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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비의 대역으로 살아남기-101화 (101/126)

101화. 아카데미 후원의 밤 - 혼돈편

2018.07.28.

"비 전하, 그 무슨?"

"영식은 기억력도 나쁘고 말길도 못 알아듣나?"

귀족 회의 때 내가 콘스탄트 공작에게 말을 놓는 모습을 본 귀족들은 알 것이다. 내가 최소한의 예의로 해주는 존대를 버린 순간에 그에게 어떤 일이 닥칠지 알겠지. 그러니 다들 숨을 죽였다.

그런데 콘스탄트 공녀가 안 보이네? 껄껄 거리며 좋아할 줄 알았는데 말이지.

"감히 황족의 몸에 허락도 없이 손을 대고는 용서를 바란 것인가?!"

내가 호통을 쳤다. 사실 카일이 듣고 오길 바란 마음도 있었다. 그런데, 이놈의 남편! 왜 오지 않는 거니?

"게다가 뭐? 추억? 나는 사가에 있을 때도 자네와 사적인 만남을 가진 적이 없거늘! 지엄한 황태자의 단 하나뿐인 반려를 무엇으로 보는 것이냐?"

스타티나는 어릴 때부터 도도했다. 자신이 예쁜 것도 알았다. 그래서인지 어지간한 남자가 찍쩝대는 것을 못 참았다.

우리 카일도 싫다고 버리고 떠난 애라고!! 아, 이건 아닌가?

아무튼, 카일 발끝도 못 따라가는 주제에 뭐?

"저, 저는 그저, 예전에 잠깐 뵈었던 일을 이야기하고 싶어서..."

"그것을 혼인한 여인에게 추억 운운하면서 함부로 손목을 잡고 끌고 가려 한 것에 대한 변명이라고 하는가?"

"그저 비 전하의 친모께서 이혼 위기에 계셔서 위로를 드리고 싶어서였습니다."

어허, 요놈 봐라? 잘못했다 빌어도 모자랄 판에, 끝까지 요리조리 핑계를 대는 이유가 뭐지? 황후파에 가까운 가문 출신이니... 혹시...

"너, 누구의 사주를 받았지?"

내가 눈매를 좁히며 서늘하게 말하자 피니토르 영식의 눈썹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내게 추문이라도 안겨주라 하던가? 아니 최소 망신이라나 모욕이도 주라던가? 테일러경!"

"네, 비 전하!! 하명하십시오."

"이자를 심문하여 황족을 모독하려 한 죄를 피니토르 가문에 물을 예정이다. 그러니 배후를..."

"그저, 밖에 나가지 못하게 시간을 끌어 달라 했습니다!!"

얍삽하게 생긴 영식이라서 그런가 바로 부네? 근데 시간을 끌라고?

"누구의 짓이지?"

"그... 고, 공녀가..."

여기에 찾아온 공녀면, 콘스탄트 공녀? 걔가 왜?

"그녀는 어딨지?"

"미, 미로정원에..."

또 카일을 노리고? 하지만 우리 남편이 상대해 줄리가 없는데? 응? 아까 공녀의 관한 소문들 중...

이상한 약... 쾌락?

뇌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최근에 봤던 공녀의 놀랍도록 닮은 눈빛. 후작부인...! 설마?!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정원 쪽으로 내달렸다. 헬레니아가 급히 시종에게 내 외투를 가져오게 하는 외침이 들렸다.

외투 따위가 무슨 상관이야!

"카일!!"

정원 쪽에 도착하자마자 큰 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내 목소리가 들리면 바로 반응해 줘요. 제발.

아무리 외쳐도 그의 답은 없었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감각이 없었다. 단지 초조하고 심장이 시큰거리고 아파왔다.

"비 전하, 아까 황태자가 에메랄드 꽃이 있는 곳으로 간댔잖아요."

프리케가 어느새 따라붙었다. 헬레니아에게 받아온 외투를 내 어깨에 둘러 주었다.

"헉, 헉, 비 전하, 같이 찾아봐 드릴게요."

