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태자비의 대역으로 살아남기-105화 (105/126)

105화. 후련함 vs 공허함. (1)

2018.08.04.

아아아, 결국에는... 사실 지난번의 만남에서 어느 정도는 무너진 그녀를 확인했기에 어쩌면 이런 날이 올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마지막에 보인 독기를 보고, 나와 더 싸울 줄 알았는데...

나는 급히 알리페르의 안색을 살폈다. 평온을 가장한 그 아이의 얼굴에 짙은 그늘이 자리 잡았다.

"펠? 괜찮아?"

"나약하신 분이었네요. 끝까지, 자식들보다는 자신만을 생각하다 가는군요."

뭐라고 위로해 줄 수 없었다. 후작부인은 나에게는 원수였지만 내 사랑하는 남동생의 어머니이기도 했으니까.

죽었다고, 내 마음이 속 시원하다고 말할 수 없는 이유였다.

"저는 괜찮습니다. 그러니 누님께서는 그리 슬픈 눈을 하지 마십시오. 벌도 제대로 받지 않고 도망친 제 어미를 마음껏 욕하셔도 됩니다."

"펠!"

"그래도 제가 장남이니 장례는 제가 치러야지요. 누님을 바래다드리고 가겠습니다."

"바래다주지 않아도 돼. 그러니까 먼저 가."

"아닙니다. 제 소임은 해야지요."

"펠!"

고집불통!! 평소에는 순하고 착했던 내 동생이 갑자기 고집을 피우기 시작했다.

제 어미의 잘못을 다 자신의 잘못으로 스스로 짐을 지우는 느낌이었다. 그럴 필요 없는데, 네가 내게 잘못한 것은 없는데.

후작부인은 참으로 나쁜 어미였다. 차라리 죗값을 제대로 치렀다면 펠이 이렇게 대신 아파하지 않았을 것이다. 정말로 자식을 사랑하는 어미였다면 자식들에게 죄책감을 떠넘기지 않았을 것이다.

방금 공녀를 보고 와서일까? 비뚤어진 사랑의 결과가 더욱 덧없고, 안타깝게 느껴졌다.

내 인생이 비록 후작부인에 의해서 갈가리 찢기고 고통받았지만, 나는 내 동생에게 그 책임을 떠넘길 마음은 없었다.

"펠, 네가 모시는 레이디로서 말할게. 지금 내 호위 기사가 맡아야 할 업무는 나의 호위 업무가 아니야. 퇴궁해서, 네 어머니의 아들로서의 일을 먼저 해. 이건 부탁이 아니라 명령이야."

나의 단호한 말에 펠이 고개를 숙였다. 나는 그런 펠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이미 여러 번 말했지만 나한테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그리고 내 앞에서 마음껏 슬퍼해도 돼. 누가 뭐래도, 어쨌든 네 어머니잖아."

"누님... 흐윽..."

옆에서 에이린도 눈물을 뚝뚝 흘렸다. 이렇게 힘이 들 때, 그래도 네 곁에서 널 지켜줄 연인이 있어서 다행이야.

"에이린, 휴가 줄 테니까, 너도 펠과 함께 가. 펠을 곁에서 지켜주고 위로해줘. 네 연인의 누나로서 부탁할게."

펠은 계속 내 호위를 걱정했다. 아이참, 나보다 자신을 걱정하지. 분명 내 진짜 호위님은 소식을 듣고 내 앞에 짠하고 나타날게 뻔한데.

"세이, 처남!"

봐, 오잖아. 걱정 따위 하지 않아도 돼, 알겠지?

"처남, 얼른 가 봐. 세이 걱정은 말고. 우리는 마지막 날에 찾아가는 것으로 하지."

"굳이 누님을 데리고 오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건, 세이의 결정에 맡겨야지. 내가 결정할 수 없어."

카일은 내 눈을 보며 말해줬다. 알리페르는 빨개진 눈으로 에이린과 함께 떠났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보는 내 마음이 착잡하게 가라앉았다.

"그런데, 어째서 여기 있는 거야?"

"공녀를 보러 왔어요."

"그 미친년이 널 해코지하면 어쩌려고?"

역시나 카일이 펄쩍 뛰었다. 예상한 반응이었다. 이러니 말하지 않고 왔지. 과보호쟁이.

"황후와 있었던 일을 캐 보려고 했죠. 펠도 곁에 있었는걸요."

나는 카일에게 그녀와 있었던 일을 들려줬다. 당연히 카일은 펄쩍 뛰었다.

"단단히 미쳤네!! 뭐 내 아이라고?"

"흐음. 그렇다네요."

"설마 믿는 것 아니지?"

"당신이 설령 사고를 쳤다 해도 이틀 만에 배속에 아기가 들어앉지는 않았겠죠. 단지, 조금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요. 미친 것이 맞는지, 그리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시감이 있었어요."

알리페르에게는 말하지 못한 찝찝함이 사실 있었다. 평소의 그녀와는 다른 기운이랄까? 낯설었다. 아니, 어디선가 느껴본 것 같기도 하고...

