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아카데미 후원의 밤 - 과시편
2018.07.28.
정령의 딸이라 불린 뒤 처음으로 힘을 선보이는 것이었다. 그 호칭 없이도 내 능력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능력은 종종 보여주며 과시하는 것이 필요하다 했다. 우리의 훌륭하신 보좌관님의 말씀이었다.
"비 전하, 여기 있습니다."
루시엘라는 쟁반에 작은 화분과 씨앗, 물 한 컵, 작은 붓을 가져왔다. 요즘 힘이 많이 늘었으니까 카일보다 더 잘할 자신이 있었다. 게다가 나는 정령의 힘을 빌리지 않는 것이니까, 훗!
"이걸 동대륙의 사람들은 목화라고 부른다더군요. 남부 왕국에서도 희귀하게 발견되는 야생화랍니다."
화분에 씨를 놓고, 준비된 물을 살짝 뿌렸다. 어느새 내 주변으로 귀부인들뿐만 아니라 남자 귀족들까지 몰려들었다. 에이린과 알리페르도 잘 자리 잡고 서있었다. 내 옆에서 보조 역할을 맡은 루시엘라의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물론 내 동생의 기대감은 루시엘라 못지 않았다.
"너무 무리하진 마."
어느새 곁에 다가온 카일이 조금은 걱정스레 쳐다보았다. 정령수에 힘쓰다 코피 흘린 일 때문에 카일의 걱정 병이 도진 것 같았다.
걱정 마시죠 남편씨. 이 정도는 나도 하거든요?
천천히 힘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러자 씨앗이 묻힌 곳의 흙이 봉긋해지더니 앙증맞은 새싹이 두 장 올라왔다.
"카일, 따뜻한 태양을 불러줄래요?"
"나의 비가 부탁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살리맨더!"
고맙게도 언제나처럼 살리맨더가 나타났을 것이다. 내 눈에는 안 보이니 뭐. 그저 느낌으로 아는 것이다.
그런데 주변 사람들의 표정을 보니 아주 다들 입이 쩍 벌어진 채로 부러워하는데?
"네 어깨에 내려앉았어. 살리맨더가 아주 황홀한 미소를 지으며 가식 떨고 있어."
카일이 내게만 속살거려주었다. 살리맨더는 내게 좀 많이 친근해졌다. 아마도 어머니 집에서 마구 쏘아붙인 탓일까?
"살리맨더님, 이 식물은 따스한 여름날을 좋아하니 꽃피울 때까지만 부탁해요."
사람들 표정 보니 내 부탁이 끝나자마자 정령이 꽃으로 스며 든 것 같았다. 나는 그 시기를 대충 예상한 뒤 다시 힘을 모았다.
"내가 식물을 이렇게 빨리 자라게 하려면 운디네와 놈이 필요한데, 역시 나의 비는 자연의 축복을 받았군. 대단해."
남편의 추임새는 덤이었다. 뭐 정령이나 자연의 축복이나 근본적인 힘은 같은 것 아닌가?
조금은 화끈거리는 카일의 칭찬을 귀로 흘리고 집중하자 곧 목화는 커다랗게 자랐고 하얀 꽃들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그러자 목화 주변을 감싸던 온기가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다.
살리맨더가 온도 조절 잘하네. 굳! 하긴, 온실에서 한 번 피워 봤으니까 잘해야지.
"안타깝게도 초 겨울이라 깨어있는 나비가 없어 붓으로 꽃가루를 옮길게요."
내가 섬세한 털로 풍성한 꽃가루를 암술머리로 옮긴 뒤 다시 힘을 주자 꽃이 지기 시작했다.
"어머, 비 전하 이게 무슨 신비한 꽃이래요?"
다들 감탄해 하는 마지않는 표정이었다. 왜냐하면 하얗게 피어났던 꽃이 지면서 분홍색으로 물들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들의 질문에 대답해 주지 않았다.
더 멋지고 신기한 일이 펼쳐질 거라고!
