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태자비의 대역으로 살아남기-110화 (110/126)

110화. 나쁜 소식과 좋은 소식. (1)

2018.08.14.

한 해의 마지막 날과 새로운 날이 이어지는 경계, 1월 1일 자정부터 신년제가 시작되었다. 준비기간 내내 소화불량과 피로에 시달린 나로서는 환영할 일이었다. 물론, 아직 끝난 일은 아니지만...

무슨 신년제를 일주일이나 하냐고!!

사실 신년제는 제국에서 의미가 큰 행사였다. 새해맞이의 의미도 있지만 거기에 제국의 건국 기념일이 포함되어있기 때문이었다.

어느 다정한 선조께서 이 엄동설한에 나라를 세우신 것인가!!

그래서 제일 정신없이 바쁘면서, 가장 즐거운 축제가 열리는 시기가 신년제였다. 거기에 아바마마의 탄신연이 섞여있으니 어찌 즐겁지 아니할까?

물론 즐기는 이들은 행복할 것이다. 대신 준비한 사람의 정성을 꼭 생각해 달라고.

아름답게 치장한 여인들과 그 파트너가 연회장에서 빙글 뱅글 돌면서 춤추는 모습을 비교적 편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그중에서 돋보이는 것은 아버지와 어머니였다.

"두 분 보기 좋으시네."

"그죠? 20년이나 기다리셨네요. 우리의 기다림은 그에 비하면 짧았어요."

아버지는 어머니가 수도원 화재에서 살아남았음을 공표했다. 결국 전 후작부인의 만행에 의한 피해자인 어머니께도 배상을 해야 할 지경에 놓인 몬테 공작은 신년제 첫날 행사에 참석하지 않았다.

"안 보이니까 편한데 뭔가 불안해요."

"누구? 몬테 공작?"

"네, 그리고 콘스탄트 공작도요."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내가 누구?"

"전지전능한 창공의 황태자죠."

"땡, 나는 너를 지키는 너만의 기사야."

카일의 시답잖은 소리에 웃음이 났다. 뭐, 카일 덕분에 누구의 눈치도, 경계도 없이 연회를 즐기고 있으니 좋은 건가?

"나의 기사님. 저랑 한 곡 추실까요?"

내가 손을 내밀자 카일은 당연한 듯이 손을 잡아왔다. 그리고 우리 부모님 곁으로 은근 슬쩍 끼어들었다.

"아버지랑 당신이랑 표정이 똑같아."

"그야, 사랑하는 연인의 얼굴을 마주 보고 있으니까."

에이린과 알리페르도 우리와 가까운 곳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는 테일러 경도 루시엘라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예전 같으면 카일과 이렇게 가까이서 귓속말을 하며 춤을 추면 온갖 적의가 쏟아졌는데. 훗, 콘스탄트 공녀가 잡혀들어 온 탓일까? 확연히 줄어든 시선에 마음이 편해졌다.

대신 어머니와 나를 향한 의아한 시선이 느껴졌다. 우리가 친모녀라는 생각을 못 해서인지 후작 부인보다도 서로 닮은 외모에 호기심이 일어나는 모양이었다.

긴 춤곡이 끝난 뒤 우리 가족은 한자리에 모였다.

"아버지, 그렇게나 좋아요? 싱글벙글, 너무 카일스러웠어요."

"허허허, 그거 칭찬이지요?"

"아버지가 매형보다 더한 애처가인지 처음 알았습니다."

"너도 만만치 않던데 뭐."

사람들은 화기애애한 우리의 분위기에 다들 놀란 모양이었다. 하긴 전 후작부인의 죽음의 원인이 아버지의 예전 연인이었으니 우리 남매가 이럴 줄 몰랐겠지.

이럴수록 더 다정하게 보이자.

"어머니, 이거 드셔보세요. 우리 요리사들이 솜씨를 제대로 발휘한 요리에요."

"어머, 비 전하, 맛있어 보이는군요. 비 전하도 많이 드세요. 어쩜, 행사 준비로 많이 힘들었나 봐. 우리 딸 어찌 이리 야윈 것인지..."

어머니의 걱정에 카일이 괜히 찔리는 표정이었다. 어머니가 나에게 먹으라고 권하신 것은 삶은 달걀 노른자를 여러 가지 견과류와 겨자와 섞어 흰자 위에 장식한 요리였다.

하지만 요즘 달걀 요리는 계속 거북해서 먹기 싫었다. 그래서 어머니께 받은 것을 싱긋 웃으며 카일의 입에 밀어 넣었다. 대신 나는 상큼한 과일을 섞어 만든 젤리를 먹었다.

"세이가 요즘 편식해요. 과일만 좋아하네요. 예전에는 좋아하던 육류도, 해산물도 다 싫어합니다. 장모님."

우씨. 그걸 고자질하고 그러냐. 요즘 힘들어서인지 소화가 잘 안 돼서 상큼한 것 먹는 건데 어쩌라고?

"어머, 비 전하. 혹시?"

"아니에요. 얼마 전 달거리도 했어요."

