고 가출을 했네. 설마? 그 탓이야?
"여왕이 정령들을 버리고 떠나버린 탓에 저 검은 황금을 지하로 보내거나 정화시키는 일을 못해서 숲이 저 지경이 됐다네."
금지된 숲이었던 이유는 어쩌면 여왕과 정령수, 검은 황금을 인간들의 탐욕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한 초대 가주님의 혜안이었을까?
"그런데 검은 황금이 지금의 폭발과 무슨 상관이에요?"
"그 검은 황금은 음, 잘 증발하는데 그 기체가 밀폐된 곳에서 불이 붙으면 큰 폭발이 일어 날 거래."
"설마?"
"어. 언제 대폭발이 일어날지 몰라. 그리고 저렇게 큰불은 물로도 끄기 힘들어. 운이 좋아서 폭발을 피하더라도 많은 양 때문에 쉽게 불이 꺼지지 않을 거야."
카일은 불이 난 곳이 잘 보이는 바위 위에 내려섰다. 카일의 얼굴은 비장했다. 우리가 날아서 불길을 벗어나는 사이에도 불기둥은 크기와 개수를 늘려나갔다.
멀리 마을이 조그맣게 보였다. 마을 주민들은 거대한 불덩어리와 폭발음에 우왕좌왕하는지 점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대피를 해야 할지, 불을 꺼야 할지 갈피를 못 잡겠지. 이럴 때 리더가 필요한데... 저들을 통솔해서 얼른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켜야 해.
"아, 카일, 저기 깃발인가요?"
"저거, 비스가의 깃발 같은데?"
"아, 어쩌면 알리페르일 수도 있어요. 내가 금지된 숲으로 갔다는 것을 아니까..."
"소식을 전할 수 있으면 마을 사람들을 대피 시킬 텐데..."
"카일, 내가 준 독수리는 어쨌어요? 나름 당신이 주인이라고 잘 쫓아다녔을 텐데?"
"아! 휘익!"
키일이 휘파람을 불자 독수리가 날아왔다. 카일은 근처에서 큰 나무줄기를 구해와 반듯하게 단면을 잘라냈다.
그리고 나와 카일의 무사함을 알리고, 마을 주민을 대피시키라는 메시지를 새겼다. 살리맨더를 이용해 카일의 인장까지 새긴 뒤 큰 독수리의 발에 쥐여줬다.
"내 동생 알리페르 알지? 빨리 전해줘. 불길 조심해서 다치지 말고."
내 말이 떨어지자 독수리는 날개를 펼치고 날아올랐다. 마법사가 눈치채지 못하게 높이 날렴. 내 당부를 알아들은 새는 더 높고, 높게 날아서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저, 불기둥은 어쩌죠?"
"이대로 두면 자칫하면 서대륙 전체가 화마에 휩싸일 거야."
어찌해야 하나 카일과 고민했다. 물을 대량으로 덮어 씌우면 되지 않을까?
"아마도 불꽃이 대량으로 날아다닐 거라는데?"
"응? 검은 황금이 기름이에요?"
"글쎄?"
일단 패스.
"불이 났을 때 담요를 덮어서 두드리거나 흙을 뿌리잖아요."
"실프가 커다란 공기 담요는 만들어 줄 수 있대. 불이 좋아하지 않는 공기들만 모을 수 있다는데? 그리고 놈도 가능하대. 단, 다 정령왕들로 불러야 할 것 같아."
정령왕의 소환이라... 카일은 정령들을 소환하기 위해서 생명력 대신 마나를 쓴다고 했었다. 하지만 정령왕을 둘이나 소환하기에는 부담스럽지 않을까?
"정령왕을 둘이나 소환하면 당신이 위험한 것 아니에요? 예전에 분명 마나가 고갈될 거라고 했잖아."
"그 사이 마나량도 더 늘었고, 본체를 소환하지는 않을 거야. 둘 정도면 감당 가능해."
그 사이 마법사가 다시 나타나거나 하면 어쩌지? 마음이 영 놓이지 않았다.
"처남도 왔고, 테일러도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 다른 잔당들을 추격하면서 반대쪽에서 마법사를 압박해 오기로 했으니까 곧 도착할 거야."
"..."
선뜻 답이 나오질 않았다. 불안했다. 정말 가능한 거야? 본체는 소환하지 않는다지만... 예전의 나라면 무조건 오케이하고 카일을 도울 방법을 찾았을 것이다.
하지만 한 번 카일이 사라졌다는 소식을 듣고 나자 부정적인 생각들이 앞서기 시작했다.
"어차피 방법은 하나뿐이야."
"응."
정령의 여왕이 원망스러워졌다. 철 없이 가출해가지고는. 이런 위험한 일에 휘말리게 하냐고.
내 허락이 떨어지자 카일은 바위 앞에 섰다. 그리고 평소와는 다르게 손으로 마법진을 그려내기 시작했다.
카일의 푸른 마나를 따라 그려진 그림 속에서 곧 커다란 형체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정령을 보지 못하는 내 눈에도 어렴풋이 보였다.
녹색의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아름다운 남자. 남자는 부드러운 솜털 같은 구름에 반쯤 몸이 가려져 있었다.
그리고 연이어 노란 황금빛을 찬란히 빛내는 망치를 든 건장한 남자가 나타났다.
"정령왕들, 저 불꽃을 잠재우고 이 땅을 다시 평온하게 가라앉혀줘."
"계약자여, 그대의 소원을 이루어 주지."
거대한 두 정령왕은 불기둥이 하늘까지 치솟아가는 숲의 한쪽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갑자기 불어오기 시작한 바람은 불꽃이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게 막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하늘에서부터 무수히 많은 흙들이 불기둥을 향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끝을 모르고 치솟던 불기둥들이 점차 힘을 쓰지 못하고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카일, 성공했나 봐요."
"어... 다행이다."
카일이 기운이 빠진 모습으로 내게 답했다.
"힘들어요? 잠시 나한테 기대요."
그 소리에 카일이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내게 기대왔다. 조금 쉬다 보면 끝이 나겠지?
바위에 잠시 앉아 카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쉴 때였다.
"세이, 조심해."
"쳇, 힘 좀 더 쓰지 그랬어?"
우리가 앉아 있던 바위로 다시 불덩어리가 날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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