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태자비의 대역으로 살아남기-113화 (113/126)

113화. 거짓말 하지마, 이 여자야! (1)

2018.08.18.

황후가 자리를 지키던 보좌에서 내려와 우리 쪽으로 사뿐사뿐 걸어왔다. 오만하고 거만한 눈에서는 나를 깔아뭉개고 말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흐으음.

사람들은 황후를 위해 길을 열어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드디어 황후가 우리 앞에 섰다.

"황후, 무슨 소리요?"

"계속 황손이 보고 싶다 노래하지 않으셨습니까? 그 소원을 콘스탄트 공녀가 이루어 줄 것 같습니다."

황후의 말에 큰 파문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황후의 주변에서 시작된 웅성거림은 점차 큰 소음으로 바뀌었다.

오호라, 황후가 사냥개였어? 이렇게 몰고 가시겠다?

"공녀라니 무슨 소린가?"

"폐하께서는 그 추문을 듣지 못했습니까? 술김에 실수를 한 황태자가 제 비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시해죄를 뒤집어 씌워 공녀를 가뒀다는 것을?"

나는 입을 꽉 다물고 주먹을 쥔 채 황후를 노려보았다.

"미약과 신경안정제를 쓴 것은 명백히 저를 시해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당연히 그 죄를 물음이 맞지요. 게다가 저는 실수 한 적이 없습니다만."

"그날, 볼라드 공작가의 시종의 증언에 따르면, 황태자비가 황태자를 발견했을 때 잠들어 있었다지요? 잠들기 전에 기억이 있나? 황태자."

카일이 대답하지 않았다. 이미 돈에 한 번 매수되었던 시종들은 살려주겠다는 황후의 말에 다시 매수된 모양이었다.

"공녀는 기억이 있다더군, 분명 황태자에게 안겼고, 그 씨를 받았다고 말이지. 그리고 폐하, 공녀가 감금된 지 한 달 가까이 되었는데 달거리를 걸렀다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공작가의 시녀가 보낸 달거리를 위한 속옷들을 사용하지 않았고, 심지어 입덧도 심하게 하느라 식사를 거르고 있다는군요."

황후는 모든 귀족들이 보는 앞에서 나의 카일을 파렴치한으로 만들었다. 내 속에서 천불이 나려는 것을 꾸역꾸역 참았다. 아직 아니야, 참자.

황후의 말이 끝나자 콘스탄트 공작이 나서서 눈물을 터트리며 폐하께 애원했다.

"제 딸의 명예를 찾아주십시오. 이제 후궁 제도도 사라졌는데 황실의 사생아를 낳게 되면 제 귀한 여식은 어찌 됩니까?"

공작의 말에 황후파의 귀족들도 성토를 시작했다. 황태자의 허물을 덮기 위해 공녀를 희생해서는 안 된다고, 그리고 이런 황태자가 황제 대리로 권력을 휘둘러서는 안 된다며, 폐하께 간언했다.

"다들, 공녀의 회임을 확신하는데, 임신 여부부터 확인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나의 말에 다들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사실 이 상황에서 제일 불쌍한 것은 나 아니야? 졸지에 남편이 바람피우고 혼외자까지 만들었다는데!!

내가 아주 피곤한 기색으로 말을 꺼내자 다들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사정을 대충 아는 펠은 아버지께 급히 상황을 알렸는지 아버지는 씩씩거리기만 할 뿐 잘 참고 계셨다. 아니면, 벌써 우리 남편, 두들겨 맞았을 거다.

어머니께는 내 임신 사실을 알렸었는데 그래서인지 어머니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계셨다. 불효한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어머니, 나는 아버지 대의 일을 반복할 생각이 없으니 걱정 마세요. 아셨죠?

"그전에 황태자비, 공녀가 정말 황태자의 아이를 회임했다면 어찌하겠느냐?"

