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은밀한 전주곡. (1)
2018.08.07.
후작부인의 장례식이 끝난지도 어느덧 일주일이 지났다.
카일과 루카스 보좌관의 정보망과 두뇌를 총동원한 결과, 아버지는 후작부인이 죽기 직전 이혼이 확정되었다. 후작 부인의 입장에서는 억울했겠네. 후작 부인으로 남고 싶었을 텐데...
덕분에 몬테 공작은 어마 무시한 배상금을 내게 되었고, 별 의미 없는 이의신청으로 그 시간만 늦추게 되었다.
그리고 황후파 귀족들의 재판이 드디어 시작되었다. 아쉽게도 마법사가 아직 과거의 일을 완전히 불지 않아 아직 아주버님을 해친 주범은 응징하기 힘들었지만, 황후파의 날개와 손, 발은 다 꺾여 숨만 쉬게 될 것이다.
그리고 콘스탄트 공녀에 의해 황후파의 명줄은 끊길 것이다.
"그러니 신년제를 화려하게 치를까 합니다."
"아바마마의 탄신연까지 이어지는 일주일이 하이라이트가 되겠네요."
반역죄의 재판으로 어수선해진 제국의 분위기를 신년제로 끌어올리자는 것이 보좌관의 생각이었다.
이미 준비는 철저히 하고 있었지만 더 화려하고 치밀하게 준비해야겠군. 오랜만에 바쁘겠어. 실력 발휘를 해야지, 호호호.
루카스는 의욕에 찬 나에게 잔뜩 일거리를 안겨주며 미소 지었다. 사악해!!
"비 전하와 일을 할 생각을 하니 기쁘군요."
윽, 저 애인이 없어서 일 중독이 됐는지, 일 중독이라 애인이 없는지 알 수 없는 인간의 미소! 소름 끼쳐.
추가할 물품과 예산들을 확인하고, 체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황후의 징계가 풀렸다고 해도 폐하 때문에 아직 자숙 중이라 모든 일은 내 차지였다.
카일의 탄생연 준비는 애들 장난이었어. 힘들어!!
"힘들어? 도와줄까?"
"싫어요. 나중에 내가 황후가 되려면 이 정도는 스스로 해낼 수 있어야 한다고요. 건들이지 마. 다 내가 할 거야."
내가 으르렁거리며 카일의 접근을 막자 카일은 조금 섭섭해하면서도 기특한 표정을 지었다.
"멋지네, 우리 세이."
이리저리 바쁜 와중에 북부 왕국에서는 나쁜 소식이 전해졌다. 드디어 2왕자가 1왕자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했다고 한다.
그래서 카일은 자신의 수하들과 아버지, 프리케를 모아서 회의에 들어갔다.
"누님, 너무 걱정은 마세요."
"으응. 하지만, 음... 진짜로 전쟁이 나면 아버지와 비스 기사단이 제일 먼저 나서게 되겠지? 너도 전쟁터에 가게 될까?"
"현재 제 임무는 누님의 호위가 우선이라서요."
"응. 고마워. 그런데 몸은 괜찮아졌어? 더 쉬라니까."
알리페르는 후작 부인의 장례가 끝나고 이틀 뒤 바로 복귀했다. 바보같이 말을 안 들어.
"그렇게 몸 혹사하다가는 소드마스터도 못되고, 정령들이랑 계약도 못 한다?"
"매형이랑 프리케가 몸 혹사시켜야 된다고 했는데요?"
이 인간들이!! 내 귀한 남동생이자 우리 가문의 유일한 후계자를 잡을 일 있어??
"그래서 실력이 늘었어?"
"매형이 주셨던 검을 조금은 쉽게 휘둘러요. 아직 완벽하진 않지만."
알리페르는 항상 자신이 쓰던 검과 카일이 생일선물로 준 검을 같이 들고 다녔다. 그리고 날 호위하는 틈틈이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기특하네, 참 아나이스는 잘 지내?"
