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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비의 대역으로 살아남기-97화 (97/126)

97화. 진실을 마주보려는 용기. (2)

2018.07.23.

내 말에 어머니의 얼굴이 서서히 굳어 가셨다.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나를 향한 안타까움이 가득했다.

이런, 이번은 다 있었던 일인가 보네. 혹시나 아니지 않을까 했는데...

"비 전하, 그러니까 세이 주변에서는 이상한 일들이 많았어요."

어머니는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하셨다. 내가 예전에 꾸던 악몽의 내용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아마 세이가 7살 즈음이었을 거예요. 내가 귀족 출신이라는 것을 모르던 마을 남자들 중에서 제게 몹쓸 짓을 하려던 사람이 있었죠."

이야기를 듣던 아버지의 미간이 크게 일그러졌다. 어머니는 지금껏 그 이야기를 하지 않으셨던 모양이었다.

"그 모습을 보던 세이가 엄마 괴롭히지 말라며 그 남자를 밀어냈어요."

어린 시절의 나는 마냥 소심한 아이는 아니었다. 할 말 다 하고, 옳고 그름을 명확히 판단하고 따질 줄 아는 아이였다고 했다. 아마 최근의 카일을 만나고 변했다고 생각한 내 성격이 어린 시절의 내 모습인 듯했다.

"세이가 엄한 목소리로 그 남자에게 싫다는 여자에게 억지로 그러는 것은 어린이나 하는 짓이라면서 혼을 냈죠."

"세이답네요."

황궁에 온 초야 때 억지로 일을 치르려던 내 남편이 듣던 훈계지. 카일은 과거의 일이 떠올랐던지 격렬히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러자 그 남자가 세이를 때리려고 했어요. 아니, 세이를 잡고 제게 협박할 심산이었을 거예요."

못된 남자가 내 목을 잡고 들어 올리려던 순간, 그 남자를 혼낸 존재가 있었다. 쓰러진 어머니가 나를 구하려고 달려가기도 전에 그 남자가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날아간 것이다.

나도, 어머니도 영문을 몰라 가만히 서서 서로 껴안고만 있었다. 몇 번 우리에게 덤벼들려던 남자는 욕을 퍼 붓다가 사라졌다.

"그 남자는 마을 사람에게 우리 모녀에게 마녀라며 모욕을 하고 다녔어요. 그걸 본 세이가 남자가 우리에게 하려던 짓을 낱낱이 이야기를 해서 반박했고요. 마을 사람들은 다행히 우리 모녀를 믿어 줬었어요. 사실, 좋은 분들이었죠."

흐음, 그랬었나? 어린 시절 이야기라 도무지 기억나지 않네.

"그래서 그 남자가 더 화가 났었나 봐요. 그래서 몰래 저희 집에 숨어들었었는데..."

다들 경악했다. 특히 아버지와 카일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둘 다 어머니의 말을 끊어내진 못하고 분노로 덜덜 떠는 것이 보였다. 알리페르도 화가 나긴 했지만 침착했는데.

"그래서요? 그놈이 누님과 어머니께 해를 끼친 것은 아니지요?"

"그것이... 세이가 먼저 알아차렸어요. 집에 들어가기도 전에요."

어머니랑 근처 산에서 열매를 따고 내려오던 길에 내가 집에 들어가지 말자고 했단다.

"그런데 집에서 갑자기 그 남자가 뛰쳐나왔어요. 온몸에 불을 휘감은 채로요."

이런, 왜 하필 그때도 불이었대? 내가 불에 대한 트라우마 생긴 것 알고 보면 이때인 것 아냐?

"사람들이 물을 끼얹었는데도 그 불은 꺼지지 않았어요. 신기하게도 집안에는 어디에도 불이 난 흔적이 없었고요."

어머니는 더 어린 아기 때만 해도 정령들과 내가 놀았기에 그것이 정령의 가호가 아닐까 하셨단다. 하지만 내게 정령에 대해 물어보자 나는 그게 뭐냐고 물었다고 했다.

