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나쁜 소식과 좋은 소식. (3)
2018.08.16.
건국 기념일 행사는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 보였다. 황제 폐하의 근위대와 황태자 근위대의 합동 사열식은 정말 박수가 짝짝 나올 만큼 멋졌다.
"우와, 다들 멋지다."
"검로에 절도가 없네. 힘도 없고."
멋지단 말에 또 질투하기는.
"나중에 우리 사이에 아들 생기면 당신이 더 멋진 검술 가르쳐 줄 거죠?"
"딸이면 험한 것 안 시킬 거야."
"왜요? 여장부로 태어나서 더 멋진 여기사가 될 수도 있죠."
"흠, 멋지긴 하겠... 아니다. 안 돼. 아직은 대부분의 기사들이 다 사내놈이라 우리 예쁜 딸내미 노리고 들이댈 거야. 안 돼, 절대로."
흐음. 아가야, 네가 딸이면 너네 아빠의 미래가 눈에 보이지 않니? 하아, 사춘기의 딸이 반항하다가 가출하는 미래가 그려진다. 절대 그러면 안 돼, 알았지?
"아빠가 무지막지한 최강의 검사이자 미래의 황제일 텐데 누가 감히 우리 딸을 넘보겠어요?"
"그건 그렇지. 우리, 아이 낳을 수 있는 만큼 낳을까? 나, 형이 먼저 떠나고 나서 외로웠어."
"음, 나도 어릴 때는 외로웠으니까..."
그렇다고 낳을 수 있을 때까지 다 낳아도 되려나?
"며늘아이 고생한다. 딱 셋만 낳거라."
아바마마가 슬그머니 끼어드셨다. 카일에게 쯧쯧거리면서 카일의 어머니께서도 산후병으로 고생했다면서 무리는 하지 말라면서 말리셨다. 셋도 건강이 허락해야 할 수 있는 것이라면서 자상하게 날 돌아봐 주셨다.
아, 어쩌면 카일보다 아바마마가 더 무서운 분이셔. 아무리 봐도 아시는 것 같아. 나중에 둘만 있을 때 조용히 말씀드려야지.
아가야, 할아버지 멋지지?
마지막 순서를 앞두고 카일과 폐하는 말을 타고 기사들 사이를 멋진 자태로 걸어갔다. 그런 두 사람을 기사들은 절도 있는 자세로 서서 기다렸다.
카일과 폐하가 기사단의 제일 앞으로 가서 서자 마나를 가진 테일러경이 멋들어지게 붉은 마나를 쏘아 올렸다. 카일은 화답하며 예검을 통해 푸른 마나를 일으켜 쏘아 올랐다.
우와, 역시 우리 남편이야. 예검으로도 저렇게 예리하고 정갈한 마나를 만들어 내다니.
"오늘 당신이 제일 멋졌어요."
별것 아닌 칭찬에 카일이 또 헤헤거렸다. 오늘은 외국 사절단들도 볼 텐데, 또 헤벌쭉하고 그러냐.
홀로 옮겨와서 여러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나는 처음 보는 외국 사절들에 관심이 많았다. 사실, 처음 보는 옷들 때문에 유심히 보게 되었다.
저 옷은 저기 남쪽 끝의 도시국가던가? 그리고 저 독특한 머리장식을 한 나라는 사막 국가 사람들이랬어. 흐음, 북부 왕국은 사절을 안 보냈네. 역시 곧 적국이 될 거다 이건가?
어? 저 화려한 옷은, 남부 왕국이네. 스타티나가 있는 곳은 저렇게 남자들도 화려하게 입는구나. 의상에 대해서 배운다고 했던가? 잘 하고 있겠지?
어?? 뭐야, 왜 나한테 다가오는데?
"밤하늘을 비추는 작은 별, 황태자비 전하. 남부 왕국의 1왕자 이사키오스라고 합니다."
갑자기 적갈색의 차분한 긴 머리의 안경을 낀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아, 반가워요. 아르세이아라고 합니다."