"기사단의 기사들에게 수호신처럼 떠받들어지고 있어요. 점점 거만해지고 있네요. 그래도 제게는 순종합니다."
잘 지내는구나. 걔는 어쩐지 어딜 가서든 잘 적응할 것 같았어.
그사이 알비케라는 내가 구조한 동물들과 시끌벅적하게 지내고 있었다. 뭐, 알비는 불만스러운 표정이었지만. 어쩐지 아나이스를 그리워하는 알비였다.
"참, 어제 작은 누님께 편지가 왔다면서요?"
"응."
몇 달 전에 보낸 편지의 답장이었다. 안타깝게도 그녀의 편지에는 제 어미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는 없었다.
그 아이는 제 어미가 목숨을 끊은 것을 알게 되면 펠보다 더한 죄책감을 느끼겠지? 후작 부인의 죄를 밝힌 것이 스타티나였으니까.
"너 같은 숙맥이 에이린과 사귄다니까 놀라더라. 그리고..."
"그리고요?"
"진도 어디까지 뺐냐고 묻던데? 키스 이상이냐고?"
알리페르의 얼굴이 갑자기 빨개졌다. 뭐야 이것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저지른 거야? 호오오.
"흐으으음, 얼른 청혼서 보내지그래?"
"안 그래도 이미 썼습니다. 아버지께 허락받고 보내려고요."
"진짜? 꺄아아, 너 프러포즈는 했어?"
"아니요. 아직."
"꼭, 화려하고 예쁘게 해줘. 그거 마음에 오래 남는다? 여자들에게는 단 한 번 밖에 없는 프러포즈가 얼마나 중요하다고! 평생의 자랑거리야."
"아, 누님은..."
"나는 받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으니까... 음... 난 괜찮아."
알리페르와 에이린에게 어떻게 프러포즈를 하면 좋을지 이것저것 의논을 했다. 내 일도 아닌데 즐겁네, 헤헷.
그러고 있는데 카일이 아버지와 함께 응접실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런 카일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북부 왕국 정세가 많이 나쁜가?
안절부절 한 것도 같고 왜 저러지?
"아버지, 카일, 어서 와요. 안 그래도 두 사람에게 할 이야기가 있었는데."
"뭐, 뭔데?"
왜 놀래고 그러는데? 카일이 자신을 부르자 움찔했다. 죄지은 것이 있나 보군. 조금 있다가 꼭 캐물을 테다.
"스타티나가 3월에 온대요."
"보고 싶어 하셨는데 잘 됐군요. 저도 삼 남매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보면 행복할 것 같습니다."
"네, 너무 좋아요. 그런데... 아직 그 아이가 그분 소식을 모르는 것 같아서 마음이 무거워요. 상처받지 않을까..."
내 말에 아버지도 알리페르도 표정이 조금 가라앉았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알리페르였다.
"작은 누님은, 저보다 더 강한 분이니 충분히 극복하실 겁니다."
"네, 비 전하. 걱정 마십시오."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우리에게는 이것뿐 아니라 해결할 일이 많았다.
"몬테 공작은 순순히 재산을 내어 놓는데요?"
"이의 신청은 들어왔습니다만, 폐하께서 단호하게 거절하셨다 들었습니다. 직접 알현하고 호소했나 보던데, 노호성을 치며 꾸짖었다네요. 그리고 전하의 기지로 어쨌든 살아있을 때 이혼이 성립되어 몬테 공녀로 돌아갔으니 쉽게 책임을 벗어나기 힘들 겁니다."
"보상 받는 영지를 정식으로 승계 받으면 이제 공작가가 되는 거예요?"
내가 살짝 기대하며 말했다. 아닌척했지만 콘스탄트 공녀가 공작 가문의 여식이 아니라며 은연중 무시하는 듯한 태도가 거슬렸었다.
"음, 당장은 아니고, 원치 않아도 될 것 같은데? 공을 세워서?"