"그 부분도 응당 더 철저한 조사를 해야지요. 그녀의 말 외에는 내 남편이 그녀를 범했다는 증거가 없지 않나요? 다만, 카일의 아이가 맞다면, 제 호적으로 입적하겠습니다. 젊은 공녀의 살길은 열어줘야 하니, 법에 예외 조항을 두고 황실의 일원이 될지 말지는 폐하와 귀족 여러분의 결정에 맡기죠."

"좋다. 이 자리에 있는 귀족들이 증인이 될것이다."

황후는 내 말에 만족한 표정이었다. 이거 어쩐지 겪어봤다? 그때도 당해놓고, 또 이렇게 덤비시네.

"단, 황후께서도 약조하시죠. 만약 회임이 아니거나, 카일의 아이가 아님이 밝혀지면, 황실과 황태자를 능멸한 콘스탄트 가도, 황후 폐하도 응당 그 책임을 다하셔야 할 겁니다."

"당연하지. 폐하, 그럼 당장 확인하러 가시지요."

황후는 아주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그 표정에 심장이 벌렁벌렁 뛰려고 했다. 내 아가를 위해 스트레스를 받으면 안 되는데...

어느 정도는 이미 예상했는데도 스트레스가 상당했다.

아바마마의 허락으로 황궁의와 3대 공작과 아버지까지만 탑으로 향했다.

마차 안에서 아바마마는 내 손을 잡고 토닥토닥해주셨다. 아마도 내 회임 사실을 마음껏 말할 수도 축하받을 수도 없는 나를 안타까워하신 것이겠지.

황후도 함께 탄 마차이기에 많은 대화를 나눌 수는 없었지만 아바마마의 마음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카일은 황후를 노려보고만 있었다. 오랜만에 카일의 살의가 밖으로 뿜어져 나왔으리라. 황후는 역시 고수였다. 그 살기를 버티고 있으니 대단해.

하지만 그녀도 조금씩 식은땀을 흘리는 것이 힘들긴 한 모양이었다.

그러게 왜 이런 무모한 짓을?

"황태자비, 아까의 약조를 잊지 않았겠지?"

"물론입니다. 황후 폐하도 꼭 지키시리라 믿습니다."

후아, 싫다. 이런 상황. 나는 카일을 살짝 째려봤다. 멋쩍은 웃음을 짓는 카일을 보니 안쓰럽기도, 짜증 나기도 했다.

탑 입구에서 다시 만난 아버지는 잠시 나를 꼭 안아주셨다. 카일과는 다른 포근함이 날 지켜줬다.

"비 전하, 괜찮으시지요?"

"아버지, 전 괜찮아요. 카일과의 행복한 미래를 위해 겪는 작은 시련일 뿐인걸요."

작은 시련이란 말에 비릿하게 웃는 콘스탄트 공작과, 꼴좋다는 몬테 공작의 미소가 보였다. 둘이 한 편 먹는 것은 아니겠지? 최악의 조합이군.

두 집안이 태생부터 철천지원수라 다행이야.

탑 입구에는 황궁의가 대기 중이었다. 늘 보던 그 황궁의였다. 작은 가방을 든 그는 황족들과 고위 귀족의 모습에 잔뜩 긴장했다.

평소처럼 해요. 알았죠?

내 눈빛 응원에 힘입은 그는 뻣뻣한 자세로 인사를 했다. 그리고 폐하의 고갯짓에 의해 탑의 문은 열렸다.

"창공을 비추는 태양, 황제 폐하와 밤하늘을 비추는 별, 황후 폐하께 릴리아나 콘스탄트가 인사 올립니다."

단정한 옷차림으로 기다렸다는 듯이 인사를 올리는 콘스탄트 공녀였다. 역시 미친 게 아니었어. 아주 멀쩡했다.

늘 난동을 부린다더니 방도 생각보다 멀쩡했다. 그렇게나 다른 이들과의 접촉을 막았는데도 그녀에 대한 정보가 새다니, 하녀들? 아니면 문지기?

스파이가 누구인지 솎아내야겠네. 감히 나와 황태자를 능욕해?

"일어나거라."

"예, 폐하."

