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진실을 마주보려는 용기. (3)
2018.07.24.
메뚜기 떼라면. 내가 11살 때던가??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몇 번 꿈도 꿨고.
이전 마을에서는 나랑 관계는 없었지만 잇따른 사고로 불편한 마음에 이사를 간 뒤였다.
"비스 영지에 메뚜기 떼의 습격이 있어 흉년이 들 뻔했던 일 아니오?"
"아, 저도 그때의 일이 기억납니다. 인근 영지에서도 혹시나 메뚜기 떼가 넘어올까 초조해했지요. 하지만 초기 소동에 비해 피해가 미미해 다행이었다고 형님께 들었습니다."
"네, 그것을 막은 것이 세이였답니다."
음, 역시 나는 대단해!! 비스 영지민뿐만 아니라 다른 영지민들의 식량까지 내가 구한 것 아냐? 어릴 때부터 나는 황태자비 감이었네. 호호호.
"푸흐흡!"
"웃지 마요."
"아니, 세이가 너무 뿌듯해하는 게 보여서."
시도 때도 없이 남의 마음속을 눈치채고 그러냐. 쳇. 이렇게 남편에게 사찰당하면서 살아야 하다니.
내가 눈을 살짝 흘리자 카일이 급히 표정을 수습했다.
"뿌듯해할만 한 일을 하셨지요. 내 소중한 따님이 우리 영지민을 지켜낸 것을 이 아비는 모르고 있었네요. 감사합니다. 비 전하."
아버지의 말에 얼굴이 확 붉어졌다.
사실 음... 딱히 남을 위해서라기보다는 내가 애써 키운 텃밭을 털리는 게 싫었던 거라서, 하하하.
처음에는 메뚜기 떼가 인근을 초토화 시키는 줄 몰랐다. 워낙 산골 구석에 박힌 마을이었기에 소문이 늦었다. 우리 집은 더 구석에 있었으니 뭐.
그래서 우리 마을에 메뚜기 떼가 닥쳤을 때 대응이 늦었다. 그리고 메뚜기들은 워낙 식성이 좋다 보니 손 쓸 시간도 없이 많은 밭이 황무지가 되었다.
그리고 나는 사람들의 울음 섞인 비명 소리에 이끌려 밖으로 나갔다. 그때 봤던 하늘을 뒤덮은 메뚜기 떼는 끔찍한 모습이었다.
푸른 하늘이 보이지 않을 만큼 시꺼먼 구름이 온 동네를 휘젓고 다녔다. 게다가 단체로 울리는 날갯짓 소리도 싫었다. 끔찍해...
결국 나는 비명을 지르며 다 흩어지라고, 뭉쳐 다니지 말라고 했었지. 걔들이 당황하며 흩어지던 모습이란... 그것도 솔직히 징그러웠다.
읏, 알고 보면 정령뿐 아니라 나도 차별쟁이였어. 미안하구나 곤충, 벌레들아.
"그때, 우리 텃밭 뒤부터 피해가 없었죠. 그래서 사람들이 시기하고 질투한 것은 기억나요. 어째서 우리 텃밭 앞에서 메뚜기 떼가 흩어졌는지 의심했었어요."
"그 즈음부터 세이의 동물들과 친한 능력이 조금씩 관심받게 되었어요."
메뚜기 사건 전에 늑대에 물릴 뻔한 아이를 내가 구했다고 했다. 그런데 그것이 메뚜기 사건과 관련되어 이상한 루머가 되어 퍼지기 시작했다.
"거기에 더해져 이전 마을에서의 일들이 소문이 나기 시작했죠."
실체 없는 소문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근거가 생겨나고, 그들만의 진실이 만들어졌다. 거짓은 진실이 되었다. 나와 어머니의 진심은 그들에게 들을 가치가 없는 것이었다. 결국 남은 것은 그들만의 믿음과 막연한 두려움 밖에 없었다.
나는 동물을 부리는 마녀가 되었고, 결국에는 그들의 두려움의 대상이자 모든 나쁜 일의 원흉이 되고 말았다.
어머니와 살리맨더의 말이 사실이라면 나는 절대 누군가를 미워해서 죽음으로 몰고 간 적이 없었다. 절대 불길하지도 위험하지도 않은 존재였다.
