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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비의 대역으로 살아남기-115화 (115/126)

115화. 간절한 기도.

2018.08.21.

그날 밤, 카일은 밤샘 회의로 새벽녘이 되어서야 침실로 돌아 왔다.

"우웅, 카일?"

"더 자. 아직 해가 뜨려면 멀었어."

내 이마에 가볍게 키스해 주는 카일의 입술은 차가웠다. 하지만 그 차가운 입술은 놀랍도록 내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 주었고, 나는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오늘은 이야기 해줘야 하는데, 당신이 곧 우리 아이의 아버지가 된다고...

아침이 되어 눈을 떴지만 카일은 이미 침대에서 빠져나간 이후였다.

"비 전하. 프리케 경이 뵙길 청합니다."

프리케. 아직 떠나지 않았구나. 그럼 인사를 하러 온 것이겠지?

가벼운 준비를 끝내고 프리케를 맞이하러 나갔다. 응접실에는 프리케와 유리아가 나란히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밤하늘을 비추는 작은 별, 황태자비 전하께 루피넬리아의 왕자, 프리케가 인사드립니다."

친구가 아닌 왕자로서 하는 인사. 진짜 떠나는구나. 오늘이 마지막이야.

"일어나세요."

나도 프리케를 타국의 왕자로 대우했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5년 넘는 세월을 나를 지켜주며 시간을 낭비한 내 친구였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를 전 후작부인의 손에서 지켜낸 은인이었다.

그런 프리케가 또 자신이 아닌, 자신을 버린 나라의 백성들을 지키기 위해 떠나려 했다.

내 존댓말에 프리케가 슬쩍 웃었다.

"저, 이제 갑니다. 최근에는 호위도 제대로 못해드렸네요."

"괜찮아요. 그대가 아니어도 날 지키는 이는 많으니까, 부디 내 걱정은 말고 곁에 있는 이를 꼭 지켜줘요."

내 말에 프리케는 유리아를 돌아봤다. 그녀를 향하는 깊은 눈매를 보아하니, 서로 이제 많이 아끼는 듯했다.

도대체 나 몰래 언제 저렇게 가까워진 거야?

"당분간은 고생시킬 것 같지만, 잘 지키고 행복하게 해주겠습니다."

"유리아, 준비는 잘 끝났지?"

솜옷도 넉넉히 준비했다. 북부 왕국은 우리보다 겨울이 더 혹독하다 했다.

"네, 비 전하가 신경 많이 써주셨잖아요."

"아프지 말라고 약도 넉넉히 챙겼지?"

"물론이죠."

"여비는?"

"넘치게 주셨잖아요."

"또 필요한 것 없어?"

내가 계속 더 챙겨주려고 하자 연인들은 웃었다. 그리고 이미 넘치도록 받았다면서 극구 사양했다.

"다음에 만날 때는... 너희가 왕과 왕비가 되어 있어야 해."

"꼭, 황후 폐하가 된 비 전하를 찾아뵙겠습니다."

내가 그들을 모두 안아주고 난 뒤 그들은 손을 잡고 응접실 문을 나섰다. 창밖을 내다보자 두 마리의 말위에 나란히 앉은 두 남녀는 어깨를 나란히 하고 출발했다.

같은 속도로 달려나가는 두 사람의 앞 날에 부디 대지와 하늘이 축복을 내려주길.

"알리페르, 아버지는 잘 떠나셨어?"

"어젯밤에 짐을 꾸려 출발하셨습니다."

"혹시 어머니는 어쩌고 계신지 알아?"

"아버지께서 혹시나 몬테 공작이 위협하실까 봐 당부하셨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안전가옥에서 머무르고 계십니다."

"그래... 지금 상황이 나쁘진 않지?"

"그럼요. 왕국의 오합지졸에게 당할 비스 기사단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초조했다. 계속 어제의 황후와 콘스탄트 공작의 얼굴이 잊히지 않았다. 역시, 북부 왕국과 내통하던 제국의 첩자는 황후와 콘스탄트 공작이었다.

"황후파 반역자들의 자백은 다 받아냈을까?"

그것이 있다면 당장 황후와 공작을 가둘 수 있을 텐데... 공녀의 문제도 일단 미뤄졌다. 아바마마가 감시하라는 대로 황궁의들이 일을 하고 있었다.

귀족들에게는 카일의 아이가 아닐 가능성이 거의 확실하나 만약을 대비하여 확인하는 차원이라고만 알렸다.

"일이 꼬이는 느낌이야. 한꺼번에 쳐낼 수 있는 기회를 놓쳤어."

