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황후의 속셈. (2)
2018.08.25.
황후가 웃음소리를 남기고 떠난 뒤 나는 잠시 우두커니 서있었다.
직감이 말했다. 카일에게 좋지 않은 일이 생길 것이라고... 어떻게 해야 하지? 아바마마께 알려야 하나?
"비, 비 전하. 괜, 찮으십니까?"
호위들의 눈에는 내가 충격 받아서 가만히 있는 것으로 보였나 보았다. 그리고 겁이 나겠지.
"황태자께서 계셨다면 여러분은 어찌 되었을 것 같나요?"
"죄송합니다."
"잘못한 것은 아나 보군요."
"..."
사실 이해는 됐다. 상대가 황후였으니까 쉽게 나서긴 힘들었겠지. 하지만 정말로 황후가 나나 내 태아의 목숨을 노린 것이었다면?
이들의 망설임 때문에 많은 것을 잃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대들의 주인은 누구죠? 황후 폐하이신가요?"
"황태자 전하이십니다."
카일이 두고 간 황태자 근위대라면 어떤 상황이 오든 나를 지켜야 한다. 그 사실을 이들이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전하가 돌아왔을 때, 내가 그대들을 믿을 수 있었노라고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그대들의 노력에 따라 오늘 일은 전하의 귀에 들어가지 않을 거라는 것을 잊지 말도록."
그날 밤, 내 침실로 돌아온 나는 배가 살짝 당기는 것을 느꼈다.
"아가야, 괜찮아. 우린 분명 무사할 거야. 네 아버지도, 네 할아버지도, 엄마랑 너를 위해 최선을 다할 테니까."
따뜻한 양가죽 주머니를 껴안고 있는데, 카일의 살리맨더가 너무 그리운 밤이었다.
"정령들은 너무해, 내가 부르면 나타나지도 않고!!"
"끼잉."
"알비, 이리 와. 우리 오랜만에 같이 자네."
카일이 있는 동안에는 악몽을 거의 꾸지 않았었다. 이제는 어지간한 어릴 때의 나쁜 기억은 사라졌기에 악몽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런데 오늘은 너무 불안했다. 카일도 없으니까, 알비가 다시 악몽을 막아줬으면 좋겠어. 부탁할게.
알비케라의 온기가 내게 전해졌다. 오늘 밤도 악몽은 없을 것 같았다. 아니, 진짜 악몽은 며칠 뒤 펼쳐지기 시작했다.
"카일은 지금 즈음 국경에 도착했겠지?"
밖에는 올해 들어 가장 많은 눈이 내렸다. 황궁이 있는 이곳에 발목이 잠길 만큼 눈이 왔으니, 더 북쪽 국경지대는 얼마나 많이 왔을까?
태양궁에서 있었던 일을 들은 뒤로 알리페르는 거의 내 곁에 붙어있었다. 가문의 집사가 만월궁으로 출퇴근하며 소식을 전하고 내 동생은 퇴궁하지 않았다.
"그렇겠지요?"
"아버지는 별 탈 없으시다지?"
"네..."
알리페르의 대답이 느렸다. 게다가 나와 시선을 잘 맞추지 못했다.
"펠, 너 나한테 숨기는 거 있지?"
움찔하잖아. 무슨 일이지? 아버지께 무슨 일이 생긴 거야?
"그게, 루피넬리아의 새 왕이 소드마스터였답니다."
"뭐?"
"이제 막 진입한 단계라 전하나 프리케에 미치지 못하는 실력이지만, 비스 기사단은 고전 중이라더군요."
"많이들 다친 거야?"
"피해가 적지는 않답니다..."
문제는 더 큰 곳에서 터졌다. 마탑에서 연락이 왔는데, 그저께 마탑이 정체불명의 기사들의 습격을 받았다고 했다. 그리고 그 기사들을 신경 쓰는 사이 문제의 흑마법사가 도주를 했다고...