유리아가 제 연인을 쫓아 뛴 모양이었다. 미안한 마음과 카일이 걱정되는 마음에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걱정 마세요. 전하가 어딜 비 전하를 두고 무슨 일을 저지르셨겠어요? 그딴 여자한테 속지도 않았을 거예요."

"맞습니다. 당할 리가 없어요. 실수라도 저질렀으면 친우인 제가 용서하지 않겠습니다."

유리아가 내 눈물을 닦아주었다. 카일이 그딴 여자한테 아버지처럼 속아넘어갈 리는 없었다. 하지만 홀에서도, 지금도 내가 애타게 찾는데 나타나지 않으니 불안하고 미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대로 기다릴 순 없었다. 사람들이 몰려나오기 전에 카일을 찾아야 했다. 혹시 무슨 일이 일어났다면 나 외에는 누구도 봐선 안 돼!

"공작 내외와 테일러경이 눈치껏 홀의 사람들을 통제하고 있으니, 얼른 찾읍시다."

카일을 찾아 미로로 들어갔다. 따로 흩어지고 싶었으나 나의 안전을 위해 절대 안 된다는 두 사람의 만류로 함께 이동하고 있었다.

"누님!"

"펠, 혹시 카일 못 봤어?"

"아까 즐거운 발걸음으로 노래를 부르며 안쪽으로 들어가시던데요?"

나는 펠의 답을 듣자마자 다시 뛰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기 시작했지만 멈출 수 없었다. 카일의 얼굴을 보기 전에는 설 수 없었다.

하지만 만약, 약에 속아 카일이 실수를 했다면?

여러 가제보를 지나치다 보니 어느새 마지막 가제보를 앞에 뒀다. 가제보 앞은 에메랄드로 만든 꽃이 마법등을 장식하고 있었다. 카일이 말한 것처럼 동대륙에서 건너왔다는 탐스러운 빨간 꽃이 주변에 흐드러지게 펴있었다.

그 꽃들 대신 눈에 들어온 것은 미로의 반대편 입구로 빠져나가는 여인의 금발 머리카락이었다. 이미 노출이 많았던 드레스가 흐트러져 보인 것은 내 착각일까?

눈물이 후두둑 떨어져내렸다.

저 가제보의 입구를 막고 있는 저 두꺼운 가죽 천막을 걷어도 될까? 흐트러진 카일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왜 내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건데? 왜 불러도 오지 않은 건데?

"바보 카일!!"

내가 크게 외치며 주저앉아 버렸다. 나를 따라오던 프리케와 유리아는 나를 보고 어쩔 줄 몰라 했다.

무서웠다. 안쪽의 상황을 확인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다시는 겁쟁이가 되지 않고 싶었는데, 사랑하는 사람을 앞에 두고 다시 겁쟁이가 되었다.

절대 그의 의지가 아닌 일이라는 것을 아는데, 내가 어찌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뒤늦게 다시 또르르 뺨을 따라 흘러내린 눈물이 카일이 끼워준 어마마마의 반지에 부딪혀 산산이 흩어졌다. 눈물이 흘러버린 자국이 차가운 공기에 얼어붙어 내 가슴을 후벼 팠다.

"비 전하, 황태자를 믿으십시오."

프리케가 내 어깨를 두드리며 말해줬다. 유리아가 속상해하며 뺨을 손으로 감싸줬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펠과 에이린도 날 염려하며 지켜보았다.

나는 내 소중한 가족과 친구들의 눈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아니면 누가 카일을 믿어?

펠의 도움을 받아 일어났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하지만 카일을 믿는 만큼 확인을 해야 했다. 열 걸음도 안 되는 눈앞의 가죽 천막이 너무나 멀게만 느껴졌다.

겨우겨우 발걸음을 떼어 천막 앞으로 왔다. 겨울이라 보온을 위해 두꺼운 가죽으로 덮어둔 가제보 안에서는 침묵만이 흘렀다.