아, 설마 전쟁을 말하는 것은 아니겠지? 내가 착 가라앉은 표정을 짓자 다들 나를 달래느라 정신이 없었다.
어차피 왕국의 내부 상황이 좋지 않아 대규모 전쟁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내부 반란을 진정시키다 자멸할 수도 있으니 전쟁 걱정은 안 해도 된다 등등.
기사 가문의 숙명이라는 것은 알았다. 언제든 제국의 검이 되고 방패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심지어 카일조차도 제국민을 위해 전쟁에 참여해야 할지 몰랐다.
"최대한 외교적으로 해결하려고 주시 중이야. 대신, 음... 프리케가 좀 더 빨리 떠날지도 몰라."
카일이 다시 내 눈치를 보며 말해주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프리케가 북부 왕국에 갔다가 미치광이 왕에게 봉변이라도 당하면 어쩌지?
"걱정 마, 그의 든든한 지지자들이 곁에서 지켜줄 거야."
그래, 괜찮을 거야. 소드마스터잖아. 쉽게 당하진 않겠지.
카일은 현재 상황에 대해서 이것저것 많이 알려주었다. 2왕자가 왕위를 찬탈하는 과정에 왕국의 수도는 많은 화재와 약탈로 엉망이라고 했다.
이미 겨울이라 식량 수급 등이 좋지 않아 당장의 전쟁은 무리일 것이라 했다. 단지 조금 불안한 것이 제국에서 자금 지원을 받은 흔적이 있다고 했다.
"당연히 황후파겠죠?"
"황후의 움직임을 막아 뒀지만, 공작이 어디서 움직일지 몰라서 말이지."
콘스탄트 공작은 딸이 감금된 뒤 바로 황궁을 찾아왔었다. 그리고 황후를 만나더니 자식의 죗값을 철저히 물어 달라며 청원을 하고는 다시 낙향했다.
우리는 황후와 공작이 뭔가 모종의 거래를 한 것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었다. 조금 더 감시 인원을 늘리고 대비를 한다면 별일 없겠지.
앞으로의 일을 조금 더 의논 한 다음 아버지와 알리페르는 돌아갔다.
"저기, 세이, 있잖아."
"그러고 보니 왜 계속 내 눈치 봐요?"
"저기 프러포즈... 내가 나중에 네 새 결혼반지와 함께 꼭 정식으로 다시 할 거니까 마음 상해있지마!"
"응? 뭐야, 또 훔쳐듣고 있었어요? 이그!"
"너의 모든 것을 알고 싶은걸."
내가 혼내자 또 주눅이 드는 카일이었다. 피식 웃음이 났다.
"나 당신 무릎 위에 앉을래."
내가 카일의 무릎 위에 자리 잡자 카일은 자연스럽게 허리를 안아줬다. 그의 무릎 위에 앉자 내 머리가 카일보다 머리가 살짝 더 올라갔다.
"카일, 왜 이렇게 사랑스러워요? 어쩜 이렇게 귀여울까?"
솔직히 사랑하지 않는 사람의 집착이라면 무섭고 끔찍하고 싫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제일 사랑하는 남자가 내게만 신경 쓰고, 집착해주는 거라서 나쁘진 않았다.
물론 가끔 자유도 필요하지만.
"대신들이 들으면 깜짝 놀라겠네. 내가 귀엽다니."
"내 눈에만 귀여우면 되거든? 그리고, 언젠가는 당신이 프러포즈 해준다고 했지만, 음, 우리는 이미 이렇게나 끈적하고 뜨거운 부부인데 안 해도 되거든요?"
내가 카일의 무릎 위에서 카일의 셔츠 단추를 하나하나 풀면서 이야기하자, 카일이 침을 삼켰다.
"안 돼, 나 꼭 할 거야. 나 이미 멋지게 계획해놨다고. 기대해도 좋아."
"좋아요. 기대할게."
나는 건성으로 대답하고는 카일의 셔츠 단추를 마저 풀었다.