다행히 그가 했던 증언들을 담아둔 마도구들의 탈취는 막았다고 했다. 흑마법사가 이를 노리고 습격할 때를 대비해 마탑은 장기간 폐쇄에 들어간다고 했다.
"예감이 좋지 않아."
마법사가 살아있는 것을 눈치채고 빼돌린 것은 황후 쪽일까, 북부 왕국 쪽일까?
"누님 대비를 하셔야겠습니다."
"카일이 준비한 대비책들을 써야겠어. 다들 비상사태라고 생각하고 언제나 긴장 상태로 있어줘."
"네, 걱정 마세요."
모일라와 에이린도 잔뜩 어깨에 힘이 들어간 상태로 대답했다. 마음이 무거웠다. 그렇다고 같이 긴장하고 가라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다들, 내 남편을 믿어. 그가 일러둔 대비책들은 다 쓸만하다고!"
억지로라도 웃으면서 강한척하려고 했다. 나도 무섭고 두려웠지만 내 아랫사람들이 그런 나를 보게 하면 안 되잖아?
실수를 했던 기사들도 더 철저하고 안전하게 나를 지키려 노력했다.
하지만 곧이어 연달아 전해진 소식은 나를 무너트리기에 충분했다.
"비 전하, 큰일 났어요. 방금 태양궁의 시녀가 황제 폐하께 보고된 이야기를 듣고 알려줬는데... 이를 어째."
"무슨 일인데?"
"그... 프리케가 북부 왕국의 군대의 편에 서서 전하의 군대를 공격했대요."
"뭐? 프리케가? 말도 안 돼!"
오해가 있겠지. 프리케는 절대 나를, 우리를 배신할 사람이 아니야. 그리고 북부 왕국을 구하고 전쟁을 막기 위해 갔는 걸?
"게다가..."
"게다가 뭐?"
"전하가, 전하가 실종되셨대요."
나는 아득히 멀어지는 정신을 붙잡을 수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뒤로 쓰러지는 나를 누군가가 받쳐주는 느낌이 들었다는 것이다.
아가야, 어쩌지? 네 아빠 무사한 거겠지?
내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내 방 침실이었다. 시간이 많이 흘렀는지 마법등이 켜져 있었다.
그리고 침대 옆에는 아바마마와 황궁의만이 곁을 지키고 있었다.
"아가, 괜찮으냐?"
"아바마마, 카일은요? 카일 소식은 없어요?"
"괜찮을 거다. 더 약했을 때도, 더 위험한 상황에서도 살아남은 녀석이지 않느냐."
눈물이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보내지 말걸, 아니 따라갈 걸 그랬어. 그때는 내가 구해줬지만 이번에는 곁에 내가 없잖아.
그래, 내가 또 구해야 해. 어딘가 또 다친 거라면, 가서 치료해주고 안아주고, 일으켜 줘야 해. 내가 지켜줄 거야.
"어딜 가려고?"
"제가 가야 해요. 어딘가에 카일이 또 상처 입고 쓰러져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가서, 가서 구해줘야 해요."
침대에서 일어나려는 나를 아바마마는 붙잡으셨다.
"아가."
"윽."
배가 갑자기 많이 당겼다. 내가 배를 잡고 몸을 웅크리자 황궁의가 급히 달려왔다.
"비 전하, 고정하십시오. 아직 초기라 이렇게 무리하시면 황손께서 놀라십니다. 황손을 위해서라도 마음 편히 먹으셔야 해요."
황궁의의 말에 일어나려것을 멈추었다. 그리고 뚝뚝, 또 다시 눈물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카일의 생사를 모르는데 황손이 다 무슨 소용이야. 카일이 없으면 다 싫어.
"아가, 네가 이러고 있으면 카일룸 녀석이 걱정할 거란다. 돌아왔을 때 너나 네 아기가 잘못되면 얼마나 자책하겠느냐? 그러니 억지로라도 기운 내거라."
아바마마는 내가 저녁과 약을 다 먹을 때까지 곁에 있어 주셨다. 그리고 계속 좋은 이야기, 위로가 될만한 이야기를 해주셨다.
