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태자비의 대역으로 살아남기-109화 (109/126)

109화. 은밀한 전주곡. (3)

2018.08.10.

"세이이이!"

윽, 어린 하녀들 앞에서 위엄을 다 갖다 버린 저 황태자는 뭐야!!! 하녀들이 얼굴이 빨개진 날 보고 미소를 지으며 각자의 자리로 사라져버렸다.

"알비야, 아빠 물어!"

"어? 왜, 내가 뭘 잘못했는데?"

"좀!! 위엄 있는 모습으로 다니지 못해요?"

카일이 등짝을 맞을 위기를 슬쩍 발을 옮겨서 피했다. 아쭈?

"그, 세이한테 맞는 모습도 나의 위엄에는 좋지 않은...! 자, 잘못했어."

틀린 말은 아니니, 흠흠. 앞으로 사람들 앞에서는 자제해야겠어.

카일과 알비와 하는 산책은 즐거웠다. 여기에 우리들의 아이도 함께 하면 좋을 텐데 말이지. 에효. 나는 또 달거리를 했구나...

그때 잠시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서, 설마?

"세이? 왜 그래?"

"아니에요."

아직은 확실하지 않으니까 조금만 더 지켜보자. 그리고, 은밀히 조사를 해야겠어. 카일 모르게.

"무슨 무서운 생각하는 것 같은데?"

"아니거든요?"

"몸은 괜찮아?"

"뭐, 괜찮은 것 같아요.”

일단 한기도 사라졌고, 이번 달거리는 양도 작아서 힘들지 않습니다요. 어, 그런데 양이 갑자기 확 준 것도 병인가? 에이, 뭐, 솔직히 여자 입장에서는 양이 줄면 완전 편하고 좋아서. 찝찝하지도 않고, 배가 우리한 것도 없고.

무엇보다 황궁의 부르기 싫어. 분명 또 그 사람이 올 것 아냐. 그러니 다음 달에도 이렇게 양이 적으면 그때 부르자. 아픈 곳도 없으니까.

"오늘은 몸보신하게 스테이크 아주 두껍게 구워 먹자."

뭐, 혈액 보충의 의미인가요? 나야 환영이지!! 고기 요리는 다 좋아!

"아직 할 일 많죠?"

"응, 조금 바쁘네. 지금도 루카스 몰래 도망친 거야. 세이랑 좀 더 같이 있고 싶은데, 죽겠어."

"나중에 루카스를 재상으로 앉힐 생각이죠?"

"응, 아무래도 그렇지?"

"계속 이러면 루카스님이 파업하거나 도망갈지도 모르겠네요."

"정확하십니다. 비 전하."

윽, 무서운 보자관!! 우리가 여기 있는 줄 어찌 알고 온 거야?

"세이."

카일이 불쌍한 고양이처럼 내게 매달려서 웅얼거렸다. 알비가 그런 카일을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봤다. 너, 아빠가 부끄럽니?

"저기, 루카스님? 곧, 첫눈이 올 것 같은데... 내가 아직 카일이랑 첫눈을 함께 맞아 본 적이 없어서요."

"첫눈은 내년에도 옵니다."

"음,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매년 첫눈 오는 날은 함께 해야하는 아름다운 순간이라서요. 아직 잘 이해가 안 되겠지만, 연인들은 그런 거예요."

윽, 마지막 말은 실수다. 루카스 상처받았어. 솔로의 쓰리고 외로운 마음에 소금을 팍팍 뿌려줬구나.

"저기, 루카스님? 내가 열심히 루카스님의 연인 후보를 알아보고 있으니까요."

"하아... 괜찮습니다. 제 인연은 어딘가에 있겠죠. 이 넓은 제국에 없다면 동대륙에 있을 것이고, 어쩌면 아직 배속에 있나 보지요."

저기 마지막 문장은 범죄 아닌가요? 도대체 몇 살 차이 여자애를 들이려고?

