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악녀들과의 신경전. (2)
2018.08.02.
"누님, 꼭 가셔야겠습니까?"
내가 공녀를 만나겠다고 하자 펠이 만류했다. 당연히 이해했다. 카일에게도 해를 끼친 여자인데 내게 무슨 짓을 할지 어찌 알겠어?
하지만 황후의 모습을 보니 무슨 꿍꿍인지 알아내야 할 것 같았다. 모르는척하고 넘어갈 순 없잖아.
"네가 날 지켜줄 거잖아."
조금은 해맑게, 알리페르에 대한 신뢰를 가득 담아서 미소 지어줬다. 펠은 내 미소에 어쩔 수 없이 동의했다.
"매형께 혼나면 누님이 책임지셔야 합니다."
"걱정 마. 그 인간은 나한테 약점 잡힌 게 많아서, 꼼짝 못 해."
"이번 일로 매형이 두고두고 구박받을 것 같네요."
"십 년은 우려먹을 수 있지 않을까?"
내 말에 알리페르가 살짝 질린 표정을 했다. 왜, 이 누나가 부끄럽니? 무서워?
"린에게 잘해야겠군요. 제가 실수하면 린도 누님처럼 그럴 것 아닙니까?"
"걔는 나보다 더 할지도 몰라. 조심해."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알리페르와 시답잖은 이야기를 하며 탑으로 향했다.
사실은 불안했다. 황후파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소문들도 마땅찮은 참이었다. 카일에 대한 내 믿음과는 상관없이 퍼지는 소문이었으니까.
거짓말도 백번 이야기하면 진실이 된다고 하지 않나. 게다가 실체 없는 소문 때문에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것을 알게 된 후였기에 지금의 이 상황들이 영 거슬렸다.
"괜찮으십니까?"
"응. 괜찮아야지. 괜찮다는 것 확인하려고 공녀를 보러 가는 거잖아. 괜찮아."
마차는 어느덧 지하감옥이 있는 탑으로 왔다. 아직도 지하감옥에는 황후파 반역자들이 수감되어있었다.
그들에 대한 심문은 거의 끝났지만, 여전히 그 밑의 자들에 대한 고문은 이어지고 있는지 간간이 고통스러운 신음소리가 들렸다.
"다시 한 번 생각하시면 안 되겠습니까?"
"나는 이제 무엇이든 피하지 않을 거야."
그게 어떤 진실이든, 소문이든, 일단 부딪힐 거야. 단단한 의지를 본 알리페르는 좀 더 긴장하며 내 호위를 서 주었다.
"황후 폐하 외에 공녀를 면회한 자가 있나?"
"없습니다. 비 전하."
"앞으로는 황후 폐하를 비롯한 그 누구도 죄인을 만날 수 없을 것이다. 이를 어길 시에는 황태자 전하의 불호령을 받을 터이니 각오하도록."
"네! 명을 받듭니다!"
공녀가 갇힌 곳은 5층이었다. 부지런히 걸어 올라가자 거의 미친 여자처럼 헝클어진 금발의 여인을 만날 수 있었다.
"죄인은 비 전하께 예를 갖추어라!"
알리페르가 도도하게 고개를 든 여인의 모습에 화가나서 큰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콘스탄트 공녀는 반응이 없었다.
눈동자에 초점 자체가 없었다. 그리고 혼자 피식피식 웃고 있었다. 우와, 드디어 미쳤구나!
미친 여자는 피하는 거라 했는데, 괜히 왔나?? 긁적긁적.
"공녀, 인사 정도는 하지그래? 내게 예를 갖추지 않아서 황태자께 그리도 혼이 나더니!"
황태자 소리에 갑자기 인광이 비치더니 공녀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황태자란 말이 미친년 날뛰게 하는 스위치는 아니겠지??
아주 살짝 무서웠다.
"황태자께서는 어찌 오지 않는 거지? 카일룸께서는 날 그리도 아껴놓고는 어째서!!"
야, 솔직히 우리 카일이 네게 한 행동이 내가 봐도 심했는데, 어떻게 하면 그렇게 해석되니? 이건 긍정적인 걸까? 왜곡된 걸까?
현실 판단이 되질 않는 모양이었다.
"도대체 카일룸이 언제부터 널 아꼈다는 거야?"
"황태자 즉위식 때, 아버지와 나란히 서있던 나를 얼마나 강렬하게 봐주셨는데!! 그때부터 날 황태자비로 찜하신 거라고!!"
우와, 망상이 아주!! 그거 분명 너네 아빠 노려본 거야. 자신의 형을 죽인 원흉 중 하나인 너네 아버지를 죽이고 싶어서 째려본 것 아니겠니? 단단히 착각에 빠지셨네.