어머니는 미심쩍은 얼굴이셨다. 하지만 내가 극구 부인하자 아쉬운 듯 더 이상 묻지 않으셨다.

나는 그 주제가 불편해서 말을 돌렸다. 계속해서 즐거운 대화가 이어지자 다른 귀족들이 어머니와 인사를 하고 싶은지 눈치를 보며 우리 곁으로 다가왔다.

"헬렌, 인사해요. 내 어머니랍니다."

나는 볼라드 공작부인에게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난 진실을 말한 것인데 사람들의 반응은 소란스러웠다. 예상은 했지만. 하하.

"반가워요. 부인. 후작님과 혼례는 언제 치르는 거예요?"

볼라드 공작부인은 조심스럽게 어머니와 인사를 나누었다. 어머니를 유심히 관찰하는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얼마 전 헬레니아는 내게 나에 대한 소문을 들려주었었다. 가짜이거나 혹시 알고 보면 후작의 사생아라는 말도 안 되는 말이 잠깐 나왔다가 들어갔다고 했다.

흠. 그거 사실인데? 누가 이리도 정확히 퍼트리는 거지? 카일이 그 소문을 차단하고 배후를 찾고 있었다. 그리고 스타티나가 오면 모든 정황을 귀족들과 백성들에게 알리기로 했다. 3월이면 황후파도 몬테 공작도 몰락할 테니까.

덕분에 나는 볼라드 공작부인이 그 소문을 전할 때 그저 웃었다.

"어쩜 두 분이 이렇게나 빼닮으셨어요? 보기 좋네요."

어쩌면 헬레니아는 내 반응과 직접 만난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예상하지 않았을까?

어머니가 사교계에서 공격받지 않도록 내가 곁에서 지키고 있어서 귀부인들과의 대화에서 어머니를 향한 무례한 발언이나 공격은 없었다. 그렇다고 함부로 나대는 입들을 모조리 막을 순 없었다.

"어머, 그럼 혼례식 날 비 전하의 이복 누이를 만나는 건가요?"

눈치 없는 저 여인은 이제 사교계에서 매장 당하겠네. 내가 직접 하지 않더라도 다들 매서운 눈으로 그 여자를 노려봤다.

"두 자매는 이전부터 친하게 지냈답니다. 서로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을 만큼 아끼는 자매였죠."

어머니는 자애롭게 웃으며 말씀하셨다. 나는 그런 어머니를 보고 환하게, 거짓 없이 웃으며 답했다.

"우리는 서로의 분신인걸요. 모든 것을 나눈 자매라서요."

내 이름마저 함께 썼던, 쌍둥이보다 더 쌍둥이 같은 내 동생.

"지금까지 복잡한 가족사 때문에 공개하지 못했지만, 공개할 날이 올 거예요. 외국에서 곧 돌아올 예정이거든요."

나의 반응에 귀부인들은 더 이상 어머니의 딸, 비스가의 사생아 문제로 어머니나 나를 모욕할 수 없게 되었다. 역시 권력의 달콤한 맛이란.

어머니를 나랑 친한 여러 귀부인들에게 소개를 하다 보니 어느새 남자들은 남자들끼리 중요한 정세를 이야기하느라 우리 곁을 떠나 바빠졌다.

새벽까지 이어지는 연회라 사실 피곤했다. 어머니도 피곤해 보여서 황태자비 전용 휴게실로 모시고 갔다. 오랜만에 둘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어머니. 사교계 너무 피곤하죠?"

"그래도 사교계의 꽃이 지켜줘서 힘들진 않았단다."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는 편하게 말해주는 어머니였다. 헤헤, 어리광 부려야지.

"그런데, 세이. 정말 달거리를 했니?"

"네, 평소보다 좀 일찍요. 게다가 확연히 양이 적긴 했는데 했어요."

"요즘 혹시 계속 졸리고 피곤하진 않았어? 가끔은 몸살 난 것처럼 으슬으슬하고."

"그렇긴 해요. 하지만 음, 신년제 준비로 바빴으니까 당연히 피곤하죠."

"관리를 하는데도 피부가 거칠 거칠 푸석하지?"

"티... 나요?"

윽... 카일도 그렇게 생각하려나? 어머니는 쉴 새 없이 내게 질문을 했다. 그런데 어쩜 그리 족집게처럼 다 맞지?

"게다가 새콤한 것이 당기진 않고? 아니 평소 잘 먹던 것이 역한 냄새가 나는 듯해서 먹기 싫고 그런 것 아니고?"

"어... 확실히 좀, 그렇긴 했어요."

"어머나 세이!! 확실히 황궁의를 만나봐야겠구나. 내가 곁에서 지키질 못해서 모르고 지나칠 뻔했어."

어머니는 손을 가슴에 모으고 너무 벅찬 표정을 지으셨다. 내가 이해가 되질 않는다는 표정으로 어머니를 바라보자 내 손을 꽉 잡으시며 말했다.

"달거리가 아니라 아기집이 생기는 과정에서 생긴 출혈일 거야. 입맛이 바뀌고 졸린 것도 임신 초기 증상이고."

"아... 지, 진짜요? 설마...!"