집중력을 잃지 않고 끝까지 자연의 힘을 쏟아부었다. 그랬더니 꽃이 진 자리에서 작고 단단한 열매가 맺혔다. 그리고 그것은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잎이 서서히 시들고, 열매도 누렇게 변한 순간!
"어머!!"
다들 깜짝 놀라며 손뼉을 쳤다. 열매가 톡 소리를 내며 터진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는 작고 하얀 구름들이 팡팡 터져 나왔다.
"솜이라는 거예요. 양털보다 가볍고, 따뜻하답니다."
루시엘라가 정성스럽게 열매들로부터 솜을 분리해 내어 작은 접시에 올렸다.
"스칼라 아카데미 교수진들과 함께 이 솜을 실로 뽑아내는 장치를 고안 중이에요. 그 실로 옷감도 만들고, 지금 이 상태로 이불이나 두꺼운 외투의 속으로 쓸 예정이랍니다. 비 전하의 외투 속에 들어 간 것이 바로 이 솜이에요."
루시엘라의 설명에 귀족들의 눈이 다들 빛나기 시작했다. 이 작물의 이익을 따져보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쉽게 내어주진 않지.
"아쉽게도 아직 제국의 모든 땅에서 자랄 수 있는 작물은 아니에요. 재배법도 까다롭고. 그래서 당분간은 황실에서 직접 농장을 운영할 예정이랍니다. 이것의 상업적 가치가 증명되면 아카데미 학생들에게 여러 기술들을 전수할 예정이고요."
평민 지구에 있던 황실 소유 황무지를 활용할 예정이었다. 수확제 때 그 땅을 살릴 방법을 전수해 주었고, 소작농민들이 지금 열심히 땅을 살리고 있다 했다. 그들에게 목화를 키우게 하고 그 목화는 황실에서 살 예정이었다.
황실에서 직접 운영할 거라는 소리에 귀족들의 애가 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황실에서 쓰는 모든 것이 선망의 대상이 되는 귀족 사회에서 당연한 반응이었다.
카일과 나는 그런 귀족들의 반응을 즐겼다. 갖고 싶겠지? 키우는 방법도 궁금하지? 이것으로 실도 만든다니 궁금해 죽을 것이다. 그런데 이거 다 스칼라 아카데미를 통해 방법을 전수해서 퍼져나가게 할 예정이었다.
마지막 말의 의미를 알아들은 귀족들은 알아서 후원을 열심히 할 것이었다. 성의를 보여보라고요.
남부 왕국도 아직 목화의 가치를 몰라서 이 식물의 존재 자체가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그래서 동대륙이 아니면 솜을 구입하기 쉽지 않으리라.
하지만 동대륙에서 거래하는 것은 운송비가 많이 들어 가격 맞추기 쉽지 않을 거야. 미리 손도 써 뒀고.
"세이, 귀족들에게 씨앗이라도 나눠주지 않을 작정이야?"
"어머, 줘도 아직은 키우지도 못할 텐데요? 괜히 죄 없는 식물들이 죽을까 봐요. 하지만 후원을 열심히 하는 분들은 원하는 것을 얻게 되겠죠."
남편과 합을 맞춰가며 귀족들을 속이는 것은 재밌는 일이었다. 뒷담이 조금 무섭긴 하지만 사교계에서 이렇게 귀족들을 홀리는 것은 할만한 일인 것 같아.
훗, 이렇게 사교계는 내 발아래에 놓이는구나!!
나의 쇼 타임이 끝나고 다시 귀족들의 아부가 이어지기 시작했다. 솔직히 지겨웠다. 뻔한 아부와 진부한 찬사들은 슬쩍 짜증이 날 지경이었다.
배도 고프고 -어떤 모임이든 드레스 핏 때문에 많이 먹을 수 없었다.- 목적 달성도 했겠다, 슬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꾹 참고 오늘의 얼굴마담으로 조신하게 참고 있었다.
그런데 헬레니아에게 시종 하나가 급히 무언가를 보고 하고 갔다. 헬레니아는 내게 눈짓 했다. 음, 왔구나.
자, 그렇다면! 나는 다시 카일과 찰싹 들러붙어야지, 호호.