"그 이후에 내가 아버지를 쫓아서 황궁에 왔다가 말이야. 날 마주치면 어찌나 부끄러워하시던지. 내가 팔이라도 잡으면 얼굴이 시뻘개져서 도망가셨지. 얼마나 귀엽든지."
아, 네네. 얼굴 빨개진 거 빡쳐서 거든요. 화나서 열이 오른 것이겠지만, 수줍어서 볼을 붉혔다고 네 마음대로 생각하셔요.
"게다가 다른 영애들이 덤벼들면 마음에 둔 반려가 있다면서 뿌리치는데, 어찌나 순정파이신지. 황태자라 얼마든지 여인들과 놀아나도 되는데 날 위해 지조를 지킨 거잖아."
심각하네. 그거 나야, 나라고 이 미친 여자야! 슬슬 화가 나기 시작했다. 착각도 자유지만 이건 진짜! 슬쩍 열받아서 공격을 해줬다.
"하지만 결국 다른 여자랑 혼인했잖아."
"내가 황후파의 자식이라서 균형을 위해 어쩔 수없이 귀족파의 여식을 비로 들인 거야!! 그년만 죽으면 그 자리가 다시 내 거라고 이야기해주셨다고."
망상이 심해지면 미치는구나. 후작부인은 아주 양호한 편이었어. 하하하. 최소한 그녀는 이성적인 판단이 가능했었다. 그녀는 날 보고 스타티나로 착각은 했었지만 다시 날 알아보고 신경질적으로 반응했었다. 이렇게까지 미치지 않았다고.
"연회 때마다 나와 함께하고 싶으신데, 옆에 있는 년 때문에 억지로 끌려다니시는 모습이 안쓰러워."
하하하. 계속해서 나를 년이라 칭하는 모습에 알리페르가 잔뜩 화가 나서 검을 뽑으려 했다. 아직은 안 돼, 펠.
잘 구슬리면 황후와의 대화를 이끌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미 미쳐버린 그녀는 상황 판단 같은 것이 전혀 안 될 것 같았다.
"그래? 그래서 이번에 몰래 황태자를 만난 거야? 좋은 시간 보냈겠네?"
"당연하지. 카일룸께서 내게 신호를 보냈어. 은밀한 곳에서 단둘이 만나자고. 먼저 나가시길래, 그년이 쫓아오지 못하게 멍청이를 보내 막았지. 같이 보낸 시간이 얼마나 황홀하던지!"
빠직. 이마에 힘줄이 솟았다. 참자, 미친 여자가 만든 망상이야. 던져지고 밀쳐지는 것이 황홀하다니, 진짜 중증이네.
아니면 맞는 것을 즐기는... 에이? 설마... 그렇지만 그렇지 않고서야 지금까지의 일들이 설명되지 않았다.
철저하게 정신적으로 모욕을 주고 가끔은 완력을 써서라도 거부한 카일이었다. 그럼에도 모욕을 느끼기는커녕 집착이 심해지더라니...
겉보기에는 멀쩡했는데, 진짜 사람 속은 모르는 일이구나. 어쩌다 이렇게까지 됐을까?
사랑이라는 것은 쌍방일 때는 참으로 아름다운데... 일방적일 때는 이렇게나 추해질 수 있는 일이었다.
"황후께서도 우리 사이를 인정해 주셨어."
갑자기 그녀가 먼저 황후의 이야기를 꺼냈다. 이런 것은 덥석 물어줘야 인지상정이지.
"그래? 그래서 황후께서 황태자비를 죽여주신대? 널 황태자비로 만들어 주겠다고?"
내가 사라져도 너같이 미친 여자를 황태자비로 앉혀주지는 않아. 정신 차려 이 여자야.
"후후후. 내 아이를 황제로 만들어 주신다고 했어."
"어떻게?"
황후는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거지? 전혀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잖아. 카일이 이 여자를 임신 시켰을 리가 없었다. 황후는 얘가 미친 여자인 것을 못 알아 본 건가? 황후가 갔을 때는 지금보다는 멀쩡했어?
"후후후후. 그건 그분과 나만의 비밀이야."
계속해서 웃던 공녀는 갑자기 자신의 배를 살살 쓰다듬었다. 그리고 세상 누구보다도 자애로운 사람인 척 얼굴에 힘을 풀었다. 그리고 그녀의 입에서는 다정한 말이 흘러나왔다.
"아가야, 얼른 나와서 황제가 되자. 네 아버지도 좋아할 거야."
온몸에서 소름이 돋았다. 이렇게까지 미칠 수 있을까? 그날 무슨 일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지금 배속에 아기가 벌써 자리 잡았을 리가 없잖아?
하지만 공녀는 이미 몇 달은 품어온 사람처럼 다정하게 배를 향해 말을 걸었다. 그 표정이 너무 진실되어 순간적으로 카일의 아이가 배속에 있나 의심할 뻔했다.