내가 심각하게 고민하자 카일이 슬금슬금 내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것이 솔직히 귀여웠다. 그러게 왜 알면서도 야한 짓 즐기겠다고 와인을 퍼마시고 그랬나 몰라.

사실 카일은 피해자였다. 속아넘어갈 빌미를 주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게 카일의 잘못은 아니었다. 피해자가 잘못해서 이런 일이 생겼다고 해선 안 되는 것 아닐까? 작정하고 나쁜 짓 한 사람이 잘못이지. 준 적도 없는 신호를 혼자 받고 착각하고 카일을 괴롭힌 공녀의 잘못이라는 것 알고 있었다.

내가 그런 일을 당했을 때 카일은 어떤 경우에도 내 편일 것이다. 그리고 내 의지가 아니라는 것을 믿어줄 것이다. 내 탓이 아니라고 해주겠지. 내 일이라고 생각하면 그 말이 가장 큰 힘이 될 것 같았다.

"눈치 보지 마요. 당신 잘못 아닌 것 알아요. 그리고 당신의 결백을 믿고 있고."

"응, 응. 고마워, 믿어줘서, 너무 고마워."

카일이 허리를 숙이고 내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마음 고생했겠지. 나는 카일의 머리카락을 정리해주며 쓰다듬었다.

"공녀가 안쓰러울 만큼 당신한테 집착하고 미쳐가고 있더라고요."

"그 여자를 동정하지 마."

"동정이 아니에요. 솔직히 무서워요. 그런 여자가 또 있을까 봐. 이번에 제대로 정리하지 못하면 또 당신과 나 사이를 방해하려 할까 봐."

"이번에 황후파들과 함께 확실하게 처리할 거야. 네가 걱정하는 일 더 이상 생기지 않도록."

"응, 꼭 그래줘요."

카일이 깊게 숨을 들이 마신 뒤 고개를 들었다. 내가 너무 좋아하는 반짝이는 노란 보석이 나를 향했다. 나만 바라보고 나만 걱정해주는 카일의 마음이 오늘도 고스란히 느껴졌다.

"후작부인의 장례식은 가고 싶지 않으면 가지 않아도 돼."

"스타티나가 못 가잖아요. 나라도 그 아이를 대신해서 가야죠. 그리고 내 과거로부터의 완전한 이별이니까... 진짜 끝이라는 것을 눈으로 확인할래요."

"더 고통받게 괴롭히다 죽였어야 했는데!"

나보다 더 진심으로 화내주는 카일의 모습에 기분이 좋아졌다. 이번에는 내가 카일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카일에게서만 나는 특유의 향이 있었다. 시트러스 하면서도 상쾌한 느낌. 카일이 늘 쓰는 향수였다. 카일이 왜 조금 전 크게 숨을 들이 마신 것인지 알 것 같았다.

좋았다. 카일의 향이. 이 향을 제대로 음미하고 향을 묻혀갈 수 있는 여자가 나밖에 없다는 사실이 너무 좋았다.

저 탑 안에 갇혀있는 여자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지.

"당신이 온전한 내 편이라서 다행이야."

"너도 내 편이잖아."

"후작부인은, 이미 아버지께 본모습을 들킨 날부터 삶이 지옥이었을 거예요. 차라리 저 탑에 갇힌 공녀처럼 정신을 놓을 수 있었다면 편했겠죠."

하지만 그녀의 정신은 멀쩡했다. 아버지께 버림받고, 자식들에게 외면받은 삶은 이미 충분히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내가 복수하지 않았어도 나락으로 떨어졌는걸.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사랑해주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언젠가 사랑이 식어서 혹시나 당신이 날 외면하면 망가져버릴 거야."

"절대로 그럴 일은 없어. 정령들에게 맹세할게."

"먼 미래에도 정말 당신은 지금처럼 이렇게 뜨겁게 사랑해 줄 거예요?"

"영원은 약속하는 것 아니라 했지만, 나는 할 수 있어. 죽어서도 내 심장은 네 앞에서만 뜨겁게 뛸 거야."

사랑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던데, 언젠가는 식어버리고 차갑게 변한댔는데...

그런데 카일의 말에는 묘한 믿음이 갔다. 7년 전, 짧은 만남의 약속도 지킨 남자니까.

"응, 믿을게요. 나도 그럴 거고."

탑 입구에 세워둔 마차의 계단에 오르자 카일과 눈높이가 맞아졌다. 나는 슬쩍 탑을 올려다 본 뒤 보란 듯이 카일의 목에 팔을 감았다.

"지금 영원한 사랑의 맹세를 할까요?"

"키스로는 부족하지만, 나야 좋지."

나는 그대로 카일의 입술을 훔쳤다. 언제나 격렬한 우리였지만 오늘의 나는 더 열심히였다. 그의 입에서 옅은 신음소리가 날 만큼, 그가 견디기 힘들 만큼 카일의 입술을, 뜨거운 숨결을 내 것으로 만들고 나서야 직성이 풀렸다.

