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악녀들과의 신경전. (1)
2018.07.31.
콘스탄트 공녀의 죄목은 황태자 시해를 도모한 반역죄였다. 정체불명의 약을 먹여 후궁이 없어진 제국에서 황족의 씨를 훔치려 한 것은 일단 추문이 우려돼서 공식적으로 공표되지 않았다.
하지만 암암리에 그 사실이 퍼지고 있었다. 공녀가 흐트러진 모습으로 도망치는 것을 본 몇몇은 카일이 책임질 일을 저질러 놓고 나 때문에 공녀를 잡아 가둔 것이 아니냐는 말도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물론 이것은 황후파의 입에서 나온 추문이었다.
"어쩌면 저렇게 추악한 말들을 지껄일까요?"
"어차피 아무도 믿지 않는데 뭘. 난 신경 안 써."
"비 전하도 참. 하긴, 지금까지 보인 황태자 전하의 성정이라면 그럴 만도 해요."
에이린이 고개를 연신 끄덕이면서 이야기 했다. 그런데 유리아는 뭔가 근심이 가득해 보였다.
"유리아, 나 괜찮다니까. 네가 왜 그렇게 심각해?"
"나중에... 우리 프리케님에게도 저런 일이 생기면 어쩌죠? 북부 왕국은 왕이 후궁도 여러 명 두고 문란하게 살았다면서요."
"법적으로 허용되는 것을 폐지한 게 누구지?"
"황태자 전하요."
그렇지, 우리 남편은 날 위해서 그걸 없앴지. 미래에 후회할지도 모르겠지만, 후손들이 욕할지도 모르겠지만 그건 내 알 바 아니고.
"프리케가 과연, 카일이 한 일을 못 할 거라 생각해? 걔 은근 승부욕 있어서 분명히 왕이 된다면 바로 폐지할걸?"
내 말에 유리아가 비로소 웃었다. 걱정 마. 걔도 한 번 사랑에 빠지면 한 사람만 보는 스타일이거든.
그러니까 네가 나보다 더 프리케를 많이 아껴주고 사랑해 줬으면 좋겠어.
콘스탄트 공녀에 대한 심문은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공녀는 반쯤 실성한 상태로 대답을 거부하고 있다고 했다.
콘스탄트 공작의 영지에는 아직 소식이 닿지 않았는지 별다른 소식이 없었다. 아직은 공녀의 단독 범행으로 치부되고 있지만 우리의 계획은 이 기회에 모든 죗값을 물을 예정이었다.
이미 우리에게는 붙잡혀 있는 황후파가 많으니까 말이지. 줄줄이 엮어서 다 없앨 예정이었다.
"아직 마탑주는 별 소식 없어요? 그 흑마법사만 입을 열면 게임 끝인데."
"조금씩 지난 과거의 죄들을 불고 있나 봐. 그런데 아직 형님의 이야기는 나오지 않고 있어."
카일과 점심을 먹으면서 앞으로의 일에 대해 의논했다. 카일은 생각한 대로 일이 풀리지 않는지 조금 짜증이 난 것 같았다.
"카일, 미간에 주름 생기는 거 싫다니까요."
"요기 뽀뽀해주면 주름이 사라질 것 같은데."
"으휴, 쪽! 됐죠?"
내 뽀뽀에 단번에 얼굴에 미소가 돌아오는 카일이었다.
사실 아직 앙금이 조금 남아 있지만... 뭐, 그래도 날 위해서 쓰러지기 직전까지 그 여자를 거부한 노력을 가상히 여겨서 봐주는 척하고 있었다. 그걸 도대체 왜 마셔가지고!! 마시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언제든 실수 한 번만 더 해 봐. 내가 아주 그냥 죽을 때까지 바가지를 긁을 테다.
"저기 세이."
"왜요?"
"갑자기 소름이 돋아서..."
예리하기는.
"나 산책하고 싶어요."
"응. 살리맨더!"
잘은 모르겠지만 살리맨더가 주변을 맴돌고 있는 듯했다. 지속적으로 따뜻하기도 했거니와 궁인들의 시선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정령들의 생각이 많이 바뀐 거 맞아요?"
"응. 요즘 네가 정령들을 찾아가서 이것저것 이야기를 많이 해줬잖아. 조금씩 인간다워지는 것 같아."
혼자서도 요즘에는 유리온실로 가서 정령수를 돌봤다. 내가 주는 힘을 받지는 못하지만 주변의 땅이라도 자연력을 풍부하게 만들어 두면 정령수에게 도움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정령들은 이런 나의 노력을 좋게 보는 듯했다. 실제로 정령수도 시들어가는 속도가 늦춰졌다고 했고. 살리지는 못해도 죽어가는 것을 막은 것만으로도 정령들에게는 기쁨인 모양이었다.