"아기가... 딸이면 어쩌려고? 아니 애초에 들어 있긴 한 거니?"
"너!! 나는 이 나라의 후계자를 품은 몸이야! 감히 어디서!!"
그녀는 벌떡 일어나 내게 덤벼들려고 했다. 그런 공녀를 알리페르가 뒤로 밀어냈다. 딱딱한 소파 위로 쓰러진 공녀는 자신의 배를 감싸 안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카일룸 전하! 저년놈들이 당신의 후계자를 해하려고 해요!! 으아악!"
그런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려니 착잡한 마음만이 들었다. 씁쓸하네...
사랑의 집착이 만든 망상의 끝은 결국 파국이었다.
"누님 그냥 가시죠."
"후우... 그래, 그래야겠어."
나는 알리페르와 함께 공녀가 감금된 감옥 문을 나섰다. 나가면서 잠시 감옥을 둘러봤다. 귀족들의 감옥이라 초라한 것 빼고는 그럭저럭 쓸만한 방이었다.
게다가 공녀는 여인이라는 이유로 황후파 귀족들이 갇힌 지하감옥 대신 높은 탑에 가둬뒀다. 그것이 이 여자에게 사치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못마땅한 눈으로 돌아보다가 콘스탄트 공녀와 눈이 마주쳤다.
어느새 그녀는 몸을 일으켜 세우고 소파에 바른 자세로 앉아있었다. 비뚜름히 올라간 입꼬리와, 선명한 눈동자에 어린 적의. 아까의 미친 여자로는 보이질 않았다. 설마 연기였어?
그 생각을 하자마자 공녀는 갑자기 헝클어졌던 머리를 빗어내리며 노래를 흥얼거렸다.
"황태자께서 오시면 모실 수 있게 예쁘게 꾸며야지, 랄라."
그녀는 더 이상 나를 보지 않았다. 대신 다시 초점을 잃은 눈으로 없는 도구들로 치장을 한답시고 부지런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뭐지? 이 섬뜩함은?
알리페르의 재촉으로 더 이상 공녀를 관찰할 수 없었다. 대신 나는 밖으로 나오는 길에 찝찝함에 이 낡은 탑에 사는 생쥐를 은밀히 불러 감시를 명했다.
"공녀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해야 해. 이상한 짓은 하지 않는지, 허락 없이 출입하는 이가 있질 않는지 철저히 감시하고 보고하렴."
붉은 눈의 생쥐는 찍찍 거리며 자리를 떠났다. 보답으로 따로 먹이라도 근처에 놓아 줘야겠네.
"누님, 공녀가 완전히 미쳐버린 것 같습니다. 제 어미가 저렇게 되지 않은 것이 다행일 정도로 끔찍하네요."
"진짜 미친 걸까?"
"네?"
"방심하게 하려는 것인지, 죄를 회피하려고 하는 짓인지 모르겠어."
게다가 황후가 어째서 기뻐한 것일까? 진짜 공녀가 카일의 아이를 가졌다면 기뻐할만도 하겠지만 사흘도 안됐는데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일도 없다는 사실을 황후도 알 텐데...
어째서 도대체 기뻐한 것이지? 정말 황후가 공녀에게 그녀의 아이를 황제로 만들어준다고 약조했을까?
카일이 품에 안기는커녕, 손끝 하나 못 대게 했는데?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해??
"우씨, 진짜 건드린 것 아냐?"
"누, 누님. 매형을 믿는 것 아니었습니까?"
"믿는데, 아악. 짜증 나!!"
하도 머리가 복잡해져서 괜스레 카일에게 불똥이 튈 지경이었다. 이래서 남편이 한 번 바람피우면 신뢰가 회복되기 힘들다는 건가? 다 의심이 되네.
심지어 우리 남편은 사실 바람을 피운 것도 아닌데 막 미워지려 했다.
아니야, 안 돼. 카일을 미워하거나 믿지 못 한다면 황후가 원하는 대로 되는 거야. 그래, 그걸 바라고 던진 말이었을 수도 있어. 괜찮아. 진정하자, 아르세이아.
"너는 장가가면 주변 여자들 정리 확실히 해."
"전 린말고는 여자 없어요. 저 좋다고 달려든 여자도 지금껏 없었고요."
"에이린이 이렇게나 부러워지다니..."
어머, 쟤도 참, 자기 이야기하는지 어찌 알고 쪼르르 달려오고 그러니.
"비 전하!!! 큰일 났어요."
에이린은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급한 모습으로 달려온 그녀는 알리페르를 안쓰러운 눈으로 보며 입을 차마 못 떼었다.
"왜 그래? 펠 눈치는 왜 봐??"
"그, 후작부인께서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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