"억지로 제 인연을 찾으려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아, 솔로가 연인의 애틋한 마음을 배려 못했네요. 첫눈과 함께 즐거운 시간 보내시지요. 뭐, 전하의 업무처리 능력이 뛰어나니 괜찮겠지요. 아니, 늦게 오셔도 됩니다. 시간이 남아도는 제가 다 하면 되죠. 같이 첫눈 맞을 사람도 없으니 얼마나 시간이 많은지 모릅니다."

으으윽! 내가 정말 나쁜 짓을 했구나! 루카스 보좌관은 땅을 보며 걷다가 한숨을 쉬고, 다시 하늘을 보고 또 한숨을 쉬며 돌아갔다.

"나, 지금 굉장히 죄를 지은 기분이네요."

"멍멍."

윽, 이러기냐. 알비케라마저 날 비난했다. 상처 주려는 것은 아니었는데 말이야.

"동물한테까지 비난을 받다니."

"크흐흐흑, 알비, 네 엄마 상처받잖아. 하지만 덕분에 우리 이렇게 오붓하게 첫눈을 맞게 됐으니 좋아."

카일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눈송이가 코 위로 떨어졌다. 아이, 차가워. 손을 내밀자 작은 눈송이가 내 손에 내려앉았다.

"꺄아, 예쁘다. 카일, 너무 예뻐요."

알비케라도 떨어지는 눈을 보며 껑충껑충 뛰어다녔다. 입을 벌려서 떨어지는 눈송이를 잡는다고 난리였다. 입에 떨어진 눈송이가 사라지자 어리둥절해 하는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웠다.

나도 눈송이를 잡겠다고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알비케라와 마구 뛰다가 발이 엉켜서 넘어질 뻔했다.

하지만 다칠 걱정은 하지 않았다.

"조심해야지. 애들처럼 뛰놀고 그래?"

역시나 카일이 단단한 팔과 가슴으로 넘어지는 날 안전하게 보듬어 줬다. 고개를 들어 카일을 보는데 카일의 머리 위로 흰 눈송이들이 쏟아져 내리는 것이 눈이 부셨다. 그림 같아.

"첫눈 처음 봐?"

"헤헤헷. 언제 봐도 예쁘잖아요. 아쉽다. 손에 닿자마자 녹으니까."

내 말에 카일은 운디네를 불러 눈송이가 녹지 않게 만들어 줬다. 헤헷, 능력 있는 내 남편 멋지다. 알비는 조금 불만스러워했지만 말리진 않았다. 알비케라와 정령은 서로 조금은 익숙해진 것 같았다.

"우리 봄이 끝날 무렵에 다시 만나서 겨울까지 함께네."

"더울 때도 딱 붙어있었고, 지금도 이렇게 붙어있죠."

"너랑 이제 매년 첫눈 볼 생각하니까 행복해."

씨익 웃는 카일의 입술에 내 입술을 겹쳤다. 차가워진 입술은 서로의 온기를 나누면서 다시 뜨겁게 달아올랐다. 벌어진 입 사이로 떨어지는 눈송이는 우리가 너무 뜨거워지지 않게 막아주는 역할이었을까?

눈송이를 나눠 먹는 맛이 너무 달달했다. 눈은, 레몬 사탕 맛이었어. 카일이 여기 오기 직전에 또 레몬 사탕을 먹었나 봐.

알비케라는 이런 우리를 보며 익숙한 듯 잠시 자리를 피해줬다.

과하지 않게, 적당히 예쁘게 내리던 첫눈은 점차 뜨거워지는 우리 탓에, 몸에 닿기도 전에 녹을 뻔했다.

"좋아!! 아이디어 충전 완료!"

카일과의 데이트로 상승한 창의력은 아바마마의 생신 때 보여드릴 쇼를 정하는데 큰 힘이 되었다. 후훗, 마음에 드시면 좋겠네.