아니, 조금은 거친 숨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 숨소리를 듣자 심장이 내려앉았다. 혹시 내가 상상하는 일이 아니라 다치거나 독에 당한 것은 아닐까?

사랑에 눈먼 여인이 카일을 가질 수 없음에 해하려 한 것은 아닐까? 저항하던 카일은 그래서 쓰러진 것은 아닐까 초조한 마음에 천막을 급히 걷었다.

"카일!!"

카일은 탁자 위에 쓰러지다시피 엎어져 있었고, 탁자 위에는 와인잔이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카일 주변의 의자나 장식들이 흩어지고 쓰러져 있었다. 침대 위에도 이것저것 던져진 흔적이 있었으나, 이불 속에 들어갔거나 누운 흔적은 없었다.

안도감과 근심이 교차했다.

"카일!! 카일 왜 이래요? 독이라도 당한 거야?"

내가 카일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지만 큰 반응이 없었다. 그런데 몸이 너무 뜨거웠다.

"비 전하!"

"프리케, 카일이 이상해. 온몸이 뜨겁고 반응이 없어. 독이라도 당한 거야??"

"잠시 비켜서세요."

프리케가 카일의 몸을 이곳저곳 살피기 시작했다. 그리고 엎어진 잔에 든 와인을 찍어 맛도 보았다.

"프리케님, 독이라도 있으면 어쩌려고!"

유리아가 깜짝 놀라서 외쳤다. 나도 놀라서 유리아와 프리케를 번갈아 보았다.

"한 잔을 거의 다 먹고도 황태자는 살아있으니 괜찮을 겁니다. 그리고 저나 황태자나 다 마나로 보호해서 어지간한 독은 막아냅니다. 이건 독도 아니고요."

독이 아니란 소리에 불안함이 조금 풀렸다. 그런데 왜 카일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거야!!

"그러고 보니 카일은 운디네가 늘 정령의 가호를 걸어줘서 독을 해독할 수 있다고 했었어."

"네, 저도 압니다. 그리고 이건 독은 아닙니다. 아마도... 미약과 수면제가 아닐까 싶네요."

사실 콘스탄트 공녀의 뒷모습을 보고 생각했었다. 미약을 쓰지 않았을까 하고... 카일의 몸이 뜨거운 것도 그 탓이었다.

하지만 카일이 미약 같은 것도 해독한다 했는데, 이게 무슨 일인 거야.

"다행히 옷차림도 그렇고 별일 없었을 것 같네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얼마나 마셨길래 정신도 못 차리고 쓰러진 것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한참을 잠이 든 듯 쓰러진 카일을 보며 고민하다가 입을 뗐다.

"프리케, 알리페르. 볼라드 공작과 테일러 경을 이리로 불러줘. 아까 피니토르 영식은 황태자 근위대의 손으로 감옥으로 압송하고, 콘스탄트 공녀의 신병을 확보해. 얌전히 감시에 응하면 자택연금으로 봐주겠지만 반항하거나 도주하면 바로 감옥에 처넣어도 좋아. 죄목은 황태자 시해 시도, 반역죄라는 것을 공표하도록."

나는 주먹을 꽉 쥔 채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도저히 나의 카일을 노리고 말도 안 되는 짓을 저지른 그 여자를 용서할 수 없었다.

제 아비가 죄를 짓고 영지에서 자숙하고 있는데, 그 딸은 뭐 하는 짓이지? 자신을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를 갖게다고 카일에게 무슨 짓거리를 한 거야!!

유리아와 에이린이 내게 차가운 물과 수건을 가져다주었다. 나는 펠이 침대로 옮겨 놓은 카일의 뜨거운 얼굴과 손을 물에 적신 수건으로 조금씩 닦아주기 시작했다.

"그 피니토르 영식이오. 그 개망나니 말하는 것 맞아요?"

에이린이 조심스럽게 물어 왔다.

"개망나니? 그놈이 스타티나를 본적있다는데 알아?"