하긴, 나는 카일을 처음 만날 때도 정령에 대해 몰랐다. 상식이 부족한 아이였어. 책을 열심히 읽었어야 했는데... 어리석었어. 지금은 열심히 책을 읽으니까 뭐, 무식하다 소린 듣지 않겠지.

"그런데 그 이후로 세이가 나쁜 사람이라고 지목한 사람들에게 미스터리한 일들이 이어졌어요. 멀쩡한 날에 벼락에 맞아 죽고, 한 여름에 얼어 죽기도 하고요. 그래서 사람들이 세이를 무서워하기 시작했어요."

음, 내가 단지 미워해서 죽은 것은 아니었나 보군. 나쁜 사람이라...

"거기에 세이를 찾아온 맹수들 때문에 오해가 겹치기 시작했지만 큰 문제는 없었어요. 그리고 그들의 공포와는 달리 실제로는 세이가 그들을 죽으라고 저주한 사실도 없어요. 세이의 기억과 달리 그들을 미워하거나 원망한 적도 없었거든요.

아, 그것은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한때의 나는 내 어두운 감정이 그런 일을 가져온 것이 아닐까 두렵고 무서워서 날 계속 가두려 했으니까. 스스로를 다른 사람들과 격리시키려 했었다.

"오히려 죽은 사람들 대부분이 마을의 난봉꾼이라 다들 싫어했어요. 아이들 중에서도 좀 잔인하여 어른들이 무서워할 정도의 소년도 있었고요. 사실, 죽을만한 사람이 죽었다는 소리도 많았어요. 다들 정말 천벌이라고 생각했죠. 뒤늦게 나쁜 놈인 것이 밝혀진 경우도 있었답니다."

어머니가 알려준 나쁜 놈들의 죄는 상상 이상이었다. 한때 내 친구였다가 얼어 죽은 소년은 살아있는 동물에게 온갖 학대를 가했단다. 산 채로 불에 던지고, 배를 가르고, 또 눈을 찌르고...

다른 이들도 패륜이나, 각종 흉악한 짓들을 많이 했다고 했다. 특히 죄 없는 동물을 괴롭히거나 금지된 숲에 함부로 들어가 훼손하고 온 이도 있다 했다.

"금지된 숲이오?"

"위험하기도 하고 성스러워서 들어가면 안 된다더구나. 불의 드래곤이 지키는 곳, 또는 살리맨더의 저주를 받은 숲이라는 곳이래."

"가문의 역사서에도 있는 숲입니다. 초대 가주께서 누구도 그곳에 함부로 발을 들여서는 안 된다, 자칫하면 제국에 크나큰 화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써 놓으셨습니다. 지독한 검은 물과 보글보글 뿜어져 나오는 연기로 이루어진 숲이라더군요."

"그런 곳에 생물이 있어요?"

생명조차 살 수 없을 것 같은데... 그런 곳에 왜 사냥을 가냐고.

"초대 가주께서는 혹시나 위험에 대비해 숲의 정확한 위치는 숨기고, 대신 넓은 지역을 통행금지 시켰습니다. 그래서 그곳을 포함해서 금지된 숲이라고 부르지요."

어떤 곳인지 궁금했다. 혹시 내가 정화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지만 절대 카일이 그곳에 보내줄 리가 없지. 엄청 위험하다잖아.

"흐음... 어쨌든 그러면 그 일들이 나 때문은 아니었다는 거네요. 그런데 어째서 갑자기 옆집 가족들도 우리를 쫓아내려하고, 날더러 저주받았다고 한 걸까요?"

내 말에 어머니는 차분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나가셨다. 내 손을 꼭 잡아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마도, 두려움 때문이었을 거라고 생각한단다. 잘못을 저지른 자들을 알아보는 너의 혜안과, 직설적인 지적, 그리고 미래를 알아 본 듯한 말투 때문이야."

"내가 예언이라도 했어요?"