어머니의 말씀에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어서 찾아와 주길 바랐던 아가였다. 하지만 노력한 만큼 빨리 생기지 않아 초조해졌었다.

혹시나 내게 이상이 있거나 한 것은 아닐까, 괜히 후궁 제도를 없애서 황실의 대를 끊은 것은 아닐까 염려도 되었다. 괜찮다고, 천천히 찾아올 거라고 해주셨지만 손주를 기다리시는 아바마마께 너무 죄송했었다.

"그런데 잔뜩 기대했다가 아니면 어떡해요?"

"내가 널 가졌을 때 딱 그랬어. 혹시나 모르니 황궁의의 진단을 받아보자꾸나."

"하지만 아니면 카일이랑 폐하가 실망하실 텐데... 요란하게 알리지 말고 내일 몰래 불러야겠어요."

"어미의 감을 믿으세요. 비 전하. 호호, 내가 곧 할머니가 되겠네요."

어머니의 확신에 찬 표정에 나도 설레었다. 그리고 내 배를 내려다봤다. 진짜, 진짜 내 배속에 들어 있니, 아가야? 내가 네 엄마가 될 수 있는 거야?

기뻤다. 기쁘다는 말 외에는 어떤 말로도 표현이 되질 않았다. 아직 확실한 것이 아니니까, 설레발을 치면 안 되는데...

"아버지께도 말씀드리지 마세요. 진짜 확실해질 때까지는요. 그리고... 아직은 황궁에 적이 많아서, 맞아도 섣불리 알리지 못할 거예요."

이럴 때 내가 황실의 여자라는 것이 걸렸다. 단 하나뿐인 황실의 후계자를 낳을 수 있는 위치. 그래서 더욱 조심해야 했다.

"그래, 이해해. 나중에 좀 더 안정기에 이르면 알려도 될 거야. 네 아버지도 좋아하시겠네."

할머니가 된다는데도 그리 좋으신가? 어머니의 얼굴에 미소가 떠나지 않으셨다. 덩달아 나도 웃음이 나왔다.

"초기에는 무리하면 안 되니까 얼른 들어가서 쉬어야 해. 이젠 높은 구두도 안 되고."

"네. 알겠어요."

나는 시종을 통해 쉬러 돌아가겠다고 알렸다. 카일이 있으니 밤새 별일은 없을 것이다. 카일이 혹시나 쫓아올까 봐, 연회 마무리 잘 못하면 죽을 줄 알라는 전언을 남겼으니 잘하겠지.

어머니와 헤어지고 오늘이 당직인 기사들을 데리고 만월궁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신년제를 위해 정원을 밝혀 놓은 마법등이 참 반짝반짝 예뻤다.

그리고... 어머니의 말을 듣고 나서 신경을 기울이니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정말, 너무 작아서, 거의 느껴지지 않아서 지나쳤던, 그저 내 주변을 맴도는 것이라 느껴진 작은 생명의 기운.

진짜, 진짜 내 뱃속에 천사가 찾아왔나 봐. 어쩜 좋아.

아니야, 아직 확실하지 않으니까 침착하자. 사람의 배에는 꼭, 아기가 있는 것은 아니었잖아. 알고 보니 꾸물꾸물 미지의 존재가 들어 있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니 기대하지 말자고 다짐하는데도 계속 입가에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마차를 타고 밖을 내다보며 가는 길에 어린 하녀가 낑낑대며 이불이며 갖가지 빨랫감을 나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저런, 신년제 밤에 힘들게... 어느 상사가 이 밤에 빨래를 시키는 거야?

"잠깐 마차를 세우거라."

내 명에 마차가 세워지고, 기사들이 작은 소녀를 불러 데리고 왔다. 기사들이 기사도는 있네. 잠시 무거운 짐을 들어준 기사들이었다.

"이 새벽에 누가 네게 이런 일을 시켰지? 신년제 밤에는 당직들 빼고는 다 자유로이 즐기라 했는데?"

"저기, 그게, 그 탑에 갇힌 마녀, 그러니까 공녀가요. 신년이라고 넣어준 특식을 보더니 막 구역질하고 신물을 토하고, 음식을 다 엎었어요."

머리가 지끈거리네, 또 걔니?

"그러면서 당장 치우라고 고래고래 욕하고... 저, 그, 자신이 황손을 낳으면 저희 당장자른다 그래서..."

황손 소리에 기사들이 눈을 부라리며 소리쳤다.

"누구 앞이라고 함부로 말하느냐! 미친 여자의 말을 옮기지 말거라!"

"그, 저도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언니들이 밉보여선 안 된다고... 공녀가 달거리도 거르고 계속 헛구역질하는 것이, 아이를 가진 것이 아니..."

"네 이년!"

"그만..."

기사가 계속 호통을 치려는 것을 내가 막았다. 그리고 하녀에게 물었다.

"공녀가 달거리를 건너 뛰었다고?"

"그... 공녀 가문의 시녀가 짐을 가져다주며 언제 즈음이라고 알려줬는데 벌써 그날을 2주 정도 넘겼어요. 게다가 잡혀온 지는 한 달이 다 되었는데 아직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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