뭐, 아까 잠깐 편들어 줬지만, 그건 그거고. 싫은 건 싫은 거니까!
"카일, 나 배고파요."
"응? 조금이라도 먹을까?"
카일은 내가 힘들어서 쓰러지기라도 할까 봐 내 허리를 단단히 감싸고 홀 한 쪽 편으로 갔다.
그곳에는 예쁜 핑거푸드들이 놓여 있었다.
"나, 새우!"
이미 껍질이 거의 까져 바로 먹기 좋았지만 꼬리마저 떼서 내 입에 쏙 집어넣어 주는 카일이었다.
헤헷. 이런 다정함 너무 좋아.
과일도 먹기 좋게 잘라서 입에 넣어주고, 푸딩도 손에 끈적한 것 묻는다고 스푼으로 떠서 먹여 줬다.
그런 카일의 모습을 귀부인들이 끊임없이 작은 탄성과 함께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속에 익숙한 시선이 느껴졌다.
"자, 카일도 아~ 해요!"
나도 이런 내가 못난 것은 알지만, 그래도 카일이 내 거라는 확인 사살을 하고 싶었다. 제발 이제는 포기하라는 무언의 경고이기도 했다.
어떤 경우에도 카일의 곁에 네 자리는 없어!!
카일이 오로지 나만의 사람이라는 것을 과시하는 것이 유치한 짓인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내 남자에게 진득한 눈빛을 아직도 보내는 것이 싫었다.
다른 영애나 귀부인들에게는 먹힌 것 같은데... 하하. 영 통하지 않는구나. 콘스탄트 영애는 나를 아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으휴, 잘생겨 가지고는!"
"내가 말했었잖아. 나 잘생겼다고."
윽, 말이라도!!
"그나저나 진짜 안 가볼 거야?"
"어딜요?"
"그 은밀하다는 미로정원."
얼굴이 확 붉어졌다. 구, 궁금하긴 한데, 그렇다고 막 대놓고 가기에는 부끄럽잖아!
"흐으음, 우리 세이 부끄러워서 그러는 거구나?"
"무슨!!"
나도 모르게 크게 소리 질렀다가 급히 다물었다. 아, 부끄러워! 민망해! 다들 내가 소리를 내지르자 우리를 쳐다보았다.
"가기 싫어? 겨울에만 피는 꽃들도 많대. 동대륙에서 가져온 붉은 꽃이 그렇게 예쁘다는데... 그 꽃 보면서 며칠간 못 한 일하면 어때?"
그 꽃이 뭔지는 몰라도 내가 더 붉어 질 것 같거든요? 근처에서 듣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내가 주변을 휙휙 둘러보다 테일러경과 눈이 마주쳤다. 급 고개를 돌리는 것이!! 들었군요!! 프리케도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걔는 들었는지 말았는지 표정이 구별이 안 돼!
"제발 좀, 채신머리 없이!"
"내가 너한테만 이러는 거 다 아는데 뭘."
"그렇다고 막 떠벌리고 다니면 부끄럽거든요?"
"내가 부끄러워?"
윽. 이것은!! 오랜만에 당하는 카일의 장기!! 사슴 눈으로 쳐다보기!! 정면으로 맞이하고 말았다.
"아니 그 뜻이 아니잖아요."
"그럼 나랑 데이트하는 게 싫은 거야?"
이차 공격!! 약간은 그렁그렁 한 표정으로 날 보는데... 윽!
"가요, 가!"
내 심장은 어째서 아직도 단련이 안 된 것인가!! 힘들었다. 카일의 눈이 너무 예뻐서. 순수한 사람 아닌 것을 아는데, 어째서 이렇게 순수하고 맑아 보이냔 말이야!
늘 느끼는 건데, 카일이 내게 약하다지만 나도 만만치 않게 카일에게 약했다.
"같이 나가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볼 거예요."
"당연히 미로 정원에 간다고 여기겠지!"
"당신 먼저 가요!"
"흐으음, 알았어. 우리가 쓸 가제보는 제일 안쪽에 에메랄드 꽃이 박혀 있는 곳이야."