"그 바람둥이 개자식이 찍쩝대지 않은 영애는 없을걸요? 그런데 요즘에는 그놈이 공작의 사위가 될 몸이라며 뻐긴다던데, 그게 콘스탄트 공녀였나 봐요? 망나니라 후계자도 못돼서 동생한테 소백작 지위도 뺏긴 놈이..."

그랬군... 백작부인도 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비관해서 카일의 몸이라도 갖고 싶었던 건가?

"제가 들은 소문이랑은 다르네요. 콘스탄트 공녀가 요즘 데리고 노는 여러 남자 중 하나라던데요. 황태자 전하와 머리색, 눈색, 키, 뭐 하나라도 닮은 남자들 여럿 만난대요. 그것도 문란하게."

그 말을 듣고 소름이 돋았다. 카일이 마음은커녕 눈길 한 번 주지 않아서 일까? 집착의 정도가 심해져서 마음의 병을 앓게 되었다 하더라도...

카일의 열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독으로 인지 못해서 운디네가 치료해주지 못하는 걸까?

셔츠의 단추를 몇 개 풀어주다가 두 시녀가 생각나서 밖으로 내보냈다. 카일의 몸은 다시는, 누구에게도, 나 말고는 보여주게 되는 위기 따위 겪고 싶지 않아.

카일의 몸을 좀 더 닦으며 여러 가지 생각에 잠긴 사이 테일러경과 볼라드 공작이 왔다.

나는 가제보 밖으로 나가서 그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테일러경, 전하께서 바로 환궁을 해야 하니 준비해주세요. 단, 외부인들에게 전하의 상태가 알려지면 안 되니 철저한 보안이 필요합니다."

"마차를 이곳까지 들어오게 조치하겠습니다. 관리를 제대로 못한 신의 잘못이니 벌을 주십시오."

볼라드 공작이 잔뜩 심각한 얼굴로 말을 건넸다. 자신의 집 저택에서 황태자가 변을 당한 것이나 다름없으니 책임감이 무거울 것이다.

나는 그에게 보안을 소홀히 한 죄를 물릴 생각은 없었다. 대신 빚은 지어놔야겠지.

"공작, 그대와 헬레니아가 얼마나 신경 써서 이번 연회를 준비했는지 압니다. 죄가 있다면 황태자를 주제도 모르게 넘본 여인과, 재물에 넘어간 사용인들이겠지요."

"철저하게 조사하여 황태자께 문제의 와인을 올린 자와 황태자 내외분께만 허락한 장소에 공녀를 출입시킨 자들을 색출하겠습니다."

"그들은... 반역죄를 저지른 이의 공범이니 공작이 사사로이 처분해서는 안 됩니다. 반드시, 황실의 법으로 처단할 것이니 근위대와 협조하세요."

내 말에 공작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비 전하의 침착한 모습을 뵈니, 제 눈이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이 드네요. 국혼 때보다 요즘의 비 전하께서 더 현명하고 차분해 보이십니다. 황실에 어떤 문제가 닥치든 혼자서도 잘 해결하실 거라는 확신이 드네요."

"사랑하는 이를 지켜야 하니까요."

내 말에 공작은 덤덤히 고개를 끄덕이고 지지해줬다. 공작은 이번 일에 대한 사죄의 의미로 증인과 공범을 철저히 가려낼 수 있게 협조한다 다짐했다.

"테일러경, 내가 그 여자의 뒷모습을 봤으나 이는 확실한 증거가 아니니, 그대의 손으로 이 가제보와 주별을 뒤져 확증을 잡으세요."

"존명! 돌아가는 길에 호위는 프리케경에게 맡기겠습니다."

공작의 도움으로 우리의 마차가 도착했고, 카일을 철저한 보안 속에 마차로 옮겼다. 테일러는 프리케와 알리페르에게 호위 문제를 신신당부했다.

마차에 올라탄 나는 카일의 머리를 내 무릎 위에 올렸다.

"카일, 얼른 눈 좀 떠요. 왜 계속 잠자는 거야? 운디네는 뭘하는 건데??"

"으으음, 세...이... 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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