단지, 남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두려운 대상이 된 것 밖에 없었다.
"어른들은 세이를 무서워하면서도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고, 자식들에게 멀리하라는 정도였어요. 피한 거겠죠. 하지만..."
어쩌면 더 무서운 것은 직설적이고 해맑은 아이들이었다. 스스로의 판단보다 어른들이 보여주는 세상을 믿던 아이들.
그들은 부모가 했던 말을 내게 직접 내뱉고, 때리고, 배척하며 멀리했다. 그렇게 결국 나는 고립되어 갔다. 그때부터 내 성격이 많이 소심해지고 어두워졌다고 했다.
"그때 유달리 세이를 괴롭히던 아이가 사고로 크게 다쳤어요. 집에 벼락이 떨어져 불이 났거든요. 그건, 아마 정령과는 관계가 없었을 거예요."
하지만 이미 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은 부풀려져서 그 자연적인 현상조차도 내가 일으킨 일이 되었다.
그리고 그 즈음 비스 후작가에 저주받은 마녀에 대한 소문이 닿아 아버지가 날 발견하신 거였다.
"하지만 솔직히 어째서 그렇게 소문이 부풀려지고 순식간에 번졌는지는 의문이에요."
"누군가의 손을 탔다면?"
카일의 말에 알리페르의 얼굴이 굳었다. 미안, 어쩌면 또, 네 어머니의 죄몫이 늘지도 모르겠어.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분이라면 충분히요."
알리페르도 수긍했다. 아니라고 부정하기에는 본인도 자신의 친모의 성정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확실한 것은 아니니까 너무 단정 짓지 마. 그리고 결국에는 그 소문 때문에 내가 아버지를 만났는걸."
정말 그녀의 짓이라면 땅을 치고 후회했겠지?
"제 친모는... 누님을 처음 봤을 때부터 저주받은 아이라며 단정 짓지 않았습니까?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건 그렇지만... 하긴 날 처음 봤을 때부터 그런 말을 했던 것 같아. 그러고 보면 내가 진짜 그런 존재였다면 날 괴롭히기 무섭지 않나? 그럼에도 구박한 것 보면, 내가 진짜 그런 존재가 아니라는 확신이 있었다는 것일까?
새삼스레 또 나의 과거가 그 여자의 손에 의해 비참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저는 누구에게도 그 소문을 말한 적이 없습니다. 그들이 고의로 소문을 부풀린 것이 사실이라면 언제 그들이 현 상황을 뒤집기 위해 이것을 이용할지 모릅니다."
"아버지, 하지만 긁어 부스럼이 되진 않을까요? 이미 다른 사람들에게는 잊힌 일일지도 모르는데..."
"장인, 그것은 세이의 말이 맞아. 섣불리 건들지 않는 것이 나을 듯해. 그러니 주의만 하는 것으로, 합시다. 소문들이 퍼지진 않나 계속 감시하지요."
아버지께 또 말을 짧게 놓으려고 해서 내가 찌릿 째려보자 뒷말은 급히 올렸다. 사실 아버지가 신하 된 도리로 부담스럽다고 하셔서 황태자 시절까지만 그러자고 합의 봤다. 그런데 이 인간이 말을 안 들어요!
"음, 그리고 사실 이제 제게는 정령의 딸이라는 이름이 있잖아요. 저주받은 마녀란 오명 따위 벗을 자신이 있어요."
어릴 때의 나라면 내 주변의 일을 내 탓이라 믿고 어둠에 날 내던졌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어둠 속에 뛰어들 날 잡고 지탱해줄 사람들이 곁에 있으니까...
"그러니까 다시 그런 소문이 돈다면 맞서 싸울게요."
결국에는 실체도 없는 소문이잖아. 부풀려진 것일 뿐이니까, 진실을 바라보게 만들자.
사람들의 편견과 두려움에 맞서 이기지 못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지는 않을 것이다.
아니, 지더라도 괜찮아. 나를 다시 일으켜줄 남자가 곁에 있으니까. 나는 카일을 향해 자신만만한 미소를 쏘았다.
그러자 내 미소의 의미를 읽은 내 남편도 나를향해 지지의 미소를 보내주었다.
