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카일을 찾아서. (2)
2018.08.27.
사실, 잘하는 짓인지는 모르겠다. 황후는 분명 며칠간은 인장 반지를 찾느라 난리를 칠 것이다. 하지만 결국 나오지 않는다면?
그때까지 아바마마가 살아계실 수는 있을까? 나는 그분의 상태를 몰랐다. 그래서 느긋하게 앉아서 기다릴 수 없었다.
다른 이들에게는 인장 반지가 없어서 아바마마를 함부로 죽일 수 없을 거라고 했지만, 장담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그러니 최대한 카일을 빨리 찾아서 데리고 가야 해.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카일이 보고 싶었다. 간절했다. 정령의 답을 들었지만 카일이 안전한지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멍멍!"
"어? 진짜? 아, 고마워요, 살리맨더님."
정령이 날 따라왔다고 했다. 날 지켜주려는 것일까? 하긴, 이 추운 겨울에 혼자 다니기에는 춥긴 하지.
"알비, 근처에 혹시 카일의 냄새가 나지 않아?"
"멍!"
알비는 희미한 카일의 흔적을 찾았는지 꼬리를 흔들며 걷기 시작했다. 비록 겨울이긴 하지만 한낮이라는 것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울창한 침엽수림이 깊게 펼쳐져 있었다.
"무슨 냄새지?"
매캐하면서도 불쾌한, 기름 냄새 비슷 한 것이 숲을 감싸고 있었다.
"계속 맡으면 토할 것 같아. 윽. 알비는 괜찮니?"
알비도 불쾌한지 고개를 푸르르 떨었다. 내 배속의 아가에게도 좋지 않을 것 같았다.
"알비, 얼른 냄새 맡아서 카일 찾으러 가자."
지독한 냄새 속에서 카일을 찾아야 한다니 알비가 일을 제대로 할지 조금 걱정되었다. 하지만 다행히 알비는 킁킁거리며 카일의 냄새를 찾아냈다.
"알비, 혹시 카일 냄새 중에 피 냄새 같은 것은 없지?"
"멍멍."
다행히 없다고 했다. 그때처럼 다쳐서 도망친 것은 아닌가 보네. 안심이 되는 한편으로 카일이 원망스러웠다.
짙은 나무 그늘 사이로 보이는 하늘은 잿빛이었다. 곧 눈이라도 쏟아지려나? 그전에 카일을 찾아야 하는데...
금지된 숲은 예전에 내가 심심하면 가출하던 산에서 멀지 않은 듯했다. 마냥 낯설지만은 않은 식물들이 보였다.
특히 저 풀은 특정 환경에서만 자라는걸. 옛날 생각이 많이 났다. 어린, 아니 젊은 카일과 뛰어놀던 숲길과 글자 연습을 하던 계곡. 여기 진짜 많이 비슷한 것 같아. 그런데 분위기가 너무 다르네?
"알비, 저게 뭘까?"
곳곳에 검은 물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이상한 웅덩이들이 있었다. 이 머리 아픈 냄새의 원인이 저것들인 것 같았다.
코를 막고 한참을 걷다 보니 더 깊은 숲으로 들어왔다. 이곳은 다행히 이상한 웅덩이가 더 이상 없어 숨을 쉴만했다. 그런데 갑자기 알비케라가 잔뜩 털을 세우고 경계하기 시작했다.
"으르르르!"
"알비?"
카일이 아닌 존재가 있는 듯했다. 누구지? 잔뜩 긴장한 상태로 서 있는데 작은 불덩이가 날라왔다.
"꺄악!"
눈을 감지도 못하고 부릅뜨는 순간, 불덩어리가 산산이 흩어졌다. 아, 살리맨더의 도움인가?
불덩어리가 날아온 쪽에서 욕지거리가 들리며 검은 로브를 쓴 인영이 나타났다. 그때 그 흑마법사였다.
이런, 하필 최악의 선택지가 왜 여기서 나와?
"살리맨더님! 저자가 자연의 섭리를 저버리는 키메라를 만든 놈이에요. 천벌을!"
"멍멍."
아, 뭐야, 저놈이 얼마나 대단하길래 상급 정령이나 정령왕이 와야 한다는 건데? 따라온 정령은 하급인 거야?
"황태자비? 잘 됐군. 너를 인질로 삼아야겠어."
아니, 나라는 것을 알지도 못하면서 무작정 불덩이부터 쐈던 거야? 미친 자식! 일단 뛰자!
달려가는 내 뒤로 몇몇 마법이 펼쳐졌다. 그리고 살리맨더가 그것을 막아주는지 내 주변에서 흩어졌다. 이런, 아가야, 엄마가 조금만 더 뛰어야 할 것 같은데 참아주렴.
한참을 뛰다 보니 어느새 금지된 숲의 깊은 곳으로 들어가게 된 모양이었다. 아까의 웅덩이들은 보이지 않았지만 분위기가 달라져 있었다.
그때 또 마법사의 외침이 들렸다.