고개를 든 공녀는 노골적인 시선으로 카일을 응시했다. 카일은 대놓고 싫은 표시를 팍팍 냈다. 잘한다, 내 남편!!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내 남편 옆에는 네 자리가 없어!!

"전하. 릴..."

"세이, 괜찮아?"

카일은 내가 조금 움직이자 바로 내게 말을 걸어왔다. 덕분에 인사를 하려던 공녀는 또 무시를 당했다.

그녀의 눈에 나에 대한 분노와 원망이 가득 차는 것이 보였다. 나는 똑같이 그녀를 노려봐 주었다.

어디서 째려봐? 거짓말쟁이 주제에.

"공녀, 자리 앉거라."

방에는 황족들과 귀족들이 편히 앉을 자리가 시종들에 의해 놓여있었다. 우리가 다 자리에 앉고 나자 폐하께서 그녀를 앉혔다.

"황공하옵니다, 폐하."

다소곳이 자리에 앉는 공녀의 모습은 내가 마지막으로 본 것과 달랐다. 우아하고, 지적인 제국의 몇 안 되는 공작가의 여식 다웠다. 한때, 황태자비 후보였던 면모가 엿보였다.

"공녀, 우리는 네가 내 아들의 핏줄을 잉태했다는 소리를 듣고 이 자리에 왔다."

"송구하옵니다."

"지금부터의 심문에 솔직히 답해야 한다."

"한 치의 거짓도 없을 것입니다."

또박또박 대답을 하는 공녀는 아바마마께 옅은 미소까지 지어 보이며 자신을 어필했다. 마치 제가 아바마마의 며느리라도 되는 것처럼.

"그리고 내 분명히 천명하는데, 네가 나의 손주를 가졌는지 여부와 관계없이, 내 며느리는 황태자비 말고는 없다."

"아바마마..."

역시 내 편이야!

"폐하!"

"너무 하십니다."

황후와 콘스탄트 공작이 발끈했으나, 아바마마는 조금의 동요도 없었다. 그리고 근엄한 표정으로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공녀가 미약을 구입하고 썼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나는 그런 사특한 짓을 하는 며느리도, 그런 황손의 어미도 필요 없다."

아버지는 폐하의 말씀에 고개를 끄덕이셨고, 황후와 공작은 부들부들 떨었다.

"소녀가 미약을 구입하여 황태자 전하를 유혹하려 한 천박한 짓을 한 것은 인정합니다."

공녀가 입을 열었다. 호오? 이제 와서 죄를 인정하는 거니?

"하지만 그 와인에 미약이 들어 있음을 알고도 전하께서는 연거푸 들이켰지 않습니까?"

그, 그건 그렇지. 저 인간이 나랑 즐기겠다고 그랬지.

"내가 그것을 마신 것은 너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의 비를 위함이었다."

음, 저기 남편? 그건 우리 아버지 앞에서 할 소리는 아니야!

"세이가 준비한 것이라고 생각한 나의 판단 미스였을 뿐이다."

"소드마스터인 전하께서 저의 기척을 모르셨나요?"

"네가 미약 외에도 판단을 흐리게 하는 신경안정제 계열을 넣지 않았느냐. 그래서 순간 놓쳤을 뿐이다."

"하지만 결국 제가 그 가제보에 들어갔을 때 저를 안으시지 않으셨습니까?"

뻔뻔한 공녀의 말에 카일이 더 차갑게 얼어붙은 눈으로 그녀를 노려봤다.

"네가 머리를 부딪혀 잊었나 본데, 나는 세이가 아닌 네 역겨운 냄새를 맡고 널 밀어냈다. 여러 번 바닥에 내팽겨 쳐지지 않았느냐."

"흑, 전하, 너무 하십니다. 제 순결을 가져가 놓고 저를 이리 박대하시다니요."

뭐어? 순결? 아, 진짜 보자 보자 하니까, 이게! 후읍, 후읍, 조금만 더 참자.

쟤, 멀쩡해 보이더니 미친 게 맞네. 맞아. 눈물 연기 최고야!

아버지도 화가 단단히 나셨는지 주먹에 힘이 들어간 것이 눈에 뜨일 정도였다.