"그건 아니야. 그저 천벌을 받을 거라고 경고를 했고 그 경고를 받은 이들이 얼마 못 가서 큰일이 났거든."

호오... 그렇다면... 속으로 외치자. 황후 아줌마랑 전 비스 후작부인 아줌마. 두 분 나란히 천벌을 받으시죠!!

다들 내 진지한 표정을 보고 걱정스러워하는 와중에 카일만 작게 풋 웃었다. 역시 내 속마음을 읽을 줄 아는 것은 내 남편뿐이군.

"그나저나, 처음 천벌이 불이었다면 살리맨더의 짓이긴 하단 말이야... 확인해 볼까?"

카일의 말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궁금했다. 어릴 때는 정령이랑 놀던 몸이라지 않은가? 분명 날 알만도 한데...

"살리맨더!"

카일이 살리맨더를 소환한 뒤 이것저것 상황 설명을 했다. 정령의 말을 알아 듣는 것은 어차피 카일뿐이라 다들 정령을 못 보는 나처럼 카일에게 시선을 모으고 있었다.

"그러니까 예전부터 인간들을 혼내 준 적이 있긴 했다고? 어쨌든 그것은 순전히 자연의 순리를 어긴 자들에 대한 자연의 복수라고?"

"그래서 정령의 여왕이 질린 거구나."

"응?"

"알비케라가 그랬어요. 정령들이 잔인해서 싫다구요. 죄 없는 사람들을 죽이거나 괴롭혔다고 했는걸요."

내 말에 다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내 말보다는 정령 때문에 놀란 듯? 왜요? 나야 보이는 게 없어서, 하하하.

"살리맨더가 펄쩍 뛰네. 죄 없는 사람들을 죽인 것이 아니라고, 다 혼이 날만 했다고..."

"뭐, 다 죄를 짓긴 했는데요. 그게 죽을 죄에요? 동물 학대한 녀석... 어려서 몰라서 그런 거였어요. 벌을 받아야 마땅했지만요. 그 아이 어릴 때 아버지가 학대하고 집을 나가서 제대로 된 보살핌을 못 받아서 삐뚤어진 거였다고요."

그런 주제에 나한테 아빠 없다고 놀리긴 했지. 얼굴도 못 본 우리 아버지 욕도 했고.

"정작 벌받아야 하는 것은 그 아이를 제대로 돌보지 못하고 삐뚤어지게 방치한 그 부모죠. 그 아이는 제대로 된 교육을 받아야 했고."

나는 그 외에도 죽임을 당한 사람들을 옹호했다. 벌을 받는 것이 왜 꼭 죽음이어야 했는지, 반성시키고 갱생시킬 여지를 왜 주지 않았는지 따지고 들었다.

알비케라도 정령의 여왕도 그런 정령들의 모습에 화가 난 것 아니냐고 다다다 쏘아붙였다. 더 이상 용서받지 못할 지경이었을 때 혼을 냈어도 됐다는 말에 정령이 당황했나 보았다.

"살리맨더 울 것 같아. 정령의 여왕도 그런 마음이었냐면서, 그래서 자신들을 버렸냐고... 그러네?"

"나야 모르죠. 그러게 정령의 여왕이 하는 말 좀 듣지 그랬대요. 알비가 이제라도 정령들이 변하면 여왕이 돌아 올지도 모른 댔어요. 인간의 도덕적 가치를 따를 필요는 없지만, 너무 유연하지 못하게 무조건 벌주고 그러진 말라고 해요. 인간사회든 정령이든 인정이 넘쳐야지."

카일은 정령이 노력해 보겠다고 하는 말을 전해왔다. 그런데 여왕이 진짜 떠난 것은 그것뿐 아니라 다른 큰 오해도 했단다. 자신들이 하도 벌을 내리니까 다른 일도 자신들이 저지른 일인 줄 알고 쫓아냈다나?

여왕도 참. 사람, 아니 정령의 말을 좀 들어주지, 마구 쫓아내고 그러냐? 여왕님 뉘신지 저랑 성격이 비슷하시네요. 과거의 나도 참 남의 말을 안 들었지.