"호오, 검은 안개라, 그것들을 소환하기 딱 좋군."
그러고 보니 어느새 검은 안개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저자가 소환하려는 것은 뭐지? 아니, 저놈은 검은 안개가 보이는 거야??
그때 그가 손으로 허공에 그린 마법진에서 괴상한 생명체가 나오는 것을 목격했다. 아마도 머리는 독사인 것 같고, 몸은 닭인가?
그 생명체는 나를 향해 괴로움을 호소했다. 저 나쁜 놈이 억지로 이어 붙인 키메라가 틀림없었다. 곧, 검은 안개가 몰려들어 그 아이를 감싸 안았다.
"안 돼!"
내가 대지의 힘을 끌어다가 안개를 분해하기 시작했다. 나는 키메라에게 접근하는 검은 안개를 분해하고 바로 죄 없는 생명들도 서로로부터 온전히 분리시켰다.
그 광경을 공격도 하지 않고 말없이 지켜보던 흑마법사였다. 그리고 내게 소름 끼치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기괴한 자세로 갸웃했다.
귀신도 아니고! 뭐야! 가운데로 돌아온 머리를 내게 향한 마법사는 끼긱 거리는 목소리로 내게 말을 걸어왔다.
"네가, 정령의 여왕이구나?"
"뭔, 헛소리야? 나는 정령의 딸이거든!"
"딸? 후훗, 아무래도 좋아, 너는 내가 접수하겠다."
"뭐래? 이 변태가!"
나는 카일한테만 접수 당할 거야! 내 도움을 받아 원래의 모습을 찾은 독사가 마법사에게 위협적으로 하악 거렸고, 닭은 날아올라 마법사의 시야를 가리면서 발톱으로 공격을 해댔다.
이 틈이야!
나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임산부가 이렇게 뛰어도 되나 모르겠다. 하지만 머뭇거리다가 죽는 것보단 낫겠지. 아가야, 좀 흔들거려서 불편해도 참으렴.
"부탁해!"
식물들은 내 앞길은 열어주고 뒤는 막아주었다. 혹시나 내가 넘어질까 뿌리도 치워주었다. 그래서 도망가는 것이 조금 수월했다. 살리맨더도 뒤에서 열심히 마법을 막아줬다.
"헉, 헉..."
열심히 달리다 보니 마법사를 어느 정도 따돌린 모양이었다. 그리고 내 눈앞에 나무와 덩굴이 무성해 눈에 뜨이지 않는 동굴이 나타났다. 나는 그곳으로 뛰어들면서 식물들로 입구를 가렸다.
"흡!"
누구야? 갑자기 내 입을 틀어막는 사람이 있었다. 깜짝 놀란 것도 잠시, 낯익은 사람의 냄새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일 만나고 싶었던 사람, 내 눈물이 먼저 반응했다.
"카일!"
"쉿!"
후두둑 떨어지는 눈물을 닦아주며 날 꼭 끌어안아주는 카일이었다. 나는 흐느낌을 삭이며 카일의 품에 안겼다. 밖에 흑마법사가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기에 소리 내며 울 수 없었다.
카일은 말없이 꼭 끌어 안은 채 등을 토닥여 주었다.
한참 시간이 흐른 뒤, 카일이 내 양볼을 잡고 내 눈을 들여다보았다. 입구를 가린 식물들의 잎 사이로 들어오는 작은 빛에 반사된 카일의 눈이 놀람과 반가움에 뒤섞여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네가 이 위험한 곳까지 어떻게 온 거야?"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이 바보!
"카일, 아바마마가, 황후에게 당해서 쓰러졌어요."
"뭐?"
"게다가 콘스탄트 공작의 사병이 성 밖에서 황성을 봉쇄하고 있어요."
"예상은 했지만 내가 마법사를 쫓는 사이에 기어이 그들이 일을 저질렀군."
"다행히 인장 반지를 내게 미리 내어주셔서 그들이 군대를 장악하진 못했어요. 얼른 돌아가서 아바마마를 구해요."
카일의 얼굴에는 분노가 일었다. 거기에 내가 황후의 속셈을 예상한 것을 알려주자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몬테 공작도 결국 파멸의 길을 걷겠다는 거군?"
"그런 것 같아요. 어쩌면, 내 정체를 말했는지도 모르죠."
유리온실에서 다른 기사들과 달리 우리를 죽이려던 병사들에 대해 말했다. 나더러 가짜라고 했지. 분명 그것은 몬테 공작의 소행임이 틀림없었다.
"그런데, 당신은 왜 여깄는 거예요? 프리케가 제국군을 공격했다는 말은 뭐였구요? 루피넬리아의 왕도 소드마스터라던데 당신이 여기 있어도 되는 거예요?"
내가 다다다 묻자 카일은 그저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에 골이 났다. 내가 얼마나 놀랐는데 뭐야?
"미안해, 적을 속이려면 아군도 속여야 했거든. 그리고 황후파를 움직이게 할 계기도 줘야 했고."