"그런데 지금은, 일단 끈적한 남편님이 더 기대 되는데 말이죠?"
나의 말이 끝나자 마자 카일이 내 입술을 덮쳐오기 시작했다. 입술만 덮칠 리가 없잖아? 아, 미치겠다. 난 내 남자의 이런 박력이 좋더라.
"으아, 배고파!"
"너무 열심히 해서 그래. 요즘 세이가 너무 적극적이라 내 체력이 모자랄, 읍!"
시녀들이랑 시종들이 듣고 있는데!! 사실 요즘 업무 스트레스 때문인지 피곤해서 잠이 늘었다. 그래서 만사가 귀찮았지만, 카일이 너무 귀여워서 덮치지 않을 수가 있어야 말이지. 그렇다고 그걸 막 말하면 내가 부끄럽잖아!
"핥지 마요. 자극되니까."
내가 손을 떼자 아쉬운 듯이 카일이 입술 주변을 훑었다. 아씨, 왜 저 모습이 섹시하기까지 한 건데? 피곤함을 이기게 만드는 내 남자의 매력이라니! 밥 먹고 한 번 더 뛸까보다.
"으음. 그런데 오늘 오믈렛 좀 비리지 않아요?"
평소에는 신경쓰이지 않던 달걀 특유의 냄새가 거슬렸다. 배고팠는데, 입맛이 뚝 떨어졌다.
"그래? 다시 내오라고 할까?"
"그 정도는 아니고, 먹을만해요. 나, 오렌지, 아니 레몬주스 부탁해."
"시큼하지 않아?"
"입안을 상큼하게 씻어내려고요."
새콤한 것 먹으면 입맛도 살아날 것 같단 말이지. 좋아, 달걀 비린내 정도로 식욕을 버릴 순 없다. 마구 먹고 다시 카일과 달릴 테다!
"신년제 준비는 끝나가?"
"훗, 이래 봬도 나 꽤 괜찮은 황태자비거든요?"
신년제에 열릴 데뷔탕트 준비도 다 끝났지롱. 올해는 남녀 합쳐서 한 번만 열면 되니까 편했다. 게다가 카일의 후궁 간택 같은 걱정이 없으니 영애들에게는 더 즐거운 데뷔탕트를 만들어 줘야지.
그런데 이집 식구들은 어째서 생일이 큰 행사들과 겹치냐고, 연회 준비하다 등골 휠뻔했네. 아바마마의 탄신연도 열심히 준비했다.
흠, 내 자식들은 생일이 행사들과 겹치지 않게 잘 조절해서 낳아야지.
"내가 도울 틈도 안 주고 너무 잘하는 것 아냐?"
카일의 칭찬에 기분이 좋아졌다. 열심히 일한 보람을 느꼈다고나 할까? 카일의 칭찬에 꼭, 키스를 받은 것처럼 살짝 달아올랐다.
"어엇, 세이 얼굴 새빨개졌다. 흠, 내 칭찬이 그리도 좋아?"
그래 좋다, 좋아 이 남자야! 그걸 꼭 다른 사람들 보게 여기서 떠들어야겠니? 눈치 없이 계속 칭찬을 이어가는 바람에 손부채질로 얼굴에 오른 열기를 시켜야만 했다.
"자, 오늘 모든 공식적인 일을 끝냈으니 다시 오붓한 시간 보내볼까?"
이미 충분히 보냈는데, 흐흠. 좋아, 다시 불태워 볼까?
"전하, 잠시 의논 드릴 일이 있습니다."
우리의 오붓한 시간을 방해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테일러경이었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지? 걱정스레 그를 불러드리자 테일러경은 곤란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무슨 일이야?"
"그, 콘스탄트 공녀의 가문의 시녀가 황궁을 찾아왔답니다."
"무슨 일로?"
"공녀의 달거리 때가 되었는데 아무것도 챙겨보내지 못했다며 챙길 수 있게 해달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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