폐하가 돌아 간 뒤, 나는 불 꺼진 침실에 홀로 남아 생각했다.
카일은 분명히 내게 봄이 되기 전에 돌아온다고 약속했어. 내 남편은 약속을 지키는 사람인걸? 절대로 나쁜 일이 생긴 것이 아닐 거야.
밤새 혼자서 끙끙 앓느라 잠을 거의 자질 못했다. 알비케라가 옆에서 계속 내게 온기를 전해주고 핥아주는데도 도저히 잠이 오질 않았다.
그나마 아바마마가 황궁에 계셔서 다행이었다. 전쟁통에 아버지도, 카일도 없는 이 상황이 불안하기 그지없었는데 그 분이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카일이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생각해둔 계책들도 대부분 아바마마를 중심으로 한 것이었다.
그런데...
"뭐라고? 아바마마가 쓰러지셨어?"
"네, 폐하께서 오늘 아침에 쓰러지셨대요."
어제까지만 해도 잔기침은 했었지만 건강하셨다. 최근에도 자주 기운은 모자랐지만, 황손이 태어날 때까지 건강을 유지하실 거라고 다짐하던 폐하셨다.
내가 쓰러진 가운데서도 한참이나 날 지켜주고 간호해 주신 것이 아바마마였다.
"어째서지?"
"아직 잘 모르겠어요."
예감이 좋지 않았다. 일단 태양궁으로 가긴 해야 할 것 같았는데, 영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태양궁으로 달려가지 않고 만월궁의 주요 인물들을 불러 모았다.
"다들 내 말을 잘 들어."
나는 만월궁의 내 측근들과 기사들을 불러 놓고 여러 가지 가능성에 대해 지시를 내렸다.
"서, 설마요."
"비 전하의 말에 일리가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대비해야 해요."
겁먹은 에이린과 달리 모일라는 침착했다. 아무래도 황후 때문에 산전수전 다 겪어서겠지? 모일라의 반응이 내게 힘을 줬다.
그리고 나는 꼭 모두에게 해야 할 말이 있었다.
"분명히 말하는데, 나는 나로 인해 누군가가 무의미한 희생을 하는 것은 싫어."
"비 전하!! 저희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비 전하를 위해 목숨을 바칠..."
"싫다구요. 나는 누구도 죽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얼마 전 황후와의 트러블에서 실수를 했던 기사들이 맹세하려는 것을 끊어냈다. 실수를 했던 이들이라서 더 내게 책임감을 느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상황이 예상한 대로 흘러가면 좋겠지만, 언제든 그대들이 불리해지면 도망쳐요. 그때의 명과 달라서 의아하겠지만, 지금은 그때와 상황이 다르니까. 도망칠 상황이 되질 않으면 투항한 척해서 목숨을 구해요. 나중에 우리 쪽이 유리해졌을 때 다시 그들의 뒤통수 치는 것도 환영이니까."
"비 전하!"
"나중에 일이 해결되고 나서 카일에게 이르지 않을 거니까 염려 말아요. 그러니 다들 살아서 만나는 것으로 하죠?"
고개 숙인 기사들의 흐느낌이 느껴졌다.
만약에, 만약에 카일에게 정말 최악의 상황이 벌어진 것이라면, 그래서 황후가 드디어 일을 벌인 것이라면 나는 카일의 뒤를 따르고 싶었다. 하지만 빛도 보지 못한 내 아이를 위해 그럴 수 없겠지.
"비 전하, 황제 폐하께서는 독에 당해 쓰러지셨답니다. 그리고 황후 폐하가, 그 시해범으로 비 전하를 지목했다고 합니다."
새로운 소식이 전해졌다. 어느 정도는 예상했다. 그리고 진짜 독살범은 황후겠지. 하지만 아직은 아바마마를 죽이지 못할 거야.
"생각보다 빠르게 움직이는데?"
"누님, 비공식적인 정보에 의하면 콘스탄트 공작의 사병들이 황성을 봉쇄하고 모든 이들의 출입을 막고 있다고 합니다."