"비 전하도 제 모습을 보지 않으셨나요? 옷도 추스르지 못한 채 부끄러워 도망치던 저를요."

"아아, 뒷모습을 보았지. 그런데 그런 짓을 저질렀다는 내 남편의 옷차림은 너무 멀쩡했어서 말이야."

"그건! 비 전하께 들킬까 급히 입으셔서..."

아, 사람들만 없어도 저 미친 여자를 쥐어박을 텐데!

"아, 그래? 볼라드 공작?"

갑작스러운 나의 호명에 볼라드 공작이 당황하면서도 즉각 반응해 튀어나왔다.

"우리가 떠난 뒤 가제보를 확인했죠? 혈흔이 있었나요?"

"클리페울룸 경과 함께 공녀의 흔적을 찾는 동안 그 어느 침구나 가구에서도 없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피식 웃어 주었다.

"공녀, 순결은 그럴 때 쓰는 말이 아니죠."

내 말에 공녀의 눈동자가 서늘해졌다.

"그렇다고, 카일룸께서 절 안고 격렬히 사랑했다는 사실이 사라지진 않습니다."

정말로 그런 일이 있었다고 믿는 거야? 이 공녀, 어쩌지? 어이없는 웃음이 나왔다.

"황태자비, 중요한 것은 공녀의 순결이 아니라 황손의 존재 아닌가?"

"안타깝지만, 황실 법도에 의해서 공녀는 황실의 여인이 될 순 없겠군요."

이건, 어쩔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귀한 황족의 피에 다른 것이 섞여 들어올 가능성은 막아야 하니까.

내 말에 황후와 콘스탄트 부녀의 미간이 구겨졌다. 아, 속 시원해.

"그, 그렇다고 해도 황손은 황손이다."

"네, 그렇죠. 카일이 진짜 그 아이의 아버지라면요."

내 말에 콘스탄트 공녀가 소리를 빽 질렀다.

"내 배속의 태아는 분명 황실의 핏줄이고, 황태자 전하의 금안을 쏙 빼닮은 아이야!"

그래그래.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의 눈 색깔도 알고 대단해.

"공녀! 무엄하구나. 감히 내 며느리에게 무슨 말버릇이냐!"

폐하의 불호령에 공녀가 태도를 바꿔 눈물을 흘렸다.

"너무하셔요. 저도 폐하, 아니 아바마마의 며느, 꺅!"

우와, 우리 아바마마 무서운 분이셨어! 아프겠다.

"그 입 다물거라. 내게 며느리는 아르세이아 단 한 명이라 천명했거늘, 황명을 우습게 아는 것이냐? 황궁의, 진단하라."

여러 가지 문진이 오갔다.

이 방을 담당하며 공녀를 돌본 하녀들은 공녀가 이곳에 오고 단 한 번도 달거리가 없었음을 증언했다. 증인으로 불려온 사가의 시녀는 마지막 달거리가 잡혀 오기 보름 전 즈음이라 했다.

그 외에 여러 가지 증상에 대해 질문했고, 상당수가 나와 일치했다.

"증상으로는 회임이 맞고, 증언대로라면 회임 시기도 그 사건 즈음이 맞습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확진이 어렵습니다. 특히 공녀께서는 회임했다는 집착이 강하신 것으로 보아 흔치 않지만 상상 임신일 가능성이 큽니다."

"아니야!"

"그럼 몇 달 뒤 태아가 자라는 것을 보며 지켜봐야 한다는 말인가?"

내가 침통한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황후와 콘스탄트 공작은 그 말에 미소를 지었다. 그쪽 입장에서는 이 문제로 시간을 끌어야 하나 보군.

하지만, 이 황궁의가 누군가. 나와 카일의 2세를 위해 약부터 모든 것을 철저히 준비한 인재 아니겠어? 후훗. 처음으로 자르지 않길 잘 했단 생각이 든단 말이야.

"아닙니다. 제가 개발한 의료 기구로 바로 확진이 가능합니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