"모레 장례식장 갈 때까지는 네 방에 칩거하는 거 어때? 어머니를 잃고 시름에 빠진 황태자비 연기를 위해서."

"그리고 그런 황태자비를 위로하기 위해 황태자도 같이 칩거하려고?"

"정확해!"

"푸흡. 나쁘지 않네. 기왕이면 당장 하죠?"

카일은 슬픔에 빠진 황태자비를 마차에서부터 위로하기 시작했다. 입술로, 손으로, 그는 나의 구석구석을 다정하게 어루만졌다. 만월궁까지의 거리가 짧지만 않았어도 하고 싶은 일을 저질렀을 우리였다.

궁으로 돌아온 뒤 눈물 연기를 선보이는 나를 안아든 카일은 겉으로는 나를 위로하는 표정으로 계단을 올랐다. 사실, 속으로는 급해서 어쩔 줄 몰랐겠지만.

나도, 뭐, 급했지. 시녀들을 물린 우리는 서로의 모든 것을 탐하기 시작했다. 카일을 노리는 미친 여자를 마주한 탓이었을까? 나의 전투력이 상승했다.

"요기도 쪽, 요기도 쪽, 다 내 거야."

내가 그의 단단한 근육 곳곳에 나의 흔적을 남기자 카일이 신음을 울리며 나를 덮치려 했다. 그런 그의 몸 위에 올라탄 나는 카일의 양팔을 잡고 눌렀다.

"흐으응, 오늘은 내가 당신 덮칠 거거든요. 꼼짝도 말고 기다려요."

"으음. 기대해도 돼?"

카일의 맑은 노란 눈이 조금 탁해졌다. 욕망으로 가득 차 흐려진 그의 눈빛에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이런 내가 먼저 당하겠어! 하지만 오늘은 내 차례라고!

"당연하지, 그러니 얌전히 있어. 카일."

나는 카일을 덮쳤다. 그의 온몸은 내 차지였다. 나만이 만질 수 있고, 즐길 수 있는 것이었다. 결국 만족스러울 때까지 우리는 서로와 이어져 떨어질 줄 몰랐다.

나의 과거로부터 완벽한 이별을 축하하기라도 하듯, 내 남자를 노리는 여자에게 경고라도 하듯. 그렇게 우리는 밤새 하나가 되었다.

잠에서 깬 나는 내 침대가 아닌 꽃이 만발한 작은 동산 위에 앉아있었다. 커다란 나무 그늘 아래에서 놀고 있는 내 주변에는 파랑, 초록, 빨강, 노랑 빛무리가 맴돌고 있었다.

"응? 뭐지? 가보자."

가녀린 도움을 청하는 소리에 다가간 곳에는 작고 하얀 새가 날개가 다친 채로 웅크리고 있었다.

내가 손을 내밀자 작은 생명은 꾸물꾸물 내 손으로 기어올라왔다. 소중히 보듬어 다시 나무 아래로 간 나는 빛무리 중 하나에게 말했다.

"임베르, 부탁해."

푸른빛이 휘감은 자리에는 어느새 커다란 흰 앵무새가 앉아있었다. 그 앵무새는 내 품에서 재롱을 피우며 놀기 시작했다. 새는 내 곁을 떠날 줄 몰랐다.

그 아이가 날면 뛰고, 내가 앉으면 그 새도 내 곁에 내려앉았다. 함께 맛있는 것을 나눠먹고, 내가 알려주는 말을 따라 하고, 우리는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시리도록 파란 하늘 위로 나의 새가 날아올랐다. 평화롭고, 아름다운 시간이었다.

그런 평화를 깨는 소리가 들려왔다.

휘잉,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나무에 앉아있던 새를 누군가 검으로 베었다. 나의 새하얀 새는 피로 물들기 시작했다. 그런 새를 나는 내 가슴으로 껴안았다.

새의 피가 내게 물들기 시작했다.

"안 돼!! 죽으면 안 돼! 내가 지킬 거야!!"

내 말 때문일까? 새의 상처가 내게 옮아온 듯 등에 화끈한 느낌이 나기 시작했다. 나는 새를 안아들고 죽어라 뛰기 시작했다.

나와 새를 쫓는 누군가가 있었다. 나의 목숨도 이 새의 목숨도 지키려면 달리는 수밖에 없었다. 벼랑 끝에 몰린 나는 선택만이 남았다. 이 새를 지키기 위해, 절벽으로 한 걸음 내딛는 것 외에는 선택할 것이 없었지만.

발을 내딛는 순간, 한 사람의 얼굴만이 떠올랐다. 내가 죽도록 사랑하는 사람, 나의 아기 새를 꼭 안겨주고 싶은 남자. 나의 빛, 카일!!

떨어지는 생경한 느낌에 몸서리를 치는데 나를 따스하게 받아드는 사람이 있었다.

"세이, 괜찮아?"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