"금지된 숲은 뭐래요?"

"드래곤도 없고, 자신의 저주도 없는 곳이래. 자연적으로 형성 된 곳인데 위험하긴 하다는데?"

그렇구나. 어째서 위험한지 궁금하네.

"그런데, 기왕 부른 김에 좀 물어봐요. 어릴 때 나 본적 없냐고, 아기 때는 놀아줘놓고 왜 잊었냐고요. 게다가 심지어 우리 모녀 괴롭히던 놈도 죽여 줬잖아."

"순수한 아기들을 좋아해서 정말 맑은 영혼의 아기들과는 잘 놀아 줬다는데? 그중 하나가 아닐까 하네? 사람은 성인이 되면서 영혼의 색이 더 뚜렷해져서 아기 때 봤더라도 그게 너인지 확실하지 않대. 아이들에게 몹쓸 짓 하는 인간들 많이 혼내봐서 그것도 뭐."

체엣, 그런 거였어? 그냥 수많은 것들 중 하나 일 뿐이었군. 뭔가 내 출생에 비밀이라도 있는 줄 알았는데. 뭔가 아쉬웠다. 그래도 어릴 때는 정말 맑은 영혼이었다니까 만족했다.

현재 내 영혼의 색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정령들이 알아보지 못하니까. 어쩔 수 없지. 정령들은 내가 사고로 기억의 상당 부분을 잊은 탓에 사람의 살아온 인생과 관련된 영혼의 색을 잃은 것이 아닐까 추측한다 했다.

즉, 내가 모든 기억을 되찾으면 색도 돌아올 거라는 소리였다.

"내 살아온 인생과 관련됐으면 뭐, 굳이..."

색을 찾지 않는 편이 이롭지 않을까? 카일도 일상생활에 지장 없으니 절대 기억을 무리해서 찾지 말자고 적극적으로 이야기했다.

정령들은 아마 내가 계약하자고 해도 영혼의 색이 없어서 계약 자체를 못 할 것이라고 했다. 물론 마나도 없으니 하고 싶으면 생명력을 내놓아야 한다 했고.

"그냥 돌아가!!"

생명력 소리에 화난 카일이 정령을 돌려보냈다.

"아무리 봐도 저렇게 융통성이 없으니 여왕이 가출한 거야. 틀림없어."

일단 정령계로 돌아갔으니 마음껏 욕하자! 차별쟁이에 냉정한 것들!!

어머니께 그 이후의 일을 물었다. 무서워 하긴 했어도 우호적이었던 사람들이 어째서 변했는지... 내 과거가 어째서 그토록 고통스럽게 바뀌었는지 알고 싶어졌다.

정말 단지 두려움 때문이었을까?

사실 카일은 끝까지 듣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설득했다.

"카일, 내가 어린 시절의 고통과 트라우마로부터 온전히 벗어나려면... 기억을 지우고 잊는 것이 아니라 맞서야 한다고 생각해요. 끝까지 외면한다면 나는 계속 내 과거를 숨겨야만 하고, 그럼 당당하게 당신 옆에 설 수 없어요."

고통과 맞서는 용기. 그것이 내게는 필요했다. 어린 시절과 세이렌이었던 과거를 숨기고만 사는 것이 아니라, 당당하게 말하고 인정받을 수 있길 원했다.

세이렌이란 말에 더 이상 떨지 않을 거야. 혹시나 내가 저주받은 아이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을 만나더라도 피하고 싶지 않으니까.

내 말에 카일을 제외한 모든 가족들이 날 자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봐 주었다. 든든한 지지의 눈빛.

그 덕에 카일도 어쩔 수 없이 양보해야 했다.

누구보다 날 아끼는 마음에서 그러는 것 아니까, 내 마음을 몰라주는 카일에게 서운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불길한 일들이었음에도 우리를 지지하던 마을 사람들이 변한 것은... 메뚜기떼 습격 이후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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