"설마?"
능글능글 웃는 것이 볼라드 공작에게 미리 말했구먼. 내가 결국 가게 될 것을 예상했어. 끝까지 버텼어도 순수한 사슴인척하고 날 꼬셨겠군.
"잠시만 있다가 나와."
바람 좀 쐬러 간다며 나가는 카일의 발걸음이 가벼워 보였다. 카일이 날 두고 혼자 나갈 일이 없다는 것을 다들 알면서도 별말 없었다. 다 그려려니 하는 거겠지. 하하하.
카일을 조금은 놀려 먹어야지. 크크크, 최대한 늦게 나갈 생각이었다. 좀 기다려요. 날 가지고 논 대가야!!
핑거푸드를 몇 개 더 주워 먹고 슬슬 시간을 때울 작정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비 전하, 오랜만입니다."
응? 누구시죠? 루시엘라랑 테일러의 곁으로 가려는데 낯선 영식이 말을 걸었다. 열심히 기억을 떠올렸다.
아마도, 황후파에 가까웠던 피니토르 백작가의 영식이었던가? 그런데 얘를 내가 본 적이 있었나? 도저히,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혹시 스타티나와 관계가 있었던가?
일단 고개만 슬쩍 끄덕이고 그 남자를 지나치려 했다.
"서운하군요. 저를 이리도 매몰차게 모른척하다니... 잠시 조용한 곳에서 대화를 하시죠."
무례하게도 내 손목을 잡았다. 그리고 끌고 가려고 했다.
"영식, 무례하군요. 나는 이 제국의 황태자비입니다."
내가 크게 팔을 휘두르며 손을 뺐다. 뺨이라도 후려쳐야 했는데!
"아, 죄송합니다."
펄쩍 뛰면서 남자가 뒤로 물러났다. 카일이 뛰쳐들어 오면 넌 죽는다. 나는 눈빛으로 경고했다.
"비 전하!"
나의 추종자 루시엘라가 제 연인을 이끌고 빠르게 곁으로 달려왔다. 테일러경은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듯 호위로서 살벌한 눈빛을 쏘고 계셨다.
우리 비 전하의 신상에 이상이 생기면 내가 깨진다!!
말하지 않아도 테일러 경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루시엘라, 괜찮아."
"손목에 멍 안 들었어요? 이 미친 영식이 함부로 손목을 잡아당기던데? 비 전하의 옥체에 흠이라도 가면 테일러님이 크게 혼나는데, 이 영식 뭐래요?"
응? 나 말고 남자친구 걱정하는 것이었니? 하하하. 충복 따위 두지 않겠어.
"미, 미친? 추억을 공유하고자 잠시 말을 건 제가 들어야 할 말입니까? 비 전하?"
뭐? 이 미친 돌 더하기 아이가 뭐라는 거야? 너랑 나랑 나눌 이야기가 뭐가 있다고?!
소란이 일어나자 사람들이 쳐다보기 시작했다. 우씨, 카일은 벌써 어디까지 갔길래 돌아올 생각을 안 하는 건데?
"비 전하가 자네 따위랑 나눌 추억은 없으시다."
프리케와 유리아가 어느새 다가와서 내 편을 들어 주었다. 스타티나의 과거를 알만한 알리페르나 에이린이 와야 하는데...
주변의 눈빛들은 불편해졌다. 아마 황태자비의 옛 연인이 소동을 피우는 것으로 인식하는 것 같았다.
억울했다. 내게 남자는 단 하나라고!! 스타티나는... 모르겠지만, 내 여동생의 눈이 그렇게 낮진 않다고.
눈이 흐리멍텅하게 풀린 비실한 정어리같이 생겨가지고는!! 얼굴은 족제비에, 얍삽하잖아!
스타티나는 이지적이고 단정한 사람을 좋아했다. 절대 이런 남자와 연인일 리가 없었다.
"내가 영식과 나눌 추억이 있다면, 오늘 자네가 황족을 희롱한 죄를 묻는 일이 되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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