* * *
얼마 뒤 볼라드 공작부인이 여는 스칼라 아카데미 후원의 밤이 열렸다.
나는 황궁이 아닌 곳에서 참가하는 첫 사교모임이라 단단히 무장하고 준비했다. 게다가 아직 아버지의 이혼이 진행 중이라 여러 사람의 입에 오르내릴 것이 틀림없기에 더 단단히 준비했다.
"가련한 이미지보다는 당차게 가시죠?"
에이린이 내 치장을 도우며 오늘의 컨셉에 대해 의논했다.
"훗, 가련한 모습은 이미 충분했어. 정령의 딸에 어울리는 우아하고 고상한 연출을 부탁해."
오늘은 오랜만에 쇼를 하기로 했다. 그 소식에 기뻐한 것은 역시나 알리페르와 루시엘라였다.
시녀들은 부지런히 내 스타일을 연출해주느라 정신이 없었다. 언제나 느끼지만, 치장하는 일은 귀찮아.
초겨울이라 하늘하늘 우아한 드레스 위에는 조금 특별한 외투를 걸쳤다.
"시간 맞게 완성돼서 다행이야."
"그러게요. 비 전하가 열매에 구름 같은 털이 열린다고 했지만 눈으로 보기 전까지는 못 믿었는데, 호호."
"에이린, 날 좀 믿지?"
식물도감을 편찬할 때 교수가 기록해둔 신기한 식물이 있었다. 제국에는 자생하지 않지만 충분히 적응 가능해 보이는 식물이었다.
그림으로만 봐서는 알 수 없어 씨앗을 구해달랬더니 얻어다 주었다. 그 씨앗을 받는 순간 확신했다. 이건 대박 아이템이야!!
그래서 카일의 유리온실에서 키웠다. 물론 카일의 정령의 힘도 빌렸지. 그래서 그 식물로부터 열매, 즉 솜을 얻었다.
뽀송뽀송 폭신한 솜은 양털을 대신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사실 모피를 대신하고 싶었다.
귀족들이 쓰는 사치품 중 하나인 모피를 얻기 위해 죄 없는 여우나 오소리 등의 가죽과 털을 한꺼번에 뜯어냈다. 그것도 질 좋은 것을 얻기 위해서라며 산 채로...
토끼에게서 고운 털실을 얻기 위해, 거위에게서 침구류의 속 재료를 얻기 위해 살아 있는 토끼의 맨살에서 털을 뽑아내고, 다시 자라면 또...
사실 내가 교감한 친분이 있는 동물들이 받는 고통은 나를 힘들게 했다. 그래서 나는 집에서 기르는 가축들은 내가 책임지고 지키지 못 할 것이라면 교감을 나누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을 먹여주고 키워줬으니 잡아먹어도 된다고 말했지만 내게는 너무 큰 아픔이었다.
인간이 먹고살기 위해 동물을 도축하는 것도 약육강식의 자연법칙이었기에 말릴 수는 없었다. 나 역시 육식을 먹는 육식동물이니까.
하지만 사치를 위해 산 채로 고통받는 동물들은 구하고 싶었다. 그래서 이 목화라는 식물을 발견했을 때 기뻤다.
"동대륙에서 온 상인이 입고 다니는 옷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면서요?"
유리아가 말한 상인은 최근 카일과 밖에 나갔다가 만난 신기한 물건들을 팔던 사람이었다. 옷차림도 우리와 전혀 달랐다. 남자고 여자고 윗옷에 리본 같은 것을 달고 있었고, 품이 넓은 바지와 치마를 입고 있었다.
그들이 쌀쌀한 날씨에 입은 겉옷이 지금 내가 만든 외투의 디자인의 바탕이 되었다.
"맞아. 옷감과 옷감 사이에 솜을 넣고 바느질로 고정했더라고? 동대륙에는 이미 솜 옷이 일반 백성들에게까지 널리 퍼졌대."
내년 봄에는 황실의 이불과 겨울옷을 위해 농민들에게 이 목화를 심게 할 작정이었다. 비용을 지불하고 남는 솜은 백성들에게 나눠줘야지.
"바느질 라인이 너무 예뻐요. 장미 무늬를 만들고 거기에 보석을 달다니요!"