"네?"
"프리케를 돕기로 한 북부 왕국의 지원군이 누군지 알지?"
"네, 왕국의 1왕녀와 그의 남편인 재상요?"
그들이 프리케의 왕국 입국을 도왔다고 했다. 그리고 국경에 있던 왕국군의 진지로 잠입해, 왕국의 새로운 폭군을 암살했다고.
"그들이 치밀하게 준비를 잘해서 쉽게 끝났어. 문제는 황후와 결탁한 무리들이었어."
그들은 아직 북부 왕국의 왕이 바뀐 것을 모르고 마탑을 습격하고 마법사를 탈취했다고 했다. 카일은 이들을 소탕하기 위해 프리케와 짜고 연기를 했단다.
북부 왕국의 왕이 소드마스터라서 입었다는 비스 기사단의 극심한 피해도 다 조작된 소문이었다고 했다. 물론 현재의 왕이 소드마스터인 것은 맞았다. 이전 왕도 근접은 했단다.
"당신... 나한테 좀 맞아요!! 그렇게 중요한 것을 숨기고!! 실종됐다 그래서 얼마나 놀랬는데!! 나쁜 사람!!"
"미, 미안. 다, 루카스가 짠 작전이라, 하지만 전령을 보냈는데, 콘스탄트 공작의 사병 때문에 황궁으로 가는 것을 포기했나 보네."
그 보좌관!! 연락을 미리미리 잘했어야지!!
"그런데 세이는 어떻게 여기 온 거야? 나 보고 싶어서 날아왔을 리도 없고! 살리맨더는 왜 따라붙은 거야?"
나는 인장 반지를 정령계에 숨긴 것과 정령들의 도움을 받아 이곳에 왔음을 밝혔다.
"여기가 금지된 숲이라고? 그럴 리가, 어, 세이, 여기 기억나지 않아?"
"응?"
아, 여기는... 나와 케이, 그러니까 다친 카일과 내가 처음 만난 동굴이었다. 주변이 내가 가출하던 곳과 비슷한 식생이라고는 생각했는데...
이곳은 워낙 신기한 풀들이 많이 자라서, 그래서 카일의 깊은 상처도 치료해 줄 수 있었다. 그래, 그랬어.
"알아보겠어?"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카일이 내 손을 잡고 동굴 안쪽으로 날 끌고 갔다. 카일은 살리맨더의 도움으로 작은 빛을 만들어 냈다. 그 빛이 가리키는 곳에는 서툰 글씨로 새겨진 글자가 있었다.
글을 배운지 얼마 되지 않았던 내가 카일의 단도로 반복해서 긁어 쓴 우리의 이름이었다. 이게 아직 있었구나. 꼭, 같이 보러 오고 싶었는데.
아가야, 신기하지? 엄마랑 아빠는 여기서 처음 만났고 사랑에 빠졌었어.
내가 그 글자들을 쓰다듬자 카일이 내 손을 덮고 잡아왔다.
"우리의 시작이 깃든 추억의 장소지."
"같이 오자고 했었는데 진짜 왔네요."
카일이 고개를 숙여 내게 키스를 해왔다. 오랜만에 느끼는 카일의 향기, 카일의 온기, 카일만의 속삭임이 나를 간질였다. 혹시나 하고 마음 졸이던 심장이 느슨해질 만큼 따스하고 달콤한 키스.
"아얏!"
어릴 때는 그렇게 넓게 느껴졌던 동굴이 어찌나 좁아졌는지 결국 머리를 동굴 벽에 부딪혔다. 절대, 오랜만의 키스라 격해진 탓은 절대 아니었다. 진짜, 아니야!
"이런, 괜찮아? 좀 더 로맨틱하고 편한 상황에 왔으면 좋았을 텐데..."
"그래도 왔잖아요. 그것도 둘이 함께."
아니, 내 배속의 아이까지 셋이서. 이제 말해줘야지. 카일이 좋아하겠지? 혼나려나?
"멍멍!"
"알비 왜? 응? 무슨 냄새지?"
"타는 냄새야, 세이 그 자식이 널 잡으려고 몰이를 시작하려나 본데?"
나쁜 놈!! 죄 없는 생물들을 막 합성해서 순리를 어기게 하는 것으로 모자라서 아예 숲을 태우고 파괴하려나는 거야!?
"어쩌죠?"
"일단, 이 동굴에서 나가서 그놈을 이번에야말로 잡아 죽여야지. 마탑주 말로는 증언은 충분히 받아 놨대."
저놈은 기억 못하겠지만 진실의 묘약을 개발한 마탑주에 의해 줄줄이 토해 냈단다. 그러니 이번에야말로 마음 껏 죽이겠다고 다짐하는 카일이었다.
"여기 있다간 통구이 되기 십상이니 나가자."
"응."
동굴 입구로 가자 숲의 한쪽이 불타오르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머리 쪽에서 기분 나쁜 소리가 들렸다.
"거기 있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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