나는 그 호감을 이용해 알비의 생각들을 전해줬다. 정령의 여왕이 바랐던 정령들의 모습을 이야기해줬다. 온전히는 아니지만 조금씩 알아듣는 것이라고 나 혼자 착각하고 있는 중이었다.
물론 일방적인 대화였다. 듣고 있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그래도 덕분에 친근해진 정령들은 카일이 소환해주면 내 곁에 오래 머물렀다.
"다른 정령들이 자신들은 부르지 않는다고 투덜대고 있어."
"겨울이 지나면 운디네님과 실프님을 마구 부를 건데요?"
특히 여름이 오면 운디네랑 놀아야지.
황궁 정세와 관계없이 평온한 우리였다. 주변에서 뭐라 하든, 어떤 루머가 판을 치든, 우리의 신뢰는 누구도 깰 수 없으니까.
나는 카일의 손을 꼭 잡고 서로 얼굴을 보며 걸었다. 낙엽이 떨어진 정원에는 상록수들만이 푸르름을 뽐냈다. 최근 귀족 사회 분위기처럼 삭막해진 정원이지만 우리에겐 여전히 반짝반짝 빛나는 아름다운 정원이었다.
"응? 어머! 너는!"
예전에 구해줬던 작은 햄스터가 내 발앞으로 포르르 달려왔다. 햄스터의 방문에 카일과 나는 의미심장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내가 손을 내밀자 내 손 위에 올라탄 작은 생명체의 몸은 많이 차가웠다. 태양궁에서부터 달려오느라 고생했겠네.
벌레들의 보고를 중단한 뒤 일을 맡아주던 햄스터였다. 주로 내가 태양궁에 갈 때 접선했는데, 얘가 오다니...
"카일?"
"아바마마께 문안 올리러 갈 시간이니 마차로 가지."
은밀한 곳에서 보고도 받고, 햄스터도 바래다줄 겸 선택한 것이 마차였다.
"황후가 태양궁 밖을 나갔어? 마차에 몰래 타서 따라갔구나. 잘했어."
햄스터는 황후를 철저히 미행했다. 생명의 은인이라고 내가 부탁한 일을 아주 열심히 따라주었다. 그래서 이 추운 겨울에 나에게 황후의 움직임을 보고하기 위해 이리도 먼 길을 달려온 것이다.
카일은 마차 문 밖으로 기사 하나를 불러 보고를 받았다. 마침 황후의 움직임을 포착한 모양이었다. 햄스터에게 누굴 만났는지 물어보고 추측할 수고는 아꼈다.
"감금된 공녀를 만난 모양이군."
"그녀가 아끼던 조카니까요. 햄스터야, 혹시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들었니?"
"찍!"
햄스터는 자신의 기억을 되살려 인간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영리한 편이긴 하지만 그 의미를 알고 듣는 단어는 많이 없기에 기억이 자신이 인지한 소리로만 전달되었다. 그래서 완벽하진 않았다.
그래도 바퀴벌레들보다는 확실히 나았다.
"뭐라고 하는데?"
"걱정하지 말거라. 버텨라. 으음... 공녀가 한 말은 제대로 모르겠는데, 황후가 아주 기뻐했네요. 이유까진 모르겠는데... 공녀는 심각한 표정이었나 봐요. 이 아이가 느끼기에는요."
"찝찝한데?"
"은밀하게 귓속말로 많은 말을 나눴나 봐요. 간간이 마지막 기회, 혼란, 협력자 등등의 단어가 나왔는데... 아쉽네요. 정보가 빈약해."
무슨 꿍꿍이들일까? 나쁜 음모를 꾸미는 것은 맞는데 말이야.
"그 정도면 충분해. 일단 공녀와 황후가 뭔가 작당을 하는 듯하니 경계해야겠어. 그리고 공녀와의 면회는 모두 금지시켜야겠군."
"그런데 카일, 영지로 내려간 공작은 어째서 소식이 없을까요? 공녀를 그리도 아꼈는데."
딸자식을 위해서 카일 앞에서 자존심도 버렸던 아비였다. 그런데 어째서 잠잠할까. 며칠 지나지 않긴 했지만...
"점심 먹기 전에 올라온 보고에 따르면 공작이 영지를 떠날 채비를 하고 있다더군."
"흠... 아끼던 자식 때문에 그동안 쌓은 공든 탑이 무너질까 전전긍긍이겠네요. 이미 자신 때문에 가문의 명예가 내려앉았는데."
"이번에는 명예뿐 아니라 모든 것을 무너뜨려 줘야지."
어느덧 태양궁 입구였다. 귀여운 햄스터를 손가락으로 몇 번 쓰다듬어주고 정령에게 회복을 부탁한 뒤 몰래 풀어주었다.
"어머, 아바마마... 어째서..."
어제 정령의 도움으로 많이 좋아지셨는데 또 안색이 나빠지셨다. 기침은 하지 않으시는데 혈색이 어두운 것이 영 좋지 않았다.
물의 정령이 모든 병을 고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감기 같은 병은 쉽게 고치는데.