유리아가 감탄해 마지않았다. 호호. 내 아이디어였지. 실행한 것은 마담 레이아였지만.
"마담 레이아가 고생했지. 처음 다루는 소재니까."
어머니께도 한 벌 만들어서 집에 보냈다. 그걸 두고 카일이 하도 질투를 해대서 여름부터 준비해 뒀던 양털 장갑과 부츠를 내어 주었다.
처음에는 양털 커플 아이템으로 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이 겨울에 뒤늦게 양털 얻겠다고 애들을 벌거숭이로 만들까 봐 그건 평소에만 쓰기로 했다. 여름에 털갈이 시기에만 깎아야 하는데, 사치스러운 우리 귀족님들은 신경 안 쓴단 말이지.
양털 아이템은 그래서 겨울이 끝날 무렵에 유행시키기로 했다. 그리고 나의 잘나고 능력 있는 남편님이 날 위해 법을 만들어 주기로 했다.
일명 동물 학대 금지법!
귀족들의 반발이 심하겠지만, 정령왕들과 정령의 딸의 의지라고 우기기로 했다.
"준비 다 됐어?"
카일이 빼꼼 얼굴을 내밀었다. 그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웠다. 마침 카일이 이쁜 짓을 한 것을 떠올리고 있었으니까 더 예뻤다.
"카일, 그 사이를 못 참고! 내가 그렇게 보고 싶었어요?"
"당연하지. 잠시도 떨어지기 싫다고. 그리고 너무 예쁘게 꾸민 것은 아닌가 감시도 해야 하고."
뒷말에 시녀들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이봐요, 남편님. 시녀들이 하는 일이 그거거든요?
"너무 예뻐졌으면 어쩌려고요?"
"못 나가는 거지. 그래서 말인데 오늘은 나가지 말까?"
"풉, 시녀들에게 상을 내려야겠네요."
역시 내 시녀들이야. 뭐, 카일이라면 내가 머리에 꽃만 꽂고 있어도 제일 예쁘다 하겠지만.
"카일도 오늘 멋지네요. 흐음, 오늘도 철통경계를 해야겠어."
"누가 할 소리를!"
카일은 말로는 내가 예뻐 보이는 것이 싫다면서도 예쁜 보석함을 가지고 왔다.
"손 줘봐."
반지일까? 팔찌일까?
"모후께서 아바마마께 청혼 받은 결혼반지야. 우리 형제 중 먼저 장가가는 사람의 아내에게 물려준다 했었어."
"어머, 그렇게 귀한 것을 내가 받아도 되는거예요?"
"당연하지. 네가 우리 부모님의 유일한 며느리인걸. 그리고... 진짜 우리의 결혼반지는 좀 더 있다가 줄게. 마음에 차는 게 아직 없어서."
울컥했다. 사실 스타티나가 결혼반지를 잘랐다는 것을 알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내가 받지도 못한 데다가 잃어버린 것으로 되어있으니까.
그런데 말이지...
"당신!! 그때 마차에서 결혼반지 없다고 눈치 줬죠? 하!! 이 남자가!! 알면서 날 놀린 거였어!!"
보석함을 열던 카일의 손이 덜컥 멈췄다. 그리고 슬슬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내가 그런 일까지 기억할 줄은 몰랐지??
"그, 그게, 놀리는 게 재밌어서... 하하하!"
이 남자... 가끔... 갖다 버리고 싶다. 애도 아니고!! 그때 내가 얼마나 긴장했는데!
카일은 한 쪽 무릎을 꿇고 내 손에 얌전히 어마마마의 반지를 끼워주었다. 그런 카일의 정수리를 노려보며 복수의 칼날을 갈았다.
"딱 맞네요?"
"그야 사이즈를 다시 맞췄으니까."
큰일이야. 세심하게 신경 쓴 모습에 또 마음이 풀렸다. 이렇게 용서해주고 이러면 안 되는데.
"자, 이제 가볼까? 우리가 빨리 가야지 시녀들도 치장하고 연인들과 함께 가지."
기가 막히게 내가 마음 약해진 순간을 포착한 남자의 손에 내 손을 포개었다.
"오늘 어쩌는지 두고 보고 용서해 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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