"오, 폐하께서 좋아하실 것 같아요."

에이린이 내게 차를 내어주다가 감탄해 주었다. 칭찬은 언제 들어도 좋다니까.

"그렇지? 역시 난 대단해, 호호호."

"네, 누님 대단합니다. 황제 폐하뿐 아니라 모두가 감동받겠네요."

알리페르라면 좋아할 줄 알았어. 그런데 순간 에이린의 표정이 썩어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칭찬해 줄 때는 언제고!! 네 예비 남편이 이런 것 좋아하니 걱정되니?

그런데 지금 이 방에 나랑 에이린, 알리페르만 있는 거지?

"에이린, 알리페르. 나 은밀하게 지시할 일이 있는데."

에이린은 내 지시를 듣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알리페르의 미간은 상당히 좁아졌다.

"서, 설마요?"

"그때 유리아가 말한 소문 기억나지? 그래서 꼭 확인해야 해. 둘이서 은밀하게 알아보고, 가능한 자들은 신병을 확보해 놔."

"네. 알겠어요."

"아버지나 카일이 알면 화나서 난리 칠지도 모르니까 조심하고."

"매형께는 말씀하지 않을 겁니까?"

"응? 해야지. 할 건데..."

생각을 조금 더 정리하고 나서 윤곽이 잡히면 카일에게 말할 참이었다. 괜히 미리 말하면 그를 믿어주지 않는 것처럼 보일까 봐...

"일단은 증거부터 잡고 나서. 공녀도 더 관찰해야 하거든."

"알겠습니다."

에이린과 펠이라면 믿고 맡겨도 되니깐, 두고 봐야지.

콘스탄트 공녀... 내가 생각하는 쪽이 맞다면, 황후가 저지르려는 짓은! 하아, 끔찍해. 설마 권력 때문에 그렇게까지 할 작정인 거야?

마음이 무거워졌다. 권력에 집착하는 여자와 사랑에 미친 여자의 조합, 좋지 않아. 공작이 황후만 만나고 돌아 간 것도 얼추 이해가 되는 것도 같고.

그런데 카일을 어쩔 생각이지? 카일이 받아들일 리가 없잖아. 인정하지 않을 텐데, 흐음...

아, 머리 아파. 겨우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연회 준비를 마쳤더니, 더 골치 아픈 일들이 대기하고 있었어.

에효, 그때 케이를 만나는 바람에 내가 황궁으로 끌려와 뭔 고생이래. 그때 바짓가랑이를 잡아서라도 못 돌아가게 막았어야 했어.

"비 전하, 만찬 준비가 끝났습니다. 전하도 곧 도착하신대요."

그래, 그래. 일단 맛있는 것 먹고 기운차리자.

복도를 지나가면서 창밖을 보니 어느새 첫눈이 새하얗게 세상을 덮고 그쳐 있었다. 첫눈 치고는 많이도 내렸네. 차가운 달빛과 마법등에 반짝반짝 빛나는 눈꽃들은 너무 예뻤다.

"알비케라를 풀어놓으면 누가 눈인지 개인지 모르겠네."

"너무 예뻐요."

"내일 해가 뜨면 녹겠지?"

그건 좀 아쉬운데. 그래도 겨울은 아직 기니까, 예쁜 눈은 자주 보겠지. 아, 궁인들은 힘들겠다. 궁의 가장 말단 하녀와 하인들은 벌써 길가의 눈을 쓸고 있었다.

"길가에 눈 청소가 끝나면 추울 테니까 궁인들에게 따뜻한 스튜 잔뜩 끓여서 바로 먹을 수 있게 조치해줘. 빵도 식은 것 말고 뜨끈한 것으로 먹이고. 요리사들에게는 따로 수당 챙겨주고."

"네, 비 전하."

응? 왜 그렇게 쳐다보는데? 펠과 에이린의 표정이 자기들끼리 싱글벙글이었다.