"영지에서 두문불출하며 한 일이 사병을 몰래 키우는 일이었나?"
"매형께서 그 정보를 놓쳤나 봅니다."
아니, 카일이 놓쳤을 리가 없어. 어쩌면, 어쩌면...
"혹시 황후가 내가 아바마마를 시해한 원인을 말하진 않았어?"
"폐하께서 콘스탄트 공녀를 살려준 것에 대한 앙심이랍니다. 전하께서 돌아오기 전에 공녀와 공녀의 배속에 들어있는 황손을 죽이려는데 폐하가 걸림돌이라고요."
"볼라드 공작과 몬테 공작은 콘스탄트 공녀가 황손이 아닌 것을 아는데?"
"그... 외숙이... 황후파와 결탁한 듯합니다."
아아, 알만 했다. 폐하가 쓰러지신 이유도 알 것 같았다. 황후의 진짜 속셈도 이제 윤곽이 만져지는 듯했다.
"이대로면 정말 카일이 위험해."
나와 카일, 아바마마가 죽으면 유일한 후계자로 콘스탄트 공녀의 아이를 내세울 참인가 보았다. 몬테 공작을 제3의 증인으로 내세우겠지. 철천지원수가 편을 들어주면 다들 믿을 수밖에...
내 설명에 내 측근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 소리는 곧 나에 대한 암살 시도로 이어지는 것이니까. 시해범으로 몰고 죽인 뒤 자살로 위장하거나 하겠지.
"다들 잘 들어. 황후가 보낸 병사들이 오기 전에 우리는 황성 밖으로 빠져나갈 거야. 많은 이들을 데리고 갈 수는 없어."
"하지만 황성의 성문에는 콘스탄트 공작이 지키고 있습니다. 위험합니다."
"그, 그래요. 펠만으로는 그 병사들을 어찌 이겨요?"
"게다가 이미 삼엄한 상황이라 황궁, 아니 만월궁을 벗어나기도 힘들 겁니다."
펠과 에이린이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나도 그들이 그러는 이유를 이해했다. 하지만 그들이 모르는 것이 있었다.
"비밀통로를 이용할 거야."
"하지만! 황후가 알고 추적할 겁니다."
"아니, 황후는 황태자비인 적이 없었거든."
"아... 그러나 황궁을 벗어난다고 해서 끝이 아닙니다. 비밀통로가 황성 바깥까지 이어진 것이 아니라면 지금 상황에서는 그곳에서 시간을 때울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황성 밖으로 이어지는 장거리 비밀통로는 없지."
"누님! 그렇다면 차라리 만월궁을 걸어 잠그고 투쟁하는 편이 좋습니다."
알리페르는 끝까지 저항했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주 안전하게, 심지어 카일과 가까운 곳으로 보내 줄 수 있는 비밀 장소가 있어."
"네?"
내가 계획한 바를 이야기하자 알리페르의 얼굴에 빛이 비치었다. 좋은 생각 맞지?
"좋습니다. 그럼 당장 준비하죠. 건식이 주방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카일이 비밀통로에 미리 주기적으로 가져다 놔서 충분할 거야."
그래, 이렇게 철저한 내 남편이 호락호락 당할 리가 없어. 나도 내 몸을 잘 간수해서 지켜야 해. 거기라면 아무나 들어올 수 없어. 안전할 거야.
나, 모일라, 에이린, 그리고 펠은 나머지 사람들에게 근위대가 오면 투항하라는 말을 남기고 카일의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곧, 만월궁에는 말발굽이 일으키는 먼지로 둘러싸였다. 부지런히 3층으로 뛰어 올라오는 기사들의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만월궁의 곳곳이 헤집어지는 소리와 가녀린 하녀, 시녀들의 비명소리가 우리가 있는 곳으로 전달되었다.
그리고, 드디어...
"여기가 마지막이다. 뒤져라!!"
하지만 그 곳에도 우리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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