"여어, 사키, 오랜만이야."
카일이 아주 편한 말투로 그에게 말을 걸었다. 뭐야, 뭔데, 우리 남편이 외간 남자가 내게 말을 거는 것을 이리 쉽게 봐주는 사람이 아닌데 말이지.
"세이, 처제를 보살펴주고 있어. 내 어릴 때 친우야."
카일이 다른 사람들을 피해 작게 속살거려줬다.
"어머, 왕자님, 큰 신세를 지고 있네요. 정말 감사드려요."
내 인사에 왕자는 싱긋 웃었다.
"티나가 왜 그렇게 언니 자랑을 했는지 알 것 같습니다."
"어허, 내 아내에게 눈웃음은 치지 말라고. 아무리 닮았어도 자네가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야."
"응? 설마, 그 아이의 연인이??"
왕자는 그저 웃었다. 안경 너머로 비치는 웃음이 차분해 보였다.
"어머, 어머, 정말 정말 반가워요."
"티나가 얼른 비 전하를 보러오고 싶어 합니다. 아직 왕립학교 일정이 끝나지 않아서요. 그전에 가서 자신의 가족들을 만나고 청혼서를 보내고 허락받아오라고 성화라서, 제가 직접 왔습니다."
어쩜, 성격이 여전하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카일이 경계 없이 왕자를 대한 이유를 알아차렸다. 눈앞의 왕자님은, 내 동생에게 꽉 잡혀사는구나.
"그, 티나가 언니께 꼭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전하보다 못나면 허락 안 해준다고 했다는데... 제가 무인이 아닌지라 검으로도 이기기 힘들고, 재력도, 권력도 모자라지만 음, 누구보다 그녀를 행복하게 할 자신은 있습니다."
"왜 이래? 곧, 왕세자가 돼서 왕국을 물려받을 거면서. 남부 왕국은 워낙 풍요로워서 제국 못지않아."
"어머, 우리 티나가 왕자님을 잘 보필할 수 있을지가 걱정이네요."
"자신이 하고 싶었던 패션 공부도 열심히고, 왕국 예법 교육과 역사 공부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왕비로 손색이 없습니다."
아, 뭔데. 공부 그렇게 싫어해서 매번 나를 대신 보내더니! 역시 사랑의 힘이란!!
"모자란 제 동생을 어여삐 봐줘서 고마워요. 잘 부탁드릴게요."
"허락해 주시는 겁니까?"
"저는요. 그런데... 음..."
"장인어른의 관문이 쉽지 않을 거야."
이미 이사키오스 왕자의 정체를 아는지 아버지의 표정이 곱지 않으셨다. 하하, 그런데 펠도 못마땅한 표정이네. 다들 기사가문 출신이라 학자 스타일의 왕자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야.
많이 굴려지겠군. 미안해요 제부. 지켜주지 못할 것 같아요. 기초 체력만이라도 통과하길 바라요.
한쪽에서는 아바마마도, 황후도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있었다. 공식 석상에 황후가 나선 것이 오랜만이여서인지 그녀에게도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었다.
"여전히 위세가 대단하군."
"자신의 명줄을 가지고 제 수하라 믿었던 이들이 거래하고 있는지 모르는 걸까요? 어찌들 저리 여유로운지."
"믿는 구석이 있나 보지."
"그게 썩은 동아줄인지 아직 모르나 봐요."
카일과 나는 서로 마주 보며 씩 웃었다. 아, 함정파는 우리 너무 사악한 것 같아. 태교에 나쁜데.
카일은 만찬으로 나온 돼지 바비큐를 내게 권했다. 아니! 이 부위는! 예전에 수확제에서 먹었던 것을 기억하고 머리 부위를 잘라온 것이다.
음, 입덧 시작하면 곤란한데. 다른 이는 몰라도 황후 앞에서는 위험했다.
심호흡을 하고.
"맛있다!"