"대외적인 일이 없어 피부 관리를 안했더니 피부가 거칠구나. 별것 아니니 신경쓰지 말거라."
"어디 불편하시면 언제든 카일을 불러야 해요. 카일 당신은 언제든지 아바마마가 부르면 달려가서 정령왕이라도 부르고요."
정령왕 하나 즈음은 부담 아니잖아. 다 불러야 마나 고갈 된댔나? 그러니 물의 정령왕 정도는 효도하게 부르라는 의사를 표현했다.
"허허허, 아가 걱정 말거라. 그나저나 황태자. 북부 왕국의 최근 정세가 내게 전해졌는데 심상치 않더구나. 아무래도 2왕자가 왕위를 가져갈 듯해."
결국 그 미치광이가 되는 건가?
"국경선 강화에 신경 쓰고 있습니다."
전운이 감돌지도 몰랐다. 그 미치광이는 전쟁을 좋아한다고 했다. 백성들의 고통 따위는 상관없이 자신의 정복욕을 채우기 위해 국경선을 마주한 우리에게 칼날을 들이댈까?
마법사도 뺏긴 상황에서 평범한 군대로 소드마스터들이 기둥으로 있는 제국으로 쳐들어올 바보인 건가? 자살행위인데...
북부 왕국과의 국경선의 상당 구간이 기사가문인 비스 영지였다. 전쟁이 발생한다면 아버지와 알리페르도 나서야 하는 걸까? 마음이 무거워졌다.
"걱정하지 마. 충분히 대비하고 있고, 장인어른의 기사단은 북부 왕국의 오합지졸들 보다 강해."
"전쟁 자체가 죄 없는 백성들이 수탈당하고, 고통받는 일이잖아요."
"최대한 막아야지. 제국도, 왕국도 어느 쪽도 피해가 없도록. 프리케도 노력하고 있으니까. 너무 염려하지 마."
아바마마와 카일은 북부 왕국에 대해 좀 더 의논하고, 곧 있을 재판의 결과들을 정리한 뒤 카일은 황제 대리 업무를 위해 먼저 떠났다.
나는 아바마마와 차를 좀 더 마시며 시간을 보냈다. 같이 카일 흉도 보고, 카일 어린 시절 에피소드도 듣고 즐거웠다.
이건 절대 노는 것이 아니었다. 일이 줄어 적적하실 아바마마와 놀아드리는 것도 황태자비가 해야 할 일이었다. 나는 착한 며느라고! 이러고 돌아가면 나도 만월궁 살림을 돌보고 결재하고 할 일이 많았다.
그래도 즐겁게 아바마마와의 시간을 보낸 뒤 만월궁으로 돌아가기 위해 마차로 돌아가던 참이었다.
"오랜만이구나."
차갑고 서늘한 여인의 목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이런, 예전의 나는 천벌받을 사람을 잘 집어냈다는데. 정령님들, 어째서 이분은 천벌을 내리지 않나요! 자연을 파괴하지 않은 탓인가?
나는 억지 미소를 꽃피우며 예를 갖추어 인사를 올렸다.
"밤하늘을 비추는 별, 황후폐하께 작은 별 아르세이아가 인사 올립니다."
"너는 황실의 두 남자의 사랑을 받으며 얼굴에 웃음꽃이 폈구나."
방금 너무 환하게 웃었나? 내 미소가 예쁘긴 하지. 그런데 나도 댁보고 활짝 웃긴 싫거든요?
"어떤 시련에도 저만 사랑해주는 남편이 있어서인가 봅니다."
당신은 그런 남편 없죠? 부럽죠? 나의 도발에 황후의 눈이 크게 치켜올라갔다. 부릅뜬 두 눈동자에서 나에 대한 증오가 느껴졌다. 카일에 대한 미움이 더해진 증오겠지.
뭐 뺨 한 대 후려치기라도 하려나? 화가 난 얼굴을 보니 아주 찔끔 무섭긴 하지만. 괜찮아. 근처에 아바마마가 계실 테니 여차하면 크게 소란을 피우자.
"그 사랑과 믿음이 언제까지 이어지는지 두고 보마."
예상과 달리 부릅떴던 눈을 휘어버린 황후였다. 그녀는 여운이 남는 미소를 짓더니 홱 돌아서서 제 침소로 돌아갔다.
찝찝해. 뭐지? 어째서 저렇게 여유로운 것이지? 콘스탄트 공녀와 무슨 일을 벌일 계획인 거지?
만월궁으로 돌아가는 마차에 앉아서 황후의 말을 곱씹었다. 단지 카일과 나를 이간질 시키려는 말일까? 햄스터가 전해줬던 광경과 대화를 떠올렸다.
마지막 기회라... 도대체 황후는 왜 기뻐한 것일까? 도저히 가시를 삼킨 듯 거슬려서 견딜 수 없었다.
"공녀가 감금된 탑으로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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