어제 콘스탄트 공녀의 죄를 못 박았어야 했다. 그러면 두 번이나 나와 카일을 음해한 황후도 쳐내고, 카일에게 집착하던 마음이 병든 여자도 해결할 수 있었다.

황후가 황궁에서 내쳐진 것을 알면, 황후파도 자신들의 뒷배가 사라졌음을 알고 결국 아주버님을 시해한 일과 그림자 군과의 결탁도 자백했을 텐데...

"다 괜찮을 겁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응."

게다가 카일에게 우리의 아이가 생겼다는 말을 아직도 하지 못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에 할걸 그랬어. 겨우 며칠이었는데, 그 시간이 너무 아쉬웠다.

"카일이 전쟁터에 나갈 수도 있을까?"

"글쎄요. 전세가 불리해지면 가시겠죠?"

마음이 착잡했다. 아버지도 걱정되고, 프리케와 유리아의 미래도 걱정이 되었다.

황궁의가 임산부들은 마음이 많이 불안하고 초조할 것이랬다. 그래서인지 계속 초조하고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평소처럼 일상생활을 하려 노력 하는데도 잘 되지 않았다.

"입맛이 없으십니까?"

입덧이 시작되어 도통 음식을 삼키지 못하는 나를 알리페르가 염려스럽게 바라봤다. 다행히 헛구역질은 아직 심하게 하지 않지만 속이 좋지 않았다.

"응. 마음이 편치 않아서 그런 가 봐."

알리페르는 정성스레 요즘 내가 잘 먹는 것들로 다시 식사를 차리도록 지시했다.

"매형이 아시면 걱정합니다. 많이 드셔야죠."

"응."

하루 종일 카일을 보지 못했다. 보고 싶어라. 내가 혹시 사랑이 식은 것은 아닐까 걱정하던 카일이었는데, 얼른 내 선물 확인 시켜주고 싶은데...

그 이후로도 사흘 동안 계속해서 카일은 밤샘 회의를 이어갔고, 나는 카일이 언제, 얼마나 쉬다 갔는지 알 수 없는 상황이 이어졌다.

그리고 하늘은 세상이 난리 난 것을 모르는지 하얀 눈을 연신 뿌려대기 시작했다.

"지겨워. 밖에 산책도 못하고."

사실 나가도 됐지만, 눈에 미끌어질까 봐 못 나가고 있었다. 대신 드디어 카일의 손수건을 실패에 실패를 거듭한 뒤 만들어 냈다.

"에이린, 봐줄 만하지 않아?"

"많은 비단의 희생이 있었잖아요. 이 정도면 괜찮네요."

"헤헷. 카일이 좋아하겠지?"

"비 전하가 만든 거면 거적때기라도 좋아할 거예요."

그건 그래. 그래도 이제 바느질 솜씨가 늘었으니, 음... 우리 아가의 배내옷에 도전해 볼까?

"에이린. 아가들 옷은 어떻게 만드는지 알아?"

참, 아직 말을 안 했구나. 에이린이 나를 동정어린 눈빛으로 봤다. 카일에게만 먼저 이야기 하려고 했는데, 말해야 할까?

"저기..."

"하긴, 비 전하의 솜씨라면 미리미리 준비해야죠. 언제 완성할지도 모르는데, 미리 준비하는 것은 좋은 선택이에요."

하하하. 내가 요즘 네 덕분에 웃는다. 쳇.

만든 손수건은 정성스럽게 접어서 침대 옆 협탁에 올려두었다. 그리고 침대에 앉아서 카일은 언제 오나, 하염없이 기다렸다.

눈은 밤에도 멈추지 않고 포슬포슬 떨어져 내렸다.

"카일이랑 산책하고 싶다."

"나 불렀어?"

"카일!"

방문이 열리며 카일의 푸른 머리카락이 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슬리퍼도 신지 않고 그대로 뛰어갔다.

내가 떨어지지 않도록 빠른 속도로 침대로 달려온 카일은 나를 안전하게 안아들었다.

"그러다 떨어지면 다쳐."

"당신이 날 언제나 지켜줄 거잖아. 믿으니까 뛴 거예요. 너무 보고 싶었단 말이야."

"겨우 3일이었는데, 그렇게 내가 보고 싶었어?"

날 침대에 앉힌 카일은 내 허리를 단단히 부여잡고 위에서 내려다봤다. 살짝 휘어진 눈을 보니, 내가 이렇게 매달린 것이 무척 기분 좋았나 보았다.

"치사하게 혼자 내 얼굴 보고 가니까 그러지. 나빠."

"그래서 왔잖아. 또 곧 가야 하지만."