다른 육류나 해산물들은 다 냄새나서 꺼려졌는데 돼지머리는 먹을 수 있었다. 우왕 이 쫀득함. 좋다. 다행이었다.
접시 들고 입에 돼지 귀를 오물 거리며 여기저기 둘러보는데 콘스탄트 공작과 눈이 마주쳤다.
"쿨럭, 쿨럭."
"세이, 괜찮아?"
카일이 잽싸게 등을 두드리며 음료를 건넸다. 어우, 겨우 입에 맞는 음식 찾았는데 죽을 뻔했어.
"방금, 콘스탄트 공작이 웃으면서 쳐다봤는데, 그 표정이..."
소름 돋았어. 분명 저자는 자신의 딸과 황후가 계획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날 곧 잡을 사냥감인 듯, 그렇게 보는 겠지? 어느새 근심에 사로 잡힌 표정을 지었지만 그 찰나의 표정이 각인되어 버렸다.
두고 봐. 호락호락하게 당하지는 않겠어.
"으드득."
"남편? 워워. 황후파 잔당들은 별말 안 해요?"
"나랑 테일러가 있어서인지 별말 안 하네. 암호로 말하는 것도 같고. 자기들끼리 사냥대회라도 열 건가?"
뭐시라? 죄 없는 동물들을 잡을 생각이야? 원래 신년제에는 매년 사냥대회가 꼭 열렸는데 내가 없앴다. 그랬더니 이러는 건가!! 반항하는 거야?
"뭐라는데요?"
"사냥 준비는 잘 끝났다고, 사냥개도 튼실한 녀석으로 새로 구해왔대. 몰이는 어느 집 개로할지 정하는 모양이야."
나는 카일의 얼굴을 쳐다봤다. 카일도 같은 생각을 하는 모양이었다. 역시 천생연분, 이심전심이라니까.
우리는 한참을 키득 거렸다.
* * *
신년제의 일주일은 금방 지나갔다. 신년제의 마지막 하이라이트는 아바마마의 탄신연이었다.
카일의 생일 때보다 훨씬 웅장하고 화려하게 장식을 해 두었다.
"으으으!! 드디어 끝이다아!"
후련했다.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도 이미 끝난 느낌. 아침에 준비 상황을 확인하고 오는데, 너무 기분이 좋았다.
"그렇게 기분 좋아?"
"당연하죠. 당신이 황제가 되고 나면 신녀제를 더 축소시킬 거야. 동의하죠?"
내 비장한 표정에 카일이 웃었다.
"나의 비가 원하신다면 얼마든지."
"약속했어요. 그러면 아낀 예산으로 새로운 사업해야지. 빈민가에 깨끗한 수원을 확보해줄 방법을 찾아야겠어요. 그러면 여름에 전염병이 줄 거야."
카일이 갑자기 멈춰 서서 고개를 갸웃했다.
"세이, 애써 일을 줄일 것처럼 하더니 또 일을 늘리려는 거야?"
"헤헤, 그런데 연회 준비보다는 그런 쪽이 더 재밌는걸요. 그런데 귀족들이 싫어하려나?"
"다른 데서 그들이 이익을 얻게 해주면 돼.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네가 하고 싶은 것 다 해."
카일이 애써 예쁘게 올려놓은 머리카락을 흐트러트렸다. 사실 제일 연회가 끝나길 기다린 사람은 카일이었다.
"대신에, 오늘 밤에..."
"아, 피곤하다. 오늘 끝나고 일찍 푹 자야지."
"세, 세이?"
"그리고 자기 전에 요리사들한테 과일 케이크 잔뜩 만들어 달라고 해야지."
"저기, 세이, 혹시..."
카일이 갑자기 너무 진지한 태도로 머뭇 거리기 시작했다. 망설이면서 차마 말을 내뱉지 못하는 것이 아주 심각해 보였다.
"혹시, 뭐?"
"내, 내가 이제 질려?"