"뭐 문제 있어?"

"아니요. 저희도 비 전하처럼 자애롭게 아랫사람들 대해야겠다 싶어서요."

낯부끄럽게... 흠흠.

"세이, 어? 얼굴이 왜 빨개? 기사 중에 혹시 잘생긴 놈이라도 있어?"

윽, 왜 또 이러냐? 시도 때도 없는 이 주책바가지!! 내가 제일 잘생긴 남편 두고 딴 남자보고 얼굴 붉힐 사람이야?

"네, 있어요."

"뭐? 어느 놈이야? 당장 잘라야..."

"내 동생이요."

결국 카일의 입은 다물어졌다. 그리고 나의 잔소리 폭격이 이어졌다.

"제국, 아니 대륙에 당신보다 잘생긴 사람 없고, 내가 당신 말고 딴 남자보고 얼굴 붉힐 일 없으니까 헛소리 좀 하지 마요!!"

"그, 잘못했습니다. 그냥 나 말고 다른 사람 때문에 얼굴 붉어지는 귀여운 모습 보여주기 싫어서..."

음식을 나르던 시종과 시녀들이 고개를 들지 못했다. 이제는 다들 익숙해져서 그저 고개를 숙이고 자연스럽게 웃음을 참는구나.

어휴, 이젠 포기했다.

"자, 세이. 아 해."

카일의 예고대로 오늘은 아주 두툼하기 그지없는 스테이크가 핏물을 가득 머금고 있었다. 그런데, 음, 이번에는 거의 피를 흘린 것이 없어서 이렇게 많이 먹어야 하나 싶었다.

"레어는 좀..."

"안 돼. 세이는 많이 먹어야 해."

나는 미디엄이 좋은데!! 아니 흘린 만큼 피를 먹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왜 하필 레어인 건데?

하지만 다정한 눈빛으로 포크를 들고 있는 카일의 성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입에 넣었다.

윽, 피비린내. 너무 역하잖아. 억지로 우물우물하는데 한입만 먹고도 체할 것 같았다.

"욱."

"왜? 맛없어?"

"피 냄새가 너무 많이나요. 그냥, 미디엄으로 다시 구워주면 안 돼요? 난 도저히 레어는 못 먹겠어."

두 번째 고깃덩이를 끝내 코를 막고 고개를 돌리자 어쩔 수 없이 카일이 다시 고기를 내어오라 시켰다.

"레몬주스 좀 가져와줘."

"또 레몬주스야?"

"입 상쾌하게 하는 데는 최고인걸요?"

"그 시큼한 것을 무슨 맛으로 먹는 거야?"

"설탕 들어있어서 먹을만해요. 그리고 당신도 레몬 사탕은 좋아하잖아요. 레몬주스 먹으면 당신 냄새나서 더 좋은데."

새로 내어 온 고기도 약간의 피비린내가 받쳤다. 아마 앞에 먹은 고기의 여파가 큰 탓이겠지? 이번에도 잘 못 먹으면 카일이 걱정할 테니까 꾸역꾸역 역겨운 것을 참고 맛있는 척 먹었다.

그리고 결국 체했다.

"세이 괜찮아?"

"그저 소화가 안 된 것밖에 없어요. 걱정 안 해도 돼요."

약 대신 레몬 버베나를 진하게 우려서 홀짝홀짝 마셨다. 이번에도 레몬이네. 그게 어쩐지 웃음이 났다.

"어째서 나는 차마저 레몬향을 찾는지 몰라. 다른 대체제도 많은데 말이야. 카일의 향에 중독된 거야."

"오늘은 나보다 세이에게서 레몬향이 더 나는 건가? 그 향 다시, 내가 훔쳐 와야겠는데?"

"됐어요. 나 피곤해요. 건드리지 마."

"쩝."

겨울밤은 앞으로도 길 거니까, 오늘은 좀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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