그 말을 하는 카일의 표정이 밝지 않았다. 문제가 있는 걸까?

"혹시... 당신이 전쟁터로 가야 하는 거예요?"

카일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카일의 말에 눈물이 터지고 말았다.

전쟁에는 기사들 외에도 많은 백성들이 참전해야 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심지어 아버지도 가셨는걸.

카일이 가면, 쉽게 전쟁을 마무리 지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내가 울면 안 되는데, 다른 백성들이 고통받지 않게 카일을 보내줘야 하는데...

그게 머리로 이해한 것과는 다르게 계속 눈물이 터지고 말았다. 그저 울음만 나왔다.

"울지 마, 세이. 네가 이렇게 울면, 내가 발걸음이 안 떨어지잖아."

우느라 대답을 못하는 나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카일은 정성스럽게 닦아주었다. 그리고 부어버린 내 눈 위에 살포시 입을 대어 주었다.

"세이, 나 믿지? 금방 끝내버리고 올게. 그래야 장인의 영지에 피해도 줄고, 프리케의 일에도 도움이 될 거야."

"으응. 믿어요. 믿는데, 무섭고 걱정돼."

"나는 내 여신이 기다리는 황궁에 오고 싶어서라도 빠른 속도로 다 해치울 거야. 걱정 마."

"언제 가는데요?"

"내일 아침."

그렇게나 빨리? 아이가 생긴 것을 카일에게 말해야 할까? 그러면 더 빨리 돌아오겠지?

"북부 왕국에 예상 밖의 실력자가 있는지 비스 기사단이 고전 중이래. 내가 가서 다 휩쓸고 올게."

내 고민스러운 얼굴에 카일은 전쟁 상황을 대충 알려주었다. 비스 기사단은 제국에서도 손꼽히는 군대였다. 그럼에도 고전하다니, 아버지는 무사하신 걸까?

"지금은 비스 기사단이 잘 막고 있지만, 장기전이 되면 백성들이 고통받으니까 내가 가는 거야. 그러니까 너무 걱정 마, 알지? 단지, 황후랑 콘스탄트 공작의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아서 널 두고 가는 게 너무 걱정이야."

"그렇지 않아도 그날, 전쟁 소식이 전해졌을 때 그들이 기뻐하는 게 티가 났어요."

내 말을 들은 카일은 걱정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아바마마가 계셔서 걱정이 덜하긴 하지만 방심하면 안 돼. 몬테 공작도 대놓고 황후파로 돌아서진 않았지만 꿍꿍이가 있는 것 같아."

"그들의 입장에서는 공녀의 회임 사건도 성공하지 못했으니까, 이번 일로 반전을 일으키려 하겠죠?"

카일의 얼굴에 근심이 어린 주름이 잡히기 시작했다. 내가, 임신했다는 것을 알면 카일은 쉽게 떠나지 못할 것이었다. 하지만 카일의 말대로 장기전이 되는 것을 막으려면 카일을 얼른 보내주는 것이 맞겠지?

"내가 아바마마를 도와서 제국을 잘 지키고 있을 게요. 염려 마요. 이래 봬도 능력 있는 황태자비잖아."

내가 웃어주자 카일이 날 꽉 안았다.

"응. 미안, 잠시 널 두고 가서."

"대신, 털끝도 다치지 말고 돌아와요. 내가 준다던 선물, 그때까지 잘 간직하고 기다릴 테니까."

"응? 내가 생각한 선물이 아니었나 봐. 일단 알았어. 돌아오면 줘야 한다. 알았지?"

카일은 그 사이 아바마마와 의논했던 일들을 내게 들려주었다. 황후 쪽 움직임을 예상하여 아바마마와 카일은 여러 가지를 준비하셨다.

나는 하나하나 되새김질하면서 열심히 기억해 두었다. 황후가 했던 말과 눈빛이 불안했지만, 아바마마가 곁에 있으니 괜찮을 것 같았다.

카일은 여러 가지 당부를 하고는 다시 회의가 있다면서 떠났다. 카일이 떠나고 혼자 침실에 남은 나는 또르르 흐르는 눈물을 막을 수가 없었다.

내일 아침, 출정식 때는 절대 울지 말아야지. 카일이 힘을 낼 수 있도록 누구보다 밝게 웃자. 내가 울면 카일이 걱정할 거야.

카일을 위해 만든 손수건에 입을 맞추며 그 어느 때보다도 간절히 기도했다.

나의 반려가, 내 아이의 소중한 아버지가 무사하길. 우리가 원하는 미래를 맞이하는 그날이 오기를 간절히 빌고 또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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