"네?"
"나에 대한 사랑이 식은 거야?"
"뭐라는 거예요? 내가 왜요?”
"네가... 계속 밤에... 나 피하잖아."
"아, 카일. 푸하하하. 이긍, 우리 남편 그래서 속상했어요?"
카일이 시무룩해졌다. 아, 미안해라. 오늘 밤에 연회 끝나고 서프라이즈 해줘야겠다. 더 꽁꽁 숨겼다가 본격 입덧이 시작되면 알려 줄랬는데...
오늘 연회 끝나면 주목받는 일이 줄어들 테니까, 카일에게는 공개해도 되겠지.
"음, 우리 남편을 위해 내가 신년 선물을 준비해 놨으니까, 삐치지 말고 기대해요. 아주 강렬하고, 뜨거운 감동이 느껴지는 선물이거든요."
"응, 뭐야? 새로운 침의라도 준비했어?"
아가야, 방금 것은 못 들은 것으로 하렴. 나는 그저 빙글빙글 웃으며 대답해주지 않았다.
저녁이 되어 탄신연이 시작되었다. 아바마마를 위해 부른 광대들의 공연은 흥미진진했다. 아슬아슬한 곡예 연기는 황제 폐하의 탄신연에 어울리는 높은 수준이었다.
귀족들도 내가 특별히 동대륙 상인들을 통해 데려온 광대들의 기상천외한 묘기가 신기했나 보았다. 거금을 들였지. 크흑.
하지만 아바마마가 저리도 신나하시니, 나도 좋아. 헤헷. 아슬한 장면에서는 눈을 동그랗게 뜨다 박수까지 치시며 웃어주셔서 기뻤다.
단지 황후도 좋아 어쩔 줄 모르는 것은 못마땅했다.
미안해 아가야, 엄마가 좀, 속이 좁아. 하지만 너도 이해하지?
공연이 끝나고 모두가 박수를 쳤다. 특히 아바마마가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치셔서 좋았다.
이제는 내 차례군.
"아바마마, 즐거우셨으면 이번에는 제 재주를 봐주세요."
나는 아바마마와 함께 홀에서 정원으로 나가는 테라스로 갔다. 카일은 그 뒤를 바짝 붙어서 내게 혹시나 있을 불상사를 막아주었다.
테라스의 문이 활짝 열리고 우리의 뒤로 귀족들이 줄을 서서 내다보았다. 황후는 못마땅한 눈으로 상단에 마련된 보좌를 떠나지 않고 자신의 자리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테라스 밖에는 첫눈 이후에 몇 번 더 내린 눈이 정원 흙을 덮고 있었다.
"아바마마가 겨울에 태어난 것은, 우리 데피니토르의 희망이 꽃 핀 것과 같아요. 그래서 준비 했답니다."
미리 구근을 심어 두었다. 봄이 오기 전 가장 먼저 피는 하얀 꽃. 기나긴 시련을 이겨내는 희망의 상징.
내가 힘을 주기 시작하자 곳곳의 눈이 사르륵 녹기 시작했다. 새싹이 자라면서 열을 낸 것이다. 그리고, 곧 땅 위로 작은 새싹과 함께 작은 풀이 돋아났다.
곧, 하얀 방울들이 꽃망울을 맺고 터뜨렸다. 달빛과 마법등에 반짝반짝 빛나는 눈가루들과 어울리는 스노우드롭이 우리가 서 있는 테라스 주변으로 가득 피어났다.
"아바마마가 기다리시는 선물은 올해 안에 보실 수 있을 거예요."
내가 귓속말을 해드리자 아바마마의 눈이 촉촉해지셨다. 알고 계신 것이 아니었나? 괜히 나까지 코끝이 찡해졌다.
오늘따라 눈치 없는 남편은 아바마마께 더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바보! 알아들었어야지!
"폐하, 폐하께서 진짜 간절히 원하는 선물은 콘스탄